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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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인류보다 먼저 우주에 진출한 지성체들이 있었다.
육신은 연약했지만, 신의 축복을 받아 특별한 힘을 사용하는 족속들.
신이 정한 ‘섭리’의 인도에 따라 우주로 나온 그들은 스스로를 ‘컬트’라 칭했다.
처음에는 위성 사이를 겨우 오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신의 가호가 우주 진출까지 돕지는 않았기에.
하나 컬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다룰 수 있는 사이킥 파워에만 의존하지 않고, 기술 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위성 여행은 타 행성 개척, 자신들이 속한 성계의 탐사로 이어졌다. 작은 행성에서 탄생한 지성체들은 어느새 여러 성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세웠다.
물론 이는 우주의 기준에서 보면 찰나나 다름없는 시간. 그들 이전에도 수많은 문명이 흥망을 반복했고, 그들 또한 마찬가지일 터.
컬트 제국의 번영은 길지 않았다. 내분, 위정자들의 부패, 끊이지 않는 전쟁이 제국의 수명을 급격히 단축시켰다. 그 탓에 현시점에 와서는 과거의 영광을 반도 못 찾을 정도로 쇠락했다.
케샤 아르마 우주요새 또한 빛나던 제국이 남긴 그림자 중 하나였다.
메가콥의 말로 번역하면 ‘부유한 왕’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 우주요새는 광산 행성을 지키기 위해 설치되었다.
제국이 번영하던 시절에는 다양한 종족들의 채굴선들이 이 요새를 이용했다. 부유한 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곳은 제국의 부가 집중된 장소였다.
만약 광산 행성의 광물이 바닥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랬을 거다.
요새의 존재 이유라 할 수 있는 행성의 자원이 고갈되자 케샤 아르마의 중요도는 급격히 떨어졌다. 과거라면 모를까, 시시각각 몰락해가는 제국은 손해만 보는 우주요새를 유지할 여력이 없었다.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제국의 요지였던 것이 이제는 완전히 애물단지가 된 것이다.
요새를 유지하는 비용이 이익을 한참 초과하자, 제국이 내린 선택은 간단했다.
황금기의 막바지를 장식한 우주요새를 버리는 것.
주둔한 컬트 군함들이 모두 철수한 것을 끝으로 이 우주요새는 무주공산이 됐다. 원칙상으로는 컬트 제국의 것이나 실상은 관리자도, 군대도 없었다.
버려진 초대형 구조물에는 광부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자들, 그리고 빈집이 필요한 외부인들만이 남았다. 주인 없는 도시가 슬럼가가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케샤 아르마는 우주의 심연 중 하나가 됐다.
몰락한 부의 왕을 점거한 자들은 마르시오 카르텔.
스페이스독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강성한 카르텔이다.
일반적으로 스페이스독 카르텔들은 행성이나 우주도시에 정착하기를 꺼린다. 적이 많다 보니 언제 토벌군이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신 카르텔의 조직원들이 살만한 함선을 무장시키는데 더 관심을 기울인다.
반면, 역대 마르시오 카르텔의 두목들은 이와 전혀 다른 방식을 택했다.
그들은 다른 해적들의 범죄를 ‘알선’하는 것으로 크래딧을 벌었다. 밀수를 위주로 하는 카르텔들을 위해 암시장을 설치해주거나, 혹은 인신매매를 주업으로 삼는 카르텔에게 메가콥 고위층과 연결시켜 주는 등등.
과거 케샤 아르마가 광산 행성과 채굴선을 매개해서 돈을 벌었던 것처럼 해적들과 범죄를 매개해서 돈을 번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방식 덕분에 케샤 아르마와 마르시오 카르텔은 존속할 수 있었다. 스페이스독이라면 이를 가는 메가콥이나 스타유니언도 그들의 고객이었기 때문이다.
우주의 열강들이 용인한 무법 지대. 그것이 오늘날의 케샤 아르마였다.
그리고 오늘도 해적의 요새에서는 곳곳에서 범죄가 판을 치는 중이다.
“씨발! 대가리를 깨! 대가리! 아씹!”
“너, 너만 믿는다 제발! 너한테 크래딧 다 몰빵했다고!”
“끄아아아악! 씨발년아! 거기서 왜 팔을 잘라?!”
한때 제5병기고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장소.
온갖 종류의 무구가 배치되어 있던 곳이 지금은 성난 군중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인간, 사이보그, 볼프, 콜드블러드.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난 지성체들이 오로지 하나만을 보고 고함을 질렀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 철창 안에서는 벌거벗은 남성 둘이 싸우는 중이었다.
외모도, 피부색도, 손에 든 무기도 달랐으나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둘은 목에 무거운 구속구를 차고 있었고, 전신이 피범벅이었다.
이곳은 해적들이 운영하는 투기장. 도시의 흔하디흔한 심연 중 하나다.
“그래! 조금만 더 힘을 내! 씹새야 넌 할 수 있어!”
“어, 어어어어?! 저 새끼 왜 저래? 아아악! 씨발!”
“와아아아아아! 이겼다! 이겼어!”
“으허어어어엉! 내 크래딧! 으아아아아!”
잔혹한 혈투는 도끼를 든 자가 창을 든 자를 참수한 것으로 끝났다.
삶과 죽음이라는 상반된 감정은 철창 안에서만 맴돌지 않았다. 투기장의 군중들 또한 환희와 절망이라는 감정에 몸서리쳤기에.
얼마 전 마르시오 카르텔에 가입한 사이보그, 기드큐는 환호하는 쪽에 속했다.
“크크, 이게 얼마냐?”
평소 잘 안 하던 역배팅이었는데, 이렇게 대박이 날 줄이야.
기드큐는 투기장에 배치해 둔 정산기에 자기 단말기를 꽂았다. 순식간에 그의 크래딧에 0이 두 개 추가된 것을 보니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와. 역배씨발.”
“…씹새끼, 좆나 부럽네.”
그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결코 곱지 않았지만, 함부로 덤벼드는 자는 없었다. 그가 마르시오 카르텔의 일원이라는 것을 다들 알기 때문이다.
그는 증오와 부러움이 섞인 시선을 즐기며 투기장을 나섰다.
몸의 절반을 기계로 대체한 사이보그를 반기는 것은 눈이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유흥 가게의 네온사인들로 인한 인공적인 빛의 향연. 빨강색, 파랑색, 노랑색, 초록색 등 온갖 빛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덕분에 길가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옷을 입고 다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는 것은 광고판만이 아니었다. 건물들도 마찬가지였다. 병기고였던 투기장처럼 컬트 전통 양식이 짙게 반영된 건물이 있는가 하면, 유입된 외부인들이 엉성하게 지은 구조물도 있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를 것 같은 가게들 앞에는 해적, 부랑자, 노예, 용병 등의 온갖 군상들이 싸돌아다녔다.
뭐 하나 통일된 것이 없는 슬럼가 같은 곳에서 과거의 편린을 느끼고 싶다면 하늘을 쳐다 보면 된다.
그들 머리 위에는 ‘또 다른 지상’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케샤 아르마는 행성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우주요새. 버려진 행성이 투명한 외벽 너머에서 요새의 거주민들을 내려다 보고 있다. 케샤 아르마의 어느 장소를 가도 황폐화된 행성의 풍경을 관람할 수 있다.
컬트 문명의 정수를 앞두고도 기드큐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닌데다가 그에게는 단말기에 찍힌 크래딧이 더 중요했다.
“술이나 먹을까.”
오락은 충분히 즐겼으니 뱃속에 기름칠을 할 차례다. 그는 평소에 자주 가는 술집에 발걸음을 옮겼다.
가게에 들어서니 그와 비슷하게 합성주를 들이키며 시간을 때우는 자들이 있었다.
“이 자리에 합성주 싹 돌려.”
기드큐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테이블에 합류했다. 그러자 다른 해적들이 의외라는 듯 그를 쳐다봤다.
“오, 깡통이 웬일이냐?”
“저 새끼 돈 땄나 보네. 매번 꼴더니 역배라도 터졌냐?”
“…아이씨, 내가 말하려 했는데.”
그렇게 몇 번씩 술잔이 오가자 기드큐를 포함한 해적들은 금세 취했다.
“깡통, 하나만 물어보자. 스타유니언에서는 혼자 딸치는 것도 못하게 한다던데 진짜 그래?”
“어. 인구 제한 정책인지 생산 정책인지 하는 것 때문에 불법이야. 매년 정기적으로 기억 검사를 하는데 그때 걸리면….”
기드큐가 검지와 중지를 펴서 가위 모양을 만들자 다른 해적들이 질색했다.
“오우씨, 내가 들은 지금까지 들은 얘기 중 제일 무서운 것 같은데.”
“섹스도 함부로 못해, 딸도 못 쳐. 그런 나라에서 수십 년을 산 것 자체가 공포다 공포. 씨발.”
“무서운 얘기하니까 그거 생각나네. 니네 소문 들었냐? 최근에 사투아 카르텔 얘기.”
“사투아? 그 또라이들? 걔네가 왜?”
“내 친구가 사투아 카르텔 애들하고 아는데 두 달 전부터 연락이 완전 끊겼다더라.”
“으, 씹. 난 네가 사투아 놈들하고 아는 사이라는 게 더 충격이다. 내 옆에서 당장 꺼져.”
다른 해적들은 사투아 카르텔과 안다고 말한 여우 볼프 해적에게 야유를 보냈다. 그때 눈에 흉터가 난 인간 해적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나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어.”
“뭐?”
“사투아 카르텔의 노예시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더라. 그것 때문에 카르텔 자체가 궤멸했다던데.”
인간 해적의 말에 기드큐는 살짝 놀랐다.
사투아 카르텔이라면 꽤 악명 높은 카르텔이다. 놈들의 주 사업은 미개척 행성의 원시인들을 잡아다가 파는 인신매매업. 마르시오 카르텔과 주인 없는 행성에 대규모 노예시장까지 둘 정도로 세력이 크다. 시장 규모도 작은 것이 아니라 이곳, 우주요새에 버금간다고 들었다.
“사투아 씹새들이 좃됐는지 어떻게 됐는지는 상관없는데, 최근 뒤숭숭한 일이 많아.”
“맞아. 티앤씨 우주도시 망해서 놀 곳이 없어졌어.”
“미친놈, 거기 망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지랄이야.”
“요즘 아웃스페이서들이 또 극성이라더라.”
“덕분에 요즘 수입이 짭짤해서 좋던데? 용병 구하는 놈들 천지라.”
“병신이 아웃스페이서랑 안 싸워봐서 개소리 지껄이죠?”
“아웃스페이서 그거 맛있냐?”
“니 애미가 더 맛있을 듯.”
“쩝. 진짜 우주가 씹창 나려는 건가?”
흉터가 난 해적이 나지막하게 남긴 말에 테이블의 분위기가 묘해졌다.
수십, 수백 개의 성계를 매일같이 오가는 해적들이다 보니 우주의 변화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빠른 편이다.
흉터 해적의 말대로였다. 우주는 이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기드큐는 술맛 떨어지는 분위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처럼 운수 좋은 날에 이런 불길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동료들은 맥락 없이 나온 괴담이 꽤 흥미로웠던 것 같았다. 다들 아는 이야기를 꺼내놓기 하나둘씩 시작했다.
“니네 드바라 카르텔이 왜 망했는지 알아? 사실은 걔네가 유령선한테 걸려서….”
“그거보다 내가 휴머니티 애들한테 들었는데….”
우주선을 잡아먹는 검은 유령선의 소문, 우주도시 멸망과 관련된 비사(祕事),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그 사람인 척 흉내를 내는 악마의 이야기 등등.
해적들의 말을 들을수록 기드큐는 기가 찼다.
다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망각하는 것 같다. 이곳은 우주 한복판에 세워진 요새. 기술과 과학의 화신 위에서 미신 타령이라니.
하물며 수수께끼의 괴물이라니. 이 요새에 방문하는 해적 중 반수 가량이 그 ‘수수께끼의 괴물’을 잡아다가 판다.
기드큐는 저들의 얘기 중 어느 부분에서 즐거워해야 할지 이해가 안 갔다.
“난 먼저 일어난다.”
그는 안드로이드에게 술값을 내고 가게를 나왔다.
‘괴물은 니미.’
우주 시대에 괴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 함선을 집어삼키는 유령선 따위가 아니다.
인간이었다가 스타유니언의 사이보그가 됐고, 지금은 해적이 된 그는 진짜 괴물이 뭔지 안다.
“…가서 잠이나 자자.”
몇 시간 뒤에는 그도 다시 일하러 가야 한다.
그렇게 한 명의 사이보그는 길거리의 인파 속에 섞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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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큐가 술집에서 인생을 낭비하는 사이, 요새의 군항에서는 새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무질서한 스페이스독이 지배하는 도시답게 방문자들 또한 일관성이 없었다.
카르텔의 문양이 그려진 해적의 강습함, 깔끔하면서도 효율성을 추구한 메가콥 군함, 메가콥과 반대로 투박한 이미지의 스타유니언 화물선, 그밖에 민간인들이 운용하는 함선들까지.
다양한 종류의 배들이 아주 쉽게 도시에 출입하고 있었다. 해적의 요새에 방문하려는 목적이야 뻔했기에 강도 높은 검문은 불필요했다. 애초에 범죄자 집단이 다른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막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군항에 들락날락하는 수백 척의 함선들. 그중 유독 튀는 배가 있었다.
“야. 저거 사투아 새끼들의 배 같은데?”
“쟤네 잠수탄 거 아니었어? 왜 여기에 왔지?”
사투아 카르텔의 강습함은 선체가 길쭉하고 후면부가 넓게 퍼진 독특한 모양으로 유명했다. 이미 퇴역한 메가콥 함선을 개조해서 만든 거라 일반적으로 보기 힘든 외형이었다.
닻을 닮은 사투아 강습함이 지금 막 군항에 정박했다. 함선에서 내린 해적들 몇 명이 군항의 경비들과 얘기를 나눴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해적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사투아 해적에 볼프가 있어?”
사투아 카르텔의 구성원은 전원이 인간이다. 다른 지성체들은 잠재적 납치 대상으로 여긴다. 그 탓에 다양한 종족들이 활동하는 스페이스독에서도 특히 이단아로 취급받는다.
그런데 지금 배에서 내린 조직원 중 하얀색 맹금류의 머리에 호박색 눈동자를 지닌 볼프가 있었다. 심지어 그 볼프는 사투아 조직원들을 지휘하는 것처럼 보였다.
해적들의 상식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경비들도 강습함을 수상하게 여긴 것 같았다. 평소라면 약식으로 끝나야 할 검문이 선내 수색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볼프를 따라 경비들이 강습함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해적들은 생각했다. 저 가짜 사투아 강습함은 요새에서 쫓겨날 거라고.
하지만 경비들의 수색 결과는 그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배에 들어갔다가 나온 경비들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뇌물이라도 받아 처먹은 것인지 볼프를 무슨 카르텔 두목 대하듯 깍듯이 대하고 있었다.
심지어 경비들은 사투아 조직원들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배에 실려 있던 컨테이너 2개가 군항에 내려가고 나서야 그들은 본업으로 돌아갔다.
“…저게 무슨 꼬라지지?”
“배에 뭐가 있길래 저 지랄이지?”
경비들이 저렇게 행동한 것은 처음 본다. 해적들의 시선이 강습함에 향했다.
대부분은 호기심이었지만, 일부는 그보다 한 발 나아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배에 뭐가 있는지 직접 알아봐야겠다고.
만약 귀한 것이 있다면 적당히 챙겨가야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