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54
초광속 항해가 수차례 이어졌으나 따라오는 적은 없었다. 보이는 것은 오색의 별로 장식된 검은 비단뿐이었다.
나는 열려 있는 격납고를 통해 다시 함선으로 돌아왔다.
격납고에서는 그리폰 볼프, 하늘의 어머니가 함재기를 점검 중이었다. 날개 아래에 장착된 스톰건을 살펴보던 그녀는 내가 들어오자 말을 걸었다.
「추적은?」
[즈즈(없어)]
「마지막에 그 ‘파장’. 그것 때문에 못 쫓아오는 건가.」
[즈즈(글쎄)]
갑자기 발생한 이상 현상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스타유니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무형의 파장이 적 함대를 궤멸시켰다. 나는 적과 직접 마주보고 있었기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함장들이 전부 죽었어.’
움직이다가 멈추거나, 혹은 했던 행동을 반복하는 함선들을 보면 답은 하나였다. 배의 통제권을 지닌 사이보그 함장들이 죽었다는 것.
파장이 한 차례 내 주변을 휩쓸고 간 이후, 배들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스타유니언의 함선은 PS-111이 하는 것처럼 함선 컴퓨터와 직접 케이블로 연결할 수 있는 사이보그가 있다면 지휘를 대행할 수 있다.
즉, 내가 내뿜는 불길에도 배들이 정상적으로 복구되지 않았다는 것은 탑승한 사이보그들이 전부 죽었다고 봐야겠지.
「게임에서 저런 이벤트는 없었지?」
[즈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사이보그만 죽이는 파장은 들어 본 적 없어)]
「…원인은 모르겠지만 운이 좋았네.」
그녀 말이 맞다.
만약 저 파장이 사이보그가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 피해를 줬다면? 아니면 우리가 스타유니언에게 패하고 난 뒤에 발생했다면?
그랬다면 지금처럼 모두가 무사하지는 못했으리라.
‘다만 100% 운은 아니었어.’
적절한 타이밍에 발생한 이상 현상은 우리에게만 이득을 준 것이 아니었다.
시현 유진 세력이 이끄는 함선. 그들도 스타유니언 함대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기에.
‘전에 인면수가 말했지.’
시현 유진의 잔당이 유물을 찾으러 얼어붙은 행성을 방문했다고. 어쩌면 사이보그를 몰살시킨 파장도 그들이 찾은 유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향후 놈들과 조우할 가능성은 낮다. 지금 이 배가 향하는 곳은 메가콥, 스타유니언, 컬트 제국 중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장소니까.
‘정보를 얻기도 쉬운 곳이니 한 번 알아볼까?’
「아무튼 네가 왔으니까 나도 좀 쉬어야겠다.」
[즈즈즈즈(고생했어)]
「고생은 뭘.」
나는 하늘의 어머니와 함께 격납고를 나섰다. 그녀는 보관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 가서 쉴 생각인지, 나와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했다.
[즈즈즈 즈즈즈(잠깐만 기다려)]
「응?」
나는 그녀를 불러 세우고, 보관소에 들어갔다.
들어가니 몸집을 커다랗게 키운 26호가 벽 앞에 자리를 잡고 잠들어 있었다. 녀석은 평상시 숨겨두는 지느러미 다리들을 전부 꺼내서 무언가를 감싸는 중이었다.
‘뭐하는 거지?’
지느러미들 사이에 갤러곤의 알들이 보였다. 암탉이 알을 품듯 몸과 지느러미를 이용해 알들을 꼭 품고 있었다.
그린 갤러곤 이상은 문제가 없지만, 블루 갤러곤이나 알의 경우는 생존에 사이킥 파워가 필수적이다. 그래서 사이킥 파워를 자체적으로 만들어 내는 26호가 알이 죽지 않도록 관리하는 거다.
‘저것도 어떻게 해결해야겠네.’
나는 녀석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보관소 안에 들어갔다. 안쪽에 위치한 냉동 컨테이너들 사이에는 그린 갤러곤들 몇 마리가 엎드려서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내가 용의 둥지에서 챙겨 온 물건들과 장비류를 담은 배낭이 놓여 있었다.
나는 거미의 다리처럼 길쭉한 전투용 팔을 뻗어서 광물 조각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보관소 밖으로 나오자 하품을 하고 있던 그녀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광물을 내밀었다.
[즈즈(받아)]
「그건?」
[즈즈즈즈 즈즈즈즈즈(신격화에 필요하잖아)]
그녀는 내 손에 들린 원석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 알갱이가 드문드문 박힌 이 광물의 이름은 스타펄. 볼프의 신격화를 상승시키는데 필요한 도구를 만드는데 사용된다.
‘당장 가공은 불가능하지만.’
스타펄 원석은 매우 단단하므로 일반적인 장비로는 가공할 수 없다. 그렇지만 상관없다. 우리가 갈 장소에 이를 가공할 수 있는 장비와 기술자들이 있을 테니까.
이름 그대로 별의 진주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광물 덩어리를 받은 그녀는 미묘한 눈빛으로 광석을 쳐다 봤다.
「어, 이거 내가 전에 챙겼는데.」
[즈즈즈즈(챙겼다고?)]
「나랑 함 오르트가 둥지에 복귀했던 날, PS-111과 둥지를 둘러본다고 했었잖아. 그때 챙겼어. 배낭에 넣어 놨는데 못 봤구나.」
생각해 보면, 최근 배낭을 들고 다니지 않은지 오래 됐다. 마지막으로 배낭 속을 뒤졌던 것이 블러드 리버를 포식하려고 했을 때니까.
그 이후로는 아드하이나 하늘의 어머니가 계속 배낭을 챙겼었다.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즈(혹시 모르니까 갖고 있어)]
「그래. 하나 더 있으면 나쁠 것 없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기에 다시 보관소에 들어가려는데, 그녀가 나를 불렀다. 그녀는 손톱으로 부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고마워. 잘 쓸게.」
그녀는 감사의 사념파를 남기고 그 자리를 떴다.
‘신격화 말고도 다른 데 쓸 수 있으니까.’
스타펄은 컬트, 볼프가 사용하는 고급 장비의 재료로도 쓰인다. 어떻게든 가공만 할 수 있다면 그녀에게 충분히 도움이 될 터.
그녀를 떠나보낸 나는 다시 보관소로 들어갔다.
‘배낭이나 살펴볼까.’
방금 스타펄을 꺼냈던 자리에 돌아온 나는 바닥에 엎드려 배낭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배낭 옆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마름모꼴 비석이 툭 쓰러졌다.
오드 그라드의 거처에서 주운 비석이다. 감정을 숨기는 반지와 함께 문명의 입김이 닿은 물건들이라 조사해 보기 위해 일부러 챙겼다.
‘이따가 확인…응?’
비석을 다시 세우려고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는데, 비석의 상태가 전에 봤던 것과 달랐다. 표면에 새겨진 알 수 없는 문자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건?’
빛이 나오는 문자를 손가락으로 건드려봤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원래 그랬다는 듯 간헐적으로 빛을 뿜어낼 뿐.
‘흠.’
괴물의 촉수, 턱 아래의 보조기관, 심지어 침식 촉수까지 꺼내서 건드려봤지만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 사이에 빛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혹시?’
문득 오드 그라드가 끼고 있던 반지가 생각났다. 나는 배낭 주변에 놓여 있는 반지를 집어 들고 가슴쪽의 작은 팔에 꼈다.
그러자 바로 비석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임시 사용자 ‘오드 그라드’ 확인됐습니다. ‘아키라 유진’와의 통신이 연결됩니다.」
‘어?’
익숙한 외형의 텍스트박스가 눈앞에 떠오르고, 동시에 비석이 내 손에서 벗어났다.
공중에 떠 있는 비석으로부터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다. 뭐 하느라 이렇게 오래 걸렸지? 한참 동안 답이 없어서 나중에 연락하려고 했거늘.」
‘뭐야?’
「쯧, 일단 받았으니 묻겠노라. 전에 말했던 일은 어떻게 됐는고?」
목소리의 주인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남성이었다. 목소리 자체는 젊은 사람 같은데, 말투와 분위기는 노인의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내 신경이 텍스트박스에 출력된 메시지에 집중된다. 거기에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록되어 있다.
‘아키라 유진.’
전에 제이슨으로부터 들었다. 메가콥에 일본식 이름을 고집하며 중2병 걸린 노인처럼 행동하는 자가 있다고.
‘그런 이상한 놈은 하나뿐이지.’
랭킹 3위를 자랑하는 플레이어이자 제이슨보다 한 술 더 뜨는 지독한 에이모프 사냥꾼. 덕분에 나하고도 지겹도록 싸웠던 메가콥 랭커다.
‘놈과 흑룡이 관계되어 있을 줄이야.’
그제야 이해가 됐다.
오드 그라드에게 반지를 준 자는 아키라 유진이다.
오드 그라드는 미래를 읽는 힘 때문에 젊은 갤러곤들의 도전, 혹은 아드하이 같은 레드 갤러곤의 힘을 갖고 태어난 존재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고민을 해결해준 존재가 바로 아키라 유진.
‘이걸 누가 만들어줬나 했더니.’
놈은 감정을 숨기는 반지를 줘서 오드 그라드가 갤러곤들을 억압하고 군림하도록 만들었다.
그 대가로 흑룡으로부터 받은 것은 아마도….
‘갤러곤.’
함 오르트가 말하길, 오드 그라드는 주기적으로 해츨링을 죽이거나 알을 둥지 밖으로 버렸다고 했다. 약한 개체를 줄여서 무리의 부담을 줄이겠다는 이유로 말이다.
당시 얘기를 들었을 때는 자기 안위를 위해서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내 추측은 반만 맞았다.
놈은 정기적으로 아키라 유진의 세력에게 알과 갤러곤을 넘겨 준 것이리라.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싸웠던 유진 가문의 일원들, 시현 유진과 그림자들이 갤러곤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것이 설명된다. 전부 아키라 유진이 오드 그라드로부터 갤러곤을 공급받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왜 대답이 없느냐? 아직 에이모프를 처리하지 못한 건가?」
게다가 지금 말하는 것을 보니 내가 오기 전에 미리 나에 대해 말을 해놓은 것 같았다. 아마 나를 잡아 죽이라는 명령일 터.
‘확실히 미래를 읽는 흑룡은 버거운 상대지.’
초월 시스템으로 만든 유일 특성과 애들이 없었다면 놈의 계획대로 됐을 거다.
나는 잠시 비석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 목에서 저장된 인면수, 제이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이야. 3위.”
「!」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서일까. 비석 너머로 놈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나 보네.”
「…この糞野郎が。(…이 개새끼가.)」
“네놈의 애완동물은 죽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놈이 얼마나 분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를 죽이려는 계획도 실패했고, 갤러곤을 공급하는 루트도 잃어 버렸으니까.
나는 놈에게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선고했다.
“너와 만나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칫!」
짧게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비석의 불이 꺼졌다. 그리고 비석에 금이 가더니 반쪽으로 깨져 버렸다.
그걸 보니 놈도 내가 뭘 말하는지 충분히 아는 것 같다.
‘뭐 당장은 아니고, 성체가 된 후의 얘기지만.’
이 함선이 향하는 곳들에서 성체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마저 채울 생각이다. 우주의 무법자들이 활보하는 영역에서 말이다.
성체가 된 다음에는 지금처럼 녀석과 비석을 통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게 될 거다.
그때 가서 놈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둘 뿐이다.
나와 싸우다가 죽거나.
아니면 나로부터 도망치다가 죽거나.
내 머릿속에서 이후 어떻게 할지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런 나와 상관없이 괴물들을 태운 강철의 요람은 목적지를 향해 꾸준히 나아갔다.
-
호화로운 집무실에서 아키라 유진은 서늘한 표정으로 마호가니 테이블 위를 노려봤다. 거기에는 문자가 새겨진 마름모꼴 비석이 놓여 있었다.
“…….”
오드 그라드에게 대여했던 비석은 즉시 파기했지만, 그런다고 일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대화는 길지 않았으나 저 빌어먹을 에이모프라면 거기서도 많은 정보를 빼먹었을 거다. 게임에서도 놈은 언제나 그랬으니까.
그 사실을 알기에 그의 속내는 활화산처럼 활활 타오르는 중이었다.
‘くそ!(씨발!) くそ!(씨발!) くそ!(씨발!)’
게다가 놈이 마지막 남긴 도발. 놈은 감히 그를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우주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 중 하나인 메가콥의 CEO이자 지구의 왕인 아키라 유진을 말이다. 다른 자가 그런 소리를 했다면 웃으며 사지를 찢어 놨을 거다.
스타유니언의 랭커 주바카, 메가콥의 랭커 클로에 가르멜다. 그 둘도 감히 그에게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못한다. 그가 진짜 자기들을 찾아와 입을 찢어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에이모프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놈에게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실수해서 놈에게 더 많은 정보를 유출시킬까 봐 그런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키라는 참을 수 없었다.
“으, 으아아아아아!”
그가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지르자 그의 팔이 기형적으로 변했다. 괴물의 팔이 마구 날뛰자 앞에 있던 마호가니 테이블이 4조각으로 쪼개졌다. 그것 말고도 다른 사치품들도 그의 손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오드 그라드으으으! 제이스으으으으은! 멍청한 놈들! 감히!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오오! 아아아아악!”
완벽히 방음 처리된 집무실에서 아키라의 발광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
「제가 보낸 ‘화물’은 받으셨습니까? 클로에 님.」
“응. 당연하지. 신시아 덕분에 연구의 진척율이 크게 늘어날 것 같아.”
「제 안전을 보장해주신다는 것,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걱정하지 마. 그곳은 영감님의 손길도 닿지 않는 곳이니까.”
「하긴 직접 와 보니 그럴 것 같군요.」
“그쪽에 잘 얘기해놨으니까 불편한 건 없을 거야. 그럼 다음에 또 얘기하자고.”
「알겠습니다. 클로에 님.」
그 말을 끝으로 전선과 연결된 다이아몬드 비석의 불이 꺼졌다.
신시아와의 통신을 종료한 클로에 가르멜다는 공중 부양 의자를 타고 방을 나섰다.
“신시아도 잘 숨었고, 재수 없던 영감님한테도 엿 한 번 제대로 먹이고. 주바카 오빠하고는 연락이 안 돼서 잘 모르겠지만, 그쪽은 뭐 늘 바쁘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오랜만에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리자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지난번 아키라 유진, 신시아, 주바카, 그녀, 이렇게 넷이서 모프박이 사냥 작전을 계획했다. 신시아는 컬트 랭커 제이슨에게 놈의 위치를 알려주고, 아키라 유진은 블랙 갤러곤을 시켜서 놈을 죽이려고 했다.
당시 논의가 끝난 뒤 클로에는 신시아를 따로 불렀다. 한 가지 요청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만에 하나 제이슨이 모프박이 사냥에 성공하거나, 혹은 실패한다면 자기한테 제일 먼저 얘기해 달라고 말이다.
현재 그녀는 스타유니언의 주바카와 함께 독단적으로 유전자 합성 생물, 즉 헐크 뮤턴트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랭커들의 유전자였다.
만약 에이모프가 사살당한다면 아키라 유진은 자기한테 시체를 달라고 주장할 것이 틀림없었다. 보기보다 무식한 제이슨은 특전을 획득한 것으로 만족할 테니 쉽게 아키라에게 시체를 넘길 거고.
그래서는 안 됐기에 그녀는 제이슨과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사이인 신시아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그리고 전투 결과는 제이슨의 패배. 그는 머리만 날아간 상태로 몸만 신시아에게 돌아왔다.
그녀는 바로 클로에에게 제이슨이 죽었다는 사실을 보고했고, 거기서 클로에는 신시아와 계약을 맺었다.
그녀의 안전을 보장해 줄 테니까 제이슨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키라에게 알리지 말라고.
제이슨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아키라가 알면 모프박이를 잡기 위해 다른 수작을 부릴 것이 뻔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이슨의 시체도 그가 가져가려 했으리라.
그래서 그녀는 ‘아주 약간’ 제이슨의 사망 소식을 늦췄다.
‘이렇게 잘 풀릴지는 몰랐는데 말이야.’
다른 때 같았으면 아키라 유진이 이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애초에 같은 행성에 블랙 갤러곤도 있으니 확인만 하면 제이슨의 패배를 금방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하늘이 그녀를 도왔다.
아키라 유진은 내전 종료 협상 때문에 바쁜 터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 덕분에 그녀는 어렵지 않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제이슨 오빠의 시체와 여러 샘플들. 그 오빠는 갈 때도 참 많은 걸 남기고 간단 말이야.’
그녀가 탄 공중 부양 의자가 실험실 문 앞에 멈춰 섰다. 문 옆 단말기로부터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그녀의 전신을 스캔했다.
「환영합니다. 클로에 가르멜다 님.」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새하얀 무채색의 공간이 그녀를 반겼다. 마치 공간 전체를 들어다가 탈색을 시킨 것인 마냥 바닥, 벽, 천장 모든 것들이 하얀 색이었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색깔을 지닌 것은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연구원들, 그리고 수십 개에 달하는 실험관들이었다.
돌아다니던 연구원 중 한 명이 클로에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 클론 배양 진척율은 현재 23%. 전(前) 실험체에 비해 매우 안정적입니다.”
“희소식이네요. 50% 이상이 되면 유전자 융합을 개시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가주님. 리 자오 수석연구원께서도 도대체 이런 걸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어보시더군요.
의자 옆에 다가온 연구원의 물음에 클로에는 입을 가리며 말할 수 없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건 가문의 기밀이니 말해 줄 수 없다고 전해주세요.”
“하하하, 역시 그렇습니까. 아, 새 실험체가 생겼으니 이번에도 명칭을 지어 주시는게 어떻습니까?”
그 말에 클로에는 검지로 의자를 톡톡 튕겼다. 잠시간의 고민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JS로 하죠.”
“JS? 지난번에는 PS로 하시더니 혹시 뭔가 의미가 있습니까?”
그 말에 클로에는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만을 지었다. 그녀가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연구원은 어깨를 으쓱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제이슨 오빠는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실험관에 있는 컬트 클론을 바라봤다.
소녀와 같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녀의 눈은 고요한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