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33
무수히 많은 가지들 위로 그림자가 깔린다. 흩어졌던 구름이 다시 돌아와 햇빛을 가렸기 때문이다.
서늘한 잿빛 속에서 우리는 스크리머의 흔적을 따라 이동했다.
띄엄띄엄 보이던 발자국이 점점 많아진다. 단순히 바닥에 찍힌 것 말고도 널려 있는 나무들, 땅에 박힌 바위들에도 뾰족한 합금 발톱이 남긴 자국들이 가득했다.
‘한두 마리가 아니야.’
스크리머의 다리는 8개이므로 발자국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긴 하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발자국이 지나치게 많았다. 족히 수십 개체 이상은 될 정도로 말이다.
“임무에 투입된 스크리머 개체 수는 얼마나 되지?”
나는 저장된 유전자 정보를 활용, 목소리를 흉내 내서 PS-111에게 질문했다.
“임무 시작 당시 300체가 투입되었습니다.”
“300? 꽤 많은데.”
녀석의 답변을 들은 나는 살짝 놀랐다.
스타유니언에서 일반 스크리머가 거의 생체드론 취급받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300체의 스크리머가 투입된 것이 딱히 드문 일은 아니다. 게임에서도 대규모 지상전이 벌어질 경우에는 스크리머가 수천 단위로 투입될 때도 종종 있었으니까.
다만 이는 플레이어들의 지휘로 인한 것. 스타유니언 정규군이 스크리머만 단독으로 투입하는 경우는 드물다.
스크리머는 강력한 전투력을 지녔지만, 전략적 사고와 유연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예상외의 사태가 발생할 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원래라면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뮤턴트 스크리머는 구 기종의 단점을 일반 모델과 지휘관급 모델, 이렇게 두 분류로 나누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뮤턴트 스크리머의 지휘관 모델이 뛰어난 전략적 판단력을 지녔다는 점은 PS-111만 봐도 알 수 있다.
오드 그라드와 싸울 때 녀석은 내가 보낸 신호를 금방 알아차리고 순양함을 이끌고 왔다. 일반 스크리머라면 절대로 그런 판단을 내리지 못했겠지.
‘그래도 다행인 건, 지금쯤이면 수가 꽤 줄었을 거라는 점이지.’
행성 전체에 위험한 생물들이 득실거리는 만큼 300체가 멀쩡히 남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실제로 PS-111도 아이스 호러의 공격을 맞고 반파되지 않았는가.
“얼마나 남아 있을까? 200? 250?”
“총 수는 300체에서 크게 줄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왜지?”
뮤턴트 스크리머가 강하긴 해도 아이스 호러라든가 글래셔 핀드 같은 에이펙스 생물을 만나도고 무사할 정도는 아니다.
눈에서 튀어나온 감지 기간으로 흔적을 수색하던 PS-111가 대답했다.
“제 뇌에 저장된 데이터에 의하면 전(前) 메인 컨트롤러 ‘피라 일레븐’의 전함에는 뮤턴트 스크리머의 생산 설비가 갖춰져 있습니다.”
“뭐?”
“유전자 정보, 대량의 에너지원, 자재로 활용할 유기물만 있다면 S모델 스크리머의 생산이 가능합니다.”
설정상 스크리머는 소모품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함선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있는 것이 스크리머 투입 후 궤도에서 대기 중인 함대로 지원사격을 하는 것 정도일까?
하지만 뮤턴트 스크리머는 구형보다 전략적 효용성이 높다 보니, 지원용 함선을 따로 마련한 듯싶다.
“스크리머 생산 라인의 규모를 생각해 보면 못해도 작스 알파급 전함은 되어야 시설이 들어갈 것 같은데. 그나마도 배 유지를 위한 시설만 빼고 다 보수 설비로 채워 넣어야 할 거고.”
“현재 데이터가 소실되어 정확한 답변은 드릴 수 없으니 타당한 추측으로 판단됩니다.”
XAX01급 전함은 스타유니언의 수도성(首都星) 이름을 딴 함선이다. 소위 작스 알파라고 불리는 이 배는 스타유니언의 군함 중에서는 가장 크기가 크고, 무장도 좋다.
물론 이 경우에는 스크리머 지원함으로 개조한 것이니 원 형태와 많이 다를 거다. 내부 시설과 장비들을 전부 해제하고 스크리머 관련 시설로 바꿔놨을 테니까. 배를 굴리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설비만 남아 있을 터.
“어디 착륙했는지는 기억나?”
“죄송합니다. 데이터 소실로 확인 불가합니다.”
작스 알파급 전함의 전장(全長)은 1km에 살짝 못 미친다. 이 주변에서 그만큼의 거대한 크기의 배가 착륙한 흔적은 보지 못했다.
게다가 그 정도의 배가 행성 대기권에 진입하는데 갤러곤들이 놓칠 리 없다. 그런 말이 없는 것을 보면 최상위권의 은신 능력을 갖췄다고 봐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이상했다.
“너희 목표가 나를 잡는 거라고 했지?”
“전 메인 컨트롤러 ‘피라 일레븐’이 설정한 특수목표A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맞습니다.”
“자가 수복이 가능한 스크리머가 300체. 거기에서 추가 생산까지 가능한 놈들이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지?”
돌이켜보면 놈들이 나를 습격할 기회는 몇 차례 있었다. 행성에 처음 왔을 때, 제이슨과 싸운 후 약해졌을 때, 오드 그라드의 기습을 받았을 때 등등.
그러나 녀석들은 한 번도 체계적으로 모여서 나를 공격한 적이 없었다. 스크리머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지휘관 모델을 배치한 것이 무색하게 말이다. 지금껏 내가 본 스크리머는 낙오된 녀석들 뿐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피라 일레븐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내 질문에 녀석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그 부분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
“시스템을 재부팅하는 과정에서 기억 데이터가 손상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녀석은 머리를 기계적으로 까딱였다. 그 모습은 사람이 잘 생각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떠올리기 위해 관자놀이를 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기억에서 파라 일레븐은 어떠한 계기로 인해 크게 손상되어 휴면 상태에 있었습니다.”
“휴면 상태라고? 갤러곤의 공격을 받은 거야?”
“아닙니다. 피라 일레븐은…error, 실례. 목표 달성에 필요한 행동을 하다가 실패하여 손상되었습니다.”
녀석의 말을 정리하자면 그동안 피라 일레븐은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면 윈터워커를 잡으러 갔을 때 만난 녀석도 비슷한 말을 했어.’
분명 놈은 명령 지연 상태라고 했다. 그밖에 제이슨을 죽인 다음 숲에 들어와서 만난 놈들도 똑같이 말했고.
그걸 보면 비교적 최근까지 놈들의 지휘자, 피라 일레븐은 활동 불능 상태에 있었다고 봐야겠지.
“이 흔적들은 놈이 다시 활동한다는 증거로군.”
“타당한 추측입니다.”
놈들의 전투가 발생할 확률이 높은데 유용한 정보는 마땅히 없었다. 우리가 뒤쫓는 적이 다수라는 점 빼고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으니까.
‘PS-111이 하급 개체는 조종할 수 있다고 했던가?’
처음 녀석을 만났을 때, 녀석이 말했다. 하급 모델은 물리적으로 회로에 접촉해서 통제권을 강탈할 수 있다고 말이다. 지휘관급 개체도 뺏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피라 일레븐이 통제권의 보안을 개선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했다.
‘스크리머 중 몇 마리는 생포해야겠어.’
그러면 전함이 착륙한 위치, 놈들의 계획 등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
대화가 끝난 후에도 우리는 한참 흔적을 따라 이동했다.
처음에는 발자국만 가득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흔적들도 눈에 띄었다. 발자국들이 나 있는 곳 주변에 갈기갈기 찢어진 생물들의 잔해들이 널려 있었다.
“에너지를 보급한 것입니다.”
“그런 것 같네.”
블러드 리버의 기능을 이식한 PS-111는 입으로 고기를 섭취하는 것에 추가로 생체에너지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몸에 에너지를 보급할 수 있다. 녀석이 예외적인 것이지, 원래 스크리머는 작은 먹이를 입에 달린 흡수 튜브로 빨아들이는 방식으로 영양을 얻는다.
‘피는 굳은 지 오래야.’
건조하고 서늘한 장소다 보니 시체조각들은 아직 부패가 더디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덕분에 놈들이 어떤 식으로 사냥했는지 조금이나마 추측할 수 있었다.
‘생산 설비를 갖췄다더니 개조한 놈들이 있어.’
PS-111이 유전자를 흡수하면서 몸을 업그레이드시킨 것처럼 적 스크리머 중에도 환경에 맞춰 변화된 개체가 있었다.
‘…가령 원거리 공격 수단이라든가.’
나는 피 웅덩이 속에서 내 손가락만한 커다란 탄환을 꺼냈다. 모양은 스톰건의 열화우라늄탄환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이게 뭔지 알겠어?”
“APDT의 열화우라늄탄과 유사한 디자인입니다만, 내부 구조를 보니 집속탄 형태로 개조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래. 안에 블랙실버 조각이 섞었어.”
찌그러진 탄환을 털자 안에서 소량의 블랙실버 합금 파편들이 나왔다. 결코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특정 생물종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양.
그리고 이 행성에서 블랙실버를 넣은 집속탄으로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생물은 딱 한 종류 밖에 없다.
‘갤러곤!’
놈들이 어디를 노리는지 알 것 같다.
“오드 그라드의 둥지가 어디 있는지 알아?”
“예. 이쪽입니다.”
“시간이 없으니 내 위에 타서 안내해 줘.”
한시가 급하기에 나는 등에 진 시체들을 전부 내려놓고 PS-111을 내 머리 위에 태웠다. 그리고 26호와 아드하이도 불렀다.
[즈즈즈 즈즈 즈즈즈즈(시간이 없으니 내 위에 타)]
「먹이 안 가져가?」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나중에 돌아와서 챙기자)]
26호는 나의 심각한 분위기에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얌전히 내 몸 위에 올라탔다. 26호는 몸을 줄여서 가슴 쪽 작은 팔에 안겼다.
녀석을 꼭 안은 나는 아드하이를 불렀다.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날아서 갈 거야. 준비해)]
「어디로」「가는 거?」
[즈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오드 그라드의 둥지로 갈 거야)]
나는 접어 놨던 날개 팔을 활짝 펼쳤다. 거대한 피막이 펼쳐지고 내 몸이 급속히 위로 치솟았다. 가지들을 박살 내며 날아오른 내 뒤로 아드하이가 쫓아왔다.
「둥지」「위험해?」
[즈즈즈(아마도)]
“이쪽 방향으로 쭉 가시면 됩니다.”
둥지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아드하이도 바짝 긴장했다. 나는 전속력으로 PS-111이 안내하는 쪽으로 날아갔다.
비행하던 중에 혹시라도 스크리머들이 숲에서 사격할지도 몰라서 보조기관으로 아래를 계속 감시했다. 나와 아드하이의 그림자가 지나가도 아래에서는 어떠한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상황이 안 좋아.’
분명 저 숲 어딘가에 수백에 달하는 스크리머들이 몰려다니고 있을 텐데 지나치게 조용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코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그렇게 반나절에 가깝게 긴장을 유지하며 날아간 결과, PS-111이 말한 용의 둥지가 위치한 절벽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절벽 주변에는 스크리머나 다른 생물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잠깐,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지금쯤이면 아드하이의 대리자인 넬 게르마가 귀환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우리가 둥지에 가까워진 이상, 갤러곤 한두 마리 정도는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큰어른」「뭔가」「이상해」「무리」「경계」「없어」
아드하이도 나와 비슷하게 느낀 것인지 의아해하는 사념파를 흘렸다.
갤러곤들은 스카이웨일 같은 천적들 때문에 항상 둥지에 감시역을 둔다.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을 수 있기에 그린 갤러곤이나 화이트 갤러곤들이 돌아가며 둥지를 지킨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것.
아드하이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하려는데, 내 보조기관이 숲 아래에서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방금까지 아무런 느낌도 없이 조용하던 숲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개미떼가 움직이는 것처럼 수많은 움직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나는 급히 아드하이에게 파장을 날렸다.
[즈으으으 즈즈 즈즈즈(아드하이! 힘을 사용해!)]
「!」
내가 파장을 날린 것과 동시에 숲에서 엄청난 수의 탄환이 쏟아져 나왔다.
저 위에 있는 먹구름보다도 새까만 죽음의 비가 나와 아드하이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날아온다. 나는 전투용 팔로 26호를 보호하면서 아드하이 아래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시야를 완전히 가릴 정도로 빼곡하게 날아온 블랙실버 집속탄이 내 전신을 때린다. 나는 사이킥 생물이 아니기에 저 안티 사이킥 탄환에 큰 피해를 받지 않는다.
게다가 관통력이 떨어지는 집속탄으로는 내 갑각과 비늘을 뚫을 수 없다.
‘하지만 녀석들은 아니야.’
놈들의 사격은 내게 전혀 피해를 주지 못했지만, 아드하이와 26호는 얘기가 다르다. 사이킥 파워에 크게 의존하는 26호라면 블랙실버 집속탄에 맞을 시, 완전히 전투불능이 될 거다.
그나마 절대방어 기술인 ‘레드아머’를 쓸 수 있는 아드하이는 상황이 낫지만, 녀석도 아직 머리와 앞발 일부만 보호할 수 있어서 저들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
[즈즈 즈즈즈(모두 괜찮아?)]
「나는 괜찮아.」
「큰어른」「덕분에」「피했어」
다행히 내가 방패가 된 덕분에 26호와 아드하이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저는 몇 발 맞았습니다만, 경미한 부상입니다.”
내 머리 위에 있던 탓에 좋은 표적이 된 PS-111만 예외적으로 몇 발 맞았지만 말이다.
“너는 내가 나중에 좋은 먹이들 챙겨줄게.”
“확인했습니다.”
짧은 장전 시간이 끝나고, 지상에서 사격이 재개되었다. 놈들은 나는 못 죽이더라도 아드하이나 26호만은 끝장낼 생각인지 미친 듯이 쏴댔다.
‘여기서 싸우기에는 좋지 않아.’
[즈으으으 즈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아드하이는 내 위에 바짝 붙어서 따라와)]
나는 스크리머의 총탄을 맞으며 둥지 쪽으로 비행했다. 아드하이도 내 등에 붙다시피 해서 따라왔다.
그리고 나는 놈들이 있는 장소에 적당히 내려앉았다. 내려오자마자 나무들이 스산하게 흔들렸다.
스크리머 떼거리들이 우리를 쫓아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