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98
「왔어?」
내가 크리스털윙을 감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의 어머니가 깨어났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예민한 감으로 알아차린 듯했다.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져)]
「그래도 생각보다는 빨리 왔네.」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PS-111 깨우고 대기해 줘)]
「알았어.」
내 아래에서 작게 속삭이던 그녀는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26호에게 파장을 보냈다.
[즈즈즈즈 즈즈 즈즈(날아다니는 애가 왔어)]
「응.」
공기놀이를 하던 26호는 몸에서 촉수들을 뽑아내더니 크게 흔들기 시작했다. 먼 거리에서도 잘 보이도록 유인하려는 거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 보조기관이 공간 중에 흐르는 전파를 잡아냈다. 레이더와 비슷한 원리로 먹이 사냥을 하는 놈인 만큼 전파가 느껴진다는 것은 놈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시선은 하늘에 고정한 채 기다리고 있으니 검은 구름 사이로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빛 뭉치 두 개가 희끗희끗 보이는 게, 마치 UFO가 날아다니는 모습처럼 보였다.
‘저기 있구나.’
크리스털윙이 가까이 있다. 놈들은 둥지에 내려오지 않고 주변에 맴돌고 있었다.
‘경계하는구나.’
상위 포식자 에이펙스치고는 꽤나 신중해 보이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모습이다. 무려 갤러곤과 먹이 경쟁을 하는 놈들이니까. 그 정도 조심성이 없다면 이 험난한 자연에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했을 터.
놈들이 내려오지 않자 26호가 더 열심히 촉수를 흔들어댔다. 녀석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인지 구름 사이에 있는 빛 뭉치들이 천천히 봉우리 위로 가까워졌다.
흩날리는 눈보라 사이로 놈들의 모습이 보인다.
몸이 금속 물질로 덮인 거대한 익룡. 크리스털윙의 외형은 몸집이 큰 걸로 유명한 익룡 ‘케찰코아틀루스’를 닮았다. 길쭉한 주둥이, 익룡치고 긴 목, 비행기를 연상시키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날개 등등.
‘몸집은 훨씬 크지만.’
놈들의 익장(翼長)은 최소 30m 이상. 날개만 보면 경쟁자인 화이트 갤러곤의 날개보다 크다.
날개 이외 주목할 만한 특징이라면 바로 번쩍거리는 외피다. 날개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는 굳으면 보석과 같은 형태로 변하는 체액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체액을 몸에 발라온 덕에 놈들의 몸은 구석까지 빠짐없이 보석처럼 빛났다.
검은 구름과 눈들이 반사하는 금속 재질의 외피는 마치 거대한 거울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쿠아아악.”
“쿠억.”
크리스털윙 두 마리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둥지 쪽에 접근했다. 놈들의 시선은 둥지 주변에서 알짱거리고 있는 26호에 고정되어 있었다.
‘잘 됐어.’
26호에 집중하느라 나무들 근처에 숨어 있는 우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놈들을 주시했다.
두 마리의 크리스털윙 중 한 마리의 머리에는 독특한 모양의 볏이 달렸다. 또한 날개 크기도 다른 한 마리에 비해 1.5배 정도 거대했다.
‘저놈이 수컷이야.’
크리스털윙은 수컷이 가족을 부양하는 습성을 지녔다. 그래서 수컷의 전투력이 훨씬 강하다.
‘암컷은 하늘의 어머니가 마크하기로 했으니.’
암컷은 PS-111과 하늘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수컷은 나와 26호가 힘을 합쳐서 공략해야겠다.
「여기야! 이리 와!」
크리스털윙이 가까워지자 26호도 움직일 준비를 했다. 몸통 아래로 다리 역할을 하는 분홍색 지느러미가 솟아났다. 녀석은 지느러미를 활용해 둥지에서 빠르게 멀어졌다.
“쿠아아악!”
“쿠어어억!”
그 모습이 크리스털윙들의 사냥 본능을 자극했는지, 놈들이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덩치만큼이나 목청도 커서 건너편 쌍둥이 봉우리까지 울음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한차례 크게 포효한 놈들이 26호를 붙잡기 위해 둥지 위로 내리꽂혔다. 수십m에 달하는 날개 4장이 펄럭이며 만들어 낸 풍압이 봉우리 위를 쓸었다. 거센 바람으로 인해 둥지 주변에 쌓인 눈이 일제히 공중으로 휘날렸다.
「퍼덕퍼덕 화났다!」
쌓인 눈과 함께 날아갈 뻔한 26호였지만, 촉수로 땅을 붙잡은 덕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사히 땅에 착지한 녀석이 지느러미를 바삐 놀리며 우리가 있는 쪽으로 뛰어왔다.
그 뒤를 바짝 쫓는 크리스털윙. 앞에 있던 수컷이 입을 크게 벌린다. 크리스털윙이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를 사용하려는 것이 틀림없다.
[즈즈(지금)]
「좋아!」
나는 눈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검갈색 털로 덮여 있는 생물이 눈에서 튀어나오자 크리스털윙들의 눈이 커진다.
그리고 내 아래 구덩이에서 하늘의 어머니를 태운 PS-111이 구덩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반쯤 엎드린 자세로 PS-111에 올라탄 하늘의 어머니의 눈에서 푸른색의 귀화가 피어올랐다. 웬디고의 고유 능력 중 하나, ‘얼음의 악령’을 사용했을 때 발생하는 효과였다.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에 푸른색 불길이 뿜어져 나와 놈들을 향해 날아갔다. 사이킥 파워를 감지한 수컷이 재빨리 날개를 펼쳐 몸을 급히 위로 띄웠다.
하지만 그녀가 노린 건 애초부터 수컷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는 수컷 뒤에 있던 존재. 뒤에서 따라오던 암컷이 날아오는 공격을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었다.
“쿠억?!”
푸른색 불길에 닿은 암컷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공중에서 우뚝 멈췄다. 놈은 꼼짝 못 하고 그대로 지상에 추락했다.
“쿠아아아악!”
[즈즈즈 즈즈(네 상대는 나다)]
나는 암컷을 도우려는 수컷에게 뛰어들었다. ‘영리한 약자’ 모드인 나는 놈에 비해 한참 작았지만 힘까지 달리는 건 아니다.
“쿠악!”
놈과 부딪치며 내 머리에 달린 뿔이 놈의 날개를 꿰뚫었다. 그 상태로 머리를 흔들어 날개를 완전히 찢어놓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놈의 입으로부터 청록색의 광선이 발사되어 내 몸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고통 경감 발동!」
‘윽!’
생물적 특성 덕분에 본능적으로 전자기력을 다룰 수 있는 크리스털윙은 그 힘을 이용해 강력한 입자광선을 내뿜을 수 있다. 어느 정도냐면 플라즈마 무기의 파괴력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다.
‘더는 못 버텨!’
현재 내 몸이 작아지면서 방어력이 떨어진 상태라 오래 맞으면 위험하다. 그때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26호가 나를 지원해 왔다.
「우리 큰애기 못살게 굴지 마!」
“컵!”
자그마한 26호의 몸에서 수백 가닥의 보라색 실들이 튀어나와 크리스털윙을 휘감았다. 씨 데몬이 건 속박에 맞은 크리스털윙이 기이한 방향으로 꺾였다.
입자광선이 멈춘 사이, 나는 크리스털윙으로부터 떨어졌다.
[즈즈즈(따라와)]
「나쁜 애 혼내줬는데?」
[즈즈 즈즈즈즈(아직 안 죽었어)]
“쿠아아아악!”
땅에 가볍게 착지한 나는 26호를 들고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의 동시에 목이 부러진 놈이 울부짖었다. 찰나의 시간 안에 부러진 목뼈와 찢어진 날개를 회복한 놈이 우리를 바짝 쫓아왔다.
‘크리스털윙의 회복 속도는 굉장하지.’
놈에게는 아이스 호러처럼 단단한 갑각도, 글래셔 핀드처럼 다양한 부하들도, 갤러곤처럼 강력한 사이킥 파워 능력도 없다. 그 대신 생존에 필요한 무기들은 다 가지고 있다.
적을 사냥하는데 쓰는 입자광선, 크고 작은 상처를 빠르게 회복시키는 초재생 능력과 뛰어난 탐지 능력. 그리고 장기간 쉬지 않고 비행할 수 있는 능력까지.
이러한 요소들 덕분에 크리스털윙도 에이펙스로 분류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질 생각은 없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놈이 입자광선으로 나무들을 박살 내는 게 보인다. 나무가 우거진 탓에 큰 날개를 지닌 놈도 속도가 느려진 것이다.
놈과 적당히 거리를 벌린 나는 26호를 내려놓았다.
땅에 내려온 녀석이 즉시 몸을 원래대로 부풀렸다. 녀석의 아래에서는 수많은 지느러미가 튀어나왔고, 몸 위에서는 날카로운 톱날이 빼곡히 박힌 촉수 수백 개들이 자라났다.
전투 모드에 들어간 녀석의 몸에 수많은 눈들이 생겨난다. 그 눈들이 일제히 나를 향한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수많은 전투를 함께 헤쳐 나온 사이. 파장으로 대화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다.
나를 본 눈들이 반달 모양으로 휜다. 내 의도를 읽은 녀석이 크리스털윙을 향해 뛰어갔다.
“쿠아아악!”
「나쁜 애! 혼나!」
나한테는 웃음을 보였던 수백 개의 눈들이 무섭게 치켜뜬다. 씨 데몬의 고유 기술 ‘심해의 공포’가 놈 앞에서 펼쳐진다.
“쿠, 쿠아아….”
입자광선으로 숲을 초토화시키던 놈이 공격을 멈췄다. 26호를 노려보던 놈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크리스털윙 수컷은 암컷에 비해 초능력 내성이 강하지만, 씨 데몬의 힘을 완전히 이겨낼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 법.
26호를 보며 덜덜 떨던 놈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놈의 뒤쪽 편에서는 하늘의 어머니와 PS-111이 암컷과 싸우는 중이었다.
“쿠, 쿠악! 쿠아아악!”
사랑하는 이를 지키겠다는 마음이었을까. 놈은 한 차례 크게 포효하고 다시 입자광선을 쏠 준비를 했다.
「못해!」
“쿠악!”
놈이 입자광선을 쏘기 전, 26호가 나무 파편들을 모아 데몬 크래시를 날렸다. 나무 뭉치에 얻어맞은 놈이 짜증스럽다는 듯 머리를 털었다.
그 사이 26호의 몸에 있는 톱날 촉수가 크리스털윙을 휘감으려고 날아들었지만, 놈은 이미 정신을 차린 상태. 입자광선이 촉수와 주변의 나무들을 불태웠다.
26호는 촉수의 잃은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즉각 속박으로 반격했다. 크리스털윙의 날개 끝이 종이 구겨지듯 으스러졌지만, 놈 또한 만만치 않았다. 놈은 날개를 희생한 채 돌진해서 26호를 부리 끝으로 쪼았다.
그렇게 에이펙스 생물들끼리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나는 청록색 광선에 맞은 부위를 살펴봤다. 털은 이미 증발한지 오래였고, 갑각은 모조리 떨어져 나갔다.
‘놈을 압도할 만큼 강한 신체가 필요해.’
그동안 영리한 약자는 잘 써먹었다. 이제는 에이모프 준성체의 모습으로 돌아올 시간이다.
‘추가로 사냥의 표상도.’
본래는 26호가 쓴 심해의 공포로 먼저 저쪽을 무력화시킨 뒤 공략할 생각이었지만, 약간 예상에서 빗나갔다. 이대로 진행하는 수밖에.
나는 영리한 약자를 해제하는 것과 동시에 ‘사냥의 표상’을 활성화했다.
5m 밖에 안 되던 내 몸이 급격히 자라났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성장하는 몸과 함께 안에 있는 골격 구조도 변화했다. 켄타우로스와 유사하던 체형은 뱀과 비슷한 형태로 돌아왔고, 그에 따라 다리 역할을 하던 4개의 전투용 팔도 제 기능을 되찾았다.
무수히 나 있던 털들이 우수수 빠지며 안쪽에 있는 갑각과 합성비늘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털에 덮여 있던 인면수들, 그리고 침식촉수들이 숨어 있는 소용돌이 형태의 피막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6개의 우람한 뿔, 대형 수각류(獸脚類)를 닮은 길쭉한 두상, 신화 속 뱀신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육신과 단단한 갑각으로 둘러싸인 6개의 팔. 그리고 꼬리 끝에 달린 육중한 집게까지.
변신한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왠지 오랜만에 돌아왔다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내 몸은 아직 쉴 상황이 아니다. ‘완전한 유기체’의 변신 모드인 사냥의 표상에 맞춰 몸을 재구성해야 했기에.
본래도 머리 갑각이 컸지만, 사냥의 표상 상태가 되면 여기서 더 거대해진다. 두터운 갑각이 내 눈 위를 덮었고, 양 갈래로 갈라지는 아래턱들은 전보다 훨씬 극단적으로 변이했다.
잘 발달된 턱 아래에 위치한 보조기관 4개는 눈과 마찬가지로 뼈 갑각이 감싼 형태가 되었다.
보조기관을 덮는 갑각의 형태는 칼날처럼 얇고 예리했다. 탐지 기능만 맡던 보조기관도 이제는 적의 살점을 도려내는 흉기가 된 것이다.
등에 붙어 있던 인면수가 머리 갑각으로 옮겨 온 것, 등에 생체 낫을 단 팔 2개가 더 추가된 것, 그리고 하반신과 꼬리에 붙은 뭉툭한 발톱이 지네나 거미의 다리처럼 길어질 것들.
사냥과 살육에 최적화된 몸답게 어느 하나 위협적이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다만 익숙한 변화들 중 딱 한 가지, 새로운 부분이 있었다.
‘이건?’
심연의 색채 효과 덕분에 풍성해진 괴물의 촉수가 한층 인상적으로 변했다.
이전에는 뒷머리 갑각 안쪽부터 목 전체를 덮던 형태였던 촉수다발이 아래턱까지 범위를 넓혔다. 지금 내 모습은 촉수로 이루어진 수염과 머리카락을 단 것 같았다.
마치 절판된 공포소설전집에 나오는 사악한 신을 묘사한 것처럼 말이다.
‘…외모는 나중에 따져 보는 걸로 하고.’
모든 진화를 끝마친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머리보다 한참 위에 있던 나무 꼭대기가 이제는 내 코앞에 있다.
“쿠악?”
「큰애기가 돌아왔다!」
나무들을 헤집으며 나타난 나를 보고 놀라는 크리스털윙.
‘네놈들의 정수는 내 것이다.’
나는 앞에 있는 적, 아니 먹이를 향해 선언하듯 힘차게 포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