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14
헬사이드 호넷이 죽은 것을 확인한 나는 뼈 낫 팔을 회수했다.
두 겹눈 가운데에 뚫린 구멍에서 피와 뇌수가 뒤섞여 흘렀다.
구더기에 누리끼리한 뇌수, 벌레의 머리. 혐오스러운 요소들만 모아놨지만, 에이모프 시점으로 보면 그저 맛좋은 먹잇감으로만 보였다.
괴물을 좋아하는 나라고 해도 부담스러운 비주얼이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놈의 머리를 뽑았다.
‘에이모프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살아 있을 때도 징그러웠지만, 죽으면서 한층 더 끔찍해진 헬사이드 호넷.
놈으로부터 획득할 수 있는 특성 중 유용한 것은 총 두 가지다.
‘저 튼튼한 팔과 구더기를 만드는 능력.’
둘 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좋은 특성이지만, 융합 특성으로 만들면 원본에 비해 한층 더 강해진다.
헬사이드 호넷의 낫은 ‘정수수확자의 턱’ 특성과 융합할 수 있다. 원본은 팔과 연결된 낫이 엄니 형태로 바뀌는 것이다. 설정상 엄니의 날 부분은 단분자 형태의 톱날이 빼곡히 박혀 있어서 어떠한 방어구든 파괴할 수 있다. 심지어 아이스 호러의 머리 갑각까지도 쉽게 찢어 버린다.
게다가 구강 구조도 지금 모양에서 꽤 달라진다. 낫 엄니로 상대의 목을 자른 뒤 바로 흡수할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대규모 수확에 유리하지.’
갤러곤들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지금 시점에 가장 필요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미래를 생각해 보면 구더기를 만드는 능력도 나쁘지 않아.’
구더기 생성 특성은 ‘인면수’와 융합이 가능하다. 둘이 합쳐지면 지성체의 머리를 단 파리 괴물을 생성하는 특성으로 변한다. 인면수를 총 5마리만 생성할 수 있는 것처럼 몸에서 분리할 수 있는 인면 파리의 수는 총 5마리.
마비 음파를 쏘는 능력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전보다 훨씬 변칙적인 운용이 가능해진다.
‘갤러곤하고 싸울 때는 못 쓰지만.’
갤러곤은 귀가 없으므로 마비 음파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니 이건 나중에나 써먹을 수 있을 거다.
‘…뭐 재수가 없으면 둘 다 안 나오고 강인한 생명력 같은 게 나오겠지.’
곤충형 생물과 식물형 생물들은 공통적으로 ‘강인한 생명력’ 특성을 지녔다.
아무리 사냥의 표상이 포식 성공률을 올려 준다고 해도 획득할 수 있는 특성은 무작위다. 꽝을 뽑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잡생각은 그만하고 빨리 먹자.’
옆에서 아드하이가 언제 먹나 하고 기다리고 있다. 먹음직스러운 향기가 올라오는 피 웅덩이에 당장에라도 뛰어들고 싶지만, 나 때문에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 먹어볼까.’
나는 제발 좋은 특성이 나오길 기도하며 헬사이드 호넷을 입에 털어 넣었다.
‘으으음.’
양 갈래로 갈라지는 턱으로 놈의 머리를 씹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놈은 누가 봐도 진저리칠 정도로 혐오스럽게 생겼다. 그런 외모만큼 맛도 매우 직관적이었다.
‘달다.’
그것도 혀가 녹을 정도로.
헬사이드 호넷의 머리를 현실 요리와 비교하면 뭐랄까. 누텔라로 만든 대형 캐러멜을 씹는 느낌이었다.
‘누텔라보다 훨씬 달지만.’
연한 갈색과 노란색 점액질이 뒤섞인 놈의 뇌수는 내 입에 들어오자마자 단맛을 고도로 농축시킨 초콜렛 잼과 같은 맛을 냈다. 게다가 곤충형 생물 특유의 딱딱한 갑각은 크래커를 씹는 것 같은 즐거움을 줬다.
‘건강에 해로운 맛이야.’
하나 같이 개성적인 맛을 자랑하는 에이펙스답게 놈의 머리도 내게 강한 인상을 줬다. 다만 다른 놈들의 고기가 식사의 개념에 부합하는 맛을 냈다면 이 놈은 말 그대로 간식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평소라면 단숨에 삼켰겠지만 중독적인 단맛 탓에 다른 때보다 입에 오래 머금었다. 나는 조각이나 파편 하나 없이 완전히 액체화된 놈의 머리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러자 내 앞에 바로 반투명 텍스트박스 여러 개가 동시에 떠올랐다.
「큰어른」「나」「식사」「가능?」
[즈 즈즈 즈즈 즈즈 즈즈(응? 먹어. 맛이 아주 좋아)]
옆에 있던 아드하이는 내 허가가 떨어지자 피 웅덩이에 촉수다발을 박아 쭉 들이켰다. 식사를 즐기는 녀석을 두고 나는 텍스트박스의 내용을 확인했다.
「포식 효과 발동! ‘오염벌레 숙주’ 유전자 정수 획득 성공.」
「‘헬사이드 호넷’의 생물 특성 중 ‘오염벌레 숙주’를 탈취.」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인면수’와 융합 가능.」
「‘초월’ 재료 목록(신규!): 오염벌레 숙주, 파상풍 덩굴, 이빨요정 둥지, 인신공양, 레드 애시드(획득하지 않음)」
‘…이건 예상 못했는데.’
오랜만에 ‘초월’ 시스템과 관련된 메시지가 날아왔다. 여러 개의 특성을 합쳐서 ‘유일’ 특성을 만드는 시스템 말이다.
한동안 안 떠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오염벌레 숙주가 키 특성이었나.’
파상풍 덩굴과 이빨요정 둥지, 인신공양을 얻었을 때만 해도 이런 메시지는 뜨지 않았으니까.
‘새 유일 특성이라.’
지금까지 내가 초월 시스템을 활용해 유일 특성을 만든 사례는 총 2회. 사냥의 표상을 쓸 수 있도록 해주는 ‘완전한 유기체’, 우주선을 침식해서 생체 전함으로 만드는 ‘악몽의 지평선’이 전부다.
내 몸을 상황에 맞게 변화시켜 주는 ‘유기적 진화’는 초월 2단계 해금 보상으로 제공된 것이라 공짜로 받은 것이고.
즉, 현재 내가 지닌 유일 특성은 3개다. 강적의 증표로 얻은 특성도 2개가 있지만 이는 유일 특성으로 분류되지 않으니 제외.
‘그러고 보니 이번에 유일 특성을 얻으면 총 4개가 되나?’
유일급 특성 4개를 획득하면 ‘우주괴물’ 타입 단계가 0단계에서 1단계로 올라간다. 우주괴물 타입이 1단계가 되면 어떤 보상을 얻는지는 현재 미지수다.
‘얻기 힘든 유일급 특성이 4개나 필요한 타입이라.’
아마 진화에 준하는 변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일단 지금은 얻을 수 없어.’
재료 목록 마지막에 있는 ‘레드 애시드’는 글래셔 핀드로부터 얻을 수 있는 특성이다. 지난번 사냥했을 때 특성을 획득했다면 이번에 바로 초월 시스템을 이용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닌가? 특성 개수가 모자라니까.’
현재 내 특성 개수는 타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만 남아 있다.
이번 재료는 새로 얻은 오염벌레 숙주와 레드 애시드까지 합쳐서 감염 관련 특성 4개, 둥지 관련 특성 1개. 생각 없이 유일 특성 재료로 써버리면 감염, 둥지 강화 타입 2개를 날려 버리게 된다.
‘특성을 좀 더 모은 다음 합쳐야겠어.’
갤러곤과의 싸움이 끝나면 글래셔 핀드나 헬사이드 호넷을 몰아서 잡는 것도 생각해 봐야겠다.
초월 시스템에 관심을 끊은 나는 오염벌레 숙주와 인면수 특성을 융합하는 길을 택했다.
「‘오염벌레 숙주’ 특성이 적용되었습니다.」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인면수’와 융합 가능.」
「‘오염벌레 숙주’와 ‘인면수’ 특성이 융합. ‘인면충 숙주’ 특성으로 진화!」
「인면충 숙주: ‘인면수’ 특성 효과가 반영된 비행 생물을 생성합니다. 비행 생물은 총 5마리까지 생성이 가능하며 숙주로부터 반경 200m 이내에서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추신: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따라서 권리도 없습니다.」
특성이 적용되자 즉시 몸에 변화가 생겼다. 사냥의 표상 중에는 내 머리 갑각으로 위치를 바꾸는 인면수들. 다섯 개의 얼굴들이 마구 뒤틀리기 시작한다.
갑각에 박혀 있는 얼굴이 세로로 갈라지더니 안쪽에서 벌레의 다리와 날개가 튀어나온다. 나비가 번데기를 까고 나오듯 벌레 괴물이 꾸물거린다. 차가온 공기에 닿자 축축한 그들의 신체가 마르며 단단해진다. 그와 함께 구겨져 있던 날개도 활짝 펴진다.
우화(羽化)를 마친 그들의 몸은 호넷링과 비슷하게 생겼다. 뾰족한 발톱이 달린 6개의 다리, 2장의 날개, 사마귀와 파리를 섞은 형태의 몸 등 모두 호넷링이 지닌 특징과 일치한다.
차이가 있다면 호넷링보다 덩치가 더 크다는 점, 그리고 말벌 형태의 머리 대신 지성체의 머리가 달려 있다는 점이다. 그 모습은 거대화된 곤충이 사람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
“■■ ■■!”
“■■!”
“■■■!”
잠에서 깨어난 벌레, 아니 인면충들이 자기 몸을 보고 기겁한다. 저들은 원본의 기억을 일부 지니고 있다. 그런 상태로 자기가 벌레가 됐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꽤 충격을 받았으리라.
인면충 숙주가 적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냥의 표상 효과도 끝났다. 내 몸이 다시 줄어들고, 등에 있던 뼈 낫 팔도 먼지가 되어 부스러졌다.
그와 함께 인면충들이 머물 둥지도 머리 갑각이 아니라 등 위로 돌아갔다. 사람의 가면을 붙여놓은 형태 대신 큼지막한 종양 같이 생긴 둥지 5개가 자리잡았다. 이제부터 그곳이 인면충들의 보금자리다.
“■■■ ■■ ■■!”
제이슨의 얼굴을 지닌 인면충이 뭐라고 외쳤다. 놈은 눈에서 진액을 흘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인면충 숙주는 게임에서도 존재하는 특성. 당연히 제이슨도 자기가 어떤 꼴이 됐는지 깨달았을 거다.
그리고 앞으로 자기가 얼마나 더 비참해질지도.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지만.’
다른 이들은 용도가 다하면 다른 유전자로 교체하겠지만, 제이슨만큼은 아니다. 그는 내가 죽기 전까지 절대 해방될 수 없다.
나는 그의 항의를 무시하고 다시 인면충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은 내가 보낸 특수한 파장을 받자 곧바로 명령에 복종했다. 좀 전까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던 인면충들은 한순간에 넋이 나간 얼굴이 되어 둥지로 돌아갔다.
특성 적용과 시범까지 완료한 나는 아드하이를 돌아봤다. 어느새 피 웅덩이를 깔끔히 비운 녀석은 촉수로 앞발에 묻은 피를 닦는 중이었다.
‘날개가 좀 변한 것 같기도 하고.’
몸에 있던 붉은색 물결무늬가 좀 더 커지고 화려해진 것 말고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블랙 갤러곤으로 진화할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에이펙스를 먹는 게 조건이 아닌가?’
변한 것은 맞는데 지난번처럼 극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헬사이드 호넷이 스카이웨일보다 급이 살짝 떨어진다고 해도 같은 에이펙스인데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양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즈즈 즈즈(몸은 어때?)]
「기분」「좋음」
[즈즈 즈즈즈 즈즈즈(뭔가 더 강해진 것 같아?)]
「무늬」「변함」「힘」「차이」「모름」
녀석도 무늬가 달라졌다는 것은 알겠지만 강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실험해 보기에는 시간이 없어.’
둥지에서 떠난 지 하루하고 조금 더 넘은 상태다. 오드 그라드 무리가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는데, 이 이상으로 밖에 오래 있는 것은 좋지 않다.
「무늬」「화려함」「좋음」
강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름답게 변한 자기 날개와 꼬리는 마음에 드는 것 같다.
‘하는 수 없지. 원래 계획대로 가야겠다.’
혹시 에이펙스를 더 먹이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인상적인 변화는 없었다. 오드 그라드 무리에서 화이트 갤러곤이 나오면 놈을 습격해서 녀석을 진화시키는 방법을 택해야 할 것 같다.
‘그럼 돌아갈…아.’
그러고 보니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
[즈 즈즈즈(배 안 고파?)]
「약간」
[즈즈즈(잘됐네)]
「?」
고개를 갸웃거리는 녀석.
이곳 근처에 적당히 배를 채울 만한 곳이 있다. 헬사이드 호넷이 애지중지하는 먹이 창고 말이다.
‘아까운 먹이를 버리면 놈도 싫어하겠지.’
나는 아드하이를 데리고 놈의 먹이 창고로 향했다.
-
“크윽!”
바닥에 떨어진 충격에 시현 유진의 수하, 콜린 러셀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고치에 갇혀 천장에 매달린 지 2주가 되는 날, 그는 마침내 탈출할 수 있었다.
강도 높은 군사 훈련을 받은 콜린에게도 지난 2주 간은 실로 악몽과도 같은 나날이었다.
시현 유진의 탐사대 중 보급을 담당하던 그의 부대는 거대한 곤충형 괴물의 습격을 받았다. 놈은 그와 그의 부하들 몇 명을 데리고 이 동굴로 데려왔다.
당장 그들을 죽일 줄 알았지만 놈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놈의 몸에서 분비되는 점액으로 만든 고치에 그들을 가둬둘 뿐.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에 그와 부하들은 기뻐했다. 당장 죽지 않았으니 어떻게든 탈출하면 그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끔찍한 오판이었다. 괴물이 그들을 살려 둔 이유는 독특한 식성 때문이었다.
놈은 그의 부하들 한 명씩 절여서 잡아먹었다. 3일에 한 번 꼴로 놈은 고치에 자기 소화액을 조금씩 끼얹었다. 고치에 갇힌 부하들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 전신이 녹아내렸다.
그렇게 해서 부하, 아니 먹이가 완전히 녹으면 그때 놈은 고치에 머리를 처박고 쭉 빨아먹었다.
고치에 갇힌 콜린과 생존자들은 그 광경을 볼 수 없었지만, 소리만큼은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이 산 채로 천천히 녹아내리는 소리, 그리고 완전히 물로 변한 인간을 괴물이 빨아 마시는 소리.
부하들은 전부 정신이 나갔지만, 고도의 훈련을 받은 콜린은 미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다 포기하고 자살을 하려고 해도 이는 불가능했다.
고치는 그들을 가두는 것 말고도 원시적인 생명 유지 장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기에 갇힌 이들은 죽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콜린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손톱으로 고치를 긁었다. 피가 흐르고 손톱이 모조리 빠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생지옥에서 포기하지 않은 결과, 하늘이 그에게 기회를 내려 줬다.
그가 생지옥에 갇힌 지 2주일 째 되는 날, 동굴에 지진이 발생했다. 곤충형 괴물은 지진을 살펴보기 위해 이곳을 떠났다.
즉, 이번이 그가 살아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놈의 소리가 들리지 않은 시점부터 그는 미친놈처럼 마구 고치를 긁었다. 손톱이 빠지는 걸로 모자라 손가락이 부러졌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고치를 찢고 다시 바깥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었다.
“쿨럭! 쿨럭….”
간신히 몸을 일으킨 콜린은 강한 기침을 했다.
현재 그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생명을 간신히 유지할 정도로만 영양이 공급되어서 몸 전체가 비쩍 말랐고, 두 손은 완전히 망가졌다.
그런데도 그는 탈출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는 주변에 아무렇게나 쏟아져 있는 짐과 희생자의 잔해를 뒤져서 손전등과 강화복을 챙겼다.
기껏 탈출해도 강화복이 없으면 바로 얼어 죽는다. 빠르게 탈출 준비를 마친 그는 허겁지겁 동굴 밖을 향해 달렸다. 괴물에게 붙잡혀서 동굴에 들어올 때 여기가 어디인지는 외워뒀다.
그 덕분에 손전등의 빛 하나로 그는 미로 같은 이곳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얼마나 달렸을까.
저 멀리 희미한 빛이 보인다. 저곳이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다.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와 달렸다. 이 정도로 치열하게 달린 적은 아주 오래 전 갤러곤의 알을 훔치고 도망칠 때 이후 처음이었다.
그때도 수백 번은 죽을 뻔했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오늘도 그는 살아날 것이다.
그는 동굴 입구를 막고 있던 덩굴 줄기를 치웠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람이 그를 맞이했다. 2주 내내 끊임없이 바랐던 밖이었다.
그곳은 그가 들어오기 전과 달라진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하얀색 눈, 낮밤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컴컴한 하늘, 빽빽하게 자리 잡은 나무들, 그리고 거대한 바위까지.
‘바위?’
그러고 보니 저 바위, 여기 들어오기 전에는 본 적 없던 것이었다.
놈이 은신처를 가리기 위해 가져다 둔 것일까, 아니면 좀 전에 있었던 지진 때문에 산 위에서 굴러떨어진 것일까.
정답은 그 둘 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바위는 움직이지 않으니까.
“어?”
그의 앞에 있는 것은 바위가 아니었다. 바위라고 착각했던 존재가 그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