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240화 (241/400)

Ep. 240

둥지에서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분홍색 해파리였다.

몸을 10m크기로 키운 26호였다. 녀석은 내게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26호 곁에는 아드하이와 하늘의 어머니가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리폰 형태로 변신한 하늘의 어머니가 아드하이에 비해 몸집이 훨씬 컸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화이트 갤러곤으로 성장한 이후 아드하이는 하늘의 어머니와 비슷해졌고, 레드 갤러곤의 힘을 얻은 지금은 몸길이가 더 길어졌다. 날개까지 합치면 하늘의 어머니보다 훨씬 크고.

‘마음이 많이 풀렸나 보네.’

블루 갤러곤들과 같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다. 26호와 함 오르트의 위로가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눈만 뜬 채로 주변을 둘러보니 검은색 늪에 잠긴 하얀색과 녹색의 섬들이 보인다. 화이트, 그린 갤러곤들 중 아직 부상이 아물지 않은 녀석들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다행히도 몸에 난 상흔들은 거의 아물었다. 다만 뿔은 회복이 더 오래 걸리는지 부러진 상태로 남아 있는 녀석들도 있었다.

녀석들의 몸을 체크하는데 갑자기 공동과 연결된 통로 부분에서 빛이 반짝였다.

‘뭐지?’

금방 꺼지긴 했지만, 이미 본 이상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평소의 26호였다면 지금 나의 움직임으로 깨어났을 텐데 꽤 피곤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녀석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늪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PS-111이 없네.’

공동 내에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빛이 번뜩인 통로로 나가자 예상대로 PS-111이 있었다.

녀석은 스크리머 머리와 동기화하는 중이었다. 내가 나타나자 녀석은 행동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일어나셨습니까.”

26호가 녀석을 따라 하듯, PS-111 또한 26호의 생활 흐름에 맞춰 행동한다. 26호가 잠들면 녀석도 시스템을 일부 절전시키고, 26호가 먹이를 먹으면 녀석도 에너지 보충 작업을 한다.

명령이 있을 때 말고 녀석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뭔가 찾을 것이 남았어?”

“예. 기억 정보 중 확인할 것이 있었습니다.”

“피라 일레븐에 관한 거야?”

“아닙니다. 몇 가지 흥미로운 기억 정보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늘 그렇듯 무표정한 녀석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다르게 느껴졌다. 감정적이라고 할까.

녀석은 잠깐의 침묵 끝에 다시 말을 이었다.

“‘아이스 호러’에게 소화되는 과정에서 제 기억 데이터는 대부분 소실되었습니다. 저는 제 몸의 원본이 어떠한 기억을 지녔는지,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다른 놈들도 비슷한지 확인하려고 한 거야?”

“예.”

녀석은 모종의 일로 아이스 호러의 공격에 몸이 크게 손상되었다. 26호가 PS-111을 주웠을 때 녀석은 머리만 남아 있었다.

녀석은 작은 머리 안에 최소한의 생명 유지 기능을 집어넣어서 목숨을 부지했다. 일련의 과정에서 녀석의 몸을 담당하는 유기체 부분과 행동 통제를 담당하는 AI가 서로를 보완하는 구조가 성립되었다.

‘그 대가로 원본의 기억과 인격은 소실된 것 같지만.’

정확히 말하면 양자가 융합됐다고 보는 것이 맞을 터.

26호의 에너지를 받은 후, 녀석의 몸은 기계와 생물 중 양자가 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상태로 복구되었다. 즉, 생체조직과 기계가 완벽히 결합한 새로운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자아도 원본과 많이 다르겠지.’

어찌 보면 이전의 녀석을 구성하던 스크리머의 지성체 부문과 기계 부문은 죽어서 없어졌고, 지금 내 앞에 있는 녀석은 전혀 다른 무언가라고 봐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녀석이 원하는게 아니겠지.’

“그래서 원하는 걸 얻었어?”

녀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해당 개체들의 기억 데이터들을 분석 결과, 89%의 유사성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생존 자체를 비관하고 있었으며 생명 유지 장치가 멈추길 희망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녀석과 일반 스크리머는 처한 조건이 완전히 다르다.

강제로 스크리머가 된 사이보그나 지성체들은 기계위원회에서 사면해주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기계 장치에 갇혀 고통 받아야 한다. 육체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지만, 고통이나 감각은 고스란히 느껴진다.

전쟁터에서 날아오는 포탄에 맞아도 돌격해야 하고, 적들이 쏜 에너지탄에 몸이 구워져도 쉬지 않고 싸워야 한다.

아무리 강한 정신력을 갖춘 사람이라도 버티지 못할 환경이다. 녀석 말대로 당장 죽여 달라는 것 말고는 찾기 어려울 거다.

“데이터 분석 후 새로운 의문점이 발생했습니다. 저도 그런 존재였을지, 아니면 다른 존재였을지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새로 개발된 뮤턴트 스크리머가 구형 모델과 다르다고 해도 기본적인 틀은 똑같다. 녀석도 지금처럼 변하기 전에는 다른 뮤턴트 스크리머들과 비슷했을 터.

다만 생각한 그대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

“글쎄, 나는 네가 다른 놈들과 달랐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정말 죽고 싶었다면 아이스 호러의 뱃속에서도 살기 위해 몸을 개조하지 않았겠지. 그리고 26호가 살려 준 뒤에도 죽을 기회는 언제든지 있었잖아. 그 점만 봐도 충분히 다르지 않아?”

녀석의 변화는 AI가 어떻게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내놓은 고육지책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지만, 100% 확신할 수는 없다. 녀석과 함께 임무에 참여한 개체들 중 아득바득 살아남은 것은 녀석뿐이니까.

녀석에게 나는 한 마디 덧붙였다.

“너는 특별한 개체야. 그것만은 확실해.”

지금의 말은 진심이다.

시각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녀석은 놈들보다 훨씬 자유로운 단계에 있다고도 볼 수 있으니까.

녀석은 눈을 대체한 카메라를 깜빡이면서 입을 다물었다. 잠깐 침묵한 녀석은 내게 말했다.

“참고하겠습니다.”

그걸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녀석은 스크리머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다가 조용히 휴면 상태에 들어갔다.

‘기억이라.’

생각해 보면 이 디스토피아적 세계에 온 플레이어들도 녀석과 비슷한 처지다. 각자 알아서 살던 인간들이 정신만 이 세계에 날아왔으니까.

나 역시 본질은 에이모프가 아니라 인간이다. 어렸을 때 입은 화상, 부모님과의 갈등, 처음에는 도피처로 시작되었던 취미 등. 몸은 에이모프지만, ‘나’ 자체를 구성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시절의 기억이다.

‘그러고 보니 돌아가면 여기서의 기억은 어떻게 될까?’

만약 그대로 남아 있다면, 현실에서 적응하기 꽤 힘들 것 같다. 내 경우는 사람을 잡아먹던 존재였다가 인간으로 돌아간 것이니까.

‘아직 신경 쓸 문제는 아닌가.’

그 후 녀석 옆에서 엎드린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주변에 움직임이 느껴져 눈을 떴을 때는 어느새 아침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26호였다.

「큰애기 안녕.」

나는 활기차게 인사를 건네는 녀석을 쓰다듬었다. 녀석이 기분 좋다는 듯 빛을 내며 파장을 보냈다.

「애기들 다 일어났어. 빨리 오래.」

[즈즈즈 즈즈즈(잠시만 기다려)]

나는 공동에 들어가는 대신, 동굴 입구에 잠시 들렸다. 점액이 덮여 있지 않은 입구 근처에서 필요한 것들을 챙긴 나는 공동으로 돌아왔다.

늪이 깔린 거대한 공간에 들어서니 갤러곤들과 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어른」「준비」「끝났어」

부상에서 회복된 갤러곤들로부터 강렬한 분노가 느껴졌다. 아드하이 또한 전의를 불태우며 복수를 다짐하는 중이었다.

‘좋아.’

스크리머로부터 둥지를 지키다가 겨우 살아난 화이트 갤러곤이 넷, 그린 갤러곤이 아홉. 그리고 여기에 함 오르트까지 추가하면 총 14마리다.

이외에 둥지를 지키느라 부상을 피한 그린 갤러곤들이 몇 마리 더 남아 있긴 하지만, 그들은 데려가지 않을 생각이다.

‘피라 일레븐은 나와 비슷한 타입의 적이야.’

놈은 생물을 흡수해서 에너지를 얻는다. 많은 숫자를 데려간다고 해서 꼭 좋다고는 할 수 없다. 대신 소수정예로 14마리의 갤러곤들과 애들을 데려갈 생각이다.

‘그 전에….’

출발하기 전 해야 할 일이 있다.

내가 둥지 입구에서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화이트 갤러곤의 시체다. 오드 그라드로부터 승리해서 얻은 4구의 사체.

‘아드하이의 사례를 보면 화이트 갤러곤이 성장하려면 다른 화이트 갤러곤을 먹어야 해.’

아직 확실하지 않기에 이 자리에서 실험해볼 생각이다. 이 시체들로 4마리의 화이트 갤러곤을 진화시킬 수 있을지 말이다.

‘누구에게 줄까.’

일단 함 오르트와 넬 게르마는 무조건 줄 생각이다. 둘 다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전투력이 탁월하다. 실험이 잘 풀려서 둘 모두 블랙 갤러곤이 되면 싸움에서 큰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샤 벨마그도 나쁘지 않아.’

저 마른 체구의 수컷 갤러곤은 반지를 잃은 오드 그라드에게 제일 먼저 반발한 녀석이다. 머리가 좋아 보이니 실험 후보로 적합하다.

그리고 나미저 하나는 누구로 할까 고민하던 나는 몸집이 상대적으로 큰 갤러곤을 골랐다.

‘함 오르트, 넬 게르마, 샤 벨마그, 제르캅차.’

나는 전날 찾아온 4구의 화이트 갤러곤 시체를 그들 앞에 내밀었다.

충성스러운 성격의 넬 게르마는 망설임 없이 시체에 촉수다발을 꽂았다. 그 뒤에 샤 벨마그, 제르캅차 순으로 시체에 남은 체액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함 오르트는 왠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즈즈즈(마셔라)]

내가 내민 시체를 바라보던 녀석은 고개를 돌려 아드하이를 한 번 쳐다 봤다.

「?」

녀석과 시선을 마주친 아드하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모습에 함 오르트는 마음을 정했는지 바로 촉수를 시체에 찔렀다.

‘과연 어떻게 되려나.’

마음 같아서는 그들이 전부 블랙 갤러곤이 되면 좋겠지만, 일이 그리 좋게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

‘최소한 하나 정도는 블랙 갤러곤이 되면 좋겠는데.’

그들이 실험 겸 식사를 시작한 지 시간이 꽤 지났다.

내가 들고 있는 시체들이 하나둘씩 바싹 마른 미라처럼 쪼그라들었다. 거의 다 먹었음에도 아직 변화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실패인…응?’

그때 함 오르트의 뿔이 눈에 들어왔다. 뿔의 표면에 먹이 번진 것처럼 검은색이 퍼지고 있었다.

이윽고 검은색 물결이 뿔을 순식간에 집어삼키고 머리, 목까지 뻗어 나갔다. 몸의 변화를 깨달은 녀석은 날개를 펼치더니 자기 몸을 휘감았다. 두꺼운 날개 너머에서 몸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드하이랑 비슷하네.’

나는 다른 녀석들도 변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넬 게르마와 샤 벨마그를 보니 목 뒤와 몸 일부에 처음 보는 검은색 반점이 있었지만, 그것이 함 오르트처럼 확장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성장한 것은 함 오르트 혼자인가?’

성장하기 시작한 녀석은 오로지 함 오르트 뿐. 나머지 셋은 화이트 갤러곤을 전부 먹어 치웠지만 변하지 않았다.

‘시체의 상태가 안 좋아서 그런 건가? 아니면 나이 때문인가?’

내가 알기로 함 오르트는 생존한 갤러곤들 중 가장 나이가 많다. 원래는 꽤 젊은 축에 속했지만 오드 그라드와와 스크리머들과의 전투에서 대부분이 죽는 바람에 녀석이 최연장자가 됐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체와 나이 둘 다 영향을 미쳤을지도.’

아쉽지만,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남은 일은 함 오르트가 무사히 성장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

아드하이가 화이트 갤러곤으로 변할 때 걸린 시간은 대략 30분에서 1시간 사이. 에이모프와 달리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다.

함 오르트는 날개를 감싼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순백의 날개는 사라지고, 흑요석을 닮은 매끈한 날개가 녀석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녀석의 몸에서 나는 소리가 멈췄다. 녀석의 성장이 끝난 것이다.

새 블랙 갤러곤이 장막과 닮은 날개를 활짝 펼쳤다. 새로운 흑룡이 탄생하자 주변에 있던 갤러곤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함 오르트의 머리에는 새로운 뿔이 2개 추가로 자라났다. 기존의 뿔들이 재생되지 않은 채 성장해서 그런지 머리의 뿔들은 제법 불균형한 인상을 줬다.

뿔과 몸의 색은 흑요석을 닮아 검은 광택이 났고, 몸도 전보다 커져서 그런지 적지 않은 위용이 느껴졌다.

늙은 수컷인 오드 그라드에 비하면 작은 크기지만, 그래도 꼬리까지 합쳐 최소 30m 이상은 될 것 같았다.

함 오르트는 한 차례 몸을 훑어본 뒤, 나와 아드하이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성장을 완료한 녀석의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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