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41
스페이스 서바이벌은 동시대에 발매된 VR게임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NPC 생물종의 수가 많다.
현실의 동물들과 각종 SF 관련 미디어에서 등장하는 외계 생물들의 특징이 적절히 섞여서 탄생한 다양한 NPC들은 스페이스 서바이벌만의 매력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게임에 나오는 생태계나 각종 생물들의 습성 등을 연구하는데 주력하는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버블아메바 같은 작고 귀여운 생물부터 우주고래인 스카이웨일까지 수많은 생물들의 설정이 플레이어들에 의해 밝혀졌다.
하지만 우주의 용이라 불리는 갤러곤들과 나란히 비행을 한 자는 없었다.
그 누구도 못한 일을 내가 지금 하고 있다.
내 옆에는 하얀 피부 위에 붉은색 드레스를 걸친 것처럼 보이는 갤러곤이 있다. 적색과 백색이 혼합된 갤러곤 아드하이가 4개의 날개를 펄럭이며 내 곁에서 나는 중이다.
함께 속도를 맞춰 날고 있는 우리 뒤에는 암컷 블랙 갤러곤 한 마리가 있었다. 오전에 블랙 갤러곤이 된 함 오르트의 모습은 마치 먹구름을 몰고 다니는 천공신을 연상시켰다.
함 오르트 곁에는 화이트 갤러곤 4마리와 그린 갤러곤 9마리가 함께 속도를 맞추며 비행 중이다. 나와 15마리의 갤러곤들이 편대를 이루어 끝이 보이지 않는 설원 위를 날고 있는 거다.
고개를 살짝 숙이면 아래에 깔린 백색 벌판이 보인다. 우리가 처음 이 행성에 와서 마주한 그 얼음 평야였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다른 적과 마주하지 않기 위해 숨어 다녔지만, 이제는 아니다.
「큰애기야, 큰애기야. 저기 봐.」
머리 위에 올라탄 26호가 내게 파장을 보냈다. 녀석이 촉수로 가리킨 방향에 얼음이 푹 꺼져서 큼지막한 구덩이를 만든 곳이 보였다.
제이슨과 싸울 때 두꺼운 얼음판을 무너트린 장소다. 그 후로 시간이 꽤 지난 탓에 눈이 많이 쌓이긴 했지만, 우리가 싸웠던 흔적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커다란 구덩이를 지나친 우리는 한참을 더 날아갔다.
눈과 얼음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평야의 끝이 보일 때쯤 시간은 이미 저녁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저기인가.’
산맥 지대와는 정반대 방향에 위치한 그곳은 굉장히 거대한 규모의 협곡이었다. 저 정도 크기라면 아마도 행성 밖에서도 관측이 가능하리라.
형태를 봐서는 아래로 깊게 뚫린 지하 협곡으로, 위에서 내려다봐도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저 정도는 돼야 배를 숨길 수 있겠지.’
작스 알파 전함은 전장만 1km를 가볍게 넘긴다. 그 무시무시한 괴물이 숨을 수 있을 만큼 협곡의 크기는 광대하고 깊었다.
이 세계에 온 이후, 이만큼 넓은 전장에서 싸운 적은 없다. 게다가 이번에는 우리가 적을 유인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급습하는 상황. 놈도 바보가 아닌 이상 방비를 해놨을 터.
‘하지만….’
나는 함 오르트에게 신호를 줬다. 내 신호를 받은 녀석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 봤다.
여섯 개의 검은 뿔이 보라색으로 반짝이자 하늘에 떠 있는 구름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용돌이 모양으로 요동치던 구름들은 곧 용오름 형태가 되어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블랙 갤러곤이 사용할 수 있는 사이킥 기술, ‘마엘스트롬’. 천재지변에 가까운 힘이 함 오르트의 손에 있다.
놈이 무슨 함정을 설치했다고 하더라도 마엘스트롬 앞에서는 상당 부분 그 효력을 잃게 될 거다.
용오름이 협곡 주위에 내려앉고, 사이킥 파워로 이루어진 번개가 안쪽 깊숙한 공간까지 파고들었다.
보라색 번개들이 협곡 바닥과 벽을 타고 흘렀다. 빛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암흑 위에 보라색 거미줄이 펼쳐졌다.
그리고 협곡 안쪽의 벽과 보이지 않는 바닥으로부터 폭음과 함께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역시 드론을 깔아놨어.’
「APD야.」
함 오르트 위에 타고 있는 하늘의 어머니가 사념파를 보냈다.
피라 일레븐은 내가 갤러곤을 끌고 올 것을 대비해 APD(Anti Psychic Drone)을 협곡 벽에 숨겨 놨다.
APD는 스타유니언의 군함들이 갤러곤이나 컬트들과 싸울 때 사용하는 드론이다. 사이킥 파워를 비롯해 여러 에너지들을 흡수할 수 있어서 에너지 계열 무기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 주로 사용된다.
그리고 갤러곤의 비행은 날갯짓과 사이킥 파워가 어우러져서 이루어진다. APD에 의해 사이킥 파워를 사용할 수 없게 되면 비행 속도가 극히 떨어진다.
‘그때 스크리머들이 치겠지.’
보아하니 우리가 협곡에 진입하면 바로 공격하도록 심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APD가 무효화됐으니 숨어 있던 스크리머들이 튀어나올 거다.
나는 녀석들이 공격하러 나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초능력 번개가 계속 떨어지고 있음에도 협곡 안쪽에서는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보조기관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지만 움직임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즈즈즈즈 즈즈(보이는 게 있어?)]
「아니. 아무것도.」
내 질문에 하늘의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독수리 머리를 지닌 그리폰답게 그녀는 낮밤 가리지 않고 멀리 위치한 사물을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녀 또한 나와 같은 랭커. 아무리 적이 몸을 잘 숨긴다고 해도 모를 리 없다.
‘어떻게 된 거지?’
돌아가는 상황을 봤을 때, 이 자리에서 관측 가능한 범위 내에 있는 위험 요소는 APD뿐이었다.
APD를 깔아둔 것을 보면 갤러곤들의 습격에 대비하려 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드론만으로는 갤러곤을 제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놈이 모를 리 없다.
“스크리머들을 전부 잃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랬다면 피라 일레븐은 임무 실패로 간주하고 후퇴를 택할 것입니다.”
기계위원회의 안드로이드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다. 어지간해서는 손상을 피하려든다.
피라 일레븐도 자기가 불리한 상황이라면 도주를 택할 거다. 그랬다면 이 협곡에도 APD를 깔아두지 않았을 거고.
다시 말해 놈은 도망치지 않았다. 놈은 우리가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다.
‘흠.’
번개의 빛 덕분에 협곡 내부를 확인한 바로는, 협곡의 폭은 위보다 아래쪽이 더 넓었다.
호리병과 비슷한 형태라고 할까. 들어가기는 쉽지만 후퇴는 어려운 구조다.
‘작전을 바꿔야겠어.’
놈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은 비효율적이고 위험하다. 시간을 주면, 피라 일레븐이 새로운 스크리머들을 생산할 테니까.
협곡을 부수는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규모가 워낙 커서 쉽지 않아 보였다. 완전히 붕괴시키려면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사이킥 브레스를 쏟아 부어야 할 거다. 시간도 오래 걸릴뿐만 아니라 체력도 심히 소모하는 방법이라 좋지 않다.
‘직접 들어가야 해.’
게임을 할 때 나는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어 봤다.
혼자서 활동하는 에이모프는 이런 식으로 적의 기지에 잠입해서 공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적보다 약한데, 적의 홈그라운드에서 싸우는 것만큼 불리한 일도 없다.
그런데도 내가 항상 승리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적이 가진 이점을 역이용하는 것.’
놈은 이 빙하의 지하 감옥이 자기에게 유리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놈이 모르는 것이 있다.
내게는 놈이 가진 이점을 역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 스크리머들과 싸울 때도 꺼내지 않은 카드다.
[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걸어 들어갈 수 있는 곳을 찾자)]
「방법이 있어?」
[즈(응)]
공중에 떠 있던 우리는 방향을 선회해서 얼음 평야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협곡 끄트머리에 입구라 할 만한 곳이 있었다.
얼어붙은 협곡의 입구는 벽이 위쪽으로 갈수록 좁고, 아래쪽은 뻥 뚫린 형태였다. 협곡 입구라기보다는 괴물이 사는 던전이나 동굴에 가까웠다.
얼음바닥 위에 착지한 나는 갤러곤들을 둘러봤다.
내가 떠올린 작전에는 인원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잘못하면 아군도 공격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우리만 들어갈게. 나머지는 밖에서 기다려줘)]
「함 오르트」「유성의 딸」「지킨다」「혼자」「보내지 않는다」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안 돼. 함 오르트는 해야 할 일이 있어)]
우리 중 공중에서 제한 없이 마음껏 적을 요격할 수 있는 존재는 녀석뿐이다. 지원 사격을 하려면 함 오르트는 외부에서 기다리는 것이 낫다.
[즈즈즈즈즈 즈으으으 즈즈즈즈 즈즈즈즈(걱정하지 마. 아드하이가 다칠 일은 없을 거야]
녀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내 말을 따랐다. 갤러곤들이 다시 날아오르고, 26호, 아드하이, 하늘의 어머니, PS-111이 나와 함께 협곡에 진입했다.
위로 갈수록 벽이 좁아지고 아래가 푹 파여 있는 구조다 보니 협곡 내부에는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여기는 그야말로 암흑 천지였다.
거기다가 위에 뚫린 부분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흉흉한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건 동물의 포효 소리 같기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속삭이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우리 중에서는 이를 무서워하는 존재가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우리가 들어온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리고 거기서 피라 일레븐에게 역공을 가할 함정을 준비했다.
‘어차피 이전에 설치했던 것은 이제 필요가 없어.’
피라 일레븐을 상대할 때 쓰려고 하는 카드는 둘. 그 중 하나가 바로 둥지다.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검은색 점액을 뿌렸다. 새하얀 얼음 위에 떨어진 점액이 순식간에 종양 형태로 굳어서 빙판을 오염시켰다.
이곳은 둥지를 두기에 그리 좋은 장소는 아니지만, 상관없다. 이 주변을 덮을 정도로만 확장되면 놈과 싸울 때 치명적인 일격을 안겨 줄 수 있을 거다.
「너 혹시 게임에서 4위랑 싸웠을 때처럼 하려고?」
[즈(그래)]
하늘의 어머니는 내가 뭘 계획하고 있는지 단번에 눈치챘다.
「특성도 없는데 어떻게 하려고?」
[즈즈 즈즈즈즈 즈즈 즈즈즈(이런 상황이니까 맞춰 가야지)]
「…욕보겠네.」
「뭔데? 나도 가르쳐 줘.」
「나」「궁금해」「나도」「알려 줘」
「이따가 보면 알 거야.」
모든 작업을 마친 나는 애들과 함께 다시 출발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 경사가 안쪽으로 급격히 쏠렸다. 협곡이라기 보다는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마치 고전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지옥의 얼음호수에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상한 느낌이 나.」
「이상한 느낌?」「나」「안 느껴져」
「나도 잘 모르겠는데.」
「여기랑 저기랑 꾸리꾸리. 재미없는 느낌이야.」
중간쯤 들어가니 26호는 기분이 안 좋은 것처럼 보였다. 평소에는 밝은 분홍색에 가까운 녀석의 몸이 체리와 비슷한 어두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나와 하늘의 어머니는 부지런히 주변을 살펴봤지만, 딱히 보이거나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주변에는 얼음과 뱀처럼 길게 늘어진 종유석 같은 암석 덩어리들만 가득했다.
‘녀석이 괜히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어.’
씨 데몬답게 에너지의 흐름이라든가, 여러 방면에서 감각이 민감한 녀석이다. 녀석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뭐가 문제인지 고민하는 그때, PS-111이 소리를 냈다.
“전방 1.5km에서 미약한 전자 신호가 느껴집니다. XAX01급 전함으로 추정됩니다.”
“뭐?”
놈들이 숨겨 놓은 함선이 벌써 코앞이다. 그런데도 적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놈들이 꼭꼭 숨어 있다고 쳐도 진작 튀어 나왔어야 할 시간이다.
‘그럴 리가 없어. 분명 뭔가가…잠깐.’
하늘의 어머니가 말한 아웃스페이서와의 전투, 26호의 반응, 그리고 지금 이 상황.
머리에 뭔가가 번뜩이고, 내 시선에 뱀처럼 생긴 암석 덩어리에 향했다.
아이스 호러가 죽어서 화석이 된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물체였다. 방금까지는 단순한 돌덩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급히 그 덩어리에 다가갔다. 그리고 표면 위에 내 보조기관을 살짝 갖다 댔다.
차가운 냉기가 먼저 느껴지고, 옅은 흙냄새가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금속 냄새!’
보조기관을 뗀 나는 고개를 들어 협곡의 벽을 노려봤다. 왜 이걸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이제 알 것 같다.
우리를 둘러싼 협곡 전체에서 아주 옅은 금속 냄새가 나고 있다.
나의 모습을 본 애들도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내가 말하기 전에 녀석들이 다급히 전투 태세를 갖췄다.
[즈즈 즈즈즈(모두 준비해)]
괴물의 촉수로 파장을 흘린 순간, 내 앞에 있던 뱀 형태의 암석 덩어리가 크게 흔들렸다.
협곡 내부를 뒤덮은 얼음들과 흙들이 깨져나간다. 그 속에서 뱀, 아니 거대한 합금 호스가 꿈틀거린다.
얼음 호수에 잠겨 있던 악마가 고개를 내밀 듯 여러 개의 금속제 호스가 바닥에서 튀어나왔다. 호스들의 끝에는 합성 금속 튜브와 생체조직이 뒤섞여서 거대한 얼굴 형태를 만든 존재가 있었다.
기계로 만들어진 거인의 얼굴이 눈을 떴다. 붉은색의 카메라 렌즈 한 쌍이 우리를 내려다봤다.
「피라 일레븐. 판단함. 관찰 중이던 특수목표A가 예상보다 빠르게 알아차렸다. 계획 변경. 임무를 속행한다.」
놈이 입을 벌리자, 내 보조기관이 저릿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계음이 터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