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08
우주고래 스카이웨일은 인기가 많은 사냥감이다.
광자포를 쏠 수 있는 날개는 메가콥의 무기 재료로 쓰이고, 쓸개를 비롯한 내장 부위는 컬트들의 제례(祭禮)나 의식에 활용된다. 체내에 축적된 기름은 안드로이드의 기계 뇌나 함선 컴퓨터 같은 섬세한 기계 장치를 닦는데 유용하다고 한다.
여러 종족들에게 이롭기 때문에 스카이웨일이 발견된 장소에는 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스카이웨일은 에이모프나 아웃스페이서 같은 특성에 따라 강해지는 종족에게도 먹음직스러운 먹이다. 우주고래가 지닌 특성 중에는 꽝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우주비행, 거대생물, 광자포를 만들어 쏘는 능력 등, 하나하나가 유용한 특성들뿐이다.
그나마 ‘에너지 흡수’가 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이것도 조건만 갖춰지면 써먹을 구석이 있는 특성이다. 유용한 특성들을 충분히 습득해서 더 이상 새 특성이 필요 없는 경우라면 단점보다 장점이 부각될 테니까.
아무튼 모든 플레이어에게 크리스마스의 선물상자로 여겨지는 스카이웨일. 놈이 내게 준 특성은 에너지 흡수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우주비행이나 거대생물도 아니었다.
‘그 특성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사실 내가 바랐던 것은 스카이웨일의 광자포 공격 특성이었지만, 이 특성도 나쁘지 않다. 덕분에 기존에 내가 지니고 있던 특성과 융합, 새 융합 특성을 얻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게 놀라움을 주는 것은 특성 따위가 아니었다.
종족의 생태 대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는 갤러곤이 현재 내 앞에서 탈피하고 있다.
스카이웨일을 먹던 중 아드하이의 몸에서 비늘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오래된 비늘이 벗겨지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한두 개로 시작된 것이 곧이어 뭉텅이로 떨어지고, 그 안에서 우유처럼 하얀 비늘이 새로 돋아났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녀석은 먹는 것을 멈추고 접었던 두 날개를 펼쳐 자기 몸을 감쌌다. 몸만큼이나 큰 날개로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들리는 소리를 통해 녀석의 변화를 유추할 수 있었다. 팝콘이 터질 때처럼 뚝, 뚝 나는 그 소리는 뼈마디들이 자라나는 소리였다.
날개 또한 몸의 성장에 맞춰 크기가 점점 커졌다. 날개 바깥쪽 녹색 비늘들은 각질처럼 벗겨져 땅에 떨어졌고, 새 비늘이 그 자리를 채웠다. 얇은 피막 위에는 백색의 물감에 물든 것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큰애기야, 작은애기가 이상해.」
[즈즈즈즈즈(성장하는 거야)]
「작은애기도 커지는 거야?」
[즈(응)]
“작은애기의 에너지 총량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드하이는 성장을 이어갔다. 멀쩡한 몸이 순식간에 커지는데도 녀석은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특별한 물질이 분비되는 건가?’
에이모프의 경우는 고치화된 상태로 전신이 재구성된다. 고치 안에 가득 찬 점액 덕분에 변화로 인한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어쩌면 갤러곤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뇌 내에서 성장통을 완화시키는 물질을 분비하는 식으로 말이다.
‘씨 데몬에 이어서 갤러곤이라.’
두 희귀 생물의 성장을 곁에서 직접 본 플레이어는 나 말고 없을 거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핏물 위에서 백색의 연꽃이 활짝 폈다. 모든 변이를 끝마친 것이다.
갓 탈피한 날개는 완벽히 세공된 다이아몬드 같았다. 그만큼 아름다우면서 또 단단하리라.
‘이게 진화인가.’
화이트 갤러곤으로 성장한 아드하이. 몸길이가 제법 늘었지만 그런데도 동족들보다는 훨씬 작은 편이었다. 같은 단계인 화이트 갤러곤은 물론이고, 일반 그린 갤러곤보다도 작았다.
‘4m? 하늘의 어머니보다 살짝 작은 크기야.’
몸길이는 그리폰 상태인 하늘의 어머니보다 작다. 물론 날개까지 합친다면 아드하이가 더 크겠지만.
‘몸이 변해서 그런지 느낌이 많이 다르네.’
이전의 녀석은 어린 사슴처럼 여린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보다 한층 더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어쩌면 머리의 크기가 그대로인데 몸이 커져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은 머리의 아래, 가녀린 몸에는 적당히 근육이 붙어 건강한 느낌을 줬고, 긴 목과 허리 또한 특유의 요염한 곡선이 훨씬 살아났다. 통통해서 귀여운 이미지였던 꼬리는 이전보다 더 길어진 덕에 풍만해졌다. 물론 보기 좋게 살이 붙었다는 얘기지, 뚱뚱해 보인다는 뜻은 아니다.
몸만 작을 뿐, 다른 갤러곤보다 훨씬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는 녀석이었다. 게다가 녀석에게는 동족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특징이 하나 있었다.
‘몸에 빨간색 무늬가 있네?’
정수리 부근부터 목 뒤, 등, 날개의 피막 안쪽과 꼬리까지 선명한 붉은색의 물결무늬가 있었다.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얗기만 한 비늘 위에 새빨간 무늬가 있으니 눈에 확 들어왔다.
‘특별한 존재라.’
함 오르트가 말한 구원자, 그리고 붉은색의 무늬를 보니 왠지 모르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갤러곤 중 최강의 존재이자 볼텍스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궁극의 생물, 레드 갤러곤 말이다.
‘…아니겠지?’
나 또한 게임에서 레드 갤러곤을 사냥한 경험이 있다. 내 기억에 놈의 크기는 그 어느 갤러곤보다 거대하다. 왜소한 몸집을 타고난 아드하이와는 거리가 있다.
하물며 레드 갤러곤은 볼텍스원과 마찬가지로 고유의 에너지 체계를 사용한다. 우리 앞에 있는 아드하이에게서는 그런 미지의 힘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상태로는 블랙 갤러곤을 못 이길 텐데.’
아무리 녀석이 화이트 갤러곤, 혹은 특별한 개체라고 해도 둘 간의 체급 차이가 너무 심하다. 거기다가 아드하이는 방금 막 성장한 터라 화이트 갤러곤이 어떻게 싸우는지도 배우지 않은 상태다. 함 오르트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나 이대로 싸우면 필패다.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
아드하이에 관해서는 함 오르트를 잡으면 확실히 알 수 있으리라.
「갤러곤의 성장을 직접 볼 줄은 몰랐는데.」
「작은애기, 어딘가 달라졌어.」
“등록된 서브컨트롤러2 ‘작은애기’과 비교했을 때 적합도 72%. 대상 특징을 수정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아드하이가 활짝 핀 날개를 천천히 접었다. 등에 난 긴 날개를 가지런히 접은 그 모습은 다른 갤러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아했다.
조금 과하게 비유하자면 웨딩드레스를 입은 젊은 신부를 연상시켰다.
「나」「어떰?」
「멋진걸.」
「응. 작은애기 커져서 기특해!」
「감사」
쏟아지는 칭찬이 만족스러운지 녀석이 기분 좋다는 사념파를 살짝 흘렸다. 이어서 녀석이 나를 쳐다본다. 내 모습을 비추는 자수정 눈동자를 향해 나는 파장을 흘렸다.
[즈즈 즈즈즈 즈즈(아주 멋지게 자랐네)]
「진짜?」
[즈(그래)]
내 칭찬에 녀석은 기분이 좋은지 꼬리 끝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드하이의 성장이 끝나고 우리는 남은 스카이웨일의 고기를 마저 처리했다. 녀석은 성장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쓴 것인지 이후에도 많은 양의 피를 빨아먹었다.
덕분에 육즙이 모조리 사라진 푸석한 살점을 씹게 됐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에이펙스들 중 나를 실망시킨 존재가 없었고, 이는 스카이웨일도 마찬가지였다.
‘굉장히 특이한 맛이었지.’
비유하자면 레몬 맛을 강하게 한 블루 하와이 음료로 단단한 젤리를 만든 느낌이었다. 식감이 거의 껌에 가까워 씹는 재미가 있었다.
‘식사 느낌은 아니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만찬이 끝나고, 나는 아드하이를 불렀다. 녀석에게 둥지의 안내를 부탁하기 위해서다.
「나」「둥지」「위치」「알고 있음」
[즈즈즈(잘됐네)]
일이 쉽게 풀린다고 생각 중인데, 녀석이 조심스럽게 사념파를 내보냈다.
「큰어른」「나」「부탁」「있음」
[즈(응?)]
「둥지」「어린 동족」「많음」「물빛 동족」「존속」「가능?」
미미하게 떨리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는 아드하이. 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흠.’
이전에 26호도 동족에 대한 연민을 여러 차례 보여 준 바가 있다. 버블아메바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PS-111도 동족의 냄새가 난다고 보살폈으니까.
그래서 언젠가는 아드하이도 비슷하게 행동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동족에게 버림받은 아드하이는 26호보다 동족애가 덜했지만, 섬세한 감정을 지녔으니까.
‘블루 갤러곤이라.’
갤러곤들은 전부 에이펙스에 속한다. 그렇기에 처음 녀석과 계약했을 때, 둥지를 싹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애초에 그때는 이렇게까지 정이 들 줄 몰랐지만.’
지금 나는 내 곁에 있는 모두에게 크든 작든 애정을 품고 있다. 스스로를 몇 번이나 다시 돌아봐도 이 점만큼은 확실했다. 나의 생존에 위해가 되지 않는 선이라면 녀석들의 부탁을 들어 주고 싶다.
그러나 지금 이 경우는 다르다.
갤러곤을 몰살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는 내 생존과 관여되어 있다. 나는 특성 획득을 위해, 진화 조건 달성을 위해 갤러곤들을 죽여야만 한다.
설령 성체들만 죽여서 진화 조건을 채운다고 해도 그것이 새끼들을 살릴 이유는 되지 않는다. 블루 갤러곤로부터 얻을 수 있는 특성들이 남아 있으니.
녀석도 나와 함께 지낸 시간이 적지 않은 편이다. 내 생각 따위는 진작 알고 있었을 거다. 머리가 굉장히 좋은 녀석이니까. 그렇기에 나머지는 죽여도 상관없지만, 어린 새끼들만이라도 살려달라고 절충안을 제시한 것일 터.
녀석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나올 만한 제안이다. 자기를 버린 동족과 달리 이후에 태어난 새끼들은 죄가 없으니까.
‘여기서 내가 거절한다면?’
녀석은 나와 동족이 되기로 결심한 몸. 거기에 계약까지 얽혀 있으니 둥지에 데려가 달라는 나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을 거다.
다만 충격만큼은 피할 수 없으리라. 내가 갤러곤을 몰살시키면 녀석과의 관계는 그야말로 파탄이 날 거다. 나와의 관계는 물론이고, 이전처럼 전투 중의 활약해 주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지.
‘어느 쪽이 이득일까.’
아드하이와 관계를 희생하고 갤러곤들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녀석의 부탁도 듣는 겸, 진화 조건만 채우고 끝낼 것인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 내 앞에 있던 아드하이가 눈을 크게 뜨더니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뭐야?’
순식간에 작은 점처럼 보일 정도로 높이 날아간 녀석. 녀석이 날아오른 뒤 얼마 안 가 26호가 폴짝폴짝 뛰어왔다.
「큰애기야! 나쁜 애들이 왔어!」
[즈즈즈(나쁜 애?)]
「응! 파닥파닥 하는 나쁜 애!」
녀석의 파장을 접하고 난 뒤, 뒤늦게 내 보조기관도 주변에서 발생하는 이상 사태를 보고했다.
강대한 사이킥 파워가 하늘 위에서 메아리치는 중이었다.
[즈즈 즈즈즈즈 즈즈(잠깐 올라갔다 올게)]
「응? 야, 어디…!」
나는 앞에 있는 26호를 등에 태운 뒤, 바로 날아올랐다. 높이 날아오르니 그제야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였다.
‘갤러곤!’
다시 구름이 끼기 시작한 하늘.
잿빛 전장 위에서 백색의 갤러곤 한 마리와 녹색의 갤러곤 10마리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
늙은 흑룡, 위대한 오드 그라드는 기분이 꽤 좋았다.
오랫동안 심기를 거슬리던 가시를 뽑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반기를 든 무리들은 몰락했고, 도망친 놈들도 곧 그의 부하들에 의해 정리될 것이다.
반역자들의 우두머리, 함 오르트는 앞으로 다시는 바깥세상을 볼 일이 없을 거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두운 동굴에서 알을 낳는 일만 반복하게 될 테니.
마침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오드 그라드의 무리는 그가 정한 완벽한 순리대로 다시 움직이리라.
그는 동굴에 깔린 반짝거리는 광물들 위에 엎드렸다. 기분 좋은 감정을 잔뜩 품은 채 그가 막 잠에 빠지려는 순간, 그의 눈에 환상이 나타났다.
검은색 동족이 그에게 달려들어 목을 잘랐다. 그는 조금도 저항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무기력하게 땅으로 추락하는 것뿐.
딱딱한 바닥에 충돌하는 것으로 환상은 끝났다.
잠이 확 달아난 오드 그라드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미래?」「어째서?」
오드 그라드는 꿈이나 환상을 통해 미래를 엿본다. 그 미래는 대개 꿈으로 나타난다. 지금처럼 환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환상으로 나타나는 미래는 아주 위험한 미래였다. 그가 경험한 바, 죽음이 매우 가까워졌을 때만 지금처럼 미래의 환상을 봤다.
「반역자」「끝」「아닌가?」
검은색 동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동족은 더 이상 없다. 그나마 함 오르트가 검은색 동족에 근접한 존재지만, 그녀는 지금 동굴에 갇혀 죽어 가는 중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에 그가 고민하고 있는데, 밖에서 부하가 급히 들어왔다.
「위대한 오드 그라드」「보고」
「말하라」
「검은색 동족」「발견」
「!」
풀빛 비늘을 지닌 동족의 보고.
그가 본 환상이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불길한 죽음이 그의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