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48
눈을 뜬 내 앞에 보이는 것은 화물칸이 아닌 전혀 다른 장소였다.
수많은 녹색 유리관들. 보조기관이 저릴 정도로 독한 화학약품 냄새.
유리관의 빛으로 인해 섬뜩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곳은 연구시설이라기보다는 머나먼 미래에 만들어진 카타콤 같았다.
‘…뭐지?’
평생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자신할 만큼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장소였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아니, 익숙한 것을 넘어 포근함마저 느껴졌다.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말이다.
나는 유리관 밖으로 기어 나왔다.
‘기억나.’
이전 컬트의 성지 행성에서 초월 2단계로 진입할 때도 환상을 봤었다. 당시 본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어떻게 이걸 잊을 수 있지?’
누군가가 내 머리의 기억과 사고를 봉인했다가 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체불명의 타인이 내 의식을 조종한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감과 공포가 밀려왔다.
‘…침착하자.’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내가 보고 느끼는 이 상황은 환상일 가능성이 높다. 현실의 나는 고치의 안에서 반쯤 액체화된 상태겠지.
‘둘러보자.’
아무것도 안 하고 떨고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간신히 침착함을 유지한 나는 앞으로 기어갔다.
공동의 크기는 상당히 넓었다. 수십m에 달하는 내가 기어 다녀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가는 길마다 보이는 녹색 유리관들은 바닥뿐만 아니라 벽, 천장까지 빼곡하게 달려 있었다.
유리관을 지나칠 때마다 살짝 훑어 봤지만,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없었다. 그냥 알 수 없는 용도의 녹색 액체만 차 있을 뿐. 유리관 위에 작은 단말기들이 붙어 있었지만, 전부 전원이 꺼져 있었다.
역한 냄새를 풍기는 유리관들을 지나다 보니 문이 하나 보였다. 녹이 심하게 쓴 철문이었다. 나는 전투용 팔을 들어서 문을 살짝 밀어 봤다.
처음에는 꼼짝도 안 하던 문이 조금씩 움직였다. 문틈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문이 활짝 열리고 하얀빛이 나를 감쌌다.
‘저긴?’
빛이 사라지고 나타난 장소는 내게 아주 익숙한 공간이었다.
‘내 집?’
스페이스 서바이벌의 세계에 들어오기 전, 내가 살고 있던 자취방의 방문이 내 앞에 있었다. 그 안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익숙한 목소리에 홀린 듯 가슴의 작은 팔로 문고리를 쥐었다.
문이 열리고 그 안에 있던 누군가와 마주친 순간.
나는 깨어났다.
육신의 감각이 돌아오고, 전신을 감싸는 따뜻한 액체가 느껴졌다. 그리고 물렁거리는 벽 같은 것이 나를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그건?’
지난번에는 잊어 버렸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새벽에 낀 안개처럼 흐릿하긴 했지만, 방금 봤던 것들이 머리에 남아 있었다.
유리관으로 채워진 기묘한 시설, 그리고 나의 자취방.
전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장소였고, 후자는 내게 아주 익숙한 공간이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내 몸의 기억일까?’
나의 정신은 인간이지만, 몸은 에이모프다. 어쩌면 에이모프의 육신에 담겨 있는 기억이 환상으로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
‘…승천 후에 알게 되는 설정들을 보면 그럴 수도 있긴 한데.’
다만 내 기억에 의하면 승천 전후에 저런 시설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승천 후 등장하는 장소는 에이모프가 처음 태어난 곳, 그러니까 고대 유적이 위치한 행성이니까.
고치 속에서 계속 고민해봤지만,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단서는 있어.’
지난번 잊어 버렸을 때와 이번 상황 간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때는 초월 시스템 2단계로 진입할 때였고, 지금은….’
초월을 통해 만든 유일 특성이 4개가 되면서 우주괴물 타입이 1단계로 올라갔다. 그 말은 수수께끼의 장소와 관련된 기억이 초월 시스템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뜻.
‘우주괴물 2단계로 올라가면 또 뭔가가 나올 수도 있어.’
아직 정보가 부족하니 추측하는데 시간을 써봐야 큰 의미가 없다.
마침 몸의 변화도 끝났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인지 모르겠지만, 액체화된 육체가 새로운 형태로 굳어진 것을 보면 나의 변화는 이미 완료됐다.
나는 전투용 팔을 뻗어 고치를 찢었다.
젓가락으로 반숙된 계란을 찔렀을 때처럼 점액이 고치 밖으로 왈칵 쏟아졌다. 말랑말랑한 고치를 찢고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내 갑각 위를 스쳤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 나는 내 몸의 변화를 확인했다.
제일 처음 합성한 유일 특성, ‘완전한 유기체’는 내 몸을 크고 날렵한 육식동물의 형태로 변화시켜줬다. 두 번째 얻은 ‘악몽의 지평선’은 등에 침식촉수들을 저장하느라 무겁고 육중한 이미지가 됐었고.
세 번째, ‘유기적 진화’의 경우는 내 몸을 특정 형태로 바꾸는 특성이다 보니 내 몸에 별다른 변화를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네 번째로 합성한 유일 특성은 어떨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례처럼 많이 달라졌다.
체형 자체는 준성체 특유의 거대한 뱀과 같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전히 다리가 없이 전투용 팔과 날개 팔을 이동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똑같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몸길이가 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는 거다. 길이만 40m에 육박하던 나였으나 지금은 25m를 간신히 넘을 정도였다.
하반신과 꼬리 부분의 길이가 크게 줄어들었지만 그 대신, 전투용 팔이 굉장히 크게 자라났다.
나는 전투용 팔로 금속 바닥을 짚고 일어서봤다. 전에는 하반신과 꼬리가 바닥에 끌렸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간단히 비유하자면 현재 내 체형은 거미의 몸에 길고 두꺼운 꼬리를 단 것 같은 형태에 가깝다.
제일 크게 변한 것은 체형이지만, 세부적인 부위에서도 변한 부분이 있었다.
먼저 머리부터 보자면 머리갑각과 형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수확자의 아가리’ 특성으로 인해 생긴 엄니, 턱 아래에 있는 4개의 보조기관, 악어나 수각류(獸脚類) 공룡 같은 두상, 거대하지만 불완전하게 자란 뿔과 화려하게 뻗은 뒷머리갑각 등은 전부 그대로였다.
달라진 점은 머리보다는 목 부위였다. 머리갑각 안쪽과 목에 걸쳐 갈기처럼 퍼져 있는 ‘괴물의 촉수’가 혜택을 받은 대상이었다.
현재 괴물의 촉수는 목과 머리갑각 안쪽에 있는 구멍 안쪽에 수납된 상태였다.
평소에 침식촉수를 배갑(背甲) 속에 숨겨뒀다가 필요할 때마다 피막을 찢고 촉수가 튀어나오던 것처럼 괴물의 촉수도 그와 비슷한 형태가 된 거다.
‘이건 진짜 좋은 변화인데.’
여태껏 내 몸에서 크게 약점으로 작용한 것은 두 가지. 턱 아래의 보조기관과 괴물의 촉수다.
보조기관이야 사냥의 표상을 쓰면 갑각이 덧씌워지니까 괜찮다 쳐도 괴물의 촉수는 보호 수단이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강적들은 목에 흘러내리는 촉수다발부터 노렸다.
‘이제는 그럴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어.’
전투 중 급하면 괴물의 촉수를 숨기면 되니까.
나는 괴물의 촉수를 빼기 위해 목에 힘을 줘봤다. 목을 펴고 걸을 때처럼 뒷목이 빳빳해지고, 목과 머리 뒤에 난 작은 구멍에서 촉수다발들이 흘러나왔다.
괴물의 촉수 다음으로 크게 변한 부분은 날개 팔이었다.
날개가 달려 있다 보니 원래도 다른 전투용 팔보다 길고 컸지만, 지금은 전보다 3분의 1 이상 길어졌다. 그리고 세로로 접힌 갑각이 이중으로 덮여 있는 구조가 되어 다른 팔들보다 배 이상 굵었다.
‘피막을 접어서 안에 수납하는 형태가 됐어.’
날개를 펼칠 때의 감각으로 날개 팔을 움직여보자 접힌 갑각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피막들이 살살 펴졌다. 잘 접힌 텐트가 펴질 때처럼 말이다.
확대된 날개 팔과 마찬가지로 다른 전투용 팔들도 상당한 크기가 됐다. 관절도 날개 팔처럼 더 추가된 덕분에 전보다 다채로운 움직임이 가능해졌다.
목과 팔, 그 외 자잘한 변화점이라고 한다면 전에 있던 뭉툭한 발톱들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대신 발톱이 있던 자리에는 작은 생체 파이프 같은 것이 돋아 있었다.
‘일반인이 보면 그대로 기절하겠는데.’
이전에도 무서운 외모였지만, 지금은 더 흉악해진 것 같다. 마음에 든다.
‘그럼 텍스트박스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한 번 볼까.’
몸의 변화를 전부 체크한 나는 텍스트박스를 확인했다.
「위대한 감염체: 당신은 하나이면서 다수입니다. 감염, 둥지 강화 타입에 속하는 특성들 중 각각 3개씩 선택해서 강화 효과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강화 대상: ① 감염 타입 특성: 미설정, 미설정, 미설정
② 둥지 타입 특성: 미설정, 미설정, 미설정
*주의: 강화 효과가 모두 부여되면, 강화된 특성이 사라지기 전까지 다른 특성에 효과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추신: 관점에 따라 개인은 집단이 되기도 합니다.」
「‘유기적 진화’에 신규 특수 상태, ‘변이 바이러스 숙주’가 해금되었습니다!」
「‘우주괴물(유일)’ 타입이 1단계가 되었습니다! 1단계 보상이 활성화됩니다!」
‘역시.’
감염, 둥지 관련 특성들을 요구할 때부터 짐작했지만, 새로 만든 유일 특성은 두 특성의 효과를 강화시키는 특성이었다.
‘감염, 둥지 타입에 속하는 특성 중 3개에 강화 효과 부여.’
다른 유일 특성이 특성과 타입 전체를 일괄적으로 강화시켜 주는 것치고 이번 특성은 딱히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만큼 효과를 집중해서 올려 준다는 뜻인가?’
초월 시스템을 통해 얻은 유일 특성들이 하나 같이 규격 외의 특성들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내 추측이 맞으리라.
‘바로 설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한 번 정하면 특성이 사라지기 전까지 번복할 수 없다고 하니까 신중해서 결정해야 한다.
‘그보다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어.’
‘위대한 감염체’를 얻은 덕분에 우주괴물 타입이 1단계로 진입했다. 하나조차도 얻기 힘든 유일 특성을 4개씩이나 요구했는데 과연 어떤 보상이 왔을까.
보상으로 날아온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우주괴물(유일) 타입 단계가 1단계를 달성했습니다.」
「1단계 달성 특전으로 ‘정수 재배열’ 효과가 적용됩니다.」
「정수 재배열: 이미 해금 및 획득한 타입이 페널티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후 새로 타입 정보를 해금할 시, 해당 타입부터 페널티가 초기화됩니다.
*추신: 진화는 퍼즐과도 같습니다. 완성하기 전까지는 항상 불완전한 상태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헐?’
우주괴물 타입의 1단계 보상.
그건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을 정도로 파격적인 보상이었다.
-
“네른 함장, 유물이 있는 곳까지는 얼마나 더 가야 하지?”
“곧 도착할 거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다행이군.”
“…젠장, 그 유물을 보관할 당시에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이유를 모르겠군.”
제국모함의 전(前) 함장 네른과 시현 유진.
그들은 이동 중인 무리의 선두에 서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라일라는 좀 전에 봤던 데이터칩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 시현의 말을 들은 라일라는 그녀가 미친 줄 알았다.
아키라 유진 밑에서 그림자 생활을 너무 오래한 탓에 정신이 나간 것이라고.
‘차라리 미쳤다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시현이 미쳤는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그녀가 건넨 자료 자체는 조작된 것이라 보기 어려웠다.
사실 이미지 자료 자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 해야 십 수 장에 불과했으니까. 다만, 이미지에 있는 항해도와 문자들을 해석하기 위해 첨부된 주석들과 연구 논저 등은 상당한 분량이었다.
라일라는 티앤씨 특수무역중심지의 총괄관리자였던 만큼 매주 도시의 제반 사항에 대한 보고를 받는다. 그렇기에 그녀의 머리 안에 축적되어 있는 지식과 정보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녀가 보기에 시현의 데이터칩에 담긴 내용이 조작되었다거나 정신병자가 짜깁기한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이상해.’
과거 시현의 스승이었다고 하는 컬트, 범호라는 자가 남긴 기록물의 내용은 두 가지 무기에 관한 것이었다.
그 중 하나는 불완전한 항해도만 존재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지만,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았다. 60% 가량 해석에 성공한 그 무기의 효과는 실로 터무니없었다.
‘특정 생물만 골라서 죽이는 무기라니.’
시현이 해석한 바에 따르면, 그 무기의 효과는 특정 유기체들에게 치명적인 효과를 주는 입자선을 쏴서 대량 학살하는 것이다. 무기에 새로운 살상 대상의 유전자 데이터를 입력하면 얼마든지 재설정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스타유니언의 나노 무기인 그렘린어뢰인데, 공격 대상을 금속에서 생명체로 바꾼 것이라 보면 된다.
네른 함장의 말을 들어봐도 기록물에서 설명하는 무기의 특징과 상당 부분 일치했다. 저 무기 하나로 아웃스페이서의 군단을 일소했다고 했으니까.
‘문제는 그 무기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
처음 만났을 때, 네른이 말했다.
정체불명의 선원이 무기만 두고 사라졌지만, 아무도 그 무기를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엄청난 파괴력을 지녔지만,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동력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무기다. 특정 생물만 죽이는 나노 핵폭탄 같은 무기를 마음대로 만질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그들은 이 외진 행성의 화산 깊숙한 곳에 무기를 숨겨 놓는 것을 택했다.
‘…이해되지 않는 요소가 너무 많아.’
일단 무기가 실존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치더라도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무기의 주인이 시현의 아버지, 정우였다면 왜 아키라와 싸울 때 쓰지 않았는가. 그랬다면 아키라에게 목숨을 빼앗기지도, 가주의 지위를 찬탈당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렇다고 후손을 위해 남긴 안배라고 보기도 모호하다. 만약 안배라면 범호란 자가 직접 시현에게 무기를 주는 것이 더 나을 터.
그러지 않은 탓에 정우 유진이 죽은 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겨우 무기를 찾아 나서게 됐다. 그녀의 가문과 전혀 관련 없는 네른 함장의 안내를 받으면서 말이다.
‘범호라는 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시현 유진, 네른 함장.
메가콥의 최고위층, 컬트 제국의 엘리트라는 존재들이 범호의 손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복잡한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일행은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막힌 길인데 어떻게 된 거지?”
“으음, 원래 이쪽에 통로가 있어야 하는데….”
네른의 말을 듣자마자 시현은 팔 부위를 칼로 변형시켜서 벽을 벴다. 동굴 벽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큼지막한 공터가 나왔다.
“이게 무슨…?”
“맙소사. 시체가 엄청나.”
손전등으로 어둠에 찬 공터를 비추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시체였다. 그들이 이곳까지 오면서 조우했던 위험 생물들의 시체들과 정체불명의 생물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생물이지? 이런 건 생전 처음 보는군.”
시현의 부하들은 시체들 사이에 섞여 있는 여덟 개의 단단한 다리를 지닌 괴물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까지 오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괴물들은 자연적으로 탄생한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기계와 비슷하게 생겼다.
“이놈도 그렇고. 이 자리에 있는 놈들, 죽은지 얼마 안 된 것 같아.”
바깥과 달리 이곳은 온도가 따뜻한 편이다. 그 말은 시체가 썩기 좋은 환경이라는 것. 그런데도 이 자리에 널린 시체들은 아직도 부패가 진행 중이었다.
먹이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왜 이곳에서 서로 싸우다 죽은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부하들은 당황해 했다.
「전에 왔을 때도 이랬나요?」
“그럴 리가. 우리가 왔을 때는 이 산 안에 아무것도 없었소.”
「어떻게 생각…시현?」
라일라가 불렀지만 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최면에 걸린 것처럼 시체 사이를 걸었다.
그리고 공동 안쪽에 산처럼 쌓인 시쳇더미 안에 손을 집어넣어 뭔가를 꺼냈다.
「그건?」
“그거요! 우리가 이 공터에 파묻은 유물!”
아직도 의심 섞인 반응을 보이는 라일라. 얼굴에 놀라움과 두려움이 혼재된 네른.
그들은 알지 못했다.
지금 시현 유진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특전 ‘만능인의 대장간’으로 제작된 ‘심연 파괴자」
「현 소유자: 없음(임시 소유자: 신범호)」
「획득 조건: ‘플레이어 정우’와의 유전적 유사성」
「신규 사용자 ‘시현 유진’. 획득 조건 확인. 방어벽을 해제합니다.」
「‘심연 파괴자’의 소유권이 ‘플레이어 신범호’에서 ‘시현 유진’으로 이전되었습니다.」
마치 뇌에 직접 꽂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반투명한 텍스트박스들. 그녀는 거기에 담겨 있는 내용 중 절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이 물건은 이제 새 주인을 섬길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