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45
PS-111이 귀한 시간을 벌어줬다. 여기서부터는 나의 차례다.
초광속 엔진을 물리적으로 무력화시키거나, 아니면 함선을 조종하는 피라 일레븐을 찾아야 한다.
‘작스 알파급 전함의 전장(全長)은 약 1km.’
피라 일레븐이 전면부의 일부를 떼다가 생체드론과 호스를 만들었기에 크기가 작아졌지만 그래도 700에서 800m 사이에 달한다.
일일이 돌아다니며 두 가지 목표물을 찾는 것은 비효율적일뿐 더러, 배가 초광속으로 도약하는 것을 막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엔진은 PS-111에게 맡기는 것이 낫겠어.’
제어권을 뺏겼지만 녀석이라면 뭔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낼 것이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 스피커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메인 컨트롤러, 에이모프. 엔진은 제가 맡겠습니다. 피라 일레븐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피라 일레븐. 함선 제어권 강탈 시도 감지됨. 원자로에서 물리적 접촉 확인.」
녀석과 피라 일레븐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함선이 크게 기울었다. 보아하니 초광속 항해 자체는 못 막았지만, 다른 기능을 건드려서 함부로 도망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111번, 후회할 거다.」
「그건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피라 일레븐.」
나는 둘의 말다툼을 들으며 금속으로 이루어진 복도 위를 질주했다.
일반 전함이었으면 40m에 육박하는 내 몸으로 돌아다니기 어려웠겠지만, 이 배는 그렇지 않았다. 무인 함선이다 보니 사이보그 승무원들을 위한 시설을 넣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효율성만 추구한 것 같네.’
내가 달리는 복도의 바닥 판은 배의 화물칸에나 쓰는 그레이팅(grating)식 바닥이었다. 내가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 봤던 격자형 창살로 이루어진 바닥판 말이다.
미관적인 요소는 완전히 배제한 복도를 기어가는 사이, 스피커에서는 더 이상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둘 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스피커에 신경을 끄고 피라 일레븐을 찾아 나섰다. 놈이 있을 만한 곳을 향해 움직이는데, 머리 위에 있던 26호가 나를 톡톡 건드렸다.
「큰애기야.」
[즈즈즈(왜 그래?)]
「저기에서 이상한 느낌이 나.」
녀석은 분홍색 촉수 하나로 내가 좀 전에 지나친 통로를 가리켰다.
녀석도 나와 마찬가지로 먹이의 냄새를 느낀 것이라 생각하고 넘기려던 찰나,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26호,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분명 파라 일레븐을 찾기 위해 협곡에 진입했을 때도 녀석이 비슷한 말을 했다. 주변에서 이상한 느낌이 난다고 말한 직후, 바닥에서 초대형 호스들이 나타났다.
어떻게 녀석이 피라 일레븐의 위치를 감지하는지는 불명이나, 녀석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걸로 두 번째.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즈즈즈즈(안내해 줘)]
「응! 나만 믿어!」
나는 뒤로 돌아서 26호가 가리킨 방향으로 기어갔다.
지금까지 내가 돌아다닌 복도가 일종의 동맥이라면, 26호가 안내한 길은 모세혈관 같은 통로다. 복도의 폭이 좁다는 뜻이다.
전투용 팔과 몸 여기저기에 붙은 뭉툭한 발톱을 활용해 빠르게 기어가고 있는데, 내 보조기관이 뭔가를 감지했다.
‘냄새?’
복도에 깔린 그레이팅판에서 나는 금속 냄새 속에 이질적인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모순된 냄새. 이번에는 내 생각보다 에이모프의 육신이 더 빨리 기억해냈다.
‘부패한 고기의 냄새와 역한 화학 약품 냄새.’
메가콥의 연구선에 있던 시신 보관소, 모뉴먼트의 유전자보관소. 그곳에서 나던 냄새와 비슷하다.
그 냄새들은 좁은 복도에 있는 문들을 지나칠 때마다 한층 더 진해졌다.
‘스크리머 생산 설비가 있다고 했지.’
아마 이곳은 보관소가 위치한 구역일 터. 복도 곳곳에 있는 강철의 문 너머에 놈이 챙겨 온 유전자 샘플과 이 행성에서 사냥한 시체들이 보관되어 있을 거다.
‘이 배는 무조건 탈취해야겠다.’
냄새만 맡아도 적지 않은 유전자 정수가 저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배에 있는 것들을 포식한다면 이 행성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얻었다고 봐야겠지.
‘지금은 피라 일레븐에 집중하자.’
나중에 들어가서 유전자 샘플들을 입에 털어 넣을 것을 상상하며 나는 수색을 재개했다.
보관소가 위치한 구역을 지나자 나온 곳은 격납고였다. 격납고에 들어서자마자 온도가 확 내려갔다. 저기 격납고의 열린 문으로부터 우리가 떠나온 행성이 큼지막하게 보였다.
엔지니어들이 탑승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격납고에는 함재기보다는 함재기를 관리하는 기계들이 더 많았다.
관리 기계들은 현재 자기들이 있는 배가 어떤 위기에 처했는지 전혀 모르는 듯 함재기들을 정비 중이었다. 그 모습은 항공기를 보관하는 시설이라기보다는 제조업 공장에 가까웠다.
격납고에 도착하자 26호는 촉수를 회수했다.
「여기에서 이상한 느낌이 나.」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즈(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고?)]
「응.」
녀석이 실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표현 방식이 유아적이어서 그렇지, 실제로는 매우 똑똑한 녀석이니까.
녀석이 느꼈을 때는 이 어딘가에 피라 일레븐이 있다는 뜻이다.
‘잠깐, 설마?’
그제야 나는 피라 일레븐이 무엇을 의도했는지 깨달았다.
‘엔진을 잃을 것 같으면 과부하시키고, 자기는 빠져나갈 생각이었구나!’
놈은 나와 PS-111이 ‘피라 일레븐은 스크리머 지원선을 타고 도주할 것’이라고 생각한 부분을 역이용했다. 내가 엔진으로 달려갔다면 바로 배를 폭파시켰겠지.
‘교활한 놈.’
물론 놈이라고 이 배를 잃을 것이라 상정하지는 않았을 거다. 원래는 블러드 리버에서 정리하려고 했지만 26호라는 변수 때문에 실패했을 뿐.
하나 용이주도한 놈은 만에 하나 발생할 사태에 보험을 들어 놨다. 함재기를 준비해놨다가 여차하면 빠져나가는 것 말이다.
‘그래서 여기로 안내한 거구나.’
26호가 가르쳐 준 대로 놈은 이곳에 있다. 격납고 어딘가에 숨어서 함선을 조종하고 있을 거다.
나는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기계들을 노려봤다.
‘함재기에 타고 있지는 않을 거야.’
기계위원회 소속답게 놈은 스타유니언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안드로이드다. 그러니 원격 조종으로 이 함선을 지배하고 있었을 터.
‘하지만 PS-111이라는 변수가 생긴 지금, 그런 무리한 시도는 하지 않을 거야.’
자칫하면 지휘권을 완전히 뺏길 테니까.
나는 함재기를 살펴보는 대신, 주변에 널려 있는 기계들에 접근했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았다는 듯 안쪽에서 플라즈마 열선이 날아왔다.
나는 날개 팔을 들어서 열선이 26호를 맞추지 못하도록 막았다.
“피라 일레븐. 이해 불가. 어떻게 알았지?”
보수용 기계들 사이에 불완전한 형태의 피라 일레븐이 보였다.
인간을 닮은 얼굴과 머리 뒤에 얇은 호스관들이 주렁주렁 달린 것은 PS-111과 비슷했지만, 다른 부위는 전혀 닮지 않았다. 놈의 몸은 스크리머라 보기도, 안드로이드라 보기도 힘들었다.
상체에는 방금 막 배양된 것처럼 보이는 분홍색 살점들이 뒤룩뒤룩 붙어 있었고, 하반신은 스크리머의 금속 골격을 억지로 붙인 것처럼 보였다. 가슴에는 전에 봤던 생체드론이 달라붙어 있었다.
‘어떻게 탈출했나 했더니.’
메모리를 백업한 드론 하나를 몰래 빼돌려서 도망쳤나 보다. 그걸 보면 26호가 똑같이 반응한 것도 이해가 된다.
「왝. 진짜 싫어.」
26호가 이렇게 경멸하는 것은 처음 본다. 나도 녀석과 비슷한 생각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적은 최고위원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약하고 역겨웠으니까.
나는 놈을 향해 다가 갔다. 그러자 놈의 가슴에 달린 생체드론이 재차 플라즈마 열선을 발사했다.
하지만 놈의 공격은 별로 효과적이지 않았다.
수천 개의 생체드론이 일시에 쏘는 것이면 모를까, 내 손가락만한 사이즈의 드론이 쏘는 공격은 별로 의미가 없다.
“피라 일레븐. 명령함. 정비용 안드로이드, 나를 지켜라.”
놈은 최후의 발악이라는 듯 함재기를 관리하는 안드로이드들을 불렀다. 무장이라고는 용접을 위해 장착된 금속주입기 밖에 없는 안드로이드들이 내가 달려들었다.
그 사이, 놈은 머리의 호스관을 분리해서 함선과의 물리적인 연결을 끊었다. 놈은 성치 않은 몸을 움직여서 함재기를 향해 기어갔다.
‘어딜 가려고.’
놈을 뒤쫓으려는데 안드로이드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팔에 장착된 금속주입기로 내 몸을 지져댔다.
나는 귀찮은 모기를 털어내듯 전투용 팔을 휘둘렀다. 내 팔에 부딪친 안드로이드들은 상하체가 분리된 채 바닥에 흩어졌다.
몇몇 안드로이드들은 내 머리 위로 기어 올라갔지만, 모두 26호가 휘두른 촉수에 맞고 머리가 분리되었다.
그때 얌전히 대기 중이던 함재기들이 일제히 움직이며 장착된 스톰건을 쏘기 시작했다. 나는 날개 팔의 피막을 넓게 펼쳐서 26호의 몸을 가렸다.
‘원격 조종이구나.’
누가 최고위원 아니랄까 봐 매우 끈질겼다. 원격 조종으로 시간을 번 피라 일레븐은 함재기 하나에 올라탔다.
나는 피막으로 몸을 막으며 놈이 탑승한 함재기에 다가 갔다.
그리고 침식 촉수를 뻗어서 함재기를 휘감았다. 촉수에 힘을 주자 후면부에 달린 로켓과 측면부의 날개가 찌그러졌다.
함재기가 실시간으로 고철이 되고 있자, 피라 일레븐은 전면부의 강화 유리를 깨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놈은 열선으로 내 눈을 쐈지만, 그건 내 짜증을 돋울 뿐이었다. 나는 망가진 함재기를 들어서 놈을 후려쳤다. 덕분에 놈의 하반신을 대신하던 금속 골격 부분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나는 침식 촉수를 뻗어서 놈을 휘감았다. 놈의 가슴에 달린 생체드론을 제거하기 위해 살펴봤는데, 가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짧은 순간, 바로 드론을 분리해서 도망친 것이다.
내가 그 사실을 눈치채자마자, 다른 함재기가 바로 격납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서둘러 침식 촉수를 뻗었지만, 놈이 탄 함재기는 이미 우주 공간으로 빠져나간 뒤였다.
놈이 떠나자 함재기들이 사격을 멈추고, 함선이 크게 기우뚱했다. 놈의 원격 조종이 해제됐기 때문이다.
각종 기계와 안드로이드들의 잔해가 벽 한쪽으로 쏠렸다. 배가 추락하는 동안, 함재기는 빠르게 멀어져갔다.
‘질긴 놈.’
아마 지금쯤 놈은 자기가 무사히 벗어났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때 스피커가 활성화 되더니 파라 일레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피라 일레븐. 경고함. 나는 스타유니언에 이미 지원 요청을 했다. 기계위원회의 함대가 오면 특수목표A는 소멸한다.」
도망치는데 성공한 놈이 함재기에서 이쪽을 향해 통신을 연결한 것이었다.
그건 일종의 승리 선언이었다. 놈은 함선과 스크리머들을 잃었지만 더 중요한 것을 얻었다. 나에 대한 정보 말이다.
놈이 스타유니언의 함대와 합류해서 내 정보를 넘긴다면, 내 안전은 크게 흔들린다. 플레이어 뿐만 아니라 기계위원회에서도 나를 붙잡아서 실험을 하려고 하겠지.
‘물론 이건 놈이 무사히 도망쳤을 때의 얘기지만.’
짧은 시간 동안 의식을 여러 번 더미에 옮겨서 그런 걸까? 놈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놓쳤다.
놈은 내가 왜 자기를 뒤쫓지 않는지를 생각해야만 했다. 또한 밖에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무한한 암흑으로 채워진 우주 공간에서 적색과 백색의 유성이 보인다. 파멸을 암시하는 듯 불길한 빛을 내뿜는 별이 함재기와의 거리를 급속도로 좁혀간다.
피라 일레븐이 탄 함재기와 충돌하려고 하는 것처럼.
「너의 유전자는 반드시 내가….」
말이 다 끊기기 전, 스피커로부터 통신이 끊겼다.
멀리서 작은 불길이 보인다. 유성에 관통당한 함재기가 만든 마지막 불꽃.
스타유니언의 최고 권력자 중 하나를 삼켜 버린 폭발 속으로 붉은색 날개를 지닌 작은 용이 모습을 드러낸다.
「제가 처리하려고 했는데 아쉽습니다.」
스피커에서 PS-111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추락하던 함선이 균형을 잡았다.
길게 이어진 싸움이 마침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