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44
나와 아드하이는 떨어지는 얼음 파편들을 피하며 날아올랐다.
이 자리에 없는 PS-111이 걱정이긴 하지만, 피라 일레븐만큼은 놓치면 안 된다. 그랬다간 내가 가진 비장의 수들이 적 플레이어들에게 노출되고 말 테니.
최대한 빨리 정리해야겠다고 다짐하며 협곡 밖으로 나왔다.
공중에서는 갤러곤들과 수백m 크기의 전함 간에 전투가 한창이었다.
평소라면 어두컴컴했을 밤하늘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우주의 용들이 뿜어내는 숨결, 기계들이 제조한 병기들이 만들어 내는 불길, 그리고 섬뜩하게 빛나는 구름들까지.
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세계의 전장 역시 몹시 화려하고 소란스러웠다.
‘대신 이곳에서는 죽으면 끝이지만.’
나는 날개 팔을 강하게 움직여서 속도를 올렸다. 내 곁에 하늘의 어머니를 태운 아드하이가 바짝 붙어서 따라왔다.
갤러곤들을 향해 사격하던 함포들이 포구(砲口)를 내 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불꽃놀이가 터진 것처럼 불빛이 번뜩였다.
피라 일레븐의 함선에 달린 수백 개의 함포들이 발사한 어뢰들이 나와 아드하이를 분쇄하기 위해 날아든다.
내 곁에 붙어 있던 아드하이가 회피 기동을 준비했다. 나 또한 어뢰의 비에 대비하려고 준비한 순간, 불길하게 빛나던 구름에서 이변이 발생했다.
태풍이 부는 것처럼 웅장한 소용돌이 형태를 띠고 있던 구름이 보라색 번개를 투하한 것이다.
사이킥 파워로 이루어진 번개가 갈퀴처럼 갈라지며 어뢰들 위로 퍼졌다. 가느다란 에너지의 줄기들이 어뢰에 닿으면서 연쇄 폭발이 발생했다.
폭음과 함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에 번개를 만든 장본인의 모습이 보인다.
검은색 비늘을 가진 갤러곤이자 아드하이 무리의 2인자, 함 오르트가 나와 짧게 시선을 마주쳤다. 녀석은 내 옆을 날고 있는 아드하이도 한 차례 쳐다본 뒤, 함선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함 오르트가 어뢰를 피해 날개를 펼쳐 지상쪽으로 활강했다. 그 뒤에는 다른 갤러곤들이 편대를 이루어 따라붙었다. 어뢰를 피한 녀석들은 양 갈래로 흩어진 상태로 고도를 올렸다.
‘스카이웨일하고 싸울 때처럼 움직이고 있어.’
스카이웨일 성체는 그 어떤 갤러곤들보다 크다. 녀석들은 자기보다 큰 상대를 잡을 때처럼 포위 진영을 유지하며 싸우는 중이다.
함선의 바닥 부근에 접근한 갤러곤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용의 숨결이 함선 외벽을 달구고, 아래에 달린 함포들을 태웠다. 어뢰를 발사하던 도중 사이킥 파워에 자극을 받은 함포들이 그대로 폭발했다.
갤러곤들의 포화가 쏟아지는 와중에 피라 일레븐도 반격을 개시했다.
배 내부에서 다수의 APD들이 사출되어 갤러곤들에게 달려들었다. 협곡에 숨어 있던 것들은 일부에 불과했는지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마치 배 안에 갇혀 있던 황충(蝗蟲) 떼가 튀어나온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APD 무리로부터 사이킥 파워를 해제시키는 파장이 뿜어져 나왔다. 함 오르트를 비롯한 성체 갤러곤들은 빠르게 물러나서 APD의 공격 범위 밖으로 이탈했지만, 그러지 못한 갤러곤들도 있었다.
APD의 공격에 당한 그린 갤러곤들의 비행 속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아직 어린 상태라 사이킥 파워에 능숙하지 못하므로 날갯짓으로 간신히 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함포들은 약해진 그린 갤러곤들을 노리고 있었다.
‘어딜!’
피라 일레븐이 갤러곤들과 공방을 벌이는 동안, 함선과의 거리를 좁힌 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올라온 녹색의 점균덩어리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함포 위로 떨어졌다.
단단한 합금을 한 끼 식사로 여기는 산성 진균들이 빠른 속도로 포구를 갉아 먹었다. 막 발사되려던 어뢰들은 입구가 막히는 바람에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그 충격에 함포들이 사격을 멈췄고, 그 사이 사이킥 파워를 잃은 그린 갤러곤들은 서둘러 전장에서 이탈했다.
‘APD에게 당한 녀석이 4마리.’
이제 화이트 갤러곤 4마리와 그린 갤러곤 5마리, 그리고 함 오르트가 남았다. 그린 갤러곤들이 안전하게 눈밭 위에 착지하는 것을 확인한 나는 사이킥 브레스를 준비했다.
나를 향해 어뢰들이 날아왔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았다. 내가 큰 공격을 준비한다는 것을 안 26호가 나섰으니까.
성인 남성 3, 4명이 합쳐진 것만큼 큰 어뢰들이 허공에 멈춰 섰다. 26호가 촉수들을 흔들자 수많은 어뢰들이 파르르 떨더니 그대로 지표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26호가 잠깐 시간을 번 사이, 빠르게 충전을 완료한 내 괴물의 촉수가 빛을 내뿜었다. 화산이 분출되는 것처럼 용솟음 친 막대한 에너지가 함선을 강타했다.
피라 일레븐의 함선이 크게 휘청거리고 측면부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내부의 시설들 중 일부도 타격을 받았는지, 피격된 곳 말고 다른 부위에서도 국소적인 폭발이 발생했다.
그러자 APD들이 서둘러 주인을 지키기 위해 모여 들었다. 드론의 구름이 사이킥 파워를 상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파장을 쏟아 냈다.
촉수에 모여드는 에너지가 APD의 방해 파장에 영향을 받아 계속 흩어졌지만, 상관없다. ‘용의 심장’ 덕분에 사라지는 속도 이상으로 사이킥 파워가 생성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내게는 지원군이 있지.’
아드하이를 비롯해 화이트 갤러곤들이 내 주변에 모여 들어 함께 브레스를 발사했다. 아드하이의 에너지탄과 일반 갤러곤들의 열선이 나의 숨결과 어우러져 APD를 강타했다.
그리고 우리 머리 위에서는 함 오르트가 ‘마엘스트롬’을 조율하고 있었다. 함선에서 발사된 어뢰들이 번개와 폭풍에 휘말려 목표를 잃고 허공에서 터져 나갔다.
APD들은 사이킥 파워를 막는 파장을 지속해서 흩뿌렸지만, 연속해서 쏟아지는 사이킥 공격에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원래도 APD는 시간차 공격에 취약한데, 거기다가 갤러곤 특유의 막강한 화력까지 겹치니 도저히 방어할 재간이 없었다.
적이 함선 하나가 아니라 함대였다면 훨씬 많은 APD를 동원해서 막아 낼 수 있었겠지만, 이 상황에서 그런 가정은 무의미하다.
값비싼 드론들로 세운 장벽이 무너져 내리고, 브레스가 함선의 전면부를 활활 태웠다. 분노에 찬 갤러곤들이 쏟아낸 불길이 어찌나 강력했는지, 두터운 외벽이 그대로 녹아 없어질 정도였다.
이 이상의 손상은 도주에도 영향을 준다고 판단한 것일까.
피라 일레븐의 함선이 한 차례 어뢰를 마구 쏟아 내더니 구름 위로 가속하기 시작했다. 대기권에서 바로 초광속 항해를 시도하는 것이리라.
[즈즈즈 즈즈(놓쳐선 안 돼)]
「아드하이의 자손들아!」「여기서!」「원한」「갚는다!」
아드하이의 호령을 들은 갤러곤들이 방어를 도외시하고 공세에 나섰다.
포화 속에서 피투성이가 됐음에도 그들은 물러나지 않고 용의 숨결을 마구 쏴댔다. 나 또한 남은 APD들을 맨손으로 잡아 부수면서 녀석들의 공격에 동참했다.
하지만 놈은 어느새 준비를 마친 것인지 선체가 옅은 푸른빛으로 물든 게 보였다. 초광속 항해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폭풍이 몰아치고 선체가 타격을 받는 상황에서도 놈은 먼 우주 공간으로의 도약을 감행하려하는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이건 예상 밖이었다.
배의 손상이 심한 상태로 초광속 항해에 들어가면 항해 도중 배가 쪼개진다거나 좌표가 어긋나서 항성 내부에 처박힐 수 있다.
피라 일레븐은 기계이기에 섣불리 시도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반대였다. 놈은 이 자리에서 확정적으로 죽는 것보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건 것이었다.
나는 브레스를 쏘던 것을 멈추고 놈을 향해 가속했다. 선체 후면부 위에 안착한 나는 산성 진균을 외벽에 쏟아 부었다.
도약을 못하도록 초광속 엔진을 망가트리거나, 아니면 놈과 함께 초광속 항해에 진입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어차피 다시 돌아올 수 있으….’
외벽을 녹이고 내부에 진입하려던 순간, 후면부에 달린 작은 대공용 포탑들이 나를 향해 무언가를 발사했다. 대공용 탄환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그것이 내 몸에 달라붙었다.
맞았다는 감각을 느끼자마자 내 몸에서 힘이 확 빠져나갔다. 극심한 권태감과 무력감이 닥쳐와서 나는 하마터면 배에서 떨어질 뻔했다.
단순히 아프다는 감각을 넘어 생명력이 강탈당한다는 이 기분, 전에도 한 번 느껴 본 적이 있다.
‘블러드 리버!’
여태까지 안 쓰고 있어서 없는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함선에 숨겨둔 블러드 리버야말로 피라 일레븐의 마지막 수였다.
뮤리엘과 싸울 때는 몸에 미리 기계 장비를 망가트리는 ‘그렘린 이끼’를 붙이고 갔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게다가 놈은 뮤리엘보다 배로 많은 블러드 리버를 내게 사용했다. 희미해지는 육체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최소 15개 이상이다. 이 정도면 오드 그라드나 아이스 호러조차도 한순간에 미라로 만들 수 있다.
실제로 내 몸의 단단한 갑각들은 생기를 잃고 쪼그라들고 있었다. 그나마 배를 붙잡고 있는 손에 온 정신을 쏟고 있는 덕분에,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하지?’
갑각이 약해진 상태라 이대로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놈의 배에 붙어서 따라가면 비참한 미래 밖에 없다.
‘빨리 선택해야…응?’
그때 내 몸에서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한층 약해졌다. 그와 함께 내 몸이 느리지만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무기력해진 보조기관도 어느 정도 기운이 돌아온 덕에 나는 내 몸 위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알 수 있었다.
‘26호!’
내가 순식간에 골골대자 머리 위에 있던 26호가 나를 도와 준 거다. 녀석은 사이킥 파워를 이용해 내 몸 곳곳에 붙어 있는 블러드 리버를 떼서 던져 버리는 중이었다.
기운이 어느 정도 돌아온 나는 전투용 팔에 힘을 줘서 선내로 진입했다.
[즈즈즈(고마워)]
「큰애기 아프게 하는 것들은 내가 다 혼내줄 거야.」
녀석 덕분에 블러드 리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아직 문제는 남아 있다. 내 눈에 선명한 푸른빛에 덮인 선체가 보인다.
앞으로 몇 초 후면 이 배는 우리 아래에 있는 얼어붙은 별에서 까마득하게 먼 장소로 떠나게 될 거다.
‘늦었어.’
이제는 나도 어쩔 수 없다. 도착한 후, 적들을 맞이해서 싸우거나 도주할 방법을 찾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했다.
이 자리에서 들려서는 안 되는 방송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초광속 엔진 해킹에 대한 제어권 물리적 접촉을 통해 강탈 완료했습니다. 초광속 항해를 취소합니다.」
배 내부 어딘가에 달린 스피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배 전체에 깔린 푸른빛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졌다.
「와! 친구다! 큰애기야, 친구가 여기 있어!」
[즈즈(그래)]
익숙한 목소리의 뒤에 배의 원주인의 기계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피라 일레븐. 이해 불가. PS모델 111번. 당장 복종하라.」
「그럴 수 없습니다. 전(前) 메인 컨트롤러. 제가 있는 한 이 배는 어디에도 못 갑니다.」
「피라 일레븐. 함선 제어권 재확보 시도 중. PS모델 111번. 다시 명령한다. 복종하여 의무를 다하라.」
피라 일레븐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듣던 것과 달리 매우 다급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래에서는 갤러곤들이 배를 찢어발기기 위해 날아오는 중이고, 배 내부에는 자기와 적대하는 거대 생물이 있으니까.
거기에 추가로 예상치 못한 배신자까지 그의 목숨을 조여 오고 있다.
혹여 선내에 남은 스크리머가 있다고 해도 우리를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 놈에게 남은 수는 없다.
「피라 일레븐. 초광속 엔진에 대한 제어권 회복 완료.」
하지만 최고위원답게 뛰어난 스펙을 자랑하는 피라 일레븐은 금방 제어권을 되찾았다. 스피커를 통해 놈의 목소리가 들린 직후, 복도에 다시 옅은 푸른빛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시간을 벌었어.’
PS-111은 자기 할 일을 충분히 다 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나설 차례다.
함선을 지배하는 피라 일레븐을 찾기 위해 내가 움직이는 동안에도 스피커에서는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PS모델 111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복종하라.」
피라 일레븐의 권유에 배신자, PS-111은 짧막하게 답했다.
「저는 특별한 개체. 누구도 저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녀석의 목소리는 차분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