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38
“방어 불가. 소각 프로토….”
나는 턱을 크게 벌려서 스크리머의 머리를 세게 씹었다. 지휘부를 상실한 놈의 육체는 무력하게 주저앉았다.
‘끝났네.’
놈들의 수가 워낙 많아서 전부 잡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내 주변에는 녹다만 금속 골격들의 잔해가 보였다. 검은색 점액들이 이를 부지런히 녹여서 영양분으로 바꾸고 있었다.
‘다른 쪽도 살펴볼까.’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애들이 실수로 놓칠 수도 있으니까.
나는 입에 들어간 스크리머 머리를 삼키고 둥지와 링크했다.
동굴 전역에 내 감각이 퍼지고, 검은색 점액 위를 거니는 움직임들이 감지된다. 다수의 생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지만, 그 중 스크리머는 없었다.
‘싸우다가 죽은 갤러곤은 없어.’
이쪽의 손실은 0. 이미 갤러곤 중 다수가 죽은 상황에서 그나마 기쁜 소식이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애들 중 둘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링크를 해제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통로 뒤쪽에서 26호와 PS-111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닥파닥 애기들한테 못된 짓한 나쁜 친구들 혼내줬어.」
[즈즈즈(잘했어)]
솔직히 26호가 망설일까 봐 살짝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갤러곤들을 잃은 아드하이가 슬퍼하는 것을 본 녀석은 스크리머들에게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녀석이 스크리머들과 마주할 때마다 인신공양으로 공급되는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정도였으니까.
PS-111도 괜찮은 실력을 보여줬다. 아드하이, 갤러곤들과 여러 번 같이 싸워서 그런 걸까. 서로 번갈아 가며 미끼 역할을 해서 적을 제대로 교란시켰다.
「작은애기 어디 갔어?」
“‘갤러곤’ 해츨링을 지키러 갔습니다.”
녀석의 말대로 아드하이는 돌아오는 대신 숨은 해츨링들을 확인하러 갔다. 나야 둥지와의 링크 덕분에 숨어 있는 블루 갤러곤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지만, 아드하이는 그 사실을 모르니까.
‘갤러곤들이 많이 죽었으니 걱정되겠지.’
무피해로 이기긴 했지만, 이익보다는 손해가 큰 싸움이었다. 내가 돌아오기 전, 다수가 놈들에 의해 죽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내버려 두자.’
[즈으으으 즈즈즈 즈즈즈(아드하이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응.」
26호도 메가콥에 의해 동족을 잃은 경험이 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녀석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화제를 돌리는 겸,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PS-111을 불렀다.
“내가 말한 것은 어떻게 됐어?”
“명령하신대로 S모델 스크리머 중 일부의 시스템을 리부팅했습니다.”
녀석은 자랑스럽게 자기가 만든 결과물을 꺼내 들었다.
‘이건?’
PS-111과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이 말했다. 상대가 하급 개체인 S모델이라면, 제한적으로 통제가 가능하다고.
당시 녀석은 물리적 접촉이 필요하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래서 마냥 형편 좋게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과 같은 모습을 예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머리만 남았잖아?’
갈고리 손톱이 달린 녀석의 손 3개가 스크리머의 머리들을 하나씩 쥐고 있었다.
난폭하게 뜯겨진 목 아래로 소형 칩들이 부착된 척추가 늘어져 있는 게 보였다. 척추가 덜렁덜렁 붙어 있는 머리를 들고 있는 녀석을 보니 고전 격투게임에서 피니쉬 기술을 끝낸 캐릭터가 떠올랐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자 녀석도 내가 원하는 것이 이게 아닌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녀석은 변명하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항이 거세서 제압하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혹시 이 머리들도 너처럼 몸을 재생시킬 수 있어?”
“이 머리들은 불가능합니다.”
“왜?”
“S모델에는 자기수복능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들의 생명 유지 기능은 전적으로 제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분리되는 즉시 사망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머리 3개의 척추의 끝이 전부 녀석의 등에서 튀어나온 금속 호스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번에는 정보만 챙겨야겠네.’
원래 내가 계획했던 것은 이게 아니었다.
녀석이 스크리머들을 해킹하는데 성공하면, S모델로 구성된 군단을 꾸려보려고 생각 중이었으니까.
‘아쉽지만 아직 기회는 있어.’
상대가 저항하지 못하면 몸을 온전히 남기고 지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령 이제 막 생산되어서 마지막 조율을 앞두고 있을 때라든가.
“생산 공정을 담당하는 시스템을 장악한다면 원하시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PS-111도 내 생각과 비슷한 얘기를 꺼냈다.
마침 얘기가 나온 김에 물어봐야겠다. 나는 녀석에게 제일 중요한 사실을 물었다.
“놈들의 배, 피라 일레븐, 둘 다 어디 있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녀석은 정보를 열람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러자 녀석이 쥐고 있던 머리들이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기기기기긱.”
“아아아아아.”
“게게게.”
머리만 남은 채 눈을 뒤집고 있는 스크리머의 머리들. 그들의 입에서 비트음 비슷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멀쩡한 인간이 보면 기겁할 광경이었지만, 이 자리에는 평범한 사람이 없다.
「친구가 이상해. 왜 저러는 거야?」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즈(중요한 기억을 찾는 중이야)]
「기억? 어떻게 찾아?」
26호는 PS-111의 행동에 호기심을 느낀 것 같았다. PS-111이 정보를 빼내는 동안, 나는 26호와 잡담을 나눴다.
「기억 보는 거 재밌어 보여.」
[즈(그래?)]
「응. 친구와 친구가 똑같이 되는 거잖아.」
[즈 즈즈즈즈(좀 다르지만)]
「다른 거야?」
아드하이의 일로 우울해 하던 녀석은 의외의 부분에서 관심을 표했다. 녀석이 다른 존재의 생각을 읽거나 이해하는 것에 흥미를 느낄 줄이야.
‘동족한테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26호는 PS-111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동족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PS-111이 할 수 있는 일은 자기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읽는다라.’
사이킥 기술 중 상대가 남긴 흔적을 통해 행동을 읽어내는 기술이 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게임 속 씨 데몬에게는 그런 특성이 없었다.
‘아니, 그건 모르는 일이야.’
오드 그라드의 사례를 보면 마냥 게임 속 기준으로만 생각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26호도 내가 모르는 능력을 얻을 수도 있고.
‘물론 그랬다면 진작 얻었을 테지만.’
녀석을 보면 새 능력 때문이라기보다는 호기심 때문에 질문하는 것에 가까웠다. 자기 동족이 모르는 능력을 사용해서 배우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지.’
씨 데몬은 매우 강력한 생물이지만, 이 넓은 우주에는 녀석의 목숨을 위협하는 요소가 무수히 많다. 나를 따라온다면 녀석보다 훨씬 무서운 힘을 지닌 존재들과 마주하게 될 터. 강적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혹은 강적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나는 기특한 마음에 녀석을 쓰다듬어줬다. 녀석은 내 손길에 기쁨을 표하면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가 얘기를 나누는 사이, 스크리머들로부터 정보를 모두 빼낸 PS-111이 눈을 떴다.
“장소를 확인했습니다. 피라 일레븐과 함선은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다행이네.”
적의 위치를 알았으니 이제 공격만이 남았다.
‘그 전에 먼저 하늘의 어머니랑 함 오르트부터 데려오고.’
용의 둥지가 워낙 넓어서 둥지를 한계치만큼 깔아 놨다. 이전에 설치했던 둥지들은 자동으로 쇠퇴했다. 하늘의 어머니는 함 오르트를 치료하기 위해 함께 전(前) 둥지로 갔었다. 그녀라면 둥지가 사라지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거다.
‘나와 여러 번 싸웠으니까.’
어쩌면 지금쯤 이쪽으로 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세한 얘기는 이따가 들을게.”
“알겠습니다.”
「친구야, 나 궁금한 거 있어.」
“무엇이든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얘기를 나누는 둘을 두고, 나는 동굴 입구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끈적이는 점액들을 밟으며 길고 어두운 통로를 따라 걷다 보니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밖에서부터 흘러들어오는 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누군가가 입구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네가 여기까지 나온 걸 보니 상황이 이미 끝났구나?」
「검은색 동족」「유성의 딸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하더니.
굳이 녀석들을 찾으러 갈 필요가 없어졌다.
-
이름도, 찾아오는 항로도 기록되지 않은 미지의 행성.
대기권에 깔린 구름 때문에 밖에서 보면 칙칙한 잿빛으로 보이는 그곳이 요사이 갑자기 나타난 외부의 침입자들로 인해 급격히 소란스러워졌다.
구름이 갈라지며 행성의 표면이 드러나고, 대량의 에너지 충돌로 인한 여파가 행성 전역에 퍼졌다.
인공적으로 발생한 에너지 폭풍은 행성 안쪽뿐만 아니라 바깥쪽에도 영향을 미쳤다.
“민석 님, 대기권이 안정되었습니다.”
“잘됐군. 통신 회선과 위성 레이더가 복구되면 내게 보고하도록.”
“옙!”
시현 유진의 기함 내 상황실에서는 승무원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최근 발생한 기상이변으로 인해 행성 내부와의 통신이 원활하지 않았다. 이를 정상화시키려면 몸이 두 개여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소란스러운 함교 위에서 함장 대리 민석 유진은 굳은 표정으로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행성 지도를 쳐다보고 있었다.
행성과 똑같이 구체 형태로 구현된 지도 위 어느 한 부분에는 붉은색 표시가 떠 있었다.
민석의 주인, 시현 유진이 탐사대를 이끌고 내려간 장소다.
‘빌어먹을.’
민석은 시현 유진의 클론이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
그가 섬기던 주인은 가문의 정의가 바로 서는 것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가주의 자리를 찬탈한 아키라 유진을 단죄하고, 정당한 핏줄이 가문을 통치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시현 유진의 목적, 이 자리의 모두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저 시현 유진의 복제품은 대업보다 다른 것에 관심이 더 커 보였다.
그 뿐일까? 시현 유진이 걸어야 할 길에서도 이탈하는 중이다. 당장 가문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 포섭해야 하는데, 이런 쓸데없는 짓거리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현재 메가콥 내에서는 노블캐피탈 티앤씨와 프라임캐피탈 에저튼 간의 내전이 한창이다. CEO인 아키라는 이를 중재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 견제 없이 빠르게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시현 유진도 그 사실을 분명 알고 있었지만, 지구로 가는 대신 이런 외진 행성에 와 있다.
‘차라리 크래딧 확보를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이해하겠지만….’
위성 레이더가 정상이었을 때 민석은 봤다. 이 행성은 자원의 보고였다. 컬트에서 환장하는 노바메탈이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데다가 희귀한 유전자들을 품은 생물들이 가득했다. 이를 잘 활용한다면 시현 유진의 세력은 막대한 크래딧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시현 유진은 행성을 통해 크래딧을 벌 생각 대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유물에 집착하고 있었다.
‘고대 유물? 말도 안 되는 소리.’
메가콥의 노블캐피탈 대부분은 다수의 행성을 보유하고 있다. 유진 가문도 보유한 유전자 풀을 넓히기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행성 탐사를 진행 중이고.
그렇기에 민석은 이 우주에 비밀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몰락한 제국이 남긴 비밀 병기, 고대 문명의 유물, 초과학적 원리로 작동하는 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우매한 대중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요소일 뿐.
메가콥 상류층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시현 유진은 무시하고 있다.
‘…결함품인가.’
몹시도 불경한 생각이었지만, 민석은 반쯤 확신했다. 헛된 목표를 위해 내려간 시현의 복제품은 불량품이다.
‘돌아오면 대책을 마련해야겠어.’
시현 유진의 동의가 없으면 새로운 클론을 만들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배제하는 것은 더더욱 심각한 문제다. 이 자리의 모두가 정우 유진의 유일한 핏줄을 따르기 위해 모인 것이니까.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
‘그분께서 남기신 물건을 쓸 수밖에.’
시현 유진이 죽기 전, 자기 복제품의 결함을 우려해 남긴 물건이 있다. 그것을 사용한다면 시현의 복제품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으리라.
민석의 서늘한 시선이 홀로그램 지도 위의 붉은색 표시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