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88
‘아.’
제이슨의 머리를 입에 넣는 순간, 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 안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의 붉은 물은 놀라울 정도로 중독적이었다. 목에 구멍이 뚫린 고통도 잊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제이슨의 피는 메이플 시럽과 비슷하지만 훨씬 감칠맛이 돌았다. 그의 고기는 내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적일 것이 분명했다.
문제라고 한다면 지금 내가 가진 것은 놈의 머리 밖에 없다는 것. 목 아래의 몸통은 푸른빛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머리라도 구한 것을 다행으로 봐야 하나.’
정수수확자의 턱 효과 덕분에 머리만으로도 상대가 지닌 유전자 정수를 획득할 수 있다.
나는 턱에 힘을 줘서 제이슨의 머리를 씹었다.
살점, 근육, 피, 뼈, 뇌, 그리고 한쪽만 남은 뿔까지. 컬트의 머리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내게 흡수되었다.
그러자 내 눈앞에 반투명 텍스트박스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포식 효과 발동! ‘제이슨(제이슨 터닝햄)’의 특전 탈취 성공!」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특성 중 융합 가능한 특성이 없습니다. 증표 저장 기관으로 이전됩니다.」
「포식 효과 발동! ‘제이슨(제이슨 터닝햄)’의 특전 탈취 성공!」
「보유한 ‘우주 박테리아’, ‘환각의 불길’과 융합 가능. 특성을 선택해주시기 바랍니다. 선택 결과는 재료로 사용된 특성에 영향을 받습니다.」
「추신: 당신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신중히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특성 선택까지 남은 시간: 24:00:00」
「특성 강화 시스템 사용 대상입니다. 시스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포식 효과 발동! ‘제이슨(제이슨 터닝햄)’의 특전 탈취 성공!」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특성 중 융합 가능한 특성이 없습니다. 증표 저장 기관으로 이전됩니다.」
‘뭐가 이리 많아?’
뮤리엘 때와 비슷할 거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출력된 텍스트박스 수가 많았다.
‘다른 플레이어를 강탈하면서 얻은 특전들인가?’
보아하니 놈이 보유한 특전은 총 3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 2개는 현재 조건이 맞지 않아서 사용할 수 없고, 하나만이 내가 지닌 특성과 합쳐서 사용할 수 있다.
‘하긴 약탈자의 부정형 다면체 때도 금속 흡수를 재료로 사용했었지.’
나는 당장 융합 가능한 특전부터 확인했다.
감염 관련 특성인 우주 박테리아, 초능력 관련 특성인 환각의 불길 중 하나가 특전을 융합시키는데 활용할 수 있다고 쓰여 있다.
두 특성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이 중 무엇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선택 가능한 시간도 24시간이나 줬다.
‘이런 적은 처음인데.’
이례적인 상황이지만 달갑지 않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이렇게 혜택을 줄 리 없으니까.
‘중대한 선택의 기로라….’
아직 남은 시간이 24시간이 있으니 당장 선택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제이슨의 머리를 먹으면서 얻은 양질의 에너지는 전부 내 목에 생긴 상처를 치유하는데 사용되었다. 내부에 생긴 관통상이 얼추 아물면서, 콸콸 쏟아지던 피도 멎었다.
치명적인 상처가 회복됐으니 레버넌트 기관도 임무를 마치고 휴면 상태로 돌아갔다. 심장에 붙어 있는 이 초소형 기관은 향후 6개월 동안 긴 잠에 빠질 것이다.
따라서 블랙 갤러곤과 싸울 때는 레버넌트 기관을 사용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 상태로 습격을 받으면 승산이 없어.’
내가 지하에서 부린 난동에 더불어 뇌신까지 발동된 상황이니 언제 갤러곤들이 날아올지 모른다.
나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다. 26호는 몸에 큰 상처를 입었고, 아드하이는 다리와 날개가 모두 부러졌다. PS-111은 멀쩡한 부분을 찾기가 힘들 정도고.
그나마 하늘의 어머니가 부리만 깨진 터라 멀쩡한 편이다.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해.」
그녀 또한 이 상황이 결코 좋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즈즈즈 즈즈(산으로 가자)]
「…갤러곤들이 다녀갔는데 괜찮을까?」
그녀 말대로 산은 안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곳 아래의 지하 공간은 완전히 무너졌다.
운 좋게 무너지지 않은 곳을 찾는다고 해도 이곳을 찾아온 갤러곤들에게 걸릴 가능성이 높다.
‘그뿐 아니라 먹이 공급도 문제야.’
제이슨을 죽이기 위해 내가 마지막으로 꺼낸 카드는 ‘영리한 약자’와 ‘사냥의 표상’ 콜라보였다. 적을 사살하는 데 유용할 것이라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영리한 약자는 민첩함, 잠입 등에 특화된 특수상태. 섭취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효과도 있다. 그렇기에 사냥의 표상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예전에 있었던 일처럼 애들에게 이를 드러낼 가능성은 낮다.
‘지금은 나보다 애들이 걱정이지.’
부상이 심각한 녀석들을 치유하려면 두 가지 방법뿐이다. 애들에게 먹이를 먹여 주거나 내가 둥지를 깐 뒤 ‘공생물 포자’를 붙여주는 것.
‘어느 쪽이든 대량의 식량이 필요하다는 점은 똑같아.’
그리고 이 주변에는 먹이가 없다. 지하가 무너지면서 먹이들 또한 얼음 속에 파묻혀 버렸기 때문이다.
[즈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어)]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하늘의 어머니는 그리폰으로 변신해서 망가진 PS-111을 등에 업었다.
“실례합니다. 중간애기.”
「…하늘의 어머니라 불러 주면 안 될까?」
“허가받지 않는 명령입니다.”
「…….」
그사이 나는 26호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몸에 큰 상처를 입은 녀석은 에너지 유출을 최소화하기 위함인지 몸을 작은 크기로 줄여놓았다.
[즈즈 즈즈즈(몸은 괜찮아?)]
「나는 괜찮아! 큰애기야말로 안 아파?」
하얗게 질린 녀석의 몸을 보면 심하게 고통스럽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 먼저 걱정하는 녀석을 보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즈 즈즈즈 즈즈즈(이 정도면 금방 나)]
「대단해!」
[즈즈즈 즈즈즈(조금만 참아줘)]
나는 26호가 아프지 않도록 주의하며 머리 위에 올려놓고, 아드하이의 상태를 살폈다.
녀석은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앞다리 뼈와 날개가 부러진 것도 문제지만, 그것보다 저체온증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나는 덜덜 떨고 있는 녀석을 전투용 팔로 들어서 가슴 부근에 꼭 껴안았다. 몸에 덮인 털가죽으로 녀석의 온도를 조금이라도 올리기 위해서였다.
「따뜻함」
품에 안긴 녀석이 머리를 비비는 것을 느끼며 나는 하늘의 어머니를 바라봤다. 준비를 끝마친 그녀는 나를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새까만 산등선이 위치한 방향을 향해 달렸다.
켄타우로스 체형이 되어 4개의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는 나, 사자를 닮은 몸으로 힘차게 뛰는 하늘의 어머니.
그런 우리가 남긴 족적은 쏟아지는 백색의 얼음 꽃들에 의해 금세 희미해졌다.
달리던 중 검게 물든 하늘에서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폭풍이 닥쳐오는 신호였다.
눈발이 거세지고, 주변 온도가 급격히 낮아졌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추위에 약한 아드하이와 하늘의 어머니는 얼어 죽고 말리라.
그 사실을 아는 하늘의 어머니도 달리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추 10분 정도 달린 끝에 우리는 산맥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어제 스크리머와 싸웠던 장소와 다른 곳이지만 보이는 풍경은 비슷했다.
밑동은 가늘지만 위로 갈수록 가지가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나무들. 수시로 닥쳐오는 강풍과 눈보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런 식으로 진화했다.
나무가 가림막이 된 덕분에 숲속은 다른 곳보다 덜 추웠다.
물론 당장 얼어 죽는 상황만 피했다뿐이지, 따뜻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나는 26호와 아드하이를 내려놓고 땅을 마구 헤집었다. 흙을 파내서 큼지막한 구덩이를 만든 뒤 위에 근처에 있는 나뭇가지들로 덮었다.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여기에 들어가면 좀 나을 거야)]
마음 같아서는 불을 피우고 싶지만, 연기가 새어 나가면 갤러곤들에게 걸릴 거다. 아쉽지만 이게 최선이다.
「얘들아, 모두 붙어. 그러면 덜 추울 거야.」
「응.」
「추움」「추움」「추움!」
「열 발산 기능은 현재 비활성 상태입니다. 추가 에너지를 보급해주신다면 활성화시킬 수 있습니다.」
4종류의 생물들이 살아남기 위해 몸을 맞댔다. 이걸로 시간을 더 벌었다.
‘이제 남은 건 회복에 필요한 에너지.’
PS-111가 말한 대로다. 우리에게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26호가 회복한다면 몸을 부풀려서 애들을 추위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다.
‘그리고 PS-111에게 사이킥 파워를 건네줄 수 있지.’
나의 회복을 위해서도 당장 먹어서 배를 채울 만한 것이 필요하다. 나는 하늘의 어머니에게 애들을 맡기고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냥의 표상이 끝나기까지 몇 분 남지 않은 상황. 혹시 모를 부작용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뭐라도 찾아야 해.’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 생물이라면 아무 거나 상관없다. 당장 입 속에 넣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뼈 칼 형태로 변한 보조기관이 살아 있는 생물을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해 움직였다.
부지런히 까딱거리며 주변을 수색하던 보조기관. 머지않은 곳에서 어떤 움직임이 잡혔다.
다수가 내는 발자국 소리.
나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뛰었다.
수많은 나무들을 지나 도달한 그곳에 소리를 낸 장본인들이 있었다.
‘…이런.’
불행히도 그들은 내가 바라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적대적 생물 확인. 설정된 목표와 30% 일치. 메인 컨트롤러 ‘피라 일레븐’ 명령 지연 상태.”
“PS-250 중간 단말기로 해당 정보 전송. 송신 완료.”
발소리의 주인은 3대의 신형 스크리머들이었다. 그들 뒤에 녹색 비늘을 지닌 짐승이 쓰러져 있었다.
꼬리까지 합치면 10m는 가볍게 넘을 정도로 큰 몸집, 몸만큼이나 거대한 날개를 지닌 그 생물은 바로 그린 갤러곤이었다.
몸에 물어뜯긴 상처들이 가득한데 피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몸에 있던 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빨아먹은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당장 에너지를 채우려면 저 갤러곤의 시체가 필요하다.
“중간 단말기 결정권 없음 확인. 자체적 판단 필요.”
“에너지 보충 완료. 갤러곤의 생물학적 특성 적용 완료됨.”
“목표 제압 개시.”
그 말을 끝으로 스크리머들이 엄청난 속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은 아드하이가 초가속을 쓸 때와 비슷해 보였다.
공기를 가르며 덮쳐 온 스크리머가 나를 향해 거미를 닮은 금속 다리를 휘두른다.
‘영리한 약자’로 변신한 상태인 나는 4개의 다리로 땅을 박차 옆으로 몸을 피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지나간 놈의 꽁무니를 향해 꼬리를 휘둘렀다. 꼬리 끝에 달린 집게발이 정확히 놈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끽!”
기괴한 신음을 낸 스크리머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 사이 다른 스크리머가 어느새 나의 바로 앞까지 접근했다.
날카로운 발톱 3개가 달린 앞발 두 개가 내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는 전투용 팔로 놈의 두 다리를 붙잡았다.
앞다리가 붙잡힌 스크리머의 몸이 기괴하게 꼬이더니 뒤에 있던 다리가 내 옆구리를 노렸다. 다리가 총 8개나 되기에 가능한 공격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이쪽도 똑같이 해 주지.’
사냥의 표상 모드인 나는 놈들보다 팔과 다리가 더 많다. 나는 등에 생긴 뼈 낫이 달린 팔을 교차해서 휘둘렀다.
섬뜩한 소리에 이어 나를 찌르려던 놈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깔끔하게 참수된 스크리머 시체를 허공을 향해 던졌다.
나무 위에 올라가 공격 기회를 엿보던 스크리머가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동료를 보고 급히 뛰어내린다.
나는 놈이 착지할 지점을 향해 돌진했다. 놈은 공중에서 몸을 틀어 나의 공격을 피하려 했다.
‘어딜!’
내 머리 갑각 위에 있는 인면수들이 합창하듯 입을 벌려서 놈에게 강렬한 음파를 쏟아 냈다. 마비를 유발시키는 무형의 파장에 직격당한 놈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머리에 달린 여섯 개의 뿔들이 스크리머의 몸을 꿰뚫었다.
“소, 소각, 프로….”
놈이 자폭하기 전, 전투용 팔로 놈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 상태로 힘을 줘 힘차게 뽑아냈다.
“소, 소, 소….”
척추까지 통째로 뽑힌 놈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기능이 정지되었다. 역겨운 스크리머의 머리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린 나는 뿔에 매달려 있는 나머지 부분들도 손으로 뜯어냈다.
스크리머와의 전투가 끝난 동시에 내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사냥의 표상 효과가 끝난 것이다.
힘이 빠져나간 부분에는 며칠 굶은 것 같은 강렬한 허기가 들어와 빈자리를 채웠다. 몸을 겹겹이 감싸던 두꺼운 갑각들은 모래성처럼 부스러졌다.
등에 있던 뼈 낫 팔은 쪼그라들다 못해 분리되어 땅에 떨어졌다. 탄탄한 근육과 갑각으로 무장한 팔이 지금은 막 발굴한 미라처럼 보였다.
갑각이 벗겨지는 것 말고 몸의 크기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
영악한 약자는 아무리 몸이 커져도 5m 이상을 넘길 수 없다. 사냥의 표상을 써도 외형만 변할 뿐 길이 자체는 늘지 않는다.
사냥의 표상이 끝나고 몸의 변이가 완전히 끝난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적대적 생물. 전투 상황 정보, PS-250 중간 단말기에 전달 중.”
내 꼬리에 뒤통수를 맞았던 스크리머였다. 머리의 3분의 2가 으깨진 놈은 아직 살아 있었다.
‘자폭하면 성가시니까.’
나는 엄청난 허기와 무기력함의 압박 속에서도 놈을 처리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놈에게 가까이 가서 끝장내려는 그때.
「큰어른!」
‘아드하이?’
갑자기 아드하이의 사념파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나무 사이로 날아오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성치 않은 날개를 휘적거리며 간신히 날아 오고 있었다.
「큰일!」「동족」「나」「발견!」
‘뭐?’
녀석이 쏜 사념파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자마자 머리 위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날갯짓 소리?’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물러난 직후 거대한 백색의 짐승이 스크리머 위에 떨어졌다.
스크리머를 깔끔하게 가루로 만든 그것이 자수정을 닮은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 봤다.
‘…미친.’
머리에 난 다수의 뿔들, 거대한 날개와 파충류를 닮은 몸체, 그리고 입 대신 달린 촉수다발.
우주의 용이라 불리는 갤러곤, 그 중에서도 블랙 갤러곤 다음으로 강력하다고 알려진 존재.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절대로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던 화이트 갤러곤이 내 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