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29
빛 아래에서 나는 여섯 마리의 갤러곤.
녹색의 비늘을 지닌 갤러곤 3마리, 화이트 갤러곤 넬 게르마, 날개 부분이 거의 회복된 함 오르트. 그리고 붉은색 화장을 한 아드하이까지.
갤러곤들 위에는 낯익은 녀석들의 모습이 보였다.
함 오르트 위에는 웬디고로 변신한 하늘의 어머니가, 넬 게르마 위에는 뮤턴트 스크리머 PS-111이 타고 있었다.
그들 앞 선두에서 나는 아드하이 위에 작은 분홍색 풍선이 보인다. 심해의 악마라는 별칭을 지닌 씨 데몬 26호다.
홀로 떠난 나를 돕기 위해 모두가 이 자리에 모였다.
「오드 그라드」「명한다!」「공격하라!」「공격하라!」
흑룡이 연신 명령을 내렸지만 놈을 따르는 무리들은 없었다. 갈팡질팡하는 놈들 사이에서 마른 체구의 화이트 갤러곤이 앞으로 나섰다.
「위대한 오드 그라드」「검은색」「적」「별의 색」「적」「강함」
「아니다!」「적」「반역자일 뿐」「거짓말이다!」
「동족」「거짓말」「불가」「색」「거짓」「불가」
설정상 레드 갤러곤은 모든 갤러곤들을 통솔하는 신화적인 존재. 우주의 용이라 불리는 갤러곤들에게 본능적인 두려움을 안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생물이다.
‘물론 아직 아드하이는 성장을 다 마치지 않았지만.’
녀석의 드래곤 파워는 내가 본 레드 갤러곤에 비하면 지극히 미약하기 짝이 없는 수준. 녀석의 힘은 오드 그라드보다도 떨어진다.
그런데도 갤러곤 무리가 동요하는 이유는 단 하나.
검은 폭군, 오드 그라드의 사악한 짓거리 때문이다.
놈은 동족들을 학대하고 굶주리게 만들었다. 동족애가 강한 갤러곤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약한 새끼들을 죽였다.
놈이 ‘정상적인 갤러곤’처럼 행동했다면, 무리는 놈의 명령에 복종했을 거다. 그동안 자기들을 지켜준 우두머리였으니까.
그러나 놈은 갤러곤에게 결코 좋은 왕이 아니었다.
「오드 그라드」「감정」「이해」「어려움」「설명」「요청」
「!」
게다가 지금 놈의 품에는 동족을 통제하는 수단도 사라진 상태.
놈의 보물, 감정을 숨기는 반지는 내가 뼈 낫 팔로 놈을 공격했을 때 앞발과 함께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반지는 현재 내가 지니고 있다. 나는 그걸 가슴의 작은 손으로 꽉 쥐었다.
「네놈!」
그 모습을 본 오드 그라드가 으르렁거린다.
놈은 지금껏 거짓말을 못하는 갤러곤의 특징을 악용해 왔지만, 이제는 불가능하다. 놈의 진심을 알게 된 다른 갤러곤들이 놈을 어떻게 볼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아마 완전히 미친놈처럼 보이겠지.’
아니면 동족을 노예로 부리고 학살한 간악한 폭군으로 보일 터.
오드 그라드에게 반기를 든 마른 체구의 화이트 갤러곤은 계속 사념파를 쐈다.
「동족」「더 강한 동족」「따름」「새 우두머리」「결정」「필요」
전투 거부의 뜻을 뚜렷하게 표현한 놈은 뒤로 물러났다. 다른 갤러곤들도 놈을 따라 뒤로 후퇴했다.
남은 적들은 오직 오드 그라드의 반려들 뿐.
우연의 일치일까. 지난번 내 공격에 맞고 한 마리가 죽었기에 남은 반려는 총 여섯 마리였다.
마침 이쪽도 하늘을 날 수 있는 존재가 여섯이다.
‘등에 탄 수까지 합치면 우리가 더 많지만.’
더 이상의 생각이나 대화는 필요 없다.
지금부터는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나는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목의 상처가 다 낫지 않았지만 ‘사냥의 표상’으로 변신하면서 생긴 갑각 덕분에 피는 멎었다. 완전히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양분이 필요하다.
블랙 갤러곤의 유전자 정수면 충분하겠지.
나는 붉은색 핏줄 무늬가 빛나는 날개를 흔들며 오드 그라드에게 접근했다.
표상 효과로 내 날개는 이전보다도 훨씬 크고 강인해졌다. 예상보다 빠르게 날아드는 나를 보고 오드 그라드가 놀란다.
「하찮은 종자!」
놈에게 바짝 붙은 나는 가속도를 실어 꼬리를 크게 휘둘렀다. 꼬리 끝 집게가 초대형 철퇴처럼 흉흉한 소리를 내며 놈에게 날아든다.
예지 능력이 아니더라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오드 그라드는 피하는 것을 택했다. 검은색 날개 중 한쪽이 살짝 굽어지고 놈의 몸이 크게 쏠렸다. 꼬리의 집게가 놈의 머리에 난 뿔을 긁으며 지나갔다.
아슬아슬하게 내 공격을 피한 놈이 그 자리에서 바로 사이킥 브레스를 발사했다. 충전 시간이 있는 나와 다르게 확실히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놈의 브레스는 더 이상 내게 큰 피해를 줄 수 없었다.
표상으로 강화된 신체, 거기다가 모방비늘 효과까지. 현재 내 몸은 사이킥 파워에 완전 면역에 가깝다.
물론 놈의 브레스가 갖는 물리력은 어쩔 수 없었다. 내 몸을 뒤로 크게 밀어낸 놈은 재빨리 뒤로 빠졌다.
나와 오드 그라드가 싸우는 동안, 놈의 반려들과 내 동료들의 전투도 시작되었다.
평균 이상의 전투 실력을 보여주는 넬 게르마가 오드 그라드의 반려들 사이로 날아들었다. 녀석 위에서 PS-111가 입으로 데몰리셔의 남색 에너지탄을 연신 쏴댔다.
반려 중 하나가 날개 끝에 물질을 분해하는 탄에 맞고 다급히 동족들에게 경고했다. 모여 있던 적들이 나와 싸울 때처럼 급히 흩어졌다.
“예정대로 적들이 흩어졌습니다. 모두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알고 있음」
흩어진 적들 중 한 마리가 함 오르트 무리의 그린 갤러곤들한테 날아갔다. 약한 적들부터 찢어 죽이고 빠르게 동족들에게 합류할 생각이리라.
그러나 그런 뻔한 공격을 내 동료들이 모를 리 없다. 아직 부상이 덜 회복된 순백의 여왕이 백색 반려 앞을 가로막았다.
녀석 등에 탄 하늘의 어머니가 미리 준비하고 있던 ‘얼음의 악령’을 사용했다. 멀쩡히 잘 날던 화이트 갤러곤은 웬디고의 광기에 전염되어 그녀를 노리기 시작했다.
미친 갤러곤이 그녀를 향해 브레스를 쐈지만 그녀는 대범하게 보라색 열선을 피해냈다. 함 오르트 머리의 뿔을 잡고 있던 그녀가 허공 위로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열선이 빗나가고 그녀가 자연 법칙에 따라 지상으로 추락했지만, 함 오르트는 능숙하게 고개를 틀어 그녀를 받았다.
「괜찮은가?」
「…괜찮다고 하면 그만둘 거야?」
「작은 존재」「그럴 수 없다는 것」「알 터」
「쳇, 빨리 정리하자고!」
얼음의 환수(幻獸)와 순백의 여왕 콤비는 미쳐 버린 반려를 끌고 뒤로 빠졌다. 그사이 다른 그린 갤러곤들은 넬 게르마와 PS-111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였다.
“제 지시를 따르신다면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겁니다.”
「어른」「신뢰」「나」「신뢰」
「나」「아픔」「싫음」
“꼬리가 잘리거나 날개에 구멍이 뚫리는 정도로 끝날 확률이 63%이니 저를 믿으셔도 좋습니다.”
「갑자기」「불안함」
「넬 게르마」「지적함」「사실」「전부」「말하는 것」「불필요」
녹, 백색의 갤러곤들과 기계 생물의 조합이 맡은 반려가 총 둘.
적 반려는 아직 셋이 남은 상황.
하지만 그들의 상황은 결코 좋지 않았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나의 친구들, 26호와 아드하이를 상대해야 했으니까.
우주도시에서부터 자주 둘이서 싸웠던 경험 덕분인지 둘은 세 화이트 갤러곤 반려를 농락하고 있었다.
원래도 뛰어난 비행 실력이 장점이었던 아드하이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전장을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이 자리의 그 어느 갤러곤도 레일건에서 발사된 탄환만큼이나 빠른 녀석을 뒤쫓을 수 없었다.
녀석을 쫓는데 실패한 반려들은 사이킥 브레스를 마구 쏴서 아드하이를 격추시키려 했다. 하지만 녀석 위에는 우리 중 최고의 사이킥 파워 전문가 26호가 탑승한 상태.
붉은빛 유성 위에서 녀석이 지휘하듯 촉수를 흔들 때마다 열선들의 방향이 휘거나 그대로 에너지가 사그라졌다.
반려들의 공격이 무효화되면 아드하이도 방향을 틀어 역으로 놈들에게 돌진했다. 머리에 레드아머를 활성화한 녀석이 반려 하나를 들이받았다.
음속에 가까운 속도에 절대 손상되지 않는 뿔이라는 요소가 합쳐져 녀석의 돌진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녀석은 반려의 복부를 아예 관통해 버렸다.
4m가 넘는 탄환으로 배에 구멍이 뚫린 것이나 다름없는 화이트 갤러곤은 바로 즉사했다. 녀석의 등에서 몸을 바짝 붙이고 있던 26호가 뿅 하고 튀어나왔다.
「재밌다! 또 해 줘!」
「싫어」「지저분해」
역시 기대했던 대로다.
이곳에 오기 전 어떻게 싸울지 미리 얘기라도 했는지 호흡이 척척 맞았다.
「네놈!」「어딜 보느냐!」
잠깐 녀석들이 싸우는 광경을 본 사이, 오드 그라드가 급습했다. 놈은 뿔로 내 흉부를 찌르기 위해 머리를 드밀었다.
머리가 좋은 놈답게 목이 반쯤 잘렸는데도 죽지 않은 것을 보고 바로 다른 부위를 노리고 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나쁘지 않은 판단이라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놈이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이 자리에서 도망치는 것 말고는 없다.
‘내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지만.’
나는 몸을 살짝 틀어 놈의 돌진을 살짝 피했다. 놈의 뿔은 내 흉부 갑각 표면에 흠집을 내는데 그쳤다.
공격에 실패한 놈이 재빨리 머리를 빼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더 빨랐다. 내 전투용 팔들이 놈의 뿔을 붙잡았다.
「!」
포식 거머리의 손이 활성화되고 뿔을 통해 놈의 에너지가 빠르게 흡수되었다.
화이트 갤러곤 같은 커다란 생물도 내 손에 잡히면 얼마 못 버티고 미라가 된다는 사실은 놈도 안다. 놈은 내게 벗어나기 위해 뿔이 붙잡힌 채로 사이킥 브레스를 발사했다.
그 충격량 때문에 내 몸이 급격히 밀려났다. 손에 힘을 줘서 어떻게든 붙잡고 있으려 했지만 뿔이 부러지는 바람에 실패했다.
「죽이리라!」「죽이리라!」「반드시」「죽이리라!」
수컷 갤러곤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뿔을 한순간에 모두 잃어버린 놈의 모습은 참으로 볼품없어 보였다. 내 손에 잡힌 뿔이 바스라져 먼지가 되는 것을 본 놈이 분노의 사념파를 마구 뿌려댔다.
「네놈만큼은!」「절대」「절대」「용서 못한다!」
분노로 인해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놈이 날개를 활짝 펼치더니 하늘 위로 올라갔다.
‘도망?’
놈의 기척이 빠르게 멀어진다.
나는 애들이 싸우는 모습을 재빨리 확인했다. 멀리서 우리를 관망하는 갤러곤들이 참여하지 않는 이상, 녀석들이 질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전황은 이쪽에 더 유리한 상황. 나는 안심하고 오드 그라드를 뒤쫓았다.
붉은색 무늬가 있는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날아오르니 놈의 기운이 느껴졌다.
‘뭐하는 거지?’
놈의 몸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사이킥 폭풍을 일으키는 ‘마엘스트롬’을 쓸 때처럼 말이다.
‘내게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 텐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내 눈에 어떤 이미지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사냥의 표상 상태이기에 시각을 상실한 지금, 이미지들이 보인다는 것은 딱 한 경우뿐이다.
바로 포식자 감각.
환경 요소들을 총합해 미래를 알려주는 특성이 내게 경고하고 있다. 표상 효과 덕분에 포식자 감각이 알려주는 미래의 이미지는 훨씬 상세했다.
오드 그라드한테 모인 막대한 에너지들. 그것은 하늘 위에 쏴서 국지적인 초능력 폭풍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저 검은 용의 목적은 오로지 나를 멸절시키는 것.
놈의 의지에 맞춰 모인 에너지들이 점차 농축되더니 곧이어 낯익은 에너지와 비슷하게 변했다. 레드 다이아몬드색 에너지, 드래곤 파워 말이다.
‘어떻게?’
놈은 노화한 블랙 갤러곤이지, 레드 갤러곤이 아니다. 아드하이처럼 특별한 개체가 아니니까.
게다가 지난번 통찰로 살펴봤을 때도 놈은 분명 블랙 갤러곤이었다. 그렇다면 나와 싸우면서 뭔가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는 것인데 원인을 모르겠다.
‘설마 내 피를 마셔서?’
내 몸에는 화이트 갤러곤의 유전자 정수가 다량 포함되어 있다. 어쩌면 놈도 내 피를 마시며 그 정수 중 일부를 취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야.’
놈이 만들어낸 드래곤 파워. 그건 아드하이의 것보다 훨씬 불안정했다. 드래곤 파워는 아드하이가 사용할 때처럼 새빨간 레드 다이아몬드 색이 나와야 하나, 오드 그라드의 힘은 붉은 기운이 도는 보라색에 가까웠다.
그 말은 사이킥 파워와 뒤섞였다는 뜻.
그리고 그 불결한 화합물이 거대한 빔 형태가 되어 내 머리 위에 쏟아졌다.
「오드 그라드의 공격에 맞았다.」
「나는 죽었다.」
포식자 감각이 끝나기 전, 마지막으로 본 놈의 공격은 나도 아는 기술이다.
‘…스타플레임.’
뇌신 같은 궤도병기의 포격과 유사한 형태의 기술로 레드 갤러곤의 주력기 중 하나다.
‘하지만 많이 달라.’
드래곤 파워를 근간으로 이루어진 공격이기에 순수한 붉은색을 띄어야 하지만 포식자 감각을 통해 본 스타플레임은 보라색에 가까웠다.
‘놈은 경계에 있어.’
갑자기 오드 그라드가 왜 성장을 목전에 두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놈의 공격도 불완전한 상태다.
진정한 레드 갤러곤이 쏘는 스타플레임은 막을 수 없지만, 아직은 아니다.
나는 놈에게 다가가는 것을 멈추고 사이킥 브레스를 준비했다.
‘최고 화력으로 밀어붙여야 해.’
사냥의 표상 효과에 좀 전에 오드 그라드부터 흡수한 에너지들, 전부 다 때려 부어야 한다.
제국모함과 싸웠을 때 이후 처음으로 내 몸이 한계에 돌입했다.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에너지들만 남기고 모든 잔여 에너지가 사이킥 파워로 전환되었다.
허용치 이상으로 많은 사이킥 파워를 보유했기 때문일까. 검은색 비늘과 갑각이 연한 보랏빛으로 빛났다. 그 중 가장 많은 에너지를 머금고 있는 괴물의 촉수 부분은 열선 이상으로 선명한 보랏빛을 띄웠다.
「하찮은 존재여!」「심판을 받으라!」
내가 사이킥 파워를 전부 충전한 순간 놈이 공격했다.
붉은 광택을 띠는 보라색 구체가 얇은 원통형 모양으로 바뀌어서 내 머리 위로 떨어진다. 내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져서 느리게 느껴지는 것이지 실은 빛의 속도 만큼이나 빠르다.
진한 자주색의 열선이 내 몸에 닿기 직전.
내 모든 힘을 실은 사이킥 파워도 발사되었다. 내가 쏜 열선이 스타플레임과 부딪치자 엄청난 반탄력이 내 몸을 짓눌렀다.
「고통 경감 발동!」
‘아니야! 버틸만 해!’
역시 놈의 공격은 불완전하다. 정상적인 스타플레임이었다면 조금도 밀리지 않고 나까지 분해시켰을 거다.
표상 효과 덕분일까. 내 브레스의 굵기 자체는 스타플레임에 뒤지지 않았다. 실제로 놈이 쏜 불완전 스타플레임은 내가 쏘고 있는 사이킥 브레스와 호각을 이루고 있었다.
「나」「별의 축복을 받은 존재!」「결코」「지지 않으리!」
놈도 자기가 나를 압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스타플레임에 힘을 계속 실고 있었다.
출력은 거의 대등하다. 둘 중 누가 더 많은 에너지를 품고 있느냐에 승부가 갈릴 상황이다.
그리고 놈은 사냥의 표상을 쓴 나보다 근소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크으윽!’
놈과 나의 힘겨루기는 놈의 승리로 기울기 시작했다. 스타플레임의 강렬한 열기가 내 머리갑각을 태웠다. 모방비늘이 있음에도 내 머리갑각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조금만 더…!’
저쪽도 드래곤 파워를 이번에 처음 써봐서 그런지 화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나는 갑각과 비늘이 녹아내리는 고통에도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집중했다.
그때, 비늘이 녹아내린 부분에서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개미 같은 작은 생물이 기어 다니는 느낌인데 신기하게도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 희한한 기분은 내 몸 밖까지 이어졌다. 흡사 바람에 날리는 털처럼 말이다.
‘응?’
그리고 그건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어느새 녹아내린 갑각 안쪽의 속살에서 감각이 이어진 실지렁이 같은 것들이 마구 자라났다.
‘이건?’
신기한 일이다. 스타플레임과의 힘겨루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몸에 생긴 변화가 신경이 쓰였다.
감각이 느껴지는 실지렁이들은 내 몸에서 자란 기관이 아니다. 심지어 물질이라 할 수도 없다.
그건 불가해의 에너지로 구생되어 있었다. 사이킥 파워 외에 미지의 에너지가 뒤엉킨 상태였다. 누군가가 혼돈을 정제해서 가느다란 줄기다발로 만든 것처럼.
‘혼돈을 정제…설마?’
내가 몸에서 일어난 변화를 자각하자마자 실지렁이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털처럼 가느다란 실지렁이들이 뭉치더니 곧이어 내 침식 촉수만큼이나 큰 촉수로 자라났다.
상처 부위에 생겨난 촉수다발은 합쳐지자마자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엄청난 속도로 튀어 나갔다. 함선 주포가 쏜 빔처럼 끝을 모르게 늘어나는 그것들이 향하는 곳에는 오드 그라드가 있었다.
「?!」
촉수의 공격이 날아오자 놈은 미래를 읽었는지 급히 스타플레임을 종료했다. 나를 태우던 에너지가 즉시 사라지고 사이킥 브레스가 놈의 다리 한쪽을 날려 버렸다.
놈은 부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접근하는 에너지의 촉수다발을 빠르게 피하려 했다. 대부분은 피했지만 에너지 촉수 하나가 놈의 꼬리를 관통했다. 목적을 달성한 촉수다발은 허공에서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크아아아악!」
처음으로 오드 그라드가 비명을 지른다. 겨우 꼬리 하나를 잃었을 뿐인데도 엄청난 고통인지 놈은 사념파도 제대로 발산하지 못했다.
‘뭐가 됐든 지금이 기회야.’
나는 아직 건재한 날개를 펄럭이며 놈에게 날아들었다. 놈 또한 더 이상 비행을 유지할 정신 상태가 아닌지 서서히 낙하했다.
「네놈!」「네놈!」「네놈!」
흑룡이 내뱉는 고통과 증오, 각종 원념이 내게 스며든다.
놈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사념파에 한 가지 감정이 추가되었다.
그것은 필시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지금 검은 폭군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입을 벌린 채 날아오는 에이모프의 모습? 아니면 지금까지 자기를 도와준 예지 능력이 보여주는 미래?
「위대한 오드 그라드」「절대」「패배하지 않…」
놈의 사념파가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목이 잘린 흑룡의 시체가 구름 아래로 사라졌다.
[즈즈 즈즈즈 즈즈즈(너의 미래는 끝났다)]
태양을 등진 채, 나는 놈의 머리를 한입에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