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21
‘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네.’
갤러곤 무리가 떠난 뒤, 땅굴에서 나온 나는 텍스트박스를 확인했다.
놈들과 싸우던 도중, 포식 효과가 떴었다. 사냥의 표상을 쓰지 않을 때는 유전자 정수 획득 확률이 매우 낮은데 웬일로 운이 좋았다. 그것도 그린 갤러곤도 아니고 화이트 갤러곤의 유전자 정수였다.
텍스트박스를 다시 띄우자 선택까지 남은 시간이 10초 밖에 남지 않았다. 깜짝 놀란 나는 재빨리 특성 획득을 선택했다.
「‘화이트 갤러곤’의 생물 특성 중 ‘갤러곤의 뿔’ 특성을 탈취.」
「‘갤러곤의 뿔’ 특성이 적용되었습니다.」
‘어휴, 큰일 날 뻔했네.’
특성이 적용되자 내 머리에 있던 뿔들이 변이하기 시작했다.
6개의 뿔들은 크기가 전보다 훨씬 커졌다. 머리갑각은 그대로지만 뿔이 커져서 그런지 전보다 더 무거워진 느낌이 확 들었다.
크기 말고 세부적인 면에서도 달라진 점이 있었다.
일단 모든 뿔에 공통적으로 표면에 얇은 비늘이 역방향으로 돋아났다. 비늘 틈새는 흰색으로 물들어서 검은색 뿔에 하얀색 균열이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변이 전 여섯 개의 뿔 중 두 개가 부러진 상태였는데, 이게 변이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원래 내 머리에 있는 뿔은 크게 두 종류였다. 소용돌이 모양으로 꼬여서 그 끝을 전방에 향하는 한 쌍의 뿔, 가시처럼 삐죽하게 솟아서 머리 갑각을 따라 일렬로 난 4개의 뿔, 이렇게 둘이었다.
이 중 오드 그라드의 브레스로 인해 왼쪽 소용돌이 뿔 하나, 일렬로 난 4개의 뿔 중 마지막 뿔이 손상됐다. 한창 재생 중이었는데 변이가 적용되어서 그런지, 뿔 간의 크기와 형태가 불균형한 모습으로 변했다.
오른쪽 뿔은 두껍고 우람한 형태로, 왼쪽 뿔은 톱날처럼 뾰족한 비늘들이 마구 튀어나온 모습으로 말이다. 일렬로 난 4개의 뿔도 마찬가지였다.
‘흠.’
예상하지 못한 변화였지만 무기로 쓰는 데는 딱히 지장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한층 더 기괴하게 변한 뿔을 손으로 만져봤다.
‘갤러곤의 뿔이라.’
초능력 관련 특성 ‘갤러곤의 뿔’의 효과는 매우 간단하다.
사이킥 파워 기술 효과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
가령 나를 종종 성가시게 만들었던 ‘리플렉션’을 예로 들어 보자.
리플렉션으로 자기 몸을 보호하는 적이라고 해도 내가 뿔로 찌르면 막을 수 없다. 뿔이 그대로 리플렉션의 영역을 뚫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리플렉션 말고 다른 보호막 계열의 사이킥 파워 기술도 전부 파훼된다.
무효화 범위는 뿔에 한정된다. 따라서 머리 갑각이 리플렉션에 닿는 순간 머리 전체가 튕겨 나가지만, 뿔이 워낙 커서 일반 컬트와 싸울 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뿔 하나의 크기만 1m를 가볍게 넘기는데 당연히 그럴 수밖에.
‘컬트랑 싸울 때는 매우 좋은 특성이지.’
안타까운 것은 갤러곤과 싸울 때는 이 뿔이 활약할 기회가 없다는 점이다. 놈들은 리플렉션 같은 기술은 사용하지 않으니까.
뿔의 변화를 확인한 나는 그동안 떠오른 메시지들도 살펴봤다.
오드 그라드 사살에는 실패했으나 이번 전투로 굉장히 많은 소득을 얻었다. 에이펙스를 사냥에 성공한 수가 어느새 28마리가 됐으니.
에이펙스 조건은 내가 직접 죽이는 것으로 카운트된다. 갤러곤 무리를 향해 ‘신의 회초리’를 쓴 덕에 수를 한 번에 많이 채울 수 있었다.
‘앞으로 2마리만 더 잡으면 에이펙스 조건은 끝이야.’
물론 그 이후에 에이펙스를 안 잡는 것은 아니다. 유일 특성 10개 획득과 타입 6개 획득이 남았으니까 말이다.
초월 시스템으로 유일 특성을 얻을 수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획득이 쉬워진 감이 있지만, 원래는 이렇지 않았다.
게임에서 유일 특성 획득의 정석적인 방법은 유일 특성을 지닌 생물을 사냥하는 것이었다. 블랙 갤러곤처럼 에이펙스 중상위권 이상의 생물을 잡거나 유일 특성을 보유한 플레이어를 죽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 중 후자는 아웃스페이서 플레이어나 유전자를 개조한 메가콥 플레이어처럼 유전자 정수를 활용하는 적을 죽이는 방법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블랙 갤러곤만 되도 플레이어 혼자서 잡기 매우 힘들어진다. 그 위에 있는 레드 갤러곤이나 아케인 오르카는 훨씬 강력한 적이고.
그리고 이들을 잡아서 유일 특성을 얻은 플레이어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하나가 랭커에 준하는 최상급 플레이어들이다.
따라서 게임에서 유일 특성을 얻는 방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오죽하면 게임에서도 에이모프 성체까지 도달한 사람은 나를 포함해 10명이 안 될 정도일까. 나도 이 벽을 넘느라 굉장히 고생했다.
‘그런 걸 보면 초월 시스템이 파격적이긴 해.’
이 세계에 온 지 1년도 안 됐는데 벌써 이 정도로 강해졌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부상당한 나를 옮겨 주기 위해 26호가 사이킥 파워를 쓴 거다.
[즈즈 즈즈즈(이제 괜찮아)]
「아니야. 큰애기 아프니까 내가 들어 줄게.」
아직 내 꼬리 아랫부분은 재생이 완료되지 않았다. 날개 팔도 뼈가 재생 중이었고.
‘지금은 녀석의 도움을 받을까.’
녀석은 나를 들고 몇 번 휘청거리다가 감을 잡았는지 제대로 운반했다.
이윽고 PS-111이 갤러곤들의 시체를 끌고 나타나자 그것도 함께 들었다.
‘대단한데.’
녀석은 나와 갤러곤 시체들을 사이킥 파워로 드는 것에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과연 준레이드 보스급 생물다운 모습이었다.
우리는 갤러곤 시체들을 챙겨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오드 그라드가 언제 다시 추격자를 보낼지 모르니 어쩔 수 없었다.
아드하이와 넬 게르마에게는 둥지에서 만나자고 미리 얘기해 놨다. 녀석들도 숲속 어딘가에 숨어서 움직이는 중일 거다.
움직이기 시작한 지 한나절이 지났을 때쯤, 내 날개 뼈가 거의 회복되었다. 그래서 나는 26호에게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큰애기 아직 아파. 아플 때는 쉬어야 해.」
[즈즈즈 즈즈즈(이제는 괜찮아)]
꼬리의 집게발은 재생하려면 한참 남았지만, 땅 위를 기는데 큰 지장은 없다. 나는 26호에게 갤러곤 시체 몇 구를 건네받아 침식 촉수로 단단히 붙잡았다.
“그 촉수는 활용도가 매우 높아 유용해 보입니다.”
[즈즈즈즈(그렇긴 하지)]
“추후 업그레이드에 반영하려면 유전자 정보가 필요합니다.”
[즈즈(안 돼)]
녀석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한 나는 갤러곤의 시체를 들고 움직였다. 하체 부분이 허전한 것 말고는 괜찮아 보였다.
그렇게 짧은 휴식을 취한 우리는 다시 둥지를 향해 출발했다.
나도 직접 걸어서 이동했기에 아까보다는 훨씬 속도가 올라갔지만, 여전히 비행하는 것보다는 느렸다. 거의 하루를 꼬박 소모한 뒤에야 우리는 내가 만든 둥지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둥지에 가까워지자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아드하이와 넬 게르마가 숲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서브 컨트롤러2 작은애기로 확인. 반갑습니다.”
「작은애기 안녕!」
「작은어른」「아픈 아이」「무사」「다행」
26호와 PS-111에게 인사한 아드하이는 아직 꼬리가 재생 중인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큰어른」「부상」「심각함」「괜찮음?」
[즈즈 즈즈즈즈(금방 나을 거야)]
「휴식」「필요」「귀환」「빨…」「?」
녀석은 사념파를 보내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원에 떨어진 라벤더 같은 눈동자는 정확히 내 뿔을 향하고 있었다.
「뿔」「느낌」「다름」
[즈즈 즈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아까 오드 그라드 때문에 부러졌어)]
「부러진 것」「다름」「뿔」「변함」
[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 즈즈(이건 먹이를 먹고 변한 거야)]
「한쪽」「커짐」「한쪽」「날카로움」「야성적」「매력」「있음」
「동의함」
아드하이는 내 뿔의 지금 모습이 더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넬 게르마도 동의한다는 사념파를 보냈다.
「부속지 커지면 좋아?」
“일부 생물종의 수컷은 화려한 꼬리나, 뿔로 성적 매력을 어필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즈즈(잡담은 그만하고. 둥지에 별일 없었어?)]
내 말을 듣자 아드하이가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사념파를 마구 쏴댔다.
「큰어른」「중요한 일」「있음」「매우」「매우」「매우!」「중요한 일!」「지금」「둥지」「가야 함!」
[즈즈 즈즈(뭔데 그래?)]
「넬 게르마」「유성의 딸」「의견」「동의」「검은색 동족」「집」「확인」「필요」
차분한 인상이던 넬 게르마도 저런 태도로 나오는 것을 보니 왠지 불안해졌다.
‘혹시 둥지에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
아니면 하늘의 어머니에게 심각한 부상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급히 그녀의 머리에 든 기생충을 체크했다. 멀쩡한 것을 보니 딱히 그녀의 신체에 큰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럼 왜?’
[즈즈즈 즈즈즈즈(둥지가 잘못됐어?)]
「둥지」「문제」「없음」「문제」「다른 것」「빨리」「확인」
펄짝펄짝 뛰면서 재촉하는 아드하이를 따라 나는 급히 둥지로 달려갔다.
멀리 나무 사이로 지하에 절반쯤 파묻힌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입구 옆에는 붉은색과 흰색이 뒤섞인 거대한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응?’
그 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다고 생각하는데 동굴에서 누군가 나왔다.
그건 삐쩍 마른 검은색 해골을 닮은 몸, 숫사슴의 거대한 뿔, 그리고 짐승의 두개골 형태의 머리를 가진 야수였다.
그 모습은 스페이스 서바이벌의 사악한 환수(幻獸) 웬디고를 닮았다.
그리고 그 웬디고를 닮은 짐승이 나를 쳐다 봤다. 놈의 텅 빈 안와(眼窩) 속에서는 익숙한 호박색 도깨비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웬디고의 정체는 ‘사냥신의 둔갑 껍데기’를 쓴 하늘의 어머니였다. 오드 그라드의 둥지를 감시하던 그녀는 무사히 이곳에 귀환한 것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다급히 손짓을 했다.
「시간이 없어! 부상이 심각해서 얼마 못 버틸 거야! 빨리 공생물 포자를 써야 해!」
그녀의 말을 들은 뒤에야 나는 동굴 입구에 있는 이 거대한 물체가 뭔지 깨달았다.
찢어진 날개, 부러지고 뒤틀린 팔과 다리, 뜯어진 꼬리와 부러진 뿔. 이건 처참하게 망가진 화이트 갤러곤이었다.
그리고 이 갤러곤은 나도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존재였다.
‘함 오르트? 어떻게?’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드하이의 어미가 살아 있었다.
‘아니,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
놈은 아주 중요한 정보원이다. 어떻게 살았는지, 왜 이곳에 있는지는 나중에 물어보면 된다.
나는 공생물 포자를 생성한 뒤, 죽어 가는 함 오르트의 몸에 붙였다.
붙이는 사이 놈의 몸을 만져 봤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숨 쉬는 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놈이 사경을 헤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도 둥지 밖에 둔 것은 내 둥지에 내 허가를 받지 않은 생물에게 해를 끼치는 요소가 잔뜩 있기 때문이리라.
내가 지닌 특성들 때문에 둥지는 다른 생물에게 해로운 물질을 잔뜩 배출하는 중이다. 이것들이 화이트 갤러곤에게까지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로 강한 것은 아니지만, 함 오르트는 부상이 심각한 상태. 그냥 넣어 뒀다간 십중팔구 둥지의 양분이 될 거다.
‘붙였으니까 안으로 옮기자.’
공생물 포자를 붙이면 함 오르트도 회복 효과를 받을 수 있다. 나는 침식 촉수로 놈을 조심히 들어 둥지 안쪽에 내려놓았다.
둥지에서 올라오는 열기 덕분일까. 함 오르트의 몸에서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즈즈즈 즈즈즈(어떻게 된 거야?)]
「자세히 설명하자면 길어. 이따가 얘기해 줄 테니까 너도 좀 쉬어.」
그녀 말대로 나 역시 꼬리의 부상이 아직 다 낫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동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생각해야 할 것이 많지만….’
둥지에 돌아오면서 긴장이 풀린 것인지, 적지 않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지금은 잠깐 쉬자.’
나는 따뜻한 늪 위에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