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246화 (247/400)

Ep. 246

아드하이가 격납고 위에 사뿐히 착지했다.

피라 일레븐의 함재기를 들이받을 때 ‘레드아머’를 사용했는지, 녀석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동족」「원한」「갚았어」

[즈즈즈(잘했어)]

「큰어른」「나」「위대한 우두머리」「역할」「했어?」

[즈즈즈즈(당연하지)]

「작은애기 장하다! 장하다!」

「성공」「다행」

나와 26호의 칭찬을 들은 녀석은 도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는 기쁠 때마다 폴짝폴짝 뛰던 녀석이 의젓하게 있으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꼬리는 제어가 안 되는 것 같지만.’

나는 통통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즈즈즈 즈즈즈즈(하늘의 어머니는?)]

「함 오르트」「맡았어」「별의 바다」「가는 것」「힘들데」

[즈즈(하긴)]

볼프는 우주 공간에 맨몸으로 간다고 바로 죽지는 않는다. 다만 에이모프나 메탈릭 그렘린 같은 괴물형 종족들처럼 장기간 생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잘 관리되고 있는 함선이나 내가 만든 둥지 같이 적당량의 산소가 공급되는 공간이 있다면 문제가 없으나 아드하이 등에 매달려서 우주로 오는 것은 꽤 부담스러운 일일 터.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격납고 문은 스스로 닫혔다. 그리고 배 전체가 빠르게 하강하는 것이 느껴졌다. 함선을 장악한 PS-111이 배를 착륙시키려는 거다.

‘상황실에 있겠네.’

피라 일레븐은 이 거대한 배를 원격 조종했지만, 그건 놈이 우월한 성능의 안드로이드라서 가능한 일이다. PS-111이 특별한 것은 맞지만, 성능 면에서는 피라 일레븐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함교와 직접 동기화된 상태로 이 배를 조종하고 있으리라.

‘작스 알파급 전함이니 상단부 중앙에 있으려나.’

나는 아드하이와 26호를 데리고 상황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상황실에 도착하니 내 예상대로 PS-111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상황실 중앙의 바닥을 들어내고 그 안에 엎드려 있었다.

녀석의 등을 덮고 있는 생체조직이 반으로 갈라져서 척추가 훤히 드러났고, 거기에는 수백 개의 케이블들이 다닥다닥 연결된 상태였다.

“오셨습니까?”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녀석이 우리를 보더니 아는 척했다.

“마침 잘됐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

“스타유니언의 지원 함대에 대한 부분입니까?”

“언제 지원 요청이 갔는지 확인할 수 있겠어?”

녀석은 거대한 함선을 직접 통제하고 있다. 그러니 어렵지 않게 기록을 열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녀석은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피라 일레븐이 보안 시스템을 강화했습니다. 지금 제 상태로는 이를 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

“그러나 제 기계 모듈을 강화한다면 뚫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화라. 이 배의 설비를 이용할 생각이구나.”

“정확한 판단입니다.”

이 배에 스크리머의 생산을 담당하는 각종 기계 장치와 설비들이 실려 있다. 녀석이라면 어렵지 않게 설비를 개조해서 자기를 강화하는데 이용할 수 있겠지.

‘배를 침식해서 데이터를 까볼까 생각했는데, 저 방법이 더 낫겠지.’

피라 일레븐의 독한 성격을 생각해 보면, 강제로 보안 시스템을 해제했을 시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다. 놈이라면 필시 함정을 설치해놨을 테니까.

녀석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안정적으로 하강하던 함선은 무사히 지표면에 착륙했다.

함선 밖에 나와 보니 저 멀리 반쯤 무너진 협곡이 보였다.

함선 근처의 평야에서 갤러곤들과 하늘의 어머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갤러곤들의 몸은 상처투성이었지만, 죽은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갤러곤 중 선두에 서 있던 함 오르트가 아드하이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뒤에 있던 갤러곤들도 앞발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아드하이는 날개를 활짝 펼친 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어서 녀석은 내가 해석할 수 없는 사념파를 주변에 흘렸다.

‘복수를 달성했다는 의식인가.’

갤러곤은 장례에 대한 관념이 없으나 동족애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린 개체인 블루 갤러곤이 죽거나 알이 깨진다면 무리 전체가 분노한다.

‘게임에서도 갤러곤의 복수는 독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지.’

그 점 때문에 사냥하는데 정말 힘들었다. 혼자서 사냥하고 있다 보면 다른 갤러곤들이 끊임없이 나타났으니까.

‘그러던 내가 갤러곤 무리와 함께 다니고 있네.’

게임 속 내가 지금 나의 모습을 봤으면 깜짝 놀랐겠지.

용들의 의식을 지켜보고 있는데, 하늘의 어머니가 내게 다가왔다.

「그 녀석이 봤으면 엄청 좋아했을 텐데.」

[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 즈즈즈즈즈(그 갤러곤 매니아? 둘이 아는 사이였던가?)]

「응. 클랜 해체 후, 혼자가 된 나를 영입하려고 엄청 애썼거든.」

그녀가 말하는 ‘그 녀석’은 18위의 콜드 블러드 랭커로 갤러곤 매니아로 매우 유명했다. 갤러곤을 길러보겠다고 알까지 훔친 적이 있었다고 하니까.

‘놈도 랭커니까 이 세계에 왔으려나.’

콜드블러드는 종족 특성상 중반까지는 빠르게 성장이 가능하나 그 이후로는 점점 힘들어진다. 볼텍스원의 힘을 빌려 쓰기 때문에 초반에는 강력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불해야 할 대가가 늘어나서 힘들어진다.

‘대가를 생각해 보면 생존이 쉽지 않겠지.’

우주의 악마 볼텍스원들은 랭커들이나 만나볼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들이다. 빌려주는 힘도 무시무시하지만, 대가도 초월적이다. 그런 놈들에게 제대로 대가를 갚지 못한다? 죽음보다 끔찍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뿐.

사교도 루트를 타지 않았다면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다. 볼텍스원의 힘만 있으면 당면한 문제들을 대부분 해결할 수 있을 텐데, 그 욕망을 과연 이겨 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고 보면 제이슨도 콜드블러드 랭커를 잡았었지.’

컬트 랭커, 제이슨을 인면수로 만들어서 심문할 때 들었다.

놈이 보유했던 특전 중 금속 형상을 만드는 능력, 지금은 ‘심연의 색채’가 된 그 능력은 본래 콜드블러드 랭커의 특전이었다.

‘제이슨은 몇 위인지 모른다고 했어.’

콜드블러드 랭커들은 특유의 한계로 인해 모두 순위가 낮다. 오만한 놈답게 자기보다 약한 자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던 거다.

‘그 경솔한 성격 탓에 내게 패배한 거지만.’

하물며 콜드블러드 랭커에 대한 조사는 함께 랭커 사냥에 참가했던 다른 플레이어가 전담했다고 한다. 그러니 놈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을 수밖에.

이미 죽은 자에 대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아드하이가 내게 사념파를 보냈다.

「큰어른」「나」「둥지」「갔다 올게」

아마 둥지에 있는 동족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려나 보다.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하려는 순간, 함선에서 뒤늦게 나온 PS-111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함선 제어 효율을 높이려면 제 기계 모듈 부분을 개량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둥지에 있는 금속이 필요합니다.”

「나」「데려다 줄게」

“감사합니다.”

그걸로 볼일이 있는 녀석들은 둥지로 돌아갔다 오는 것으로 정해졌다.

녀석들이 떠나고 함선 옆에는 나와 26호, 하늘의 어머니만 남았다.

‘그러면….’

나는 전면부와 측면부가 손상된 함선을 올려다 봤다.

아직 남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피라 일레븐이 말한 스타유니언의 지원부대가 언제 올지 모르니까.

하지만 그건 녀석이 강화된 이후에나 파악할 수 있는 정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

스크리머 제작을 위해 피라 일레븐이 열심히 모아둔 보물들. 그것들을 확인하는 일이다.

‘배에 유전자 샘플들이 얼마나 있으려나.’

[즈 즈즈즈즈 즈즈(배 구경이나 하자)]

「좋아.」

「스크리머의 배라. 게임에서는 없던 건데. 흥미롭긴 하네.」

나는 애들과 함께 함선에 다시 올라탔다.

운이 좋다면 여기서 새 유일 특성 합성식이 열릴 수도 있다.

‘이미 감염 관련 특성들을 재료로 요구하는 합성식이 열리긴 했지만.’

반대로 동일한 생물들의 샘플만 많아서 특성을 별로 얻을 수 없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그렇게만 돼도 다량의 특성을 확보할 수 있으니 나쁘지는 않다.

그런 즐거운 상상을 하며 유전자 정수가 보관된 구역으로 향했다. 구역과 가까워질수록 아까 지나쳤던 매혹적인 냄새가 점점 진해졌다.

격한 싸움 때문에 에너지를 많이 소비해서 그런 걸까. 적당한 허기, 앞으로의 기대감 등으로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큰애기가 기분이 좋은가 봐.」

「…역시 모프박, 크흠, 그러게.」

마침내 냄새가 가장 강하게 나는 장소에 도달했다. 나는 달콤한 향기를 가로막는 두꺼운 철문을 붙잡고 뜯어냈다.

그러자 어마어마하게 농축된 향기가 나의 보조기관을 강타했다.

‘와.’

철문 뒤에 펼쳐진 광경은 내 상상대로였다.

아니, 어찌 보면 상상 이상이었다.

그곳에는 수백 종류 이상의 생물들로부터 정제한 유전자 샘플들이 냉동고에 채워져 있었다. 그뿐 만인가. 이 행성과 다른 행성에서 구한 생물 시체가 든 냉동 컨테이너들도 나를 반겨 줬다.

「와! 먹이가 진짜 많아!」

26호가 내 머리 위에서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녀석 말대로 이곳은 유전자 정수의 보고였다.

아쉬운 점이라면 냉동고에 들어있어야 할 샘플 중 상당 부분이 밖으로 흘러나와 깨져 있었다는 것일까. 전투 중의 충격으로 인해 냉동고가 파손된 것으로 추측됐다.

그래도 큰 문제는 없다. 깨진 것만큼이나 남아 있는 샘플들도 적지 않았으니.

‘다 필요 없고, 사냥의 표상부터 쓰자.’

오랜만에 포식의 시간이 왔다.

-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그 행성에는 특이한 화산이 있다.

초대형 화산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거대하긴 하나, 사실 특별하다고 할 정도로 거대한 것은 아니다. 다른 행성에는 그보다도 더 규모가 큰 화산이 널려 있으니까.

그 화산이 진정 특이한 이유는 크기가 아니다.

첫 번째는 바로 색깔. 낮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눈과 우박이 내리는 이 행성에서 그 화산은 언제나 검은색을 유지했다. 자연이 그 화산을 피하는 것도 아닌데, 기이한 일이다.

두 번째는 에너지다. 이 화산은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쉴 새 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어찌나 강렬한지 에너지를 먹는 생물들은 도저히 이곳을 떠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신기한 점은 이 화산이 원래부터 이러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화산이 이렇게 변한 지는 불과 몇십 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물리법칙과 자연을 초월하게 된 화산. 그 산의 초입에는 하나의 굴이 있었다.

겉으로 보면 흔하디흔한 굴처럼 보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미로처럼 얽혀 있는 긴 동굴은 화산의 심부에 닿아 있다.

화산 내부로 들어가면 생물이 살 수 있을 정도로 온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굴에는 이 행성의 여러 포식자들이 득실거렸다.

덕분에 오랫동안 이 동굴에는 낯선 방문자가 발을 들이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스악…!”

사마귀와 말벌, 말파리가 뒤섞인 혐오스러운 생물이 머리가 반쯤 잘린 상태로 쓰러졌다.

쓰러진 괴물 앞에는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가 서 있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하얀색 바디슈트를 입은 그녀는 손목 부근에 솟아난 새하얀 칼에 묻은 피를 가볍게 털었다.

“그쪽은?”

「끝났어요.」

그녀의 말에 답한 것은 2.5m 크기의 금속 슈트를 입은 어떤 존재였다. 강화복과 워커의 특징이 섞인 육중한 슈트였기에, 완전 무장한 전투용 안드로이드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네른 함장은 모두 무사한가?”

“난 무사하오. 시현 유진.”

하얀색 바디슈트의 여자, 시현 유진은 살아남은 자들의 모습을 살폈다. 남아 있는 자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9명인가.’

처음 이 행성에 발을 디뎠을 때의 인원이 60명이었다. 그 중 10명은 이 화산 내부에 들어오기 전에 야생 동물들의 습격을 받아 실종됐다. 사실 말이 좋아 실종이지, 이 가혹한 행성에서 홀로 떨어진다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60명 중 10명이라는 적지 않은 인원을 잃고 화산에 들어왔지만, 이곳은 바깥보다 한층 더 끔찍한 마경이었다.

화산 내부는 혹독한 추위는 없었지만, 대신 온갖 위험한 생물들이 들끓었다.

그녀가 방금 해치운 생물도 헬사이드 호넷이라는 이름을 가진 매우 위험한 괴물이다. 착용자의 상상대로 형상이 변화하는 강화복 ‘화이트 메이든’이 없다면, 그녀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런 괴물과 조우한 것이 벌써 4번째.’

“여기서 잠깐 휴식하겠다.”

“넵!”

그녀의 명령에 부하들이 바닥에 쓰러져 휴식을 취할 준비를 했다. 쉽지 않은 적과 싸우느라 지쳤다는 것을 알기에 시현도 그들에게 쓴소리를 하지 않았다.

시현은 통신을 담당하는 부하에게 다가 갔다.

“통신은 어떻게 됐지? 기상이변 문제는 해소됐나?”

“현재 기상이변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다만 저쪽에서도 회선이 완벽히 복구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위성 레이더의 문제인…음?”

그때 금속 슈트를 입은 존재, 라일라 쳄벌린이 그녀에게 손짓 했다. 뭔가 따로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다시 시도해 보고 성공하면 내게 알려라.”

“옙.”

부하에게 명령을 내린 시현은 라일라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다른 인원들이 쉬는 공터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내게 할 말이 있는가?”

「이곳에 들어온 후 마주친 헬사이드 호넷이 벌써 넷. 아, 방금 것까지 합치면 총 다섯이네요. 제 평생 이렇게 많은 헬사이드 호넷을 본 것도 여기가 처음이죠.」

“…그래.”

「그것 말고 아이스 호러도 한 마리 있었죠? 놈 때문에 20명이 죽었어요. 그것도 당신이 유인한 덕분에 간신히 놈을 따돌려서 그 정도 손해로 그친 거지, 잘못하면 전멸했을 수도 있었어요. 제 말이 틀린가요?」

심각한 육체 손상으로 인해 라일라는 남은 평생 슈트의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하면서 살아야 한다. 성대도 완전히 망가져서 말할 때는 기계의 도움을 빌린다.

속사포처럼 쏟아 내는 기계의 음성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시현은 라일라의 감정이 어떤지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그녀가 하는 일이 이만한 가치가 있는지, 라일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곳에는 중요한 유물이 있다. 그것을 얻어야 우리가 바라는 일을 이룰 수 있어.”

「그놈의 유물. 당신도 스스로 얼마나 우스운 말을 하는지 알죠? 마술적인 유물 따위는 이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다는 걸.」

라일라가 속했던 가문, 티앤씨는 메가콥에서 가장 많은 식민 행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온갖 행성에 존재하는 특이한 요소들을 전부 꿰뚫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니 라일라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고대의 유물이라든가, 인류가 모르는 먼 과거에 존재했던 몰락한 문명이 남긴 비밀 병기 같은 것은 실존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당신은 제게 기회를 줬죠.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어요.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것은 특히 더 사양이랍니다.」

“…….”

라일라의 말에 시현은 바로 답하지 않고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라일라의 생각, 저 행성 밖 어딘가에 있을 민석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시현은 안다. 원래라면 그녀 또한 그들과 비슷하게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봤다.

클론의 육체로 다시 태어난 그녀는 시현이 남겨둔 기록물뿐 아니라 시현의 주변인들이 남긴 기록물까지도 전부 확인했다.

그러다가 시현의 과거 스승, 범호가 남긴 몇 안 되는 기록물에서 범상치 않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건 일종의 미래에 대한 안배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그 기록을 시현은 지금까지 누구하고도 공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말해야 할 때가 왔다. 시현은 강화복 내부에 숨겨둔 작은 메모리칩을 라일라에게 건넸다.

「이게 뭐죠?」

“확인해 보면 알 거다.”

라일라는 더 물어보지 않고 바로 칩을 손목의 패널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칩에 담긴 사본 이미지들이 그녀의 눈앞에 떠올랐다.

「이건 항해도인가요?」

“그래.”

「이 옆에 이것들은 뭔가요? 단어? 문장? 원시 지성체들이 남긴 문자 같네요.」

“그건 과거 지구에서 사용된 글자다.”

「지구? 제가 아는 그 지구 말인가요?」

“그래. 지금은 이미 사어(死語)가 된 글자들이지. 해독하자면 이런 뜻이다.”

시현은 한 차례 심호흡하고 입을 열었다.

“제작자 ‘알 수 없음’의 ‘특전’으로 제작한 장비 2개의 소유권을 ‘플레이어 정우’에서 임시로 ‘플레이어 신범호’에게 넘긴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말이었다. 시현은 자기 입으로 말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몸속에 흐르는 피가 호응하는 것처럼.

“이후 장비 2개의 소유권은 ‘플레이어 정우’의 피가 흐르는 자만이 획득할 수 있다. ‘플레이어 신범호’는 그때까지 이 장비를 안전하게 보관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그 다음 문장을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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