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189화 (190/400)

Ep. 189

치명상만 면했다뿐이지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내가 화이트 갤러곤을 꺾는 것은 불가능하다.

블루 갤러곤과 그린 갤러곤 간에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그 위의 화이트 갤러곤은 훨씬 우월한 존재다.

신전수호단이 든 갤러곤의 발톱검, 시현 유진이 사용했던 갤러곤의 발톱 특성은 모두 화이트 갤러곤에서 비롯된 요소들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게임에 존재하지 않던 특성인 ‘괴물의 촉수’. 촉수를 사용해 사이킥 브레스를 쏘는 이 능력은 화이트 갤러곤의 고유 특성이다.

그리고 나와 달리 놈은 그 사이킥 브레스를 난사할 수 있다. 파괴력은 준성체 상태인 내가 더 강할지 몰라도, 나와 달리 놈은 쏘는데 한계가 없다.

‘싸우면 필패야.’

나는 몸을 돌려 아드하이 쪽으로 향했다.

[즈즈즈즈즈(도망쳐야 해)]

아드하이는 날개가 부러진 터라 비행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나는 녀석을 붙잡아 품에 꽉 껴안은 뒤 미친 듯이 달렸다.

「큰어른」「동족」「나타남」「나」「추적」

[즈(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린 갤러곤 2마리가 내 앞에 나타났다. 왜소한 아드하이와 다르게 10m에 가까운 덩치를 자랑하는 놈들이 나를 가로막았다.

옆으로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어서 보라색 열선이 나의 바로 앞을 태우고 지나갔다.

「함 오르트」「말한다」「멈추라고」

뒤를 돌아보니 화이트 갤러곤이 느긋하게 나를 따라오는 중이었다. 보라색으로 진하게 물들어 있던 놈의 촉수가 서서히 옅은 붉은색으로 돌아왔다.

화이트 갤러곤은 사이킥 브레스로 정확히 내 발 앞의 흙만 태웠다. 경고의 의미였다.

‘뭐 하자는 거지?’

아드하이가 특이한 것이지 본래 갤러곤은 매우 흉포한 생물이다. 자기 영역에 침입한 자들은 어지간해서는 용서하지 않는다. 괜히 갤러곤의 둥지가 최고 난이도의 사냥터 중 하나로 분류되는 게 아니다.

실제로 그린 갤러곤들은 당장에라도 공격하기 위해 근육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었다.

그들이 가만히 있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기이할 정도로 침착한 저 화이트 갤러곤 때문이다.

‘원하는 것이 있어.’

나는 화이트 갤러곤의 모습을 빠르게 살펴봤다. 뿔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작고 꼬리가 두터운 것을 보니 놈의 성별은 암컷이다.

갤러곤은 성적 이형성(性的異形性)을 가진 생물. 암컷보다 수컷이 근소하게 더 강하지만 이 상황에서는 딱히 의미 없는 이야기다.

몸길이는 화이트 갤러곤답게 그린 갤러곤의 두 배 이상이다. 날개는 현재 접은 상태지만 펼치면 그 위용이 대단할 것이다.

여기까지 봤을 때는 일반적인 화이트 갤러곤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지만 두 가지 면에서 차이점이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잘 몰랐지만 다시 보니 몸 여기저기에 검게 물든 비늘들이 있었다. 어쩌면 다른 생물의 피가 말라붙어서 생긴 흔적일지도.

‘그보다 갤러곤치고 지나치게 말랐어.’

우리를 경계하는 그린 갤러곤도 그렇고 내 앞에 있는 화이트 갤러곤도 몸이 매우 마른 편이었다. 옆구리에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였으니까.

물론 저쪽이 굶주렸다고 해서 내가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현저히 약해진 상태이기에.

‘대화부터 해 보자.’

[즈즈즈즈(뭘 원하지?)]

괴물의 촉수가 파르르 떨며 파장을 만들어내자 화이트 갤러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히다」「동족」「말」「가능한가?」

[즈(그래)]

「기이한 동족」「나」「소개한다」「함 오르트」

자기를 ‘함 오르트’라 소개한 화이트 갤러곤은 사념파를 계속 쏘아 보냈다.

「함 오르트」「필요하다」

[즈즈 즈즈즈즈(뭐가 필요한데?)]

놈은 대답 대신 앞발을 들어 내 품에 안긴 아드하이를 가리켰다.

「유성의 딸」「특별하다」「동족」「구원」「필요하다」

[즈으으으즈(아드하이가?)]

「함 오르트의 무리」「약하다」「위대한 오드 그라드의 무리」「강하다」「유성의 딸」「무조건」「필요하다」

갤러곤 특유의 화법 탓에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화이트 갤러곤 함 오르트의 무리는 다른 갤러곤 무리와 경쟁하고 있다.

그리고 상대 무리보다 열세라고 한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갤러곤 무리의 우두머리는 무조건 블랙 갤러곤이 맡으니까. 유일하게 다른 갤러곤이 우두머리가 되는 사례라면 레이드 보스로 레드 갤러곤이 나타나는 이벤트뿐이다.

‘화이트 갤러곤이면 에이펙스 중 중하위권.’

아이스 호러보다는 훨씬 강해도 블랙 갤러곤보다는 약하다. 그 정도 약한 힘으로는 용의 둥지를 노리는 다른 괴물들로부터 동족을 지킬 수 없다.

‘그렇다면 더 이상한데.’

화이트 갤러곤이 이끄는 무리니까 당연히 블랙 갤러곤 무리보다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아드하이가 있다고 달라질까?

‘아드하이에게 뭔가 특별한 점이 있나?’

녀석을 계속 봐 왔지만, 머리가 비상하다는 점 말고는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나와 떨어져 있던 사이, 블루 갤러곤에서 그린 갤러곤으로 성장했다는 사실 정도가 특이한 점이라고 할까. 갤러곤의 성장 과정을 모르기 때문에 그게 특별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어떻게 할까.’

거절하면 십중팔구 힘으로 뺏겠다는 말이 나올 거다. 갤러곤이란 본래 그런 생물이니까. 지금처럼 갤러곤이 ‘신사적’으로 대화를 청하는 경우는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아드하이를 넘겨 주는 것도 걸린다.

약자를 멸시하는 갤러곤들이 왜 갑자기 아드하이를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몸에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쫓겨난 녀석을 말이다.

‘더군다나 무리 간의 전쟁에 써먹는다면 더더욱 위험해.’

아드하이는 지금까지 함께한 소중한 존재다. 저놈들이 정확히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는 이상, 아드하이를 넘겨줄 수는 없다.

그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타이밍 좋게 놈이 사념파를 흘렸다.

「함 오르트」「말한다」「유성의 딸」「귀중함」「생명」「지킨다」

[즈즈즈즈(지킨다고?)]

「그렇다」「나의 자식」「나」「자식」「지킨다」

‘뭐?’

놈의 사념파 중 그냥 듣고 넘길 수 없는 정보가 있었다. 나는 품에 안겨 있는 아드하이를 쳐다봤다.

[즈 즈즈 즈즈즈즈(저 말이 사실이야?)]

아드하이는 머뭇거리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동족」「부모」「맞음」

「위대한 오드 그라드」「무리 우두머리」「유성의 딸」「추방했다」「나」「막지 못했다」

함 오르트가 짧게 말했다. 그것 말고도 뭔가 깊은 사정이 더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놈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놈은 여기까지 했으니 아드하이를 넘기길 바라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드하이가 보여주는 반응은 도저히 어머니를 만났을 때의 반응이 아니었으니까.

녀석의 몸이 간헐적으로 떨리는 것은 단순히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필시 녀석이 추방당할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즈즈 즈즈 즈즈즈즈 즈즈 즈즈즈즈(한 번 버린 자식인데 두 번 못 버리겠나?)]

「함 오르트」「맹세한다」「유성의 딸」「생명」「보호한다」

[즈즈 즈즈즈 즈즈즈(만약 싫다고 한다면?)]

「나」「기이한 동족」「살린 것」「이유 있다」「너」「유성의 딸」「보호자」「함 오르트」「감사한다」「하지만」

녀석은 긴 목을 굽혀서 내 주둥이 끄트머리까지 머리를 바짝 붙였다. 종이 한 장 정도의 거리를 남겨둔 채 놈이 말했다.

「함 오르트」「싸움」「피하지 않는다」「원하는 것」「쟁취한다」

자수정처럼 아름다운 빛을 내뿜던 눈이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우리 뒤에 있는 그린 갤러곤들도 시끄럽게 으르렁거렸다.

놈의 반응을 보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드하이를 넘기는 길밖에 없는 것 같다.

예전 같았으면 망설임 없이 바로 그렇게 행동했을 거다. 오히려 아드하이를 거래로 써먹고 갤러곤들에게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했겠지.

‘하지만.’

알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머릿속에는 녀석을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겨우 감정 따위가 생존 본능보다도 위에 있을 리 없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미쳤네.’

사냥의 표상 부작용인지, 아니면 에너지가 부족해서 뇌가 기능을 정지한 것인지.

이유는 불명이지만, 한 가지 명확한 것은 내가 미쳤다는 거다.

얼마 남지도 않은 에너지를 신의 회초리 쪽에 돌리려고 하고 있으니까.

협상이 결렬되고 서로 달려들기 직전, 갑자기 아드하이가 내 품에서 빠져나왔다. 녀석은 부러진 앞다리로 간신히 함 오르트의 앞에 섰다.

「나」「큰어른」「계약 완료」「나」「어머니」「동족」「돌아감」

[즈으으으(아드하이?)]

덜덜 떨면서도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는 아드하이.

함 오르트는 녀석을 잠시 내려다 보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유성의 딸」「판단」「현명하다」

놈은 앞발로 아드하이를 붙잡았다. 억세게 쥐는 것이 아니라 보물을 만지듯 조심스러운 발놀림이었다. 그렇게 아드하이를 손에 올린 놈은 녀석을 등에 태우고 날개를 활짝 펼쳤다.

가지가 뒤얽힌 숲속에 새하얀 빛이 가득 찼다. 태양처럼 빛나는 날개를 펼친 함 오르트는 아드하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이어서 그린 갤러곤도 함 오르트가 뚫어놓은 자리로 빠져나갔다.

놈들이 떠난 자리에 눈이 한 송이, 한 송이 떨어졌다.

‘…….’

아드하이는 끝까지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함 오르트가 떠나기 직전.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만큼이나 미약한 사념파가 나의 촉수를 간질였다.

‘안녕이라고?’

녀석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다른 말도 아닌 작별 인사였다.

갤러곤의 둥지에 데려다주겠다는 계약이 완료됐으니 동족들에게 돌아가겠다고.

‘…똑똑한 줄 알았는데 바보 같긴.’

내가 그런 말에 ‘아, 그렇습니까?’ 하고 넘어갈 줄 알았으면 큰 착각이다.

녀석은 갤러곤을 따라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행동했던 거다. 안 그랬다면 나는 물론이고 숲에 숨어 있는 다른 애들도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까.

나는 왔던 길을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직 남아 있는 그린 갤러곤의 시체와 스크리머의 잔해들을 들고 임시 거처로 돌아갔다.

「큰애기야! 큰일 났어!」

「어떻게 된 거야? 아드하이가 갑자기 뛰어나가고 그린 갤러곤들이…응?」

둥지에 돌아가니 26호와 하늘의 어머니가 나를 반겨 줬다. PS-111은 에너지가 다 떨어져서 그런지 휴면 상태에 있었다.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지금은 이것부터 먹어)]

「큰애기야, 작은애기는 어디 갔어?」

「…설마?」

[즈으으으 즈즈 즈즈 즈즈(아드하이는 잠깐 멀리 갔어)]

「멀리?」

[즈즈즈즈 즈즈즈(가족들이 왔거든)]

「…….」

「그럼 우리랑은 더 이상 같이 안 다녀?」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아니. 절대로 그럴 일은 없어)]

아드하이가 원해서 간 것이라면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리고 다른 갤러곤도 아니고 녀석를 낳은 어미가 직접 와서 데려간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하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다.

녀석이 계약 종료 후에도 같이 다니고 싶다고 말한 것을.

갤러곤들이 아드하이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는 관계없다. 녀석이 우리와 함께하고 싶다고 한다면 그걸 들어 주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복이 우선이야.’

나는 전투용 팔로 그린 갤러곤의 배를 갈랐다. 그리고 반쯤 식은 내장들을 뜯어내서 하늘의 어머니에게 던졌다.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 즈즈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부리가 부러졌으니 먹기 힘들겠지. 이건 좀 나을 거야)]

「…그래.」

하늘의 어머니는 나를 잠깐 쳐다보다가 말없이 내장을 뜯기 시작했다. 옆에서 눈치를 보던 26호도 조심스럽게 갤러곤의 날개를 뜯어냈다.

‘…그래도 놈과 대화를 나눈 덕분에 중요한 정보를 얻었어.’

갤러곤 무리의 우두머리는 막대한 권한을 갖는다. 보통 무리에서 가장 나이 든 갤러곤이 우두머리를 맡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무리 내에 어리지만 강력한 갤러곤이 등장한다면, 우두머리의 자리를 노리고 도전할 수 있다. 즉 무리의 우두머리는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다.

‘도전자가 이겼을 때 말이지.’

그리고 함 오르트는 나를 ‘기이한 동족’이라 불렀다.

놈들이 나를 갤러곤과 비슷한 무언가로 인식한다면 답은 하나다.

놈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

‘이번에는 철저히 준비한다.’

오늘처럼 무력하게 당하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그때 아드하이를 구하러 간다.

나는 갤러곤의 앞다리를 잘근잘근 씹으며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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