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184화 (185/400)

Ep. 184

지하에서 기어 올라왔을 때도 어둑하던 하늘에서 하얀색 알갱이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잠잠했던 눈보라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떨어지는 눈을 사이에 두고 나와 놈은 서로를 노려봤다.

“왜? 나도 너처럼 커진 건데 불만 있어?”

여유로운 얼굴로 나를 비웃는 적 플레이어. 흩날리는 눈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형상은 소환자를 굳건히 보호하는 중이었다.

나는 놈의 비웃음에 반응하지 않고 방금 전의 공방을 되새겨 봤다.

‘저 수수께끼의 입자.’

적어도 사이킥 파워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만약 그랬다면 초능력 반사 장갑으로 조금이라도 반사했을 테니까.

‘게다가 크기도 의미가 없어.’

금빛 형상의 크기는 기껏 해야 5m에서 6m 사이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건 속임수다. 방금 금빛 형상이 칼 모양의 팔을 휘둘렀을 때 길이가 쭉 늘어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팔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팔을 구성하던 금색 입자들의 배열이 변하면서 얇고 긴 검기 형태로 변화한 것이었다.

‘검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놈의 제어 아래에 있어.’

즉, 저 금빛 형상은 자기 몸을 자유롭게 바꾸는 소환물이다. 게임에서 그런 개념의 소환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 생긴 기술이거나 아니면….’

놈이 가진 특전의 효과일지도 모른다. 내가 뮤리엘을 죽이고 얻은 ‘약탈자의 부정형 다면체’처럼 놈 또한 누군가를 죽이고 특전을 강탈한 것이다.

‘최소 2개, 혹은 그 이상이라.’

혹시 뭐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적 플레이어에게 통찰을 써봤지만 딱히 나오는 것은 없었다. 뮤리엘을 봤을 때와 동일하게 확인할 수 없는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는 메시지뿐.

유일하게 알 수 있는 정보는 적 플레이어의 이름이었다.

‘제이슨이라.’

본명이 나오지 않는 것 또한 뮤리엘과 동일했다.

통찰로 본 것 말고도 지하에서 발동된 포식자 감각에서도 놈의 이름은 제대로 뜨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노이즈가 잔뜩 낀 상태에서 파편적으로 띄엄띄엄 보였다.

‘플레이어가 상대라서 그런가?’

왜 이런 식으로 나오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부분은 나중에 생각해야겠다.

짧은 시간 안에 생각을 정리한 나는 다시 움직였다.

꼬리와 하체 부근에 난 뭉툭한 발톱, 뼈 야수로 변하면서 생긴 가시들이 눈과 얼음을 강하게 박찼다.

100m에 달하는 내 몸이 폭풍처럼 앞으로 쏘아진다. 순식간에 컬트 플레이어, 아니 제이슨의 바로 앞까지 접근한 나는 전투용 팔로 그를 내리쳤다.

“흥.”

코웃음과 함께 나의 공격을 막는 금빛 형상. 놈의 방패와 닿자 내 팔에 달린 뼈 가시들이 우수수 꺾였다.

“소용없다니까?”

형상과 똑같이 왼팔을 들고 있던 제이슨이 오른팔을 까딱였다. 소환자의 움직임에 맞춰 금빛 형상이 또 한 번 나를 공격하려든다.

황금색 검이 내 머리 갑각을 베고 지나갔다. 머리가 놈의 검과 맞닿자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꼬리 끝 집게발과 함께 내 몸에서 최고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머리 갑각답게 쉽게 잘리지는 않았다. 수십cm 깊이의 상흔이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어디까지나 버티나 볼….”

그가 다시 자세를 가다듬는 사이, 나는 등에서 침식 촉수 6개를 전부 뽑아냈다. 항아리에 숨어 있던 뱀처럼 튀어나온 촉수들이 금빛 형상을 얽어맸다.

나는 그 상태로 침식 촉수에 힘을 줘서 형상을 잡아당겼다. 형상과 연결된 제이슨도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주춤거리는 놈을 향해 내 꼬리가 바닥에 덮인 눈을 쓸면서 날아들었다. 그 끝에 있는 집게발이 활짝 벌어졌다.

뼈 야수로 인해 집게의 크기는 대략 10m. 아이스 호러의 갑각만큼이나 단단한 집게발에 붙잡힌다면 용살자 세트라고 해도 벗어날 수 없다.

“…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제이슨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놈이 입을 연 순간, 금빛 형상이 입자 형태로 산산이 분해어서 내 촉수들 사이로 빠져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재구성된 형상은 빠르게 방패를 만들어서 내 집게를 막아 냈다. 방패 모양의 왼팔은 다른 부위에 비해 한층 짙은 황금색을 띠고 있었다.

“쉽네.”

그리고 펜싱 선수가 칼을 뻗듯 반격해 오는 금빛 형상. 턱 아래의 보조기관을 노리고 날아드는 공격을 나는 머리를 위로 들어 피했다.

하지만 놈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제이슨이 땅을 박차고 공중에 뛰어오른 것이다.

놈을 감싸던 방패가 사라지며 내 꼬리가 놈의 발밑을 스쳐 지나가고 놈은 허공의 눈을 계단처럼 밟고 날아올라 내 흉부를 올려 벴다.

제이슨은 나에 비하면 한참 작아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문제는 놈의 등에 매달린 소환물이다.

공중에 떠 있는 놈의 뒤에서 재구성된 금빛 형상의 거대한 칼날이 나의 몸을 쪼개기 위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몸을 옆으로 피하기는 어려운 상황. 나는 서둘러 전투용 팔에 붙어 있던 활공 피막을 활짝 펼쳤다.

본래 활공 피막은 활공용이지 땅 위에서 비행하는 건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내 몸의 덩치가 커지면서 6개의 팔마다 달린 활공 피막도 함께 확대된 상태다. 한 장다 수십m를 족히 넘는 6개의 날개라면 몸을 잠깐 띄우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터.

피막을 펼친 나는 팔들을 세차게 휘둘렀다. 내 아래에 강풍이 몰아치며 내 몸이 위로 솟구쳤다.

“에이씨!”

날아드는 바람에 제이슨이 눈을 깜빡인다. 나의 복부를 막 베려던 검이 순간 금색 입자로 흩어졌다.

“잔재주를!”

그의 고함과 함께 물리력을 상실했던 검이 순식간에 원상 복귀되고 내 외골격을 얕게 벴다. 그사이 공중에 떠오른 나는 뒤로 빠지면서 꼬리를 빗자루 쓸 듯 앞으로 휘둘렀다.

좀 전처럼 금빛 형상으로 방패를 만들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다른 행동을 취했다. 놈이 왼손을 활짝 펼치자 무형의 에너지장이 나타나더니 내 꼬리를 반대로 밀어냈다.

상대의 공격을 반사시키는 사이킥 파워 기술, ‘리플렉션’이었다.

꼬리에 담긴 에너지가 반사되면서 엄청난 반동이 내 몸에 닥쳐왔지만, 나는 그 반동을 역이용했다. 내 거구가 반사된 에너지의 흐름을 타고 뒤로 한참이나 밀려났다.

눈밭 위에 착지한 나를 향해 금빛 입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창이 날아왔다. 집요하게 내 보조기관을 노리는 적의 공격을 침식 촉수로 맞받아쳤다.

촉수 때문에 궤도가 뒤틀린 창은 작은 빛의 알갱이로 화하더니 다시 원주인의 몸으로 돌아가 버렸다.

“버러지 같은 새끼. 도망치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지?”

“…….”

“왜 입을 닥치고 계실까? 그 잘나신 랭킹 5위께서? 응?”

제이슨이 나를 보며 이죽거린다. 하지만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그건?’

몇 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굉장히 중요한 정보를 두 개나 얻었다.

‘놈이 눈을 깜빡일 때 실체를 상실했어.’

내가 공중에 날아오르면서 생긴 바람에 제이슨은 아주 잠깐 눈을 깜빡였다. 그 찰나의 순간 금빛 형상이 입자 상태로 쪼개졌었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였지만 나는 놓치지 않았다.

‘저 형상, 놈의 감각에 영향을 받는다.’

특히 시각이 형상을 구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칼로 검기를 쏘거나 창을 던지는 것 또한 놈의 시야에서 벗어나면 무력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형상을 바꾸는데 쿨타임이 있어.’

눈을 깜빡거린 뒤 재구성된 금빛 형상은 다시 칼로 나를 베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 직후 내 꼬리가 놈을 후려치려고 했지만, 놈은 방패로 변화시켜서 막지 않았다.

‘처음과 달리 리플렉션으로 막았지.’

이 부분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놈이 함정을 판 것이거나, 아니면 별생각 없이 그런 행동을 취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에.

‘한 번 실험해 보자.’

나는 피막을 크게 펼친 뒤 바닥을 힘차게 쓸어 올렸다. 내 앞에 있는 바닥이 갈라지고 얼음 파편과 막 쌓이기 시작한 눈들이 공중에 흩뿌려지며 내 앞을 가렸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엄폐물도 없는 이곳에서 도망치려고?”

도망이라니. 당연히 아니다.

나로 인해 얼음 평야에 고저차가 심하게 생기긴 했지만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새까만 내 몸과 다르게 새하얀 눈으로만 뒤덮인 곳이니 숨을 수도 없다.

‘그래도 상관없어.’

이제부터 내가 하려는 행동은 ‘몸을 숨기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니까.

-

‘역시 모프박이 새끼. 금방 알아차리네.’

새하얗게 깔리는 눈 속에서 제이슨은 짧게 혀를 찼다. 싸운 지 얼마나 됐다고 놈은 벌써 그가 쓴 특전의 약점을 알아차렸다.

그의 척추와 연결된 금빛 형상의 정체는 아주 작은 입자 형태의 기생 생물들의 군집이다.

생물의 크기가 워낙 작은데다가 각 생물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보니 군집 전체가 하나의 실체를 구성하는 것처럼 보일 뿐.

평소에는 제이슨의 몸 안에 저장되어 있다가 특전을 활성화할 때마다 지금처럼 척수와 연결된 상태로 외부로 나와 금빛 형상을 구성한다.

즉 제이슨은 금빛 입자를 닮은 기생 생물들의 살아있는 둥지이자 뇌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그의 인지 능력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가 보이지 않는 것은 기생 생물들도 볼 수 없고, 그가 모르는 것은 기생 생물들 또한 모른다.

‘짧은 순간에 그걸 캐치해 내다니. 역시 미친놈이라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약점이라 할 수 있지만, 제이슨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컬트 제국에서 제사장 자리에 있을 정도로 막강한 사이킥 파워 능력자다. 인지 능력과 감각을 강화시킬 수 있는 수단은 얼마든지 지니고 있다.

제이슨은 그 자리에 서서 자기 감각을 강화시키는 사이킥 기술들을 시전했다. 그러자 놈이 어디로 움직였는지에 대한 정보가 속속히 그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빠르게 멀어지고 있는 놈의 기운, 가느다란 실선처럼 어딘가로 날아가는 사념파까지. 제이슨은 아주 작은 정보조차도 놓치지 않고 전부 확인했다.

‘사념파라. 노예를 부르려는 건가?’

그가 기생충으로 볼프를 노예로 부리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신전수호단원의 눈으로 봤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 그리폰 볼프, 혹시 플레이어려나?’

정황을 봤을 때, 뮤리엘이 죽기 전 남긴 메시지 내용대로 볼프 플레이어일 가능성이 높았다.

‘플레이어라.’

남자면 특전 말고 쓸모가 없으니 바로 죽이고, 여자면….

‘볼프 노예는 오랜만이네.’

적당히 갖고 놀고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은 제이슨은 느긋하게 모프박이가 남긴 흔적을 따라갔다.

거세지는 눈발 속에 놈이 남긴 흔적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에게는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다. 사이킥 파워는 겨우 눈 따위로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는 사물에 담긴 기억을 읽는 ‘메모리 사이트’를 활성화한 상태로 놈의 뒤를 쫓았다.

놈은 도망칠 수 없다.

그렇게 5분 정도 지났을까. 제이슨은 아무 것도 없는 눈 더미 위에서 멈춰 섰다.

‘하, 뭘 하나 했더니.’

마지막으로 남은 기억을 읽어보면 놈은 그가 서 있는 이곳에서 열심히 눈을 파고 있었다.

무슨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기껏 도망치더니 하는 짓거리가 눈 아래에 몸을 숨기는 것이라니. 놈의 꼴사나운 모습에 제이슨은 자기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는 리플렉션 같은 방어용 사이킥 파워 기술을 활성화시킨 뒤, 팔을 하늘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 붙은 금빛 형상의 검이 수십m 크기로 확장되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놈의 몸의 3분의 1은 족히 넘을 것 같은 크기로 형상을 키운 제이슨은 눈 더미를 향해 팔을 크게 휘둘렀다. 저 멀리 있는 거대한 산맥에서도 보일 만큼 커진 황금색 검 또한 눈 위로 내리꽂혔다.

폭음과 함께 여러 파편들이 허공에 비산했다.

강화된 감각을 통해 그 파편들 중 놈의 몸에서 나온 육편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조각들을 보니 방금 그가 파괴한 부위는 놈의 팔처럼 보였다. 최소 5m는 가볍게 넘을 정도로 거대한 손가락 마디들이 눈 위에 나뒹굴었기 때문이다.

‘응?’

잔해가 생각 이상으로 큰 것을 본 제이슨은 흠칫 놀랐다. 놈의 크기가 100m쯤 된다고 해도 손가락의 크기가 저 정도로 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뭐가 저리 큰…잠깐?’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한 제이슨은 급히 발을 굴러서 몸을 위로 띄웠다. 그 순간, 그가 서 있던 눈 더미 아래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이런 씹?!”

제이슨은 순간 작은 산 두 개가 그의 발아래에서 자라난 줄 알았다. 수십m는 가볍게 뛰어넘을 것 같은 그것은 놀랍게도 입이었다.

지금까지 눈 아래에서 양쪽으로 활짝 벌려져 있던 턱이 그를 삼키기 위해 닫히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나뭇잎으로 가려 둔 곰덫이 작동하는 것처럼 말이다.

방패를 활성화하기에는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이미 리플렉션을 시전 중인 상태지만, 전방위에서 닥쳐오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턱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몸을 뒤로 빼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 그는 허공을 박차서 뒤로 빠르게 빠졌다.

고대 무덤에 있는 벽 함정마냥 좁혀 오는 턱들을 피해 제이슨은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도 수십m는 가볍게 넘기는 거대한 입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상처 하나 없이 피하지는 못했다. 빠져나오기 직전, 그의 다리 한쪽이 입에 박혀 있는 이빨들에 의해 긁혔기 때문이다.

“끄윽!”

말이 긁혔다는 것이지 이빨 하나하나가 그의 키보다 크다. 그런 거대한 이빨들이 그의 다리를 스쳐 지나갔으니 긁힌 것이 아니라 다리가 찢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니미 씨, 씨발!”

그가 착용한 용살자 세트 덕분에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고통까지 없애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강렬한 통증을 느낀 것은 오랜만이었기에 제이슨은 원색적인 욕설을 내뱉었다.

그 앞에 있던 입의 주인이 욕설에 대답이라도 하듯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개씹모프박…어, 어어어?”

순간 이 행성에 일식이 닥친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달의 그림자가 아니라 어떤 생물이 만들어 낸 그림자였다.

눈이 내리는 평야 위를 덮는 그림자의 주인은 그가 잘 아는 존재였다.

제이슨이 가장 혐오스러워하는 생물이자….

「■■■■■■■■■■■■■■■■■■!」

그가 악몽에서조차 마주하고 싶지 않던 괴물.

수백m가 넘는 크기의 에이모프가 그의 앞에서 포효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