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86
레버넌트 기관의 발동 조건은 다음과 같다.
죽기 직전이 될 정도로 치명적인 공격을 당해야 하는 것.
여기서 말하는 치명적인 공격에는 자해가 포함되지 않는다. 오로지 나 말고 다른 적이나 생물이 공격했을 때만 발동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상처가 회복되면 레버넌트 기관은 자동으로 휴면 상태에 들어간다.
이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죽은 자나 다름없는 상태에서만 쓸 수 있는 것이다.
이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켜서 레버넌트 기관을 발동시키는데 성공한다면, 실로 파격적인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레버넌트 기관이 활성화 되면 보유한 모든 특성의 쿨타임이 초기화된다. 또한 지속 시간 동안에는 모든 특성을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에이모프가 얻을 수 있는 특성들 중 제한이나 쿨타임이 있는 특성들은 대개 유일급 특성이거나 융합 특성이다.
나의 경우를 봐도 ‘사냥의 표상’, ‘악몽의 지평선’, ‘유기적 진화’ 등의 유일급 특성들은 모두 쿨타임을 지녔다.
이렇게 강력한 특성이 왜 비주류가 됐느냐 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일단 레버넌트 기관을 제대로 써먹으려면 유일급 특성을 다수 보유해야 의미가 있다.
다만 유일급 특성은 캐릭터가 사망할 시 소실된다. 일부러 이 특성을 써먹으려다가 자칫 잘못한다면 유일급 특성을 그대로 날려 먹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적들도 레버넌트 기관의 존재를 안다는 점이다.
적이 이 특성을 써먹지 못하도록 공격을 조절하면 그대로 애물단지가 된다.
까다로운 조건,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 그리고 수동적인 플레이가 강조된다는 점까지.
아무리 파격적이라고 해도 특성 자체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 보니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이 특성을 주력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보험으로 쓰거나 아니면 특성을 보유한 것처럼 속여서 적에게 블러핑을 가할 때나 쓸 뿐.
물론 세상에는 별별 인간이 다 있는 만큼 레버넌트 기관을 적극적으로 써먹어보려는 한 사람들도 있다.
체력 조절을 완벽히 해낼 수 있으며 적의 전략과 공격을 완벽히 간파할 수 있다면.
이 조건을 만족한 자는 진정한 ‘돌아온 자’, 레버넌트 기관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조건을 만족시키는 자 중 하나였다.
목에서 피가 흐른다. 금빛 형상으로 몸을 감싼 제이슨이 관통하면서 생긴 부상이다.
만약 게임이었다면 지금 내 체력 포인트는 얼마 남지 않았을 거다.
여기는 게임이 아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 몸에 흐르는 피들이 빠르게 식어가고 있는 것을.
심장의 박동수는 빠르게 떨어지고 있고, 뇌는 극한의 고통으로 인해 분비되는 엔돌핀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 온 이후, 지금만큼 죽음에 가까워진 적이 없다.
‘모든 것은 예상대로야.’
제이슨이 뇌신을 꺼내든 이상, 합공을 펼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예상했다. 미친 척하고 나에게 달려드는 것과 별개로 그게 합리적이었으니까.
물론 빛줄기로 변하는 기술을 공격용으로 쓸 줄은 몰랐다. 내가 예상한 것은 다른 사이킥 파워 기술이었으니까.
그래도 놈이 어디를 노릴 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는 현실이니 최대한 안전하게 갈 거야.’
에이모프는 뇌가 파괴되면 패시브형 특성을 제외한 일반 특성 사용이 불가능해진다. 그러니 놈 입장에서는 설령 일격에 죽이지 못해도 안전하게 나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이득이다.
‘아니면 도망치는 것을 모색하거나.’
차갑기만 하던 피가 조금씩 뜨거워진다.
죽어 가던 심장에 작은 불꽃이 피어오른다.
구멍이 난 목으로부터 오는 통증은 여전했지만, 지금 내 몸은 몇 초 전과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에이모프의 심장이 울릴 때마다 그 옆에 붙어 있는 기관에서 특수한 액을 내뿜는다. 기름을 따라 불이 번지는 것처럼 액체가 내 혈관을 통해 몸 곳곳에 스며든다.
내 몸에서 변화가 발생하는 동안, 밖의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제이슨과 놈을 막으려는 내 동료들이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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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직 안 죽었다고?’
바닥에 쓰러진 모프박이를 보고 제이슨은 치를 떨었다. 거대화가 해제되면서 두터운 갑각이 전부 바스러진 놈은 겉만 봤을 때는 숨이 끊어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놈이 정녕 죽었다면 제이슨은 놈이 보유한 특전을 획득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답은 하나다.
놈이 죽지 않았다는 것.
‘…도망쳐야 하나?’
모프박이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기습을 하는 존재. 분명 지금도 뭔가 수작질을 부려놨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아니라면?’
게임이라면 모를까 현실인데도 모프박이가 과연 자기 목숨이 위험한 상황을 유도했다고 볼 수 있을까?
정말로 놈이 위기인데 그냥 도망쳐 버리면 그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다.
제이슨은 고민했다. 당장 ‘정화’와 ‘단죄’로 놈의 목을 쳐 버리고 싶다는 욕망과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공존했다.
‘아니. 괜한 모험을 할 필요는 없겠지.’
놈과 싸우면서 필요한 정보를 다수 얻었다. 다른 동료들을 데리고 온다면 놈을 무조건 잡을 수 있으리라.
그리 마음먹은 그는 ‘세 번째 특전’을 가동시키려고 했다.
‘응?’
파란색 입자에 잠식되던 그의 몸이 일순간 멈췄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가로막은 것이다.
「너! 큰애기를 아프게 해놓고 어딜 가려고!」
강렬한 감정을 담은 파장이 그의 머리에 꽂혔다. 고개를 돌리자 에이모프의 지배를 받는 씨 데몬이 보였다.
에이모프와 비슷하게 검은색에 가까운 보라색을 띠고 있는 놈의 몸은 흉측한 눈들로 뒤덮여 있었다.
수백 개가 넘는 눈들이 그를 주시하자 거대한 어둠이 그를 덮쳐왔다.
‘심해의 공포!’
제이슨은 급히 정신 공격을 방어하는 사이킥 파워 기술을 사용했다. 짧은 순간 세상이 암흑에 잠겼지만 금세 해제되었다.
정상적인 씨 데몬이었다면 이렇게 쉽게 해제할 수 없었겠지만, 저 씨 데몬은 힘이 약한 것처럼 보였다.
‘장애가 있는…윽?!’
세상의 빛이 다시 돌아왔을 때, 녹색빛이 그에게 날아들었다. 심해의 공포 때문에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그는 녹색 생물의 돌진을 그대로 얻어맞았다.
「큰어른」「부상」「용서」「불가!」
“이런 썅!”
그를 친 뒤 날아오르는 그린 갤러곤을 보고 제이슨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하여간 비슷한 놈들끼리만 모아놨군.’
반푼이 씨 데몬, 장애를 지닌 그린 갤러곤. 좆같은 인성을 지닌 모프박이의 동료답게 병신들 천지였다.
‘그 날개, 뜯어 주마.’
제이슨이 손을 뻗자 금빛 형상이 팔 부위를 채찍으로 변형시켜 비행 중인 그린 갤러곤을 향해 휘둘렀다.
그의 공격이 막 닿으려는 순간, 어디서 날아온 남색 에너지 덩어리가 채찍을 때렸다. 에너지탄에 맞은 부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싹 사라졌다.
“뭐야?”
“적. 배제합니다.”
부서진 에이모프의 갑각 위에 흉측한 괴물이 꼬리를 하늘을 향해 세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게 왜 여기에…아니 그보다 왜 모프박이의 명령을 듣고 있지?’
외형이 많이 다르긴 했지만 기계와 생물이 뒤섞인 모습을 봤을 때, 클로에가 개발 중인 뮤턴트 스크리머가 틀림없었다.
‘설마 기억이 복구된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절대 없다고 그랬는데?’
제이슨은 뮤턴트 스크리머의 재료가 뭔지 알고 있다. 다량의 유전자가 뒤섞인 저 흉물의 원본은 그와도 관련이 있기에.
그러나 그의 고민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황금색의 털을 지닌 짐승이 그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하얀색 머리에 황금색 털을 지닌 그리폰이 그의 배를 베고 지나갔다.
“씹?!”
갑작스러운 복부의 통증에 제이슨은 기겁했다. 무려 블랙 갤러곤의 비늘로 만든 갑주인데 베인 것이다.
제이슨의 배에 자상(刺傷)을 남긴 존재는 부리로 황금색 단창을 물고 있었다.
‘제사장의 황금창!’
뮤리엘이 볼프 노예를 구하러 가면서 겸사겸사 저 무기를 얻으려고 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 무기를 그리폰이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상대가 누구인지 쉽게 짐작이 갔다.
「날 기억하나? 뮤리엘을 시켜서 나의 가족들을 죽였지.」
“같잖은 볼프 새끼가….”
블랙 갤러곤의 갑주가 빠르게 상처를 회복시켜줬지만, 불의의 공격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는 짜증을 내며 그리폰을 향해 왼손을 펼쳤다. 그래비티 컨트롤이 펼쳐지며 광범위한 영역에 막대한 중력이 발생했다.
「큭!」
바닥의 얼음에 금이 가고 그리폰의 움직임이 급격히 느려졌다. 그 위에 추가로 ‘속박’까지 펼치자 놈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 상태로 금빛 형상이 칼로 썰어버리려는데 또 방해가 들어왔다.
「나쁜 놈아! 중간애기 괴롭히지 마!」
“쯧.”
투명한 실이 그의 몸을 옭아맸다. 제이슨은 적의 사이킥 기술을 무효화시키는 ‘모르타’를 사용해 씨 데몬의 속박을 해제했다.
“병신 주제에 귀찮게 굴지 마라!”
그가 귀찮은 듯 손을 털자 금빛 형상이 칼로 씨 데몬의 몸을 벴다. 일격에 촉수 여러 개가 잘리자 놈의 몸이 하얗게 질렸다.
「작은어른!」
“너도 꺼져라.”
그 모습을 본 그린 갤러곤이 날아들었지만 제이슨은 리플렉션으로 놈의 몸 자체를 튕겨 냈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그린 갤러곤의 날개가 엉망으로 꺾였다.
바닥에 추락해 신음하는 놈을 마무리하려는데 어느새 접근한 뮤턴트 스크리머가 입을 벌려 그의 팔을 깨물었다.
“소용없…으헉?!”
갑주로 보호받으니 문제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순식간에 힘이 빨려나가는 바람에 제이슨은 꼴사납게 주저앉을 뻔했다.
‘이런 Fuckingreaver!’
상대가 블러드 리버를 흡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이슨은 바로 오른손에 든 정화를 휘둘렀다. 검은색 불꽃으로 이루어진 검신이 뮤턴트 스크리머의 다리를 벴다.
“키릭, 이동에 장애 발생.”
“씨발, 장애고 나발이고 죽여주마!”
진짜로 분노한 제이슨이 정화를 세차게 휘둘렀다. 검은 검신이 번뜩일 때마다 뮤턴트 스크러미의 다리가 처참하게 잘려 나갔다.
놈은 순식간에 다리 대부분을 잃고 주저앉았다. 제이슨은 신경질적인 태도로 놈의 몸을 마구 난도질했다.
“퉤. 별 거지 같은 게.”
그는 쓰러진 스크리머에게 침을 뱉고, 정화를 회수했다.
짧은 시간에 모프박이의 부하들을 정리한 그는 꼼짝도 못하고 있는 그리폰에게 다가 갔다. 그리폰은 부리에 창을 문 상태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창, 네놈한테는 과분한 물건이다.”
그가 손을 펼쳐 사이킥 파워를 활성화하자 창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폰은 어떻게든 놓지 않으려고 부리를 다물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윽!」
매끈한 황금색 부리가 뒤틀리다가 결국 부서졌다. 그는 부서진 부리 조각과 함께 땅에 떨어진 단창을 주워 들었다.
‘이건 됐고. 아, 그러고 보니 플레이어면 특전이 있겠지?’
그리폰도 함께 잡아갈까 생각 중인데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렸다. 부리가 부러진 그리폰이 그를 비웃고 있었다.
“혹시 미친 건가?”
「크, 크큭, 큭큭큭, 머저리 같은 새끼.」
“벌써 미치면 곤란한데.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아주 많거든”
「큭큭큭,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건 내가 할 말이야. 과연 고문당하면서도 그런 태도로…크헉!”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제이슨은 피를 토했다. 피를 통하는 동시에 여태까지 겪어보지 못한 통증이 그를 덮쳤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흉부를 뚫고 나온 거대한 뼈가 보였다.
“이게 뭔…?”
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곳에는 뼈 칼날의 주인이 서 있었다.
“너, 너 이 새끼…!”
등에서 튀어나온 뼈 칼날이 달린 팔로 그를 찌른 존재.
그것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한 에이모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