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10
「숨은 동족」「데려옴」
[즈즈즈 즈즈 즈즈즈즈 즈즈(정리가 되면 이곳으로 와라)]
「알겠음」
넬 게르마는 내게 정중히 인사한 뒤, 날아올랐다.
원래라면 녀석은 이 자리에서 아드하이에게 먹혀 죽을 운명이었지만, 계획이 바뀌었다. 내가 녀석을 희생시키는 대신, 살리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계획이 변경되었으니 녀석도 다음 행동에 나섰다. 바로 뿔뿔이 흩어진 동족들을 모으는 것.
생존한 갤러곤 대부분은 해츨링이고, 그들을 지킬 몇 마리의 그린 갤러곤만 남았다고 한다. 녀석은 이 행성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내 근처라고 판단했는지, 동족들을 이곳에 데리고 온다고 했다.
‘나도 당장은 잡아먹을 생각이 없어.’
내 원래 계획은 날개를 얻은 다음 아드하이를 구출하는 것이었지, 흑룡의 무리와 전면전을 벌이는 게 아니었다.
이 행성에 온 이후 갤러곤과 싸운 경험은 총 2회. 함 오르트 혼자와 싸웠던 것, 그린 갤러곤 10마리를 죽인 것, 이렇게 두 번이다. 두 번 다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서 수월하게 이겼지만, 그것은 운이 좋아서 그렇다.
만약 함 오르트가 부하가 있었다면? 혹은 그린 갤러곤 10마리와 이를 이끌 화이트 갤러곤 서너 마리가 있었다면?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었을 거다.
‘갤러곤은 개체도 강하지만 무리가 모이면 더 강해.’
아프리카에서 사자가 무리를 꾸려서 위험한 초식동물을 사냥하듯, 갤러곤도 제대로 무리를 갖추면 매우 위험해진다. 단독으로 싸우지 않고 하수인을 부리는 글래셔 핀드의 상위 호완이라고 할까. 구색을 맞춘 갤러곤 무리는 살아 움직이는 전투기 부대나 다름없다.
‘그러니 저쪽에서 준비하기 전에 빠르게 쳐야 해.’
함 오르트의 잔당을 추격하기 위해 보낸 그린 갤러곤 무리가 전멸했다는 사실을 알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거다. 흑룡 오드 그라드는 이 행성 어느 갤러곤보다 나이가 많다. 강적이 나타났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잘 알고 있을 터.
다시 말해 놈들이 방어 태세를 갖추기 전에 먼저 흔들어 놔야 한다.
‘다행인 점은 넬 게르마가 유용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었다는 거지.’
함 오르트와 마찬가지로 녀석은 과거 흑룡, 오드 그라드의 무리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무리에 화이트 갤러곤이 몇이나 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화이트 갤러곤 수는 총 19마리.’
원래는 24마리였는데 함 오르트를 따라서 4마리가 무리를 나오는 바람에 19마리가 됐다고 한다. 이 중 12마리는 탈피한 지 얼마 안 된 어린 개체다. 성별은 암컷과 수컷이 각각 절반이다.
반면, 7마리의 경우는 탈피한 후 오랜 시간을 보낸 성숙한 개체라고 한다. 블랙 갤러곤만큼은 아니지만 나이를 제법 먹은 것으로 보인다.
게임에서야 화이트 갤러곤은 서로 실력이 동일했지만 여기는 현실. 얼마나 오래 살았고, 전투 경험이 많은 지에 따라 편차가 갈리는 편이다.
‘함 오르트를 보면 확실히 차이가 나.’
그리고 그 7마리는 오드 그라드가 아끼는 반려여서 흑룡의 관리를 받는다고 했다. 넬 게르마도 그들이 특히 위험하다고 강조할 정도였다. 못해도 함 오르트급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좋으리라.
‘일단 약한 개체부터 정리할 계획을 세우자.’
아드하이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재료는 아무 화이트 갤러곤이나 상관없다고 한다. 적어도 녀석의 비밀을 알고 있는 갤러곤들은 그렇게 말했다.
‘처음 한 마리는 먹이로 삼고, 나머지는….’
잡아먹어서 특성을 얻을 수 있는 만큼 얻고, 그 다음에는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좋겠지. 다른 때 같았으면 싹 다 먹어 치우겠지만 지금은 우리 편을 늘릴 필요가 있으니.
‘놈들이 사냥을 나서는 시기는 이미 들었어.’
7마리는 항상 둥지에서 머물며 오드 그라드를 보필한다고 한다. 12마리는 3일에서 4일 사이에 한 번씩 둥지를 나와 먹이 사냥을 한다.
‘넬 게르마 말로는 다시 사냥을 나설 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어.’
놈들은 아직 그린 갤러곤 추적대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따라서 추적대의 죽음을 알기 전에 사냥을 보낼 가능성이 높다. 다만 갤러곤의 시간 감각은 인간과 미묘하게 달라서 그 말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감시와 준비. 둘 다 필요해.’
둥지의 동태를 주시하는 한편, 놈들이 나오기 전에 싸울 준비도 마쳐야 한다.
그게 지금부터 내가, 아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넬 게르마로부터 들은 정보로 대략적인 계획을 세운 나는 애들을 불렀다.
「확실히 괜찮은 계획이야. 단, 한 가지만 바꾸면.」
[즈즈 즈즈즈 즈즈즈(어떤 부분이 걸리지?)]
「둥지 감시역은 PS-111보다 내가 나을 거야. 내 쪽이 더 시각이 뛰어난데다가 경험도 있고.」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 감지 시스템은 360도 범위에….”
PS-111에게 둥지 감시를 맡기려 한 이유는 녀석이 가진 두 가지 장점 때문이다.
바로 사이킥 파워 감지 능력과 민첩함.
우리 중 사이킥 파워의 최고 전문가는 26호지만, 땅 위에서는 움직임이 느리다는 단점이 있다. 만에 하나 갤러곤들에게 걸린다면 그 자리를 벗어나기 어렵겠지. 반면 PS-111은 감지 능력은 26호보다 떨어져도 움직임이 매우 날렵하다.
‘아니야.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어.’
하늘의 어머니는 사이킥 파워 감지 능력은 떨어지지만, 시각이 매우 뛰어나다. PS-111은 동의하지 않는 것 같지만 내가 봤을 때 둘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게다가 그녀는 나와 같은 랭커 출신. 당연히 갤러곤 정도는 사냥해 본 경험이 있다.
‘여긴 게임하고 다르다는 것이 걸리지만.’
기계라서 고지식한 편인 PS-111과 다르게 그녀는 유연한 판단력을 지녔다. 혹여 일이 잘못돼도 그녀라면 위기에서 어렵지 않게 빠져나올 거다.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그러네. 그 부분은 하늘의 어머니에게 맡길게)]
「고마워.」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즈즈(대신 PS-111은 26호와 함께 움직여 줘)]
“알겠습니다.”
「친구야, 나만 믿어!」
26호와 PS-111은 넬 게르마가 데려올 무리를 지키는 역할을 맡을 예정이다. 넬 게르마는 말하지 않았지만, 늙은 흑룡이 추적대를 하나만 보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분명 그린 갤러곤 추적대가 더 있을 거야.’
26호와 PS-111을 넬 게르마에게 붙여두면 추적대와 조우해도 잘 처리할 수 있을 거다.
[즈으으으 즈즈 즈즈 즈즈즈(아드하이. 넌 나와 같이 갈 거야)]
마지막으로 아드하이는 나와 함께 움직일 예정이다.
이유는 두 가지.
녀석에게 전투 훈련을 시키는 것, 그리고 새로운 에이펙스를 먹여보기 위해서다.
화이트 갤러곤이 성장의 중요한 키인 것은 맞지만, 다른 먹이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녀석의 성장에 큰 보탬이 될 지도 모르니.
‘뭐가 됐든 손해는 아니야.’
에이펙스는 많은 에너지를 함유하고 있으니 이제 막 탈피한 아드하이에게 좋은 먹이가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에이펙스 사냥에 녀석을 데려가야 녀석이 능력을 단련할 수 있다. 다가오는 전투에 대비하려면 자기 능력을 완벽히 숙지해야 탈이 없다. 녀석을 적응시키는데 강적과 싸우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으리라.
[즈즈즈즈 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넬 게르마가 오면 둥지 쪽으로 데려가)]
「괜찮겠어?」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즈(블루 갤러곤을 밖에다 두면 다 얼어 죽어. 순양함에 둬야만 살 수 있어)]
하늘의 어머니가 무엇을 우려하는지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용의 둥지를 잃은 이상, 녀석들이 살리려면 열기가 있는 순양함에 보내야 한다.
때마침 넬 게르마가 돌아왔다.
「생존」「동족」「전부?」
「전부」
「알?」「어디?」
「오드 그라드」「가져감」
넬 게르마가 데려온 그린 갤러곤은 3마리. 블루 갤러곤은 5마리였다. 화이트 갤러곤은 전부 오드 그라드가 직접 죽였다고 한다.
‘적네.’
저쪽의 화이트 갤러곤만 19마리나 되는데, 이쪽은 다 합쳐도 9마리다. 아드하이까지 합쳐도 불과 10마리.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열세다.
‘쩝. 이 정도는 예상했으니.’
아쉽지만 예상한 바였다.
다만 아드하이는 그렇지 않았는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녀석은 함 오르트에게 붙잡혀 있을 때, 해츨링이 있는 둥지에 머물렀다. 얼마나 많은 블루 갤러곤이 죽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다른 때 같았으면 녀석을 위로했겠지만, 이번만큼은 아니다.
‘분노는 싸움에 도움이 돼.’
자기도 모르게 선을 그은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니까.
물론 분노에 사로잡히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되지만, 이 경우에는 상관없다. 내가 녀석의 감정을 조율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어디로 갈 것인지는 이들한테 물어봐)]
「가면서 설명해 줄게. 따라와.」
「동의」「모두」「이동」
다들 미리 얘기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떠난 그 자리에는 아드하이와 나만 남았다.
「큰어른」「나」「충격」「어린 동족」「죽음」「원하지 않음」
[즈즈(그래)]
「어린 동족」「죄」「없음」「오드 그라드」「나쁨」
사실 나 역시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는 갤러곤들을 싹 다 잡아먹을 생각이었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꺼낸 말은 다른 이야기였다.
[즈즈즈즈즈(복수해야지)]
「동의」「복수」「필요」
[즈즈 즈즈 즈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너를 버린 오드 그라드는 어미도 죽이고 어린 새끼들도 죽였어)]
「동의」
괴물의 촉수가 만든 파장을 접하자 녀석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자수정 눈동자 위로 보라색 불길이 피어올랐다. 잠재된 사이킥 파워가 영향을 받아 몸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즈즈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오드 그라드는 죽음으로 갚아야 해. 녀석의 무리도)]
「동의!」「오드 그라드」「죽음」「필요!」「필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드하이.
이걸로 녀석과의 관계에 손상이 가지 않는 선에서 갤러곤의 유전자 정수를 취할 수 있게 됐다. 블루 갤러곤들을 못 먹게 된 것은 좀 아쉽지만 말이다.
‘다 떠나서 오드 그라드는 무조건 죽어야 해.’
놈이 나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에, 혹은 놈의 유전자 정수가 필요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놈은 아드하이를 버린 장본인이다. 내가 아끼는 녀석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존재.
‘모든 준비가 끝난 그때….’
오드 그라드는 내 손에 죽는다.
-
뱀의 왕이 서식하는 얼음 평야.
얼마 전 의문의 지진으로 인해 평야의 지반이 불안정해진 그곳 위를 녹색 비늘을 지닌 존재 10마리가 날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오드 그라드가 보낸 추적대. 순백의 여왕 함 오르트를 섬기는 잔당들을 찾기 위해 수색 중이었다.
얼음 평야 위를 꼼꼼히 둘러본 갤러곤 무리는 이곳에 적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 다음 갈 장소는 그들의 둥지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평야 너머에 있는 얼어붙은 협곡이었다. 그곳은 야수의 왕의 영토지만 그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야수의 왕은 땅 위에서는 무적이지만 하늘을 날 수 없다. 놈과 조우해도 언제든지 빠져나갈 수 있다.
그렇게 갤러곤 무리는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야수의 왕 영역에 침입했다.
10마리의 날개 달린 용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자연이 만든 깊은 협곡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렇게 협곡 중간쯤 도달했을 때, 선두에 있는 갤러곤이 뭔가를 발견했다.
워낙 깊어서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그곳에 뭔가가 반짝였다.
「정지」
「반역자」「발견함?」
「확인」「시도」
선두의 갤러곤이 빛을 향해 다가가려는 그 순간.
빛이 위치한 절벽에서 수십 개에 달하는 붉은빛이 나타났다.
「적」「습…」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갤러곤은 급히 사념파를 발산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동족들은 그의 사념파를 듣지 못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파장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사념파가 닿지 않아 당황하는 사이, 붉은빛들이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여러 개의 다리를 지닌 정체불명의 존재 수십 마리가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그는 어떻게든 놈들을 떨어뜨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놈들은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로 그의 날개를 무자비하게 물어뜯었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그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아래로 추락했다.
그가 당하는 동안 동족들이 무사히 도망쳤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그의 동료 9마리도 그와 똑같이 심연으로 추락하고 있었으니까.
절벽 위에서는 또 다른 붉은빛들이 무감정하게 그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적대적 생물 10개체 제압 완료. 보급용 에너지로 투입.”
“에너지량에 따라 ‘피라 일레븐’ 75%까지 회복 예정. 활동 재개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됨.”
“복구반, 보급반 투입….”
그와 함께 떨어지는 중에도 끊임없이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는 붉은빛들.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린 갤러곤은 결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