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47
에이모프가 스페이스 서바이벌의 대표적인 비주류 종족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엿 같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강력한 힘을 지닌 NPC나 플레이어를 사냥한 후 얻는 보상.
우연히 내가 모르는 특성 융합식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
새로운 특성을 손에 쥔 후 이를 사냥 전략에 반영했을 때의 성취감.
그것들이 하나씩 스노우볼처럼 쌓여서 완전에 가까워지는 것을 체험할 때만큼 즐거운 일이 없다.
사실 승천 이후에는 이러한 기쁨을 느낄 일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나를 피했기 때문이다.
게임에서의 위치가 높아질수록 새로운 생물, 새로운 특성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는 일도 적어졌다. 당연히 성취감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랬었는데, 오늘은 과거에 느꼈던 즐거움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은은히 빛을 내는 반투명 텍스트박스를 바라봤다.
「‘초월’ 재료 목록: 오염벌레 숙주, 파상풍 덩굴, 이빨요정 둥지, 인신공양, 레드 애시드」
「‘초월’ 재료 목록(신규!): 통찰, 공포의 주시자, 환청벌레, 정신 기생 농포, 미믹 기관(획득되지 않음)」
「정신 기생 농포: 파상풍 덩굴 특성을 일부 계승합니다. 지성체의 정신에 사이킥 파워로 이루어진 농포를 심습니다. 폭발 시, 주변에 사이킥 파워 피해를 주고 낮은 확률로 다른 지성체에게 농포가 옮겨갑니다.
*추신: 이런 가학적인 특성은 도대체 누가 만든 거죠?
「수확자의 아가리: 정수수확자의 턱 특성을 계승, 강화합니다. 입에 톱날이 달린 엄니를 추가합니다.
*추신: 먹는 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본능입니다.」
「‘제이슨(제이슨 터닝햄)’의 특전과 ‘제2의 뇌’ 특성이 융합. ‘두 번째 머■∬∬⨸⫱ 특성 강화 시스템 개입!」
「특성 개량 중」
「‘형상 지배자’ 특성으로 진화!」
「형상 지배자: 활성화 시 타 존재의 사고에 영향을 주는 특성들의 효과가 증폭됩니다.
*적용 대상: 의태 기관, 기생 군체, 정신 기생 농포
*추신: 상황에 맞춰 적절한 가면을 쓰는 것, 우수한 사냥꾼의 덕목 중 하나입니다.」
‘유일 특성 합성식 중 하나는 달성, 하나는 해금, 새로 얻은 융합 특성 다수, 새 강적의 증표 획득, 그리고….’
다수의 일반 특성들까지.
사냥의 표상이 종료된 이후, 쏟아지는 특성의 텍스트박스들 중 뭘 먼저 검토할지 생각하느라 굶주림까지 잊을 지경이었다.
나는 보관된 시체들 중 하나를 씹으며 텍스트박스를 차근차근 살펴봤다.
‘먼저 새 강적의 증표부터 볼까.’
새로 얻은 강적의 증표, ‘형상 지배자’는 전에 제이슨을 잡고 얻은 특전 중 하나를 특성화시킨 결과물이다.
전에 제이슨을 잡고 얻은 플레이어 특전은 총 3개.
제이슨이 원래부터 갖고 있던 것이 하나 있었고, 놈이 다른 플레이어를 죽이고 강탈한 특전이 2개 있었다.
획득 당시 나는 하나만 특성으로 전환시켰다. 놈이 갖고 있던 콜드블러드 랭커의 특전, 그러니까 황금색 형상을 불러내는 능력을 ‘심연의 색채’로 만들었다.
3개 전부 강적의 증표로 전환하지 못했던 이유는 증표로 전환할 수 있는 재료 특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다른 플레이어의 특전을 강탈하고 이를 사용하려면 무조건 그 특전과 어울리는 특성이 필요했다.
‘특전과 특성. 이렇게 둘이 있어야 강적의 증표를 얻을 수 있어.’
심연의 색채를 제외한 나머지 2개는 불완전한 상태로 몸에 저장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이번에 스크리머 지원선을 털면서 기회가 온 거다. 대량의 특성들을 일시에 획득했고, 그 중 특전과 맞는 특성이 있었기에 새 강적의 증표를 획득할 수 있었다.
‘거기에 일반 특성도 꽤 많이 얻었지.’
지금 내가 띄운 반투명 텍스트박스에 나온 특성들 외에 얻은 일반 특성도 상당히 많다.
사실 대부분이 내가 이미 보유했거나 ‘에너지 흡수’나 ‘왜소화’처럼 불리한 효과를 주는 특성들이 많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쓸모없는 특성들은 ‘특성 강화’ 재료로 써먹으면 되니까.
「특성 강화: 특별한 과정을 거쳐 특성을 융합할 시, 일반 특성들을 재료로 사용해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재료 수는 최대 10개이며 융합, 유일 특성은 재료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적용 대상: ‘유일 특성 합성 시스템’, ‘강적의 증표 시스템’, 미확인」
‘이 시스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
게임이었다면, 보유하면 손해가 되는 특성을 받지 않았을 거다. 한 번 획득한 특성은 융합 재료로 써먹기 전까지는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월 시스템의 2단계 특전으로 ‘우주괴물’ 타입과 함께 해금된 특성 강화 시스템 덕분에 불필요한 특성도 제한적이나마 써먹을 여지가 생겼다.
‘그렇다고 아무 특성에서나 다 써먹을 수는 없지만.’
특성 강화의 단점은 초월 시스템과 관련된 특성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 가능하다는 것.
특성 강화 튤팁에 적혀 있는 상황, 그러니까 유일 특성을 합성할 때, 혹은 강적의 증표를 융합할 때 가진 특성을 재료로 소모할 수 있다. 그러니 아무 때나 부정적인 특성을 받는 건 곤란하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나는 새로 얻은 강적의 증표의 튤팁을 쳐다봤다.
‘형상 지배자라.’
앞서 새로 얻은 융합 특성 2개는 게임을 할 때도 여러 번 써먹은 기억이 있는 특성들이다. 반면 ‘형상 지배자’는 처음 보는 특성이다.
‘의태 기관 효과의 강화라니. 이런 효과를 가진 특성은 본 적이 없는데.’
애초에 게임에서 의태 기관은 융합식을 아는 자가 나 말고 없었기에 나만의 고유 특성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기생 군체를 나만큼 잘 써먹는 플레이어도 없었고.
‘마치 나를 위한 특성 같네.’
지금까지 다른 강적의 증표들이 모두 말도 안 되는 성능을 보여줬다. 다른 특성들에 비해 튤팁의 설명은 극히 심플했지만, 그래서 일까? 역으로 더 기대된다.
‘이건 천천히 실험해 보도록 하고.’
나는 변화한 내 몸을 확인했다.
보관소를 털어서 얻은 일반 특성 중 대부분은 특성 강화 재료로 써먹었다. 그래서 내 몸은 다른 때처럼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크게 달라진 점이라면 일단 주둥이 부분이다.
헬사이드 호넷의 특성과 기존에 갖고 있던 ‘정수수확자의 턱’이 융합해서 ‘수확자의 아가리’로 변화했다. 그에 따라 내 구강구조도 다른 모습이 됐다.
이전에는 아래턱이 양 갈래로 갈라졌지만, 이제는 더 이상 갈라지지 않는다. 준성체가 되기 전의 얼굴 형태, 그러니까 악어나 보아뱀의 주둥이 같은 형태로 변했다고 보면 된다.
턱 구조는 전처럼 심플해졌지만, 대신 아래턱에 큼지막한 엄니가 2개 튀어나왔다. 엄니는 사냥의 표상 상태가 되면 생기는 뼈 칼날처럼 날카롭고 또 단단했다.
‘튼튼한 것으로 치면 머리 갑각 이상이지.’
또한 엄니 표면에 자란 미세한 톱날은 거의 단분자 커터 수준의 예리함을 자랑한다. 어지간한 것은 다 자를 수 있다고 보면 된다. 레드갤러곤의 ‘레드아머’ 같은 특별한 힘이 부여된 물건이 아니라면 말이다.
베고 자르는 용도로 엄니가 생긴 덕분에 적의 머리를 취하는 방법도 전과 달라졌다. 전에는 아래턱을 활짝 벌려서 적을 통째로 삼켰다면, 이제는 엄니로 머리만 자르고 취한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이를 돕는 게 바로 이거지.’
나는 입을 살짝 벌려 혀를 밖으로 내밀었다. 연한 검은빛에 달팽이 더듬이와 비슷하게 생긴 혀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인다.
아주 유명한 SF크리쳐를 모티브로 하는 것치고, 에이모프에게는 원래 혀가 없다. 지금처럼 특별한 특성들을 얻어야만 혀를 얻을 수 있다.
‘뭐, 혀라기보다는 입에 있는 촉수라고 해야 하나?’
설정상 에이모프는 입 안쪽에 미뢰가 넓게 분포되어 있어서 혀가 필요 없다. 그러니 에이모프의 혀도 맛을 느끼는 용도 대신 다른 목적으로 사용된다.
가령 적의 머리를 낚아채 집어삼키거나, 아니면….
「간지러워!」
나는 옆에서 저장된 시체를 먹고 있는 26호를 살짝 핥았다. 내 혓바닥이 녀석의 몸 표면에 옮겨붙은 각종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을 모두 빨아들였다.
내 혀의 표면에는 이번에 새로 얻은 감염 관련 특성, ‘미생물 저장기관’이 있다. 독성이 있는 생물을 제독(除毒)하거나 아니면 상대에게 이로운 효과를 주는 미생물을 제거하는 특성이다.
「방금 뭐야? 또 해 줘!」
[즈(그래)]
「간지러워! 재밌다!」
26호는 처음 느끼는 감각이 신기한지 몸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러자 옆에서 함께 식사 중이던 아드하이도 호기심을 보였다.
「나」「궁금해」「나도」「해 줘」
[즈(응)]
요청대로 핥아주자 녀석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뭐임?」「뭐임?「뭐임?」
「재밌지?」
「흥미로워」「매우」「흥미로워」
둘 다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질 지경이다.
녀석들과 이렇게 순수하게 장난을 친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아드하이를 되찾은 뒤, 계속 전투의 연속이었으니까 녀석들과 놀 시간 자체가 없었다.
‘앞으로는 녀석들과 자주 시간을 보내야겠네.’
녀석들은 내게 도움이 되는 유용한 존재이자 친구들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하늘의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멋진 황금색 갈기를 가진 그리폰은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헛구역질을 하던 중이었다.
[즈즈 즈즈즈(너도 해 줄까?)]
「아니. 사양할게.」
그리폰 상태는 볼프 상태보다 독에 대한 내성이 높아서일까. 그녀는 내 호의를 단호히 거부했다.
아무튼 주둥이의 변화 말고 다른 부분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달라졌다가 특성 강화로 소모해 버리면서 사라진 거지만.
그것 말고 ‘오염벌레 숙주’ 같이 몸을 바꾸는 특성들도 얻었지만, 내 몸에는 그보다 상위 특성이 적용 중이라서 전부 비활성화된 상태다.
나는 26호를 핥는 것을 관두고 다시 텍스트박스를 바라봤다.
먹은 특성이 많아서 그런지 현재 유일 특성 합성식 두 개가 열렸다.
하나는 전에 헬사이드 호넷을 잡으며 열어 놨던 융합식으로 감염 계열 특성과 둥지 계열 특성이 필요하다.
이 유일 특성은 지금 당장 만들 수 있다.
‘원래는 한참 걸릴 걸로 예상했는데 말이지.’
헬사이드 호넷과 글래셔 핀드의 특성을 요구해서 얻는 데까지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릴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스크리머 지원선에는 예상외로 놈들의 샘플이 꽤 있었다.
특히 헬사이드 호넷. 어디 서식처라도 턴 것인지 유독 유전자 샘플이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헬사이드 호넷보다 희귀한 에이펙스 생물인 글래셔 핀드. 다른 행성에서 채취한 것으로 보이는 놈의 유전자 샘플도 보관소 안쪽에 저장되어 있었다.
‘양이 조금만 더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글래셔 핀드의 마약성 물질 생성 특성을 에이모프가 얻으면 ‘레드 애시드’라는 특성이 된다. 에이모프의 피를 마약성 물질로 만드는 특성인데 이를 ‘스모그탑’과 합치면 강력한 융합 특성이 된다.
‘집단전에서 매우 효과적인 특성이지.’
글래셔 핀드의 샘플이 많았다면 레드 애시드를 기반으로 하는 융합 특성, 유일 특성 둘 다 얻었겠지만, 불행히도 그건 불가능했다.
피라 일레븐도 글래셔 핀드는 어려웠던 것인지, 아니면 헬사이드 호넷처럼 서식지를 못 찾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글래셔 핀드 샘플이 둘 밖에 없었다. 3개만 되도 융합 특성, 유일 특성 모두 얻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다.
‘지금은 융합 특성보다 유일 특성이 먼저야.’
진화 조건을 채우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초월 시스템을 이용해 유일 특성을 하나만 더 만든다면 우주괴물 타입도 0단계에서 1단계로 올라간다. 레드 애시드 기반의 융합 특성이 아무리 강력해도 유일 특성만큼은 아닐 터.
‘게다가 우주괴물 타입 1단계의 효과도 궁금하기도 하고.’
융합을 포기한 현재, 감염 계열과 둥지 계열 특성으로 만드는 유일 특성의 조건은 완벽히 맞췄다. 두 타입 효과가 없어지지 않도록 특성 수도 맞춰났으니 언제든지 만들 수 있다.
‘그 다음 이건 어떻게 할까.’
「‘초월’ 재료 목록(신규!): 통찰, 공포의 주시자, 환청벌레, 정신 기생 농포, 미믹 기관(획득되지 않음)」
새로 열린 융합식은 초능력 관련 특성들을 다수 요구했다. 이것도 하나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얻은 상태다.
‘미믹 기관은 이곳에서 못 얻어.’
스크리머 지원선에도 저 특성을 얻을 수 있는 샘플은 없으니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슬슬 떠날 때가 됐나.’
죽기 전, 피라 일레븐이 말했다. 지원을 요청했으니 기계위원회의 함대가 올 거라고.
‘같은 멤버가 죽었으니 못해도 최고위원 중 절반이 나를 잡으러 올 거야.’
어쩌면 대수령 플레이어도 같이 올지도 모른다.
‘잠복했다가 기습한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아직은 준비가 부족하다. 기계위원회와 싸운다는 것은 곧 스타유니언과 전면전을 한다는 뜻. 내 힘이 강해진 것은 맞지만 거기까지 미치지는 못한다.
‘아직은 말이지.’
어차피 성체로 진화할 수 있는 조건 중, 타입 조건을 채우려면 다음 장소로 가야 한다.
이곳처럼 척박한 곳이 아니라 다수의 종족과 생물들이 득실거리는 곳 말이다. 그곳에 가면 나는 또 한 차례 크게 성장할 수 있으리라.
‘PS-111에게 함선 기록을 열람해 달라고 해야겠어.’
용의 둥지에서 필요한 금속을 챙겨 온 녀석은 현재 이 자리에 없다. 보관소 옆 구역에 위치한 생산 라인에서 기계 파츠를 개조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녀석이 말하길, 완료까지는 몇 시간가량 소모될 거라 했다.
‘그럼 그 동안….’
[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나 또 알이 될 거야. 그러니까 지켜줘)]
이 자리에 있는 녀석들은 내가 고치 안에 들어가는 것을 여러 번 봐 왔다. 그래서 놀라거나 의문을 던지는 애는 없었다.
녀석들에게 말한 뒤, 나는 보관소를 나와 가까운 곳에 있는 화물칸에 들어갔다.
‘오랜만이네.’
내가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눈을 뜬 장소. 물론 그때와 달리 이 배에는 화물이라 할 만한 물건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느낌은 비슷했다.
화물칸 위에 똬리를 튼 나는 반투명 텍스트박스를 재활성화했다.
「‘초월’ 재료 목록: 오염벌레 숙주, 파상풍 덩굴, 이빨요정 둥지, 인신공양, 레드 애시드」
「초월 시스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이걸로 네 번째 보는 텍스트박스의 질문이다.
언제나 그렇듯 내 답은 정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