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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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리머는 뇌와 연결된 기계에 의해 모든 활동이 통제된다. 개조되기 전의 자아가 남아 있지만, 신체 활동 제어권은 전부 기계가 갖고 있다.
‘비명을 지르는 자’라는 명칭과 달리 자기 의지대로 소리 하나 낼 수 없는 존재. 사실상 움직이는 감옥이나 다름없다.
이는 신형 뮤턴트 스크리머도 마찬가지였다.
개조 대상의 신원이 불분명하다는 것, 유전자 흡수를 통한 유기물 부분을 개조시킬 수 있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나 기계의 지배를 받는 생체병기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리고 AI가 통제하는 전투 병기의 가장 큰 장점은 두려움이 없다는 사실이다.
곁에 있던 동료가 플라즈마탄에 맞아 소실되거나, 헐크 뮤턴트가 일반 병사를 찢는 광경을 목격해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저 목표 달성을 위해 꾸준히 전진할 뿐.
물론 스크리머의 재료가 되는 생물의 자아는 공포심을 느끼겠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머리에 연결된 감정 제어 모듈이 활성화된 이상, 본체의 감정이 움직임에 영향을 주지 못할 테니까.
아무튼 스크리머들은 예상외의 사태가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공간이 제멋대로 움직인다거나, 동굴 전체에 생명 반응이 나타난다거나 하는 기괴한 일이 연달아 터져도 말이다.
“D조 탐지 시스템 수정 요망함.”
「B조 열 감지 시스템으로 전환. 통로 전체에서 열이 감지되므로 유용하지 않음.」
「C조 ‘케이브고일’ 유전자로 획득한 음파 감지 시스템은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확인됨.」
「E조 사이킥 탐지 시스…지지, 시험…지지지」
「피라 일레븐에게 보고 중. 모두 대기…지지」
“사이킥 방해 파장 관측됨. 회선 재정비가 필요함.”
D조의 통신을 담당하는 뮤턴트 스크리머의 말에 다른 개체들이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여러 생물의 특징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괴물들이 각자의 탐지 기관을 활용해 주변을 감시했다.
그때 동굴의 안쪽에서 잿빛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선두에 있던 스크리머가 이를 감지하고 보고했다.
“공기 중에 유독성 물질 확인됨.”
“방독 튜브 연결.”
금속 골격과 생명 유지 장치에 연결된 튜브 중 일부가 분리되어 입에 콱 틀어박혔다.
「쿠우우」「공기의 유해 성분 분석 중.」
「적 습격 가능성 78%」「쿠우우」
D조에 소속된 스크리머들은 튜브로 막힌 입 대신 딱딱한 기계 음성으로 대화했다.
좁은 통로에 독성 안개가 흘러들어온다는 것은 적의 습격이 멀지 않았다는 뜻. 스크리머들은 각자 무기를 꺼내 전방을 주시했다.
「쿠우우」
동굴에 울려 퍼지는 거친 숨소리. 그 속에는 다른 소리도 섞여 있었다. 질척한 진흙탕 위를 걸을 때 나는 그 소리는 발소리였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접근하는 중이다.
「쿠우우」「마그마게이터의 발화 기관이 유효할 것으로 확인됨.」「쿠우우」
「선제공격 개시.」「쿠우우」
스크리머들 중 살점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있는 개체들이 앞에 나섰다. 뒤룩뒤룩 찐 살점 사이에 있는 금속 파이프들이 움직여 전방을 향했다.
이윽고 강렬한 화염이 파이프에서 뿜어져 나왔다. 체내에 저장된 가스와 인화성 물질로 만든 불길이 통로를 집어삼켰다.
그때, 전방 안쪽 깊숙한 곳에서 보라색 에너지탄이 날아와 화염을 방사하는 스크리머를 강타했다. 살점이 터져 나가고 안에 있던 인화성 물질이 흘러나와 주변 스크리머를 뒤덮었다.
뮤턴트 스크리머의 금속 골격과 기계 장치는 높은 내열성을 지니고 있다. 유기체 부분의 외피 또한 고열에 저항력을 지니도록 유전자가 조작된 상태. 그렇기에 이들 중 그 누구도 몸이 불타고 있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물론 몸의 원 주인은 극심한 작열통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지만.
「갤러곤으로 확인.」「쿠우우」
「반격 개시함.」
스크리머들이 몸에 새로 덧붙인 다리를 전방에 겨냥하자 보라색의 반투명한 에너지탄이 발사되었다. 갤러곤의 유전자를 흡수해서 사이킥 라이플 형태로 반영한 것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위에 사이킥 파워로 이루어진 에너지탄이 쏟아지자 어두컴컴한 동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긴 통로의 끝에서 작은 몸집에 붉은색 피부를 지닌 갤러곤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적 추적 개시함.」「쿠우우」
「확…」
D조의 스크리머들이 적을 추적하려는 순간.
후방에 있던 PS개체가 대답하다 말고 갑자기 쓰러졌다. 모두의 시선이 쓰러진 개체에게 향했다.
그의 머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리고 뒤에서 또다시 남색 에너지탄이 날아왔다. 이번에도 지휘관 역할을 하는 PS모델의 머리를 노린 공격이었다.
D조의 지휘관 개체는 금속 다리를 들어 공격을 막아 냈다. 다리는 마치 컬트들의 물질 분해 무기에 맞은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컬트의 물질 분해 병기 ‘데몰리셔’와 유사한 효과로 판명됨.」「쿠우우」
「쿠우우」「사격 교란용 물질 살…」
「측면에서 적습.」
「적습…」
전, 후방의 적을 공략하기 위해 준비하던 그때, 그들이 서 있던 양측의 검은색 벽이 동시에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 하얀색 비늘을 지닌 갤러곤들이 튀어나왔다.
스크리머들은 자기들이 서 있는 통로가 일직선으로 뚫린 동굴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원래 이곳은 갈림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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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조와의 수신 상태 불량. 회선 복구 진행 중.”
「B조, C조와 합류 후 거대한 공동에 진입.」
E조는 앞서 들어간 조의 지휘관들과 계속해서 교신을 시도했다.
씨 데몬과 여러 사이킥 생물의 유전자를 합성한 뮤턴트 스크리머들에게 통신 장애라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자기기를 이용하는 것도 아니고 특유의 사이킥 파워를 이용해 서로 소통하는데 누가 방해할 수 있겠는가.
강력한 사이킥 생물, 이를테면 씨 데몬급의 생물이라면 회선을 교란할 수 있겠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이 둥지의 전(前) 주인인 블랙 갤러곤은 이미 죽었고, 씨 데몬은 이 행성에 살지 않으니까.
E조의 지휘관 모델 둘이 통신 장애의 원인을 찾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 외부에서 명령이 날아왔다.
「피라 일레븐 명령 전달함. 함정으로 판단되니 서둘러 후퇴할 것.」
“명령 확인. 후퇴함.”
아까부터 계속 잡음이 꼈는데 운이 좋았다. E조는 바로 둥지를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D조의 스크리머들과 연락이 닿지 않았지만, 그건 총지휘관인 피라 일레븐이 알아서 할 문제. 중간단말기 역할에 불과한 이들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주기적인 구조 변경으로 지도 기록은 무의미함.”
“현재 위치를 근거로 판단했을 때 벽을 돌파하는 것이 효과적.”
“확인. 돌파 준비.”
다리가 많이 달린 스크리머가 앞에 나섰다. 헬사이드 호넷의 유전자를 적용한 이들은 다리에 매우 거대한 발톱을 부착하고 있었다.
헬사이드 호넷은 낫 발톱이 달린 앞발로 자기가 머무르는 동굴의 흙을 파내곤 한다. 원본이 했던 것처럼 스크리머들도 벽을 파서 나갈 생각이었다.
낫 모양의 앞발이 달린 스크리머들이 굴착을 시작했다. 예리한 낫 발톱이 움직일 때마다 단단한 벽이 모래처럼 뭉텅이로 파였다.
“흙 성분에 정체불명의 물질이 포함됨.”
“물질에서 생명 반응 관측.”
낫 발톱에는 검은색에 껄쭉한 물질이 잔뜩 묻어 있었다.
어쩌면 저 물질이 그들의 통신을 방해하는 요소일지 모른다. 후방에 있는 지휘관급 PS모델들은 바로 이 사실을 외부에 전달했다.
“갤러곤의 둥지에서 발견되지 않는 이질적 물질 확인. 드론 사용이 불가능하니 관련 정보만 우선 전송하겠음.”
「치직, 물질, 지지, 확인, 지직, 확인…」
“신 물질을 발견했으니 정보를 전송함. 확인 바람.”
방금까지는 멀쩡하던 통신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E조의 지휘관들이 다시금 보고하려는데 저쪽에서 통신이 날아왔다.
「지지, 지지지지, 확인, 지지, 나, 지지지」
“통신 상태 불량함. 확인 바람.”
「지지지, 나빠, 치지지, 나빠, 나빠, 지, 나빠, 나빠」
“PS-005?”
「나빠나빠나빠나빠나빠나빠나빠나빠나빠나빠나빠나빠나빠나빠나빠나빠나빠나빠나빠나빠…」
순간적으로 발생한 통신 폭주에 PS모델들은 급히 통신을 중단했다. 이후 다시 연결하려고 했지만, 완전히 먹통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통신이 차단된 것과 동시에 그들의 뒤편에서 막대한 사이킥 파워의 흐름이 느껴졌다. 벽을 뚫고 있던 스크리머들까지 이를 감지하고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 통로 위에는 분홍색의 풍선처럼 생긴 물체가 놓여 있었다.
스크리머가 봐도 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물체였지만, 지휘관급 개체는 ‘저것’이 뭔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건 이 행성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적 발…겨억?!”
명령을 내리려던 PS모델이 그대로 정지했다. 분홍색 풍선을 향해 달려들려고 했던 개체들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스크리머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그들의 몸이 공중에 천천히 떠올랐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짓눌리듯 그들의 몸이 서로 겹쳐서 뭉쳐지기 시작했다.
고강도 합금으로 이루어진 금속 골격은 고무마냥 구부러졌고, 유기체 부분과 연결된 기계 장치는 스파크를 튀며 으스러졌다. 뮤턴트 스크리머의 모습들이 어마어마한 수준의 수압을 자랑하는 심해에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변해 갔다.
“위, 위, 위, 위험, 위험, 위험.”
스크리머들 중 일부가 사이킥 에너지탄을 발사했지만, 소용없었다. 허공에서 박제라도 된 그들처럼 에너지탄들도 날아가다가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지, 집속, 집속탄, 교, 교체….”
“대, 대응, 대응, 대응, 불, 불, 불….”
“후퇴, 후, 후기기기긱!”
그들은 어떻게든 에너지탄 대신 물리적인 사격 수단으로 교체하려고 했지만 역시나 불가능했다. 몸 안의 모듈과 금속 골격이 엉망이 된 이상 그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단말마를 내지르는 것 말고는 말이다.
몇 분이 지나고 통로는 침묵에 잠겼다.
그곳에 수십 체의 스크리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거대한 핏빛 구체만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모든 일을 끝마친 분홍색 풍선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구체가 쪼개지며 내용물이 쏟아졌다.
피와 살점, 잘게 쪼개진 금속 조각, 역한 냄새를 풍기는 화학 약품들이 뒤섞인 그 잔해들.
바닥에 흩어진 그것들은 동굴 벽을 덮고 있던 검은색 점액질에 의해 흡수되었다.
잠시 후 그곳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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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들이 공격받는 사이, B조와 C조는 동굴 안쪽으로 계속 진입했다.
통신이 끊기기 전, 그들이 마지막으로 받은 명령은 둥지 내부 수색과 특수목표A의 사살. 목표 달성에 필요한 정보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탐사를 진행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진입한 그들 앞에 여태껏 보지 못했던 거대한 크기의 공동이 나왔다.
“공동 발견. 공기 중 다량의 수분이 감지.”
“생물이 다수 머무른 흔적 확인됨.”
공동 내부에는 상당한 규모의 늪이 있었다. 스크리머 중 하나가 늪에 다가가 다리 하나를 집어넣었다. 온도가 높은 것을 보아 이곳은 갤러곤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가 틀림없었다.
“주변 환경 특성상 늪이 위치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움.”
“확인 필요.”
“늪 내부 수색 개시.”
“확인.”
B와 C조에 속한 S모델 스크리머들이 늪에 진입했다. 밖에서는 지휘관급 개체들이 공동 밖과 이어진 통로에서 대기했다. 여차하면 하급 개체들이 시간을 버는 사이 후퇴하기 위해서였다.
“생명 반응 다량 감지.”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음.”
생명 반응이 감지되는데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는 묘한 상황. 다른 탐지 기능을 돌려 봐도 전부 모순적인 결과만 도출될 뿐이었다.
그렇게 수색을 이어 나가던 도중, 어느 한 개체가 수면이 부자연스럽게 요동치는 것을 발견했다. 늪 중앙으로부터 파장이 주기적으로 흘러나와 수면을 흔들고 있었다.
스크리머들은 재빨리 흩어져서 포위 진영을 갖추었다. 이상 현상을 발견한 개체는 파장의 진원지에 천천히 접근했다.
끈적거리는 검은색 액체를 해치고 나아간 그의 앞에 검은색 바위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그 바위에서부터 파장이 흘러나오는 것인지 주변의 수면이 얕게 흔들렸다.
“잠수해서 확인 필요.”
“허가함.”
스크리머는 알 수 없는 물질로 가득 찬 늪 호수에 고개를 깊이 처박았다. 수생 생물의 유전자가 섞인 덕분에 그는 쉽게 늪 내부 상황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앞에 있는 것은 바위라기보다는 매우 크게 자란 종양에 가까웠다. 바위같이 생긴 물체로부터 여러 가닥의 길쭉한 줄기들이 뻗어 있었다. 줄기의 길이는 제법 길어서 바위를 포위하고 있는 스크리머들의 발아래까지 닿을 정도였다.
줄기를 확인한 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바위로 향했다. 그리고 바위를 보자마자 깨달았다.
바위, 아니 바위처럼 보이는 ‘그것’이 눈을 뜨고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특수목….”
그는 적에 대해 보고하려고 했지만, ‘그것’의 행동이 더 빨랐다.
늪 아래에 깔려 있던 놈의 거대한 팔이 튀어나와 그를 낚아챘다. 놈의 손과 닿은 스크리머의 유기체 부분은 급속도로 쪼그라들다가 부서져 버렸다.
스크리머의 에너지를 빨아먹은 ‘그것’, 아니 ‘특수목표A’가 늪에 잠겨 있던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