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92
「뭔가 달라진 것 같아.」
아침에 일어난 26호가 내게 한 말이다.
늘 그랬듯 26호는 바로 내 변화를 인지했다. 나를 지켜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겠지.
엄밀히 따지자면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관계에 가깝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는다. 현실에서든 게임에서든 26호처럼 대가 없는 사랑을 주는 존재를 만난 적이 드물었기에.
나는 나무 밑동에서 자란 식물들을 뜯어 주며 간단히 설명했다.
[즈즈즈즈 즈즈 즈즈즈즈(나쁜놈을 먹고 더 커졌어)]
「쑥쑥 자라는 큰애기 기특해!」
[즈즈즈 즈즈 즈즈(고마워. 이거 먹어)]
「응!」
녀석은 촉수를 꺼내서 버섯 비슷하게 생긴 식물들을 한 번에 쓸어 담았다.
「빨리빨리 커서 작은애기도 데리고 오자.」
[즈(그래)]
기특하게 구는 녀석을 쓰다듬자 분홍색 몸이 밝게 빛났다.
그때 PS-111이 영양 보급을 위해 휴면 상태에서 깨어났다. 나는 이빨요정을 생성내서 하늘의 어머니와 PS-111에게 줬다.
「어, 음, 나는 됐어.」
“감사합니다.”
하늘의 어머니는 이빨요정을 보고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대신 옆에 있던 PS-111이 그녀의 것까지 모두 받아 갔다.
“새로운 변신 상태입니까?”
26호의 사이킥 파워가 깃들어서 그런 것일까. PS-111도 내 촉수의 모습에 호기심을 보였다.
[즈즈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아니. 이건 영구적인 변화야)]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에너지의 파장이 빛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녀석은 이빨 요정들을 한입에 꿀꺽 삼킨 뒤,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샘플을 주신다면….”
[즈즈(안 돼)]
‘심연의 색채’가 어떤 능력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런 걸 녀석한테 줄 수는 없다. 녀석한테도 어떤 부작용이 닥칠지 모를 뿐더러 우리에게도 좋지 않다.
‘잘못돼서 통제 불가가 되면 골치 아파.’
내가 단칼에 거절하자 녀석은 시무룩한 태도로 이빨요정을 오도독 씹었다.
간단한 아침식사가 끝나고 나는 애들에게 오늘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새로 얻은 강적의 증표를 실험해야 하니 단독행동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이다.
「나도 큰애기랑 갈래.」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미안하지만 이번에는 안 돼)]
이 특성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아직 모른다. 통제 불가 특성들은 직접 써 보기 전에는 지뢰인지 아닌지 알기 어렵다.
괜히 같이 갔다가 녀석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다.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대신 중간애기를 도와줘)]
「중간애기가 왜?」
[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내가 없는 동안 둥지와 먹이를 구할 거야)]
어제 나는 하늘의 어머니에게 아침에 뭘 할지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내가 실험을 하는 동안, 둥지로 삼을 만한 장소를 찾겠다고 했다. 자기가 제일 시각이 뛰어나니 터를 찾는데 제격이라고.
‘맞는 말이야.’
그녀는 게임 속에서 나와 싸운 경험이 제법 되는 편이다. 그렇기에 에이모프가 어떤 장소에 둥지를 트는지 잘 알고 있다. 그녀라면 우리가 은신처로 삼을 만한 장소를 찾아낼 수 있겠지.
또한 주변에 갤러곤이 돌아다닌다고 해도 26호와 PS-111이 있다면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을 거다. 둘은 갤러곤의 사이킥 파워를 감지할 수 있으니까.
[즈즈즈(조심해)]
「걱정 마. 최대한 조심할테니.」
[즈즈즈즈(부탁할게)]
「그, 너도 조심해.」
머뭇거리던 그녀는 한마디를 덧붙이고 시선을 돌려 버렸다. 어제의 기억이 남은 건지 아직 나를 대하는 태도가 어색해 보였다.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면 더 껄끄러워하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각자 맡은 일을 위해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위로 갈수록 높게 퍼지는 형태의 나무들 사이를 달렸다. 가지들이 수없이 많이 뻗어있는 데다가 다른 나무들과 얽혀 있기까지 하다 보니 안쪽에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나뭇가지들 사이로 공기가 통과하면서 나는 짐승의 으르렁거림 비슷한 소리만 가득할 뿐
가뜩이나 어두운데다가 밖에서는 눈보라가 쉬지 않고 휘몰아치다 보니 분위기가 상당히 을씨년스러웠다.
나는 으슥하기 짝이 없는 숲에서 한참 달렸다.
단순히 애들과 거리를 벌리기 위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 나는 어떤 ‘생물’의 흔적을 찾고 있는 중이다.
‘분명 이곳에 놈도 있을 거야.’
게임에서 갤러곤의 둥지는 공략하기 까다로운 사냥터로 분류된다. 내가 있는 이곳처럼 기온이 극단적으로 낮은 행성이거나 반대로 용암이 들끓는 화산 행성에서만 있으니 진입부터가 까다롭다.
어떻게 잘 준비해서 들어왔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용의 둥지 주변은 마경이니까.’
갤러곤의 둥지 근처에는 갤러곤급, 혹은 갤러곤 이상의 강력한 생물들이 대거 서식한다. 이 생물들은 갤러곤의 먹이가 되거나, 갤러곤의 개체 수를 조절하는 기능을 맡는다.
간단히 말해 갤러곤의 둥지가 있는 행성 자체가 에이펙스급 생물이 득실거린다고 보면 된다.
‘아이스 호러, 윈터워커까지 있는 걸 보면 이곳에 다른 생물들도 있어.’
용의 둥지가 위치한 얼음 행성에 어떤 괴물이 사는지는 이미 꿰뚫고 있다. 예전에 게임에서도 여러 번 공략했으니까.
4개의 다리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안 턱 아래의 보조기관도 열심히 흔적을 찾았다. 그러던 중 멀리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나는 몸을 바짝 낮추고 속도를 줄였다.
‘영리한 약자’ 상태를 해제하지 않았기에 내 몸은 꼬리까지 합쳐서 5m를 못 넘길 정도로 작다. 좀 커다란 바위나 굵은 나무가 있다면 몸을 숨길 수 있다.
지형지물을 엄폐물 삼아 움직임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잠시 후, 나무 사이로 놈의 모습이 보였다.
키 4m에 깡마른 체형에 기형적으로 긴 팔과 다리, 하얀색 몸과 다르게 새까만 얼굴. 설원의 사냥꾼 윈터워커였다.
다만 사냥꾼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놈의 행동은 매우 허술해 보였다. 하얀색 눈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고, 내가 근처에 있음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윈터워커는 이 행성 먹이사슬의 하위권에 위치한 생물. 그렇기에 주변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놈이 저렇게 이상하게 행동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냄새.’
비 오는 날, 옆집에서 부침개를 부치는 것처럼 공중에 맛있는 냄새가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놈은 그 맛 좋은 냄새의 근원지를 향해 걷는 중이었다.
‘잘됐어.’
나는 거리를 유지한 채 놈의 뒤를 밟았다. 눈은 앞에 고정한 채 흐느적거리며 걷는 놈의 모습은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최면이 맞을지도.’
그렇게 놈을 따라 걷다 보니 주변 풍경이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빼곡하게 박혀 있는 나무들의 색이었다. 검정에 가까운 갈색이던 나무에 붉은색 이끼들이 붙어 있었다. 마치 핏줄이 불거진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바닥에 깔린 눈도 시럽을 뿌린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실제 시럽인 것처럼 달콤한 냄새까지 풍겼다.
‘찾았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는 저 붉은 이끼가 내가 찾던 흔적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냄새를 맡은 윈터워커가 나무에 붙은 이끼를 게걸스럽게 핥았다. 혀가 이끼에 닿을 때마다 놈은 마약 흡입으로 오르가즘을 느끼는 중독자마냥 몸을 파르르 떨었다.
저 붉은 이끼는 아주 강력한 힘을 지닌 에이펙스급 괴물이 생성한 독성 물질이다. 다만 중독된 자에게 고통을 준다거나 환각을 보여 준다거나 하는 그런 류의 독은 아니다.
‘그보다는 마약에 가깝지.’
파리지옥이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벌레들을 유혹하듯 저 붉은 이끼는 향기로운 먹이 냄새로 주변 생물들을 유인한다.
독, 바이러스에 면역 효과를 제공하는 ‘완전면역체’ 특성을 지닌 나에게도 저 냄새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매혹적이다. 독에 대한 면역력이 거의 없는 윈터워커라면 절대로 못 버틸 터.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걸.’
예상대로 나무에 고개를 처박았던 놈은 한층 갈증이 심해진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 붉은 이끼는 엄청나게 강력한 마약 효과를 지니고 있다. 저 물질을 조금이라도 섭취하면 순식간에 이 숲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지금까지 무기력했던 것이 거짓말인 듯 놈은 빠른 속도로 붉은 이끼가 가득한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간신히 놈의 뒤를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만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갔다.
너무 깊이 들어갈 수는 없다. 자칫 잘못해서 못 나오게 되면 끝장이니까.
전신의 신경을 곤두세워서 천천히 따라가다 보니 주변에 다른 생물들이 하나둘씩 보였다.
윈터워커, 케이브고일 같은 약한 생물부터 시작해 그린 갤러곤과 같은 강한 생물까지.
종류는 다르지만 모습은 동일했다. 머리만 빼고 몸은 붉은색 나방 고치 같은 형태로 땅에 박혀 있다는 것.
땅과 연결된 줄기는 계속해서 맥동하며 무언가를 생물들에게 주입하고 있었다. 줄기가 움찔거릴 때마다 붙잡혀 있는 생물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침을 질질 흘렸다.
이곳은 먹이 저장소다. 붉은 줄기에 붙잡혀 있는 저들은 모두 붉은 숲의 주인이 엄선한 먹이들이다.
‘글래셔 핀드.’
놈은 사슴벌레를 닮은 상체에 수많은 줄기가 달린 식물 형태의 하체를 지닌 괴물이다. 자리를 잡기 전에는 등에 달린 날개를 이용해 먹이가 풍부한 곳을 찾아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면 땅속에 뿌리를 내려서 먹이를 유인할 붉은 물질을 생성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얼어붙은 대지 아래에도 놈의 뿌리가 잔뜩 깔려 있을 거다.
즉, 이 광범위한 붉은 숲 전체가 놈의 영토다.
땅에 몸을 심는데 성공한 글래셔 핀드는 매우 강력한 적이다. 놈은 붉은 물질로 다른 생물을 조종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마약성 물질로 행동을 유도하는 거지만.’
저 고치에 틀어박힌 생물들도 마약을 누가 주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글래셔 핀드가 목표를 지정하면 죽을 각오로 복종한다.
여기서 글래셔 핀드가 나를 죽이고자 한다면 저 고치에 있는 괴물들 모두가 나에게 덤벼들 거다.
‘이쯤이면 되겠지.’
나는 윈터워커 추적을 멈추고 최대한 붉은 줄기가 덜 자란 곳으로 이동했다. 먹이 저장소의 주인은 아주 굼뜨지만 놈이 부리는 노예들은 그렇지 않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먹이 저장소의 주인이 아주 싫어할 일이다. 여차하면 쉽게 도망칠 수 있도록 도주로를 확보해놔야 한다.
‘사이킥 브레스를 실험할 생각이니까.’
사격 목표는 줄기에 매달려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는 저 먹이들이다.
나는 쉽게 도망칠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심연의 색채를 활성화했다. 그러자 내 몸을 덮고 있던 털들이 정전기라도 일어난 듯 빳빳이 섰다.
‘이거 왜 이래?’
당황해서 전투용 팔을 들어 보니 털 안쪽 갑각에 기이한 색채가 깃든 것이 보였다.
그것은 보라색 같기도, 녹색 같기도 했다. 온갖 종류의 색깔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팔 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서 수상한 빛들이 들끓었다.
‘내 몸의 일부 같지는 않아. 에너지 감지도 안 되고.’
인면수와 달리 몸에 흐르는 색채는 명백히 이질적이었다. 무언가 다른 존재의 거죽을 뒤집어쓴 것 같은 느낌이랄까.
오래 유지하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나는 목과 턱 관절 부위를 덮고 있는 괴물의 촉수에 감각을 집중했다.
그러자 흐느적거리던 색채들이 빠르게 촉수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보라색과 녹색으로 물들어 있던 촉수의 색깔이 훨씬 선명해졌다.
축 늘어져 있던 촉수들이 물리법칙을 무시한 채 공중에 떠오른다. 촉수를 덮고 있던 색깔들이 물에 물감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허공에 퍼진다.
사이킥 브레스를 쓸 때 만들어진 구체가 보라색 태양과 같다면, 지금 나의 앞에 있는 이 구체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것은 섬뜩한 빛, 색들의 향연을 간신히 봉인한 구체였다.
나는 끊임없이 들끓고 있는 혼돈의 구체를 붉은 고치 위에 내던졌다. 구체 형태로 발사되는 그 모습은 이전까지 보랏빛 열선 형태로 나가던 사이킥 브레스와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그 구체가 목표물에 닿는 순간,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구체 속에 있던 수많은 빛들이 쏟아지며 붉은 고치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한 것이다. 빛과 색채에 직격당한 고치들은 원 형태를 상실하고 내가 쏜 구체와 똑같은 형태로 변화했다.
새로 탄생한 혼돈의 구체는 옆에 있는 또 다른 먹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똑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통제할 수 없는 연쇄 공격. 그것이 심연의 색채가 깃든 사이킥 브레스의 효과였다.
「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사이킥 브레스가 퍼지면서 붉은 고치들을 죄다 집어삼키자 안쪽에서 포효가 들려왔다. 창고의 주인이 분노한 것이다.
포효가 끝나자마자 여러 생물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 주변에 창고가 얼마나 더 있으려나.’
나는 글래셔 핀드의 노예들을 피해 자리를 옮겼다.
놈에게는 안타까운 얘기지만,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