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85
나는 백색의 눈밭에 콕 박혀 있는 점을 내려다 봤다.
블랙 갤러곤의 갑주 효과로 종아리의 상처를 금방 회복한 제이슨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6m 크기의 금빛 형성에 비하면 작다고 할 수 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제이슨의 키는 작다고 하기 어려웠다. 2m에 달하는 그의 키는 컬트 남성 중에서도 꽤 큰 편이었으니까.
‘내 앞에서는 의미가 없지만.’
2m든 6m든 내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뼈 야수 상태에서 추가로 ‘유기적 진화’의 특수상태인 ‘괴수의 왕’을 쓴 덕분에 내 몸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화되었다. 몸길이는 300m에 달했고, 아래턱의 길이는 수십m를 가볍게 넘겼다.
과장 좀 보태면 움직이는 야산이나 다름없다.
‘성체도 아닌데 이 정도로 커질 줄이야.’
에이모프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는 나도 예상하지 못한 걸 제이슨이 알 리가 없다. 그는 내가 눈 아래에서 입을 활짝 벌리고 있어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놈도 내가 숨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기에 금빛 형상으로 공격을 가했다. 그 탓에 전투용 팔 하나가 심하게 다쳤지만, 나는 오히려 안심했다.
‘원래라면 내 몸의 3분의 1을 날려 버릴 정도의 힘이었어.’
필살의 공격이 고작 팔 하나에 부상을 입히는 데 그쳤다. 그리고 놈의 공격을 통해 나는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다.
금빛 형상의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결코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상관없다. 지금처럼 전투 중에는 그 짧은 쿨타임도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으니.
“씨, 씨발 이게 뭐야?! 이런 건 들은 적이 없다고!”
아까까지만 해도 여유로웠던 제이슨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상상 이상으로 거대해진 내 모습에 평정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사실 이쪽 형편도 그리 좋은 건 아니지만.’
괴수의 왕은 유지하는 데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몸 안에 있는 에너지들이 엄청난 속도로 깎여나가고 있다.
‘아이스 호러를 잡아먹지 않았다면 금방 끝났겠지.’
높은 에너지를 함유한 고기를 다량으로 섭취한 덕분에 나는 굉장히 많은 에너지를 비축해 놓은 상태다.
신의 회초리처럼 에너지 소비율이 높은 특성을 쓰지 않는 이상, 괴수의 왕도 10분간 유지할 수 있을 터.
나는 제이슨이 서 있는 공간에 전투용 팔을 내리쳤다. 작은 공원만한 전투용 팔이 떨어지자 놈이 황급히 양팔을 위로 들었다.
내 손이 빙판과 충돌하자 어마어마한 풍압이 발생하며 눈을 걷어냈다. 흩날리는 눈보라 너머에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이 빌어먹을 모프박이 새끼가!”
내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멀리서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금빛 형상의 대검이 내 보조기관을 노리고 날아왔다.
나는 다른 전투용 팔을 들어서 보조기관을 가렸다. 놈이 만든 대검이 내 팔뚝을 벴다.
하지만 내 팔 자체가 워낙 커서 그런지 금빛 형상의 검은 내 팔목을 덮은 갑각만을 벴을 뿐이다. 공격이 얕았다는 것을 깨달은 놈은 짧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젠장!”
현재 제이슨은 아까 못 보던 머리띠를 쓰고 있었다. 보라색 빛이 감도는 십자가 모양의 후광머리띠. 9단계 퀘스트 보상으로 얻는 ‘조율자’다.
‘일단 지금 걸로 한 번.’
조율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여분의 목숨은 총 5개. 지금 한 번 썼으니 앞으로 4개 남았다.
나는 놈을 붙잡기 위해 전투용 팔들을 뻗었다. 내 팔들이 바닥에 쌓인 눈을 쓸면서 놈을 붙잡기 위해 움직였다. 나의 손이 막 그를 움켜쥐기 직전, 그가 왼손을 들었다.
그러자 내 손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래비티 컨트롤과 리플렉션을 혼용해서 내 팔을 밀어낸 것이리라.
제이슨이 내 공격을 막아 내는 동안, 그를 감싸고 있던 금빛 형상의 모습이 또다시 변했다.
형상을 구성하고 있던 입자들이 분해되며 빛줄기 형태로 변하더니 그의 몸을 싣고 날아오른 것이다.
‘저걸로 지하에서 빠져나갔구나.’
나는 꽁무니를 빼려는 놈을 붙잡기 위해 침식 촉수들을 뽑았다.
6개의 침식 촉수들은 평소에는 안이 비어 있는 배갑(背甲) 안에 둘둘 만 형태로 보관되어 있다. 그러다가 내가 원할 때 6개의 구멍에 덮인 얇은 피막을 찢고 밖으로 빠르게 튀어나온다.
이 침식 촉수들은 별다른 특성 효과 없이도 내가 지닌 신체 부위 중 가장 긴 길이를 자랑한다. 몸 전체가 기존의 10배 이상으로 커졌으니 당연히 침식 촉수 또한 말도 안 되는 크기로 변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이곳에 마치 용이 승천하려 하는 것처럼 6개의 침식 촉수들이 황금색 빛줄기를 따라 뻗어간다.
황금색 빛줄기가 곡예비행을 하듯 피했지만, 사방에서 밀어닥치는 촉수들을 과연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제이슨이 손에 든 ‘정화(淨化)’를 공중에 던졌다. 검은색 불로 이루어진 검신을 가진 은색 막대기가 풍차처럼 회전하며 내 촉수들을 공격했다.
정화는 고전 스페이스 오페라 미디어에 등장하는 유명한 검을 모티브한 무기다. 원본이 무엇이든 못 베는 것이 없는 것처럼 정화도 매우 강력한 공격력이 특징이다.
실제로도 제이슨이 던진 검은 그의 조종을 받으며 내 촉수를 아주 쉽게 베고 있다. 다만 문제라고 한다면….
‘촉수가 크니까 타격이 별로 없지.’
침식 촉수 하나당 두께만 해도 제이슨의 키를 아득히 초월한다. 검신 길이가 1m 어간에서 머무르는 정화로 열심히 공격해도 치명상을 주기 쉽지 않다.
지금 놈의 공격은 개미가 이쑤시개를 들고 사람을 찌르는 것과 같다. 이쑤시개로 급소를 찌르지 않는 이상, 개미가 사람을 죽이기는 쉽지 않다.
설령 상처가 깊게 난다고 해도 나에게는 ‘재생력’ 특성이 있다. 촉수가 아예 절단되지 않는 이상 이 정도 상처는 금세 회복된다.
‘물론 에너지 소모가 적지 않지만.’
침식 촉수가 깊이 베일 때마다 괴수의 왕을 유지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내가 할 일은 간단하다.
거대한 크기로 놈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
즉, 크기의 폭력. 이것이 내가 준비한 무기다.
“큭!”
제이슨은 정화로 공격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칼을 다시 회수했다. 그를 감싸던 빛줄기는 다시 등에 매달린 금빛 형상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래비티 컨트롤로 공중에 뜬 채 팔을 휘두르자 금빛 형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빛나는 황금검이 침식 촉수 하나에 박혔다. 절반 이상 베는데 성공했지만 완전히 절단하지는 못했다.
고통 경감이 뜰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형상이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을 틈타 다른 침식 촉수들로 제이슨 본체를 노렸다.
부속지를 활짝 펼치고 달려드는 침식 촉수들을 본 그가 급히 왼쪽 손을 뻗었다. 리플렉션이 활성화되며 촉수들을 튕겨 냈다.
하지만 여섯 방향에서 덮쳐 오는 촉수들을, 그것도 하나하나가 수백m에 달하는 것들을 전부 떨쳐 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닌 랭커라고 해도 말이다.
“윽!”
침식 촉수의 뾰족한 부속지가 놈의 다리를 스쳐 지나갔다. 내 이빨에 의해 찢겼다가 회복된 부위였다.
“이 새끼가 진짜!”
내가 자꾸 동일한 부위만 공격하자 제이슨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와 함께 그의 왼손에서 거대한 크기의 보라색 채찍이 튀어나와 내 촉수들을 튕겨 냈다.
그가 촉수를 상대하며 분노를 표출하는 사이 나는 놈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수백 미터가 넘는 거구가 질주하다 보니 아래에 깔린 빙판이 흔들리다 못해 그대로 박살 났다.
나는 내가 움직이면서 피어 오른 눈안개 속에서 입을 크게 벌렸다. 아래턱이 양 갈래로 벌어지고 그 안에 빼곡하게 박혀 있는 이빨들이 외부에 노출되었다.
‘그대로 삼켜주마.’
다른 인간들이 봤다면 심연 속 아가리처럼 흉측한 내 모습에 몸을 떨었을 거다. 제이슨도 수십m에 달하는 거대한 입이 닥쳐오자 짧은 욕설을 내뱉었다.
“Shit!”
놈의 욕설에 반응이라도 하듯 금빛 형상이 빛줄기 형태로 변했다. 제이슨은 아슬아슬하게 내 입 밖으로 빠져나갔다. 쾅 소리를 내며 닫히는 턱을 본 놈이 새된 소리를 질렀다.
“이 미친 새끼!”
그의 고함을 듣자마자 내 목과 머리에 무형의 힘이 닥쳐왔다. 그래비티 컨트롤, 속박, 추가로 몇 가지 이상의 사이킥 파워 기술이 내 머리와 목에 걸린 것이다.
‘윽!’
어마어마한 힘이다. 실력과 별개로 상대가 내는 초능력의 출력은 26호를 능가할 정도다.
초능력 반사 장갑이 반사하고 있을 텐데 놈은 그조차도 리플렉션으로 다시 반사해서 나에게 피해를 주고 있었다.
“죽어…억?!”
그가 괴성을 지르며 내 목을 비틀어 버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놈의 몸이 실이 끊어진 인형마냥 멈췄다. 어느새 보이지 않는 실들이 그의 몸을 옥죄고 있었다.
에너지가 고도로 압축되어 만들어진 저 실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나쁜 녀석! 우리 애기한테 뭐하는 짓이야!」
거세지는 눈폭풍의 너머에 보라색에 가까운 분홍빛을 띤 생물이 보인다.
게임에서 악명 높은 강적이자 절대 동료가 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존재.
그리고 내가 이 세계에 온 이후 처음으로 사귄 친구.
씨 데몬 26호였다.
26호가 전력을 다해 속박을 펼치고 있는 사이, 녀석의 뒤로 한 마리의 용이 날아올랐다.
「나」「추위」「인내」
선명한 녹색의 날개와 길고 통통한 꼬리가 인상적인 그 존재는 작은 갤러곤, 아드하이다. 녀석의 등에는 독수리 머리에 사자 몸을 한 수인이 타고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 놓칠 줄 알고?」
그리폰 수인 모드인 하늘의 어머니가 으르렁거리며 사념파를 흘린다. 이전부터 여러 차례 호흡을 맞춰 온 둘이었기에 이번에도 합공을 준비한 것이다.
매우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갤러곤과 볼프를 본 제이슨의 눈이 커졌다.
“이런 씹!”
그의 눈에서 보라색 불길이 타올랐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보라색 에너지가 빠져나가더니 수많은 가시 형태로 변했다.
‘모르타’라고 하는 상급 사이킥 파워 기술로 다른 사이킥 파워의 작용을 무효화하는 효과가 있다.
「어? 풀렸다!」
뾰족한 가시들이 보이지 않는 실을 건드리자 26호의 속박이 즉시 해제되었다.
자유의 몸이 된 제이슨은 급히 허리를 옆으로 비틀었다. 이미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하늘의 어머니가 제사장의 황금창을 내질렀기 때문이다.
「칫!」
간발의 차로 창날이 놈의 갑주를 베고 지나갔다. 복부 부분의 갑주가 깨지면서 블랙 갤러곤의 조각난 비늘들이 허공에 비산했다.
“감히…!”
분노한 제이슨이 포효하며 하늘의 어머니를 향해 팔을 휘저었다. 그와 동기화된 금빛 형상 또한 팔을 검 형태로로 바꿔서 마구 휘둘렀다.
하늘의 어머니를 태운 아드하이는 놀라운 곡예비행을 펼쳐서 놈의 공격을 피해냈다. 제이슨은 나의 침식 촉수를 리플렉션으로 막아 내면서도 아드하이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건방진 새끼가!”
「위험!」「위험!」
제이슨이 손을 뻗자 아드하이가 허공에 고정된 것처럼 정지했다. 놈도 26호처럼 속박을 사용한 것이다.
그 틈을 타 금빛 형상이 아드하이와 하늘의 어머니를 양단하기 위해 칼을 일직선으로 내려벴다.
‘그렇게 내버려 둘 것 같냐.’
나는 전투용 팔에 달린 활공 피막 전부를 활짝 편 뒤, 제이슨이 떠 있는 방향을 향해 세차게 휘둘렀다.
크기, 무게, 그리고 힘, 이렇게 세 가지 요소가 섞여서 만든 결과물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엄청난 힘을 품은 강풍이 제이슨을 강하게 후려쳤다.
“으헉?!”
리플렉션으로 바람까지 반사할 수 없었는지 그는 내가 만든 자연현상을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공기가 확 빠지고 눈 알갱이들이 얼굴을 때리는 바람에 그는 눈을 감았다. 시각에 반응하는 금빛 형상은 막 아드하이를 베려던 찰나, 입자 형태로 부스러졌다.
「작은애기랑 중간애기 때리지 마!」
눈밭 위에 있는 26호의 사이킥 파워가 아드하이에게 흘러들어왔다. 두 막강한 초능력자의 힘이 충돌하고 아드하이에게 걸려 있던 속박이 약해졌다.
「감사!」
속박을 푼 아드하이는 날개를 한 차례 턴 뒤, 특유의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 내 뒤에 숨었다.
“모프박이 이 새끼!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렸기에 씨 데몬하고 갤러곤을 조종한 거냐!”
눈을 뜨고 그 모습을 본 제이슨이 악을 썼다. 그는 연계에 당한 것보다 내가 다른 괴물들과 같이 움직이는 것이 더 충격적인 것 같았다.
‘조종이라니.’
그는 내가 기생충으로 이들을 조종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기생충으로는 다수를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조종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내 동료는 셋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 하나 더 남았지.’
쉴 틈 없이 내리는 눈으로 새하얗게 물든 빙판 위에는 26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녀석이 데려온 특별한 친구가 눈 아래에 몸을 숨긴 채 대기하고 있다.
[즈즈(지금!)]
내 신호를 받은 스크리머, 아니 PS-111이 눈을 뿌리며 튀어나왔다.
4쌍의 다리에 인간 여성의 머리를 가진 거미 형태의 괴물 PS-111. 기계와 살점이 뒤섞인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던 녀석의 꽁무니 부분에는 새로운 부위가 생겨나 있었다.
그것은 꼬리였다. 전갈의 꼬리와 비슷하게 몸 위쪽으로 구브러져 있는 꼬리 끝에는 독침 대신 다른 물건이 달려 있었다.
작살의 끄트머리처럼 뾰족한 것이 마치 데몰리셔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성공했구나.’
나는 녀석에게 몰래 명령을 하나 내렸다. 내가 제이슨의 부하들과 싸우며 유인한 사이, 돌아다니며 데몰리셔를 흡수해 두라고.
데몰리셔를 흡수해서 새 무기를 만들어 낸 녀석이 준비한 무기를 작동시켰다.
떨어지는 눈을 증발시키며 날아가는 남색의 에너지탄. 그것의 목표는 바로 제이슨의 발밑이었다.
“!”
뒤늦게 알아차린 그가 몸을 틀어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마비된 허벅지가 말썽이었다.
모든 것을 분해시켜 버리는 데몰리셔의 힘이 그의 왼쪽 발목 아랫부분을 집어삼켰다.
“끄, 끄아아아악!”
왼쪽 발이 깔끔하게 날아간 제이슨이 비명을 질렀다. 놈이 공황에 빠진 지금 최대한 타격을 주기 위해 나는 전투용 팔로 놈을 후려쳤다.
분명 손끝에 감각이 있었지만 맞고 날아가는 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우리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는 곳에서 보라색 빛이 번뜩이며 놈의 몸이 재구성되었다. 잃어버린 발목 또한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놈은 방금 느꼈던 통증을 잊지 못한 것 같았다.
“이, 다, 다 죽여 버리겠다!”
고함과 함께 놈의 머리 위에서 보라색의 선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하늘 위로 날아갔다. 저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안다.
‘뇌신!’
뮤리엘과 마찬가지로 놈 또한 뇌신을 들고 온 것이다.
‘여기서 쓰면 자기도 휘말릴 텐데.’
조율자 효과로 피한다고 쳐도 뇌신의 타격 범위는 매우 넓기 때문에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이슨은 컬트 랭커이니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
‘믿는 것이 있거나, 아니면….’
분노로 이성이 나갔거나.
뭐가 됐든 놈은 뇌신으로 나를 죽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게임이라면 놈의 판단이 맞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괴수의 왕과 뼈 야수 두 개를 사용한 나는 뇌신에 직격당해도 죽지 않으니까.
‘대신 애들은 아니야.’
[즈즈 즈즈(모두 모여)]
나는 전투용 팔을 쭉 뻗어서 26호와 PS-111을 집어 들었다. 일행 모두를 가슴 쪽 작은 팔로 껴안은 상태로 뒤로 빠지려는데 제이슨이 달려들었다.
“어딜 가려고!”
놈이 쏟아 낸 수십 개의 사이킥 기술들이 내 하체를 붙들어 맸다.
“모프박이! 넌 여기서 죽는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제이슨의 얼굴. 놈의 뒤에 있던 금빛 형상의 칼날이 내 갑각 위에 날아들었다.
-
‘…역시 모프박이. 지랄 맞게 강하군.’
제이슨은 속으로 혀를 찼다.
놈이 그 악마 같은 실력으로 악명이 높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이 정도로 잘 싸울 줄은 몰랐다.
그가 죽인 랭커들 중 모프박이만큼 성가신 존재는 없었다.
‘젠장. 그냥 갤러곤을 기다릴 거 그랬어.’
강한 거로 치면 콜드블러드 랭커도 만만치 않았지만 당시 그에게는 조력자들이 있었다. 클로에와 신시아가 있던 덕분에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사실 지금 이 싸움에서도 블랙 갤러곤이 있었다면 모프박이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
‘쯧, 동료가 있을 줄은 예상 못 했다고.’
그의 그룹 동료들 중 가장 모프박이를 잘 아는 아키라도 놈이 홀로 다닐 것이라 단언할 정도다. 제이슨 역시 모프박이와 여러 차례 싸워봤기에 그가 어떤 성향인지는 알고 있다.
게임에서 놈은 철저하게 외톨이었다. 협력은커녕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았다.
모든 생명을 포식하길 원하는 에이모프처럼 놈에게는 모든 존재가 적이었다.
오죽하면 커뮤니티에서는 놈이 개발사가 만든 AI가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을까.
그랬기에 제이슨도 놈이 NPC들을 끌고 다닌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기생충으로 지배한 노예인지, 혹은 저게 놈이 지닌 특전 효과인지는 불명이었다.
‘이번 공격으로 못 끝낸다면 후퇴해야겠어.’
매우 치욕스러운 결론이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은 놈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죽어! 죽으라고!”
차갑게 가라앉은 내면과 달리 겉으로는 분노에 사로잡힌 것처럼 괴성을 지르는 그. 정신이 나간 것처럼 몰아치는 그의 모습은 연기였다.
어마어마하게 커진 표적을 붙잡아두려면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나는 빠져나갈 수 있으니까.’
그가 얻은 세 번째 특전. 메탈릭 그렘린 랭커를 잡아서 얻은 그 능력이라면 이 자리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괴물들과 제이슨 간의 공방이 이어지는 동안에 뇌신이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죽여!’
“죽어!”
제이슨의 겉과 속이 하나가 되어 외친 순간, 하늘에서 노란색 불길이 떨어졌다.
뇌신이라는 이름을 지닌 궤도병기가 만들어 낸 초월적인 힘.
신의 의지의 발현이라 불러도 좋을 그 신성한 불 앞에서 에이모프가 반기를 들려 한다. 악마가 신의 권능을 흉내 내고, 모독하는 것처럼 놈의 입에서도 똑같이 노란색 불길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두 뇌신의 힘이 어우러지며 하늘을 진동시켰다. 눈과 얼음, 그리고 천둥 형태로 구현된 사이킥. 물질과 힘이 빚어 낸 뇌신들의 춤은 실로 장엄했다.
이를 예상했던 제이슨조자도 감탄할 정도로 경외스러운 광경이었다. 잠깐 넋을 놓았던 그는 재빨리 정신을 다잡았다.
‘역시 약해!’
제국모함과 싸울 때 쏜 것에 비하면 지금 놈이 쏘는 공격은 확실히 약했다. 마치 에너지 출력이 부족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래. 이중 거대화에 뇌신의 힘까지. 둘 다 쓰기는 어렵겠지.’
놈이 야산 크기로 거대화되었을 때, 제이슨은 생각했다. 저렇게 연달아 커진다면 몸에서 소모되는 에너지량이 극심할 것이라고.
그의 예상이 맞았다. 뇌신의 힘을 쏟아내는 중인 놈의 장갑에 금이 가는 것이 보였다.
이중 거대화의 결과물로 놈의 장갑은 무시무시하게 두꺼워졌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기회는 지금!’
제이슨이 집중하자 금빛 형상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대신 놈의 칼 부분은 한없이 커지기만 했다.
잠시 후 금빛 형상은 사라지고 오로지 거대한 빛의 덩어리만이 제이슨의 몸 위를 덮고 있었다.
금빛 형상을 지금까지 계속 회피용으로 사용했던 빛줄기 형태로 바꾼 제이슨은 목표를 재설정했다.
회피용으로만 사용한 것은 일종의 속임수. 빛줄기 형태의 금빛 형상은 그가 지닌 가장 강력한 공격 무기 중 하나다.
‘바로 내 몸이 탄환이 되는 것이지.’
에이모프의 갑각이 부서지고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뇌신이 쏜 벼락 또한 위력이 가파르게 감소 중이다.
‘조금만 더…지금!’
뇌신의 빛이 꺼진 순간, 제이슨은 금빛 형상에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날아가 놈의 머리를 부수라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의 몸은 눈밭 위에 있지 않았다. 금빛 형상 전체에 묻은 새까만 피가 순식간에 입자들에 의해 흡수되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거기에 있는 것은 목에 커다란 구멍이 난 거대 괴수였다. 그 와중에도 놈이 그의 공격을 피했기에 머리가 아닌 목이 꿰뚫린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놈이 입은 상처가 치명상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실이 끊어진 연처럼 괴수의 몸이 천천히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