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94
지독한 고통에서 벗어나니 정신도 빠르게 돌아왔다. 정신이 안정화되면서 바짝 곤두선 털들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집게가 달린 꼬리를 생으로 떼어 놨기에 아픈 것은 여전했지만,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통증과는 비교 불가였다.
몸이 나아지고 나서야 심연의 색채에 대해 객관적으로 따져볼 수 있었다.
‘리스크가 치명적이긴 하지만….’
하이리스크 하이리턴답다고 할까. 내가 느낀 고통과는 별개로 얻은 것도 적지 않았다.
강화된 사이킥 브레스와 공포의 주시자. 전자는 상대의 육신이 사라질 때까지 갉아 먹으며 피해를 주고, 후자는 상대의 기억에 잠재된 가장 끔찍한 고통을 일깨운다.
하지만 적용을 받는 특성의 효과가 어떤지에 대한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내가 얼마나 능숙하게 사용하느냐에 달린 거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심연의 색채 그 자체다.
‘내 의지로 활성화 여부를 정할 수 있는 점은 큰 장점이야.’
내가 원하는 시점에 골라서 쓸 수 있다는 것. 이는 한 특성으로 두 가지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가령 사이킥 브레스로 평소처럼 적을 저격하다가,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 죽을 때까지 갉아먹는 거품을 쏘는 식으로 운영 가능하다.
공포의 주시자도 마찬가지다. 원본과 달리 심연의 색채 버전은 다수에게도 통한다. 좁은 공간에서 적들이 몰려 있는데 그 위에다 뿌리면 아주 효과적일 터.
만약 이후에 새 초능력 계열 특성을 얻었을 때, 심연의 색채가 적용된다면? 한 번에 특성 두 개를 얻는 것이나 다름없다.
‘혹시 새 능력에도 반영되려나?’
일단 텍스트박스에 따르면 현재 ‘심연의 색채’가 적용되는 특성은 셋 뿐.
인간성이나 포식자 감각처럼 전투와 관련 없는 특성은 적용되지 않았다. ‘초능력 반사 장갑’은 적용 대상이지만 활성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서 아직 실험하지 못했고.
만약 새로 얻은 초능력 특성들도 심연의 색채 적용 대상이라면? 나의 부족한 대(對) 초능력 전투 능력에 적지 않은 힘이 되리라.
‘이건 사냥하면서 알아봐야겠네.’
심연의 색채 적용 여부는 사이킥 파워 특성을 새로 얻어야 확실해질 것 같다.
마침 내가 있는 이곳은 갤러곤의 둥지가 있는 행성. 초능력 관련 특성을 얻기 쉬운 곳 중 하나다.
‘그것 됐고. 당장 여기서 벗어나야 해.’
숲의 주인은 죽었지만 아직 위험이 남아 있다.
이 주변에 크기가 제각각인 고치들이 아직 수백 개 이상 남아 있다. 저 안에는 붉을 물질의 노예들이 잠들어 있다.
마약을 제공하는 글래셔 핀드가 죽은 이상, 곧 놈들이 깨어날 것은 기정사실.
‘잠깐 가기 전에….’
나는 목이 잘린 글래셔 핀드의 시체를 내려다 봤다.
바닥에 널브러진 8m, 아니 땅속에 파묻힌 하반신 부분까지 합치면 15m에 육박하는 신선한 고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영리한 약자’ 상태라서 내 몸은 5m를 넘지 못한다. 그렇기에 시체 전부를 챙기는 것은 무리지만 상관없다. ‘정수수확자의 턱’ 덕분에 머리만 먹어도 유전자 정수를 얻을 수 있으니까.
나는 사슴벌레를 닮은 글래셔 핀드의 머리를 붙잡았다.
전투용 팔로 놈의 머리를 단단히 고정한 뒤, 힘을 줘서 바짝 당겼다. 간신히 연결된 목 부근의 살점이 뜯어지며 머리가 분리되었다.
준성체가 되면서 얻은 ‘정수수확자의 턱’ 특성 덕분에 머리만 먹어도 몸 전체를 먹은 것과 동일하게 포식 효과를 띄울 수 있다. 놈의 몸 전체를 다 챙기기에는 크기 차이가 심하게 나서 들고 가기 어렵다. 그러니 머리만이라도 잘라서 가져갈 생각이다.
‘약쟁이들한테 뺏길 수는 없지.’
글래셔 핀드는 유용한 특성을 다수 지닌 괴물이다. 방대한 영토를 발아래에 두고 먹이 사냥을 하는 타입답게 흔하게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여기서 놓치면 언제 다시 기회를 얻을 지 모르니 놈의 머리만큼은 꼭 챙겨야 한다.
놈의 머리를 챙기고 떠나려는데 주변에 있던 고치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고치가 터지고 안에 있던 생물이 뛰쳐나왔다. 다리가 길쭉한 도롱뇽처럼 생긴 괴물이 내게 달려들었다.
놈의 이름은 스노우밴시.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붉은색 혓바닥이 인상적인 소형 육식동물이다. 눈 속에 몸을 바짝 엎드리고 있다가 먹이가 오면 두꺼운 혓바닥으로 낚아채는 방식으로 공격한다.
‘놈의 무서움은 완벽한 은폐에서 나오지만….’
내 앞에 있는 놈은 마약에 찌들어 제정신이 아닌 상태. 숨어서 싸우기는커녕 무작정 내게 혓바닥을 날렸다.
나는 날아오는 혓바닥을 가슴 쪽 팔로 붙잡았다.
영리한 약자 상태가 되면 몸 크기가 줄어드는 대신 가슴 쪽 팔의 근육이 두드러지게 발달한다. 전투용 팔보다는 힘이 떨어지지만 나와 비슷한 크기의 적과 싸울 때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지금처럼 말이지.’
“끽?”
혓바닥을 쥔 팔에 힘을 줘서 놈을 힘껏 끌어당겼다. 자기가 힘에서 밀릴 줄 몰랐는지 놈이 맥없이 앞으로 쓰러진다.
나는 자세가 무너진 놈에게 바짝 접근한 뒤 입으로 놈의 목뒤를 깨물었다.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놈의 몸이 축 늘어졌다.
‘이것도 챙기고.’
1m 50cm에 이르는 놈도 글래셔 핀드의 머리와 함께 등 위에 얹었다. 그 사이 다른 고치들도 하나둘씩 터졌다.
고치에서 깨어난 괴물들 또한 글래셔 핀드의 시체를 먹기 위해 끼어들었다.
붉은 물질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기에 저러는 거다.
‘빨리 도망치자.’
놈들이 다른 데 정신이 팔린 동안 나는 재빨리 중심부에서 벗어났다. 외곽 부근에 위치한 고치들은 아까 사이킥 브레스로 전부 파괴했기에 나를 막는 자는 없었다.
딱 하나를 제외하고.
“그으으으으.”
4m의 덩치, 깡마른 체형에 기형적으로 긴 팔과 다리. 그리고 하얀 몸과 대비되는 검은색 얼굴.
윈터워커가 숲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까 그 놈이네.’
내가 뒤를 밟았던 윈터워커였다.
놈의 시선은 정확히 내 등, 글래셔 핀드의 머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보아하니 내가 도망쳐도 죽을 때까지 쫓아올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정리하고 가는 게 낫겠지.
‘차라리 잘 됐어.’
하늘의 어머니한테는 윈터워커의 심장이 필요하다.
나는 등에 진 것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내가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자 놈이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원터워커가 성큼성큼 걸으며 내게 접근한다. 지금은 놈이 나보다 두 배 정도 키가 크기 때문에 제법 위협적으로 보인다.
나는 4개의 다리를 박차며 놈에게 뛰어들었다.
때맞춰 놈이 비정상적으로 긴 팔을 휘두른다. 내 전투용 팔과 놈의 팔이 맞부딪친다.
“그으으으.”
「그르르」
윈터워커는 팔 관절이 일반 동물에 비해 훨씬 많다. 그래서 팔이 아니라 채찍처럼 보일 정도로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다.
놈의 팔이 뱀처럼 내 전투용 팔을 타고 넘어간다. 면도날처럼 예리한 놈의 손톱이 노리는 목표는 내 눈. 내 눈을 공격해서 시각을 무력화시키려는 것이리라.
설원의 사냥꾼이라면 별명답게 초반부터 교활한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하지만 놈이 이렇게 나올 것은 충분히 예상했다.
나는 뒤쪽 다리에 하중을 실은 상태로 앞쪽 다리를 위로 쳐들었다. 말이 앞발로 걷어차듯 앞쪽 다리로 놈의 하복부를 세게 찼다.
“그윽?!”
급소를 얻어맞은 놈이 주춤거리며 팔을 푼다. 앞쪽 다리를 원위치한 나는 발을 굴러 제자리에서 몸을 회전시켰다. 그리고 회전력을 실어서 꼬리를 크게 휘둘렀다.
집게는 아직 재생되지 않았지만, 통나무처럼 큰 꼬리만으로도 충분한 무기가 된다. 끝이 잘려서 뭉툭한 형태의 꼬리가 곤봉처럼 놈의 두 다리를 후려쳤다.
“그으으으.”
놈은 그대로 뛰어올랐다. 바닥을 쓸며 낮게 날아가던 꼬리가 놈의 발바닥 아래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보기보다 날렵한 놈이지만 이 또한 예상 범위다. 내 진짜 의도는 꼬리가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질 공격이었으니까.
몸을 반쯤 돌린 상태인 지금, 내 등이 놈 쪽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내 등에는 인면수들이 있다.
다섯 개의 얼굴들이 빠르게 튀어나와 입을 활짝 벌렸다. 마비를 발생시키는 음파가 목표를 향해 쏟아졌다.
“!”
공중에 떠 있다가 마비된 상태로 떨어진 윈터워커. 내 턱이 양 갈래로 벌어지고 놈의 머리를 덮었다.
놈의 검은색 얼굴에 내 이빨들이 마구 박혔다. 이어서 턱에 힘을 주자 놈의 머리가 천천히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
산 채로 머리가 으깨지는 통증에도 놈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것만이 놈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였다.
잠시 후, 호두 껍데기가 깨지는 소리가 나며 달달한 액체가 입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초코푸딩을 떠올릴 정도로 진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느껴졌다.
‘쩝, 더 먹고 싶지만.’
이제는 입이 나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기에 간신히 참았다. 하늘의 어머니에게 필요한 것은 심장뿐이지만, 그렇다고 심장만 가져다 주는 것도 이상하니까.
그렇게 먹이를 주섬주섬 챙겨서 붉은 숲을 빠져나왔다. 외곽 끄트머리에 다다르자 붉은 이끼들이 벌써 시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주인을 잃은 숲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금도 안쪽에서 싸우고 있는 짐승들까지 떠난다면 이곳도 예전처럼 조용해지겠지.
나는 보조기관에 집중해서 왔던 길을 따라갔다. 아침까지 머무른 곳에 가면 녀석들이 이동한 흔적들이 남아 있을 거다.
붉은 숲을 빠져나와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어두운 숲속을 달렸다. 가지들 때문에 햇빛도 거의 들지 않았고 나무들도 비슷하게 생겨서 길을 잃기 딱 좋았지만,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에이모프 고유의 초감각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주고 있으니.
도중에 스노우밴시를 비롯한 야생 생물들의 기척이 몇 번 느껴지긴 했지만, 다들 나를 피했다. 내 몸에서 나는 윈터워커의 피 냄새 때문인지 내게 접근하는 생물은 없었다.
계속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어제 파둔 구덩이에 도착했다. 근처에서 멈춘 나는 몸을 굽혀서 보조기관을 바닥에 가까이했다.
애들이 남긴 희미한 체취가 감지되었다. 그 흔적은 한 방향을 따라 드문드문 이어져 있었다.
나는 미약한 흔적을 따라갔다. 도중에는 의도적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이 있었다. 작은 돌탑이라든가, 나무에 있는 발톱 자국 등. 혹여 내가 따라오지 못할까 봐 일부러 만든 것이리라.
바닥에 보조기관을 대고 한참을 기어간 끝에 나는 어떤 굴 앞에 도착했다.
‘흠.’
입구 자체도 좁은데 주변에 나무가 우거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나도 보조기관이 없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잘 숨겨진 곳이었다.
‘괜찮아 보이네.’
들고 있는 짐이 많다 보니 이대로는 못 들어갈 것 같다. 나는 안쪽에 짐들을 하나씩 던지고 굴 안에 진입했다.
굴 안쪽에서는 원래 다른 동물이 쓰던 곳이었는지 흙냄새 대신 텁텁하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입구 주변을 살펴보는데 안쪽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독수리의 머리에 황금색 털로 덮인 사자의 몸을 지닌 그리폰, 하늘의 어머니였다. 그녀가 호박색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맞이했다.
「하루 종일 걸릴 줄 알았더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필요한 정보는 충분히 얻었어)]
나는 그녀에게 윈터워커의 몸통을 넘겼다.
「이게 뭐야? 윈터워커?」
[즈 즈즈즈 즈즈즈즈즈(응. 심장이 필요하잖아)]
「어? 아, 응. 고마워.」
[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이런 좋은 곳을 용케도 구했네)]
「뭐 내가 한 일은 딱히 없지만….」
[즈즈(응?)]
「들어가서 보면 알아.」
나는 그녀와 짐을 나눠 들고 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을 보니 내부가 꽤 넓었다. 호리병 형태라고 해야 할까? 입구와 굴 초입의 통로 부분이 길게 나 있는 대신 안쪽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형태인 것으로 보였다.
「큰애기야!」
그때 26호의 파장이 내게 날아왔다. 안쪽 공동에서 기다리던 26호가 분홍색 빛을 반짝이며 내게 다가왔다. 작아진 녀석이 폴짝 뛰어올라 내 머리 위에 올라탔다.
[즈즈즈즈(잘 있었어?)]
「응. 집 찾아다니는 거 재밌었어.」
나를 반겨 주는 녀석을 보니 나도 모르게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녀석을 쓰다듬고 있는데, 어두컴컴한 굴 내부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응?’
공동 구석에 정체불명의 생물이 누워 있는 것이 감지되었다. 오래된 굴이라 퀴퀴한 냄새가 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냄새의 출처는 저 생물이었다.
심장 박동이나 근육의 움직임 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시체가 틀림없었다. 덩치 큰 생물의 시체 옆에는 PS-111이 누워 있었다.
“서브 컨트롤러 에이모프. 오셨습니까.”
“옆에 있는 것은?”
「샤크베어야. 주인 없는 동굴인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하늘의 어머니가 말한 걸 듣고 나는 살짝 놀랐다. 샤크베어는 에이펙스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당히 강력한 괴물이다.
놈은 상어의 머리에 곰의 몸이 뒤섞인 괴물로 뛰어난 육탄전 실력을 지니고 있다. 사이킥 파워에 대한 내성이 없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아, 설마?’
그러고 보니 샤크베어의 시체가 뭔가 이상했다. 내가 알기로 놈의 덩치는 꽤 크다. 두 발로 일어서면 윈터워커랑 비슷할 정도로.
그런데 보조기관에 감지되는 놈의 신체는 그 정도로 크지 않았다. 마치 압착기에 넣어 짓누른 것처럼 말이다.
「동굴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들어오더라고. 그때 26호가 놈을 잡았지.」
「애기랑 같이 사는 집인데 들어온 나쁜 애 혼내줬어. 잘했지?」
상어의 머리를 지닌 곰을 큐브 스테이크로 만든 장본인.
씨 데몬 26호가 내 머리에서 해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