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02
신화 속에서 하늘은 동경의 대상이다. 드넓은 창공은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신격을 가지며 창세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설령 신격을 지니지 않았다고 해도 하늘은 신적인 존재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때로는 죽은 자들이 구원받는 천국으로, 때로는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어 머무는 곳으로.
무지의 시대가 끝나고, 이성과 기술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에도 하늘은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이는 스페이스 서바이벌에서도 마찬가지다. 광대한 우주가 배경인 게임인 만큼 하늘은 도전과 극복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미지의 영역인 하늘 속에 어떤 존재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눈과 비, 우박. 그리고 폭풍. 자연이 연주하는 교향곡 속에서 내 날개가 헤엄친다.
빛이 번뜩이고 그 뒤를 따라오는 뇌성. 번개가 칠 때마다 잿빛 구름에 내 그림자가 깜빡인다.
어깻죽지와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갑각과 비늘에 덮인 근육이 요동친다. 길게 뻗은 손가락 끝까지 연결된 피막이 구름을 가른다. 활짝 펼쳐진 날개의 길이는 장당 40m 이상. 한쪽 날개만 가늠해도 내 몸의 길이보다 길다.
‘내 덩치와 무게를 생각해 보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늘을 날 수 있겠지.’
그리고 나에게 공격당하는 컬트들은 그다지 달가운 상황은 아닐 거다. 내 몸은 수백m를 넘기는 순양함에 비하면 훨씬 작은 크기지만, 카메라를 통해 내 모습을 보고 있는 컬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터.
‘추락시키는 것은 좀 그러니.’
좀 전에 상황실이 위치한 전면부에 몸통으로 들이받았다. 저쪽이 당황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내 생각대로 순양함 측은 제대로 된 판단을 못 내리고 있었다. 당장 전속력으로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함포로 반격을 가하고 있었으니까.
눈보라와 번개가 만드는 섬뜩한 소음 속에 사이킥 포대들이 불을 뿜는 소리가 섞였다. 나는 날개 팔을 조정해서 아래로 급강하했다. 적이 쏜 공격이 내 꼬리 끝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조, 조심해서 날아! 우리는 떨어지면 끝장이라고!」
“저는 행성 대기권의 강하 임무를 상정해서 만들어져 해당 사항이….”
「닥쳐!」
「와! 파닥파닥! 재밌어!」
엄청난 속도로 날고 있는 내 등에는 애들이 타 있는 중이다. 혹시 떨어질까 봐 침식 촉수들을 꺼내서 애들을 살살 휘감고 있다. 하늘의 어머니 말대로 떨어지면 좋은 꼴을 보기 힘들 테니까.
‘의외네.’
이름과 달리 하늘의 어머니는 초고속 비행이 달갑지 않은 것 같았다. 아까부터 그녀는 내 침식촉수를 롤러코스터의 안전바인 것마냥 꽉 붙들고 있었다.
그리폰에게는 허공에 잠시 떠 있을 수 있는 활공 능력이 있다.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다.
‘오히려 26호가 좋아하고.’
내가 하는 일은 다 좋아하는 녀석답게 아까부터 꽤 즐거워 보였다. 반대로 절반 이상이 기계인 PS-111은 아무 느낌이 없어 보였고.
‘일단 그러면 발부터 끊어놓을까.’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저쪽 함장이 초광속 엔진을 가동시키면 골치 아파진다. 운이 좋게 순양함이 항성 내부로 도약하면 모를까, 무사히 이곳을 도망치면 내게도 좋지 않다.
‘컬트 제국에서 지원군을 데려올 수도 있으니까.’
이곳은 성지로 지정된 행성이 아니기에 지난번과는 상황이 다르다. 자칫 잘못하면 제국 전체와 싸우게 될 수도 있다.
나중에 성체가 되면 제국과 싸울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놈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그러면 추진기 쪽부터.’
나는 날개 팔을 천천히 흔들면서 구름을 타고 활공했다. 그런 나를 향해 적 순양함의 함포들이 연신 불을 뿜었다. 지름만 수m가 넘는 보라색 에너지탄이 구름에 구멍을 내며 내 뒤를 바짝 쫓아왔다.
우주선과 동기화되었을 때도 쉽게 피하던 나다. 나는 먹구름 속으로 들어가 어렵지 않게 적의 공격을 피해냈다.
‘주포는 아마 못 쓸 거야.’
컬트 순양함에는 강한 화력을 지닌 주포가 장착되어 있다.
예전에 뮤리엘의 해적단, 휴머니티 카르텔이 보유한 순양함이 한참 멀리 떨어진 나를 요격한 적이 있다. 당시 스타유니언산 화물선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주포 한 방에 그 거대한 배가 두 쪽이 났다.
그만큼 파괴력이 강력하지만 지금은 쓰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주포가 활성화 되면 막대한 사이킥 파워가 집중된다. 사실상 이 주변에 있는 갤러곤들에게 자기들이 여기 있다고 광고하는 거나 다름없다.
‘물론 저쪽이 정신이 나가서 그냥 쏴버릴 수도 있지만.’
그러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겠지.
구름 속에 숨어서 날던 나는 순양함의 측면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구름을 찢고 튀어나온 나를 발견한 함포들이 급히 포신을 돌렸다.
몇몇 발 빠른 함포들이 나를 쏴서 맞추는데 성공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나는 이미 순양함과의 거리를 충분히 좁혔으니.
거리가 가까워졌다고 판단한 나는 날개 팔을 뒤로 쭉 펴고, 피막을 활짝 폈다. 맹렬히 앞으로 나아가던 내 몸이 공중에서 급히 멈췄다.
그와 동시에 나는 그 반동을 내 꼬리에 실었다. 길쭉한 꼬리가 시계추처럼 자연스럽게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그 끝에 달린 집게가 마치 철퇴처럼 마름모꼴 순양함의 측면에 틀어박혔다.
폭음과 함께 화염이 솟구치고, 컬트들의 배가 크게 한쪽으로 쏠렸다. 배 측면에 달린 추진기가 박살 나면서 균형을 잃은 것이었다.
적들이 당황해하는 사이, 나는 순양함 위에 착지했다. 함포들도 배 전체가 흔들리는 탓에 나를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배가 정상화되기 전에 할 일이 있다. 나는 오랜만에 ‘산성 진균샘’ 특성을 활성화했다. 양 갈래로 벌어진 턱 아래로 산성 점액질이 무자비하게 쏟아져 내렸다.
순양함의 매끈한 상아색 외장갑이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녹아내렸다. 진균들은 순식간에 외벽을 뚫고 내부 구역까지 침투했다.
‘이쯤 하면 됐겠지?’
나는 전투용 팔로 구멍을 크게 벌린 뒤, 내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안쪽 복도에서 멍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컬트가 보였다.
나는 그가 반응하기 전 턱을 크게 벌려 그대로 깨물어 버렸다.
“히, 히익!”
“괴물이 함선 내부로 침투한다!”
발목만 남기고 내 뱃속에 들어간 동료를 보고 컬트 승무원들이 비명을 지른다.
‘여기는 내가 돌아다니기에는 좁네.’
어느새 내 몸이 복도를 돌아다니기에는 부적합할 정도로 커졌다. 영리한 약자 상태가 아니라면 움직이기는커녕 들어가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활주로 쪽을 노려볼까.’
도망치는 컬트들 뒤에다 진균 한 번씩 쏴준 나는 다시 고개를 밖으로 뺐다.
[즈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나는 다른 쪽으로 갈게)]
「알았어. 상황실하고 엔진실부터 정리하는 걸로 하면 되지?」
[즈즈즈(일단은)]
「큰애기야, 이따 봐.」
“컬트 순양함의 구조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갱신할 기회입니다.”
나는 침식촉수로 감고 있는 애들을 조심스럽게 함선 내부에 넣어줬다. 애들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낀 나는 다시 날개를 펼쳤다.
-
“피해 보고하라!”
함장은 악을 쓰듯 소리쳤다. 좀 전의 충격으로 인해 머리를 다쳤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외장갑 손상률 9%! 내부구역 중 23%가 파손되었습니다!”
“승무원들의 상태는 확인 불가!”
“저, 정체불명의 사이킥 생물, 엔진실로 향하는 중! 바, 방어를 맡은 전사단은 전멸입니다!”
“미친! 신전수호단은 도대체 뭘 하는 거야!”
“그, 그게 활주로에 나타난 괴생명체를 막느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함장도 알고 있다.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상황실 중앙에 떠 있는 수많은 영상 이미지들이 지금 상황이 어떤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신전수호단원 12명은 전부 활주로에 있었다. 그들은 현재 갤러곤보다 아득히 거대한 비행 생물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실 상대한다고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학살이었다.
놈의 등에서 튀어나온 길고 굵은 촉수들은 에너지탄만큼이나 빠르고 치명적이었다. 촉수 끝에 있는 부속지에 걸리면 단원들이 입은 용린복(龍鱗服)도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촉수에게 삼켜지면 몸이 통째로 녹아버리는데 방어력이 무슨 소용이랴.
그뿐 아니었다. 놈은 그 거대한 덩치가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듯 몹시도 단단했다.
“비, 빌어먹을! 놈은 사이킥 파워를 반사한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데몰리셔를…끄아아아악!”
잠깐 시선을 다른 데 돌린 사이, 또 한 명의 단원이 죽었다. 허리가 반대로 접힌 그의 머리에는 불쾌하게 빛나는 거품들이 잔뜩 묻어 있었다.
출발하기 전까지 이 배의 컬트들을 지켜 준 단원이었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저 비행 괴물은 지나치게 강했다.
또 다른 단원의 팔다리가 뜯겨나가는 것을 본 함장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들이 그나마 남은 희망이었는데 그것조차도 사라진 상황. 다른 수를 짜내야만 했다.
‘배를 버려야 하는가?’
탈출선을 이용한다면 저 괴물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문제는 여기서 탈출한다고 해서 딱히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 배를 버린다고 해 봐야 무서운 괴물, 그리고 혹독한 기상 조건을 가진 이 행성에서 오래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껏 해야 며칠 정도 삶이 연장되는 것에 불과하리라.
“…초광속 엔진 가동 준비.”
“함장님! 그건 미친 짓입니다!”
상황실의 승무원들이 반발했지만 함장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남은 수단은 그것밖에 없다.
현재 배가 상당히 손상된 상태이므로 항해 도중 배가 쪼개질 가능성이 높지만, 어차피 이래나 저래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
게다가 괴물 중 하나가 엔진실로 향하고 있으니 몇 분 후면 이 방법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초광속 항해로 인근 행성으로 날아간 뒤, 탈출하면 돼.’
습격한 괴물들의 정체는 불명이지만 필시 이곳의 토착 생물일 터. 전혀 다른 환경에서도 수월히 살아남을지는 불명이다.
“다시 명하겠다. 초광속 엔진 가동을 준….”
함장이 재차 명령하려는데 바닥이 크게 흔들렸다.
‘아니야.’
배가 흔들린 것이 아니다. 현재 배는 비상시 운용 가능한 임시 추진기가 작동 중이므로 공중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상태다.
배를 부술 수 있는 비행괴물은 아직 활주로에서 신전수호단과 싸우는 중이다.
‘배가 흔들린 게 아니라….’
그의 시선이 굳게 닫힌 차폐문에 향했다. 함교의 상황실이 공격받으면 끝장이기에 이곳과 이어지는 중간 구역들은 전부 폐쇄되었다.
‘설마?’
그의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또다시 상황실이 흔들렸다. 이번 충격은 그만이 느낀 것이 아니었다.
부지런히 함선 상태를 조율하고 있던 승무원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들도 함장과 똑같이 차폐문을 쳐다 봤다.
“…인근 구역의 상황을 전부 확인하라.”
“아, 알겠습….”
그때 울리는 굉음. 흡사 함포에서 에너지탄을 발사할 때와 비슷한 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렸다.
딱 저 차폐문 뒤에서 났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함장의 예상은 정확했다.
차폐문이 강한 충격을 받아 크게 떨렸다. 그렇게 몇 차례 더 떨리더니 곧 잠잠해졌다.
“…….”
공격이 멈췄지만 이 자리에 있는 컬트들 중 그 누구도 적이 이대로 물러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몇몇 승무원들이 함장의 눈짓을 받고 함교에 비치된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들이 무장하는 사이, 차폐문에 다시 변화가 생겼다. 문 한복판에 갑자기 붉은 점이 나타났다. 붉은 점은 급속도로 확대되더니 금세 큼지막한 구멍이 되었다.
에너지가 고도로 집중되면서 문을 구성하는 물질이 분해된 것이었다.
상황실의 모두가 구멍 너머를 주시했다. 구멍을 통해 승무원들의 비명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짙은 어둠만 가득한 그곳에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처럼 새빨간 눈, 그와 대비되어 창백하기 짝이 없는 얼굴.
눈을 감고 있었다면 아름답다고 할 만한 여성의 얼굴이 상황실 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 여자?”
누군가가 어이없다는 듯 흘린 말. 하지만 그는 곧 자기 발언을 취소해야만 했다.
어둠 속에 떠 있던 하얀 얼굴이 입을 쩍 벌린 순간,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저건 여자 따위가 아니라고.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든 컬트든 여자는 저렇게까지 입이 크게 찢어지지 않으니까.
컬트 얼굴만큼 벌어진 입.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남색 불길을 본 순간, 함장은 명령하려고 했다.
저 괴물에게 당장 사격하라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갑자기 세상이 뒤틀리고 매끈한 아이보리색 바닥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와 함께 매일 아침마다 거울을 통해 보는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멋들어진 휘장을 찬 그의 상반신이.
그제야 함장은 자기 목이 몸과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윽고 구멍을 찢으며 들어오는 수많은 팔들, 승무원들의 소리 없는 절규가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