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267화 (268/400)

Episode 267 - 수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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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녀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흠흠.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럼.”

공중에 떠 있던 마름모꼴 비석에서 불이 꺼지며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 작동이 정지한 것을 확인한 신시아는 비석에 연결된 전선들을 분리했다.

“휴우.”

짧게 한숨을 쉰 그녀는 고급스러운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사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사과. 지구가 원산지인 과일은 현재 화성의 바이오 돔에서만 재배되고 있다. 먼 과거에는 흔하디흔한 과일이었으나, 지금은 부자가 아닌 이상 쉽게 맛볼 수 없는 과일이 되었다.

그런 귀한 과일을 신시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입 베어 물었다. 입 안을 가득 적시는 단맛, 혀를 살짝 아릿하게 만드는 신맛과 상큼함. 사과를 먹어 본 적 없는 자라면 제법 감동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달랐다.

신시아는 손에 쥐고 있는 붉은 과일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세계에서 왔다. 그 세계,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있던 시절에 그녀는 이 과일을 즐겨 먹었다.

지금 맛보는 이 달콤함은 그리움의 맛이었다.

‘…멀지 않았어.’

이 세계에는 그녀와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자들이 존재한다. 한때는 수십 명에 달했다고 하나,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이방인들. 그에 따라 여러 개 존재했던 파벌들도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는 3개의 파벌만이 남아 있다.

그녀는 그중에서 이방인들의 파벌 중 이곳에 남아 열등한 존재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지배파’에 속해 있다. 메가콥, 스타유니언, 컬트 등 고등 문명을 갖춘 지성체들이 주축이 된 파벌이다.

하지만 신시아는 같은 파벌의 동료들도 모르는 비밀을 하나 품고 있다.

‘그가 안배해 둔 자가 이곳에 오면 이 역할도 끝이야.’

그녀는 이 세계에 온 이후, 단 한 번도 잔존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다른 이방인, 즉 ‘인간’ 플레이어를 죽이는 일, 혹은 그들을 기만하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사과를 든 그녀는 화려하게 장식된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발아래에 우주요새의 전경이 펼쳐졌다.

한쪽은 수많은 가게들이 만들어 낸 인공적인 빛으로 인해 눈이 부실 지경이었고, 다른 한쪽은 빛 한 점 없이 검은색으로 덮여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몰락한 광산 행성이 빛을 반사하며 요새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아름답다기보다는 경이롭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케샤 아르마의 풍경을 보고도 신시아는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데이터쪼가리 따위….’

신시아가 속한 진짜 파벌의 이름은 ‘귀환파’. 게임을 클리어해서 고향으로 귀환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세력이다.

잠시 도시를 바라보던 그녀는 짧게 혀를 차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곳에 머물렀다면 분명 눈치챘을 거다.

빛이 없는 어두컴컴한 구역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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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네.’

나는 이름 모를 누군가가 남긴 발목을 집어다가 입에 털어 넣었다.

‘폐쇄회로로 작동하는 연락 수단이 있을 줄은 몰랐네.’

26호가 깔아둔 사이킥 파워 때문에 이 지하 저장고의 모든 무선 통신 수단은 완전히 봉쇄되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해적들이 EMP 방지용 유선 통신망을 깔아 뒀을 줄은 몰랐다.

‘외부와 연락됐으면 귀찮아졌을 텐데.’

다행히 지하 저장고 내부의 다섯 구역들 간에만 연락할 수 있도록 깔아 뒀다. 아무래도 비용 문제 때문에 외부까지 통신선을 연결하지 않은 것 같았다.

‘저쪽에서도 여기가 털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겠지.’

이곳에는 백 명이 넘는 용병과 수백 대에 달하는 안드로이드, 두께 1m가 넘는 이중 차폐문들로 지켜지는 공간이니까. 전쟁이 터지지 않는 이상 여기가 뚫릴 것이라 생각하는 해적은 없으리라.

‘20m를 가볍게 넘기는 크기의 괴물이 아니라면 말이지.’

그 누가 거대 괴물이 1m 두께의 문을 하나하나 부수며 저장고를 털러 들어올 줄 상상이라도 했을까?

실제로 나는 여기까지 오기 전, 저장고 입구와 A구역의 차폐문들을 직접 부쉈다. 현재 나한테는 아주 두꺼운 문도 쉽게 뚫어버릴 수 있는 특성이 있었기에.

‘강화된 산성 진균샘.’

현재 내가 보유하고 있는 감염 계열 융합 특성 ‘산성 진균샘’은 ‘그렘린 이끼’, ‘기생 군체’에 이어 세 번째로 ‘위대한 감염체’의 강화 효과를 받는 특성이다.

안개 형태로 분사되는 그렘린 이끼, 기생충 숫자를 20마리로 늘려 준 기생 군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위대한 감염체의 강화 효과는 비교적 직관적인 편이다. 마찬가지로 산성 진균샘 또한 심플하게 강한 특성으로 변모했다.

‘브레스 형태로 나가도록 바뀌었으니까.’

원래는 몸에서 진균 덩어리를 투사체 형식으로 토해내던 형태였으나, 지금은 산성 진균을 액체화해서 물대포처럼 쏘는 형태로 변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화력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다.

‘고르곤 스웜과 싸울 때도 아주 효자 특성이었는데 여기서 또 써먹을 줄은 몰랐네.’

다만 마냥 좋아진 것은 아니고, 예상외의 단점도 새로 생겼다.

목 안쪽에 위치한 진균샘이 생산된 진균액을 토해내는 형식이라 기껏 해야 몇 초 정도만 산성 브레스를 쏠 수 있다. 진균액이 바닥나면 몇 분 정도 휴식을 취해서 충전시켜야 한다.

‘지금 다시 쓸 수 있지만….’

저장고를 전부 장악한 이상,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나는 천장이 날아간 경비실 안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가슴 쪽 작은 팔로 피로 범벅된 모니터 앞에 있는 컴퓨터를 조작했다.

‘열려라 참깨.’

멀리서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구역과 통로들 사이에 있는 차폐문들이 개방되는 소리다.

그때 부서진 경비실 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스피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이 열린 것을 보니 모두 처리하셨나 봅니다.”

“응. B구역으로 갈게.”

“예. 지하 저장고의 방화벽을 뚫었으니 오시면 바로 보관된 목록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일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PS-111을 데려왔는데 확실히 정답이었다. 녀석에게 알겠다고 답한 나는 B구역으로 움직였다.

대규모의 저장고와 다리를 펴면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좁은 통로를 몇 번 지나 B구역에 도착하니 녀석들의 모습이 보였다.

26호와 PS-111은 어떤 컨테이너 앞에 있는 관리용 컴퓨터 앞에 있었다.

「큰애기, 안녕.」

“오셨습니까?”

촉수들을 이용해 안드로이드를 분해하고 있던 26호가 나를 보고 촉수를 흔들며 인사했다. 그 옆에는 PS-111이 턱 아래에 달린 케이블로 컴퓨터의 포트에 연결한 상태로 엎드려 있었다.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방화벽을 뚫는데 어렵지 않았어?)]

“피라 일레븐의 함선도 해킹한 저에게는 아주 쉬운 일입니다.”

「맞아! 친구는 대단해!」

26호가 칭찬하자 PS-111은 갈고리 발톱이 달린 다리를 들어 브이 표시를 했다. 녀석의 손에는 난도질당한 인간의 피가 묻어 있었다.

나는 혓바닥을 내밀어 녀석의 손을 할짝 핥은 뒤 물었다.

[즈즈즈 즈즈즈(목록을 띄워줘)]

“옙. 화면을 띄우겠습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팔을 내린 녀석이 컴퓨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녀석 턱 아래에 달린 케이블이 움찔 떨리자 컴퓨터의 모니터에 수많은 이름이 나열된 목록이 나타났다.

나는 녀석의 도움을 받아 나열된 목록을 간단하게 한 번 싹 훑었다.

‘흠.’

밀수 생물들이 보관된 곳은 B, C 이렇게 두 구역이다. 나머지 구역들은 사치품이나 마약, 기밀문서 같은 것들을 보관 중이라 나와는 상관이 없는 곳이다.

‘생각만큼 엄청 많지는 않아도 유일 특성을 만드는 재료를 모을 정도는 되겠네.’

보아하니 여기를 다 털면 최소한 유일 특성 1개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재료 특성들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운이 좋으면 유일 특성 2개를 얻어서 진화 조건을 전부 충족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고.

나는 요새에 오기 전에 열어둔 유일 특성 합성식을 띄웠다.

「‘초월’ 재료 목록: 강화 두개골, 갤러곤의 뿔, 가시털 발사 꼬리, 단백질동화 작용, 군집 피부 조직(획득되지 않음)」

「‘초월’ 재료 목록: 무기물 소화, 수확자의 아가리, 뼈 야수, 지옥의 환영(획득되지 않음), 울트라 컨트롤(획득되지 않음)」

‘이 중 첫 번째 융합식은 여기서 얻을 수 있을 것 같네.’

첫 번째 융합식은 유일 특성으로 만들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문제는 두 번째 융합식이다. 얻기 힘든 특성을 재료로 요구하는 만큼 함부로 초월 시스템에 써먹기 어려울 것 같다.

‘특히 저 수확자의 아가리가 문제야.’

‘수확자의 아가리’ 덕분에 나는 머리만 먹어도 유전자 정수를 획득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저 특성이 없어지면 유전자 정수를 획득하는데 상당히 곤란해진다.

다시 얻으면 되지 않느냐 할 수 있지만 그것도 쉽지가 않다. 수확자의 아가리 재료인 ‘정수수확자의 턱’은 준성체 에이모프나 아웃스페이서를 먹어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 말고 ‘무기물 소화’라든가, ‘뼈 야수’도 구하기 어려운 재료들이다. 이것만 봐서는 합쳐졌을 때 엄청나게 강력한 유일 특성이 될 것 같긴 하지만, 재료가 재료다 보니 함부로 합칠 수는 없다.

‘뭐 지금 생각할 일은 아니겠지.’

재료만 모아 두고 나중에 유일 특성을 합성해도 되니까 벌써 고민할 필요는 없다.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고.

게다가 지금은 수많은 컨테이너 속에 담긴 유전자 정수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들을 먹다가 새로운 융합식이 튀어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고 보니 26호 것도 챙겨줘야지.’

내가 먹을 것들은 이미 다 확인했으니 이제 26호에게 줄 먹이가 남았다. 사실 이곳에 저장된 생물들은 그 수가 상당했지만 씨 데몬을 강화시켜 줄 만한 생물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도 유의미한 변화를 줄 만한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것들이 몇몇 보여서 다행이라고 할까.

‘해양 생물도 있네?’

도대체 어떻게 잡아 온 것인지 모르겠으나 심해에 서식하는 생물들도 여러 마리 보였다. 페일 마스크처럼 대형 괴수는 당연히 없지만, 10m 미만의 중소형 희귀 생물들이 눈에 띄었다.

지금껏 26호에게 페일 마스크 말고는 심해 생물을 먹여 본 적이 없다. 이번 기회에 한 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이거랑 이거, 이것도 먹여 봐야겠다.’

10번 이상 목록을 꼼꼼히 확인한 나는 무엇을 포식할지, 무엇을 26호에게 줄지 전부 정했다.

‘그럼 B구역부터 시작을….’

“제 것도 잊지 않으셨으리라 믿습니다.”

「맞아. 친구도 배고프데!」

‘아.’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는 그 말을 듣고 다시 엎드렸다.

그로부터 10분이 지난 뒤, 나는 두 녀석에게 줄 만한 생물들을 모두 정했다.

[즈즈 즈즈즈즈 즈즈(그럼 밥 먹으러 가자)]

「좋아!」

“선별하신 목록은 제 데이터에 저장해두겠습니다.”

[즈즈즈 즈즈즈즈즈(시작은 B구역부터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맛 좋은 먹이를 수확하기 전에 항상 하는 의식을 시작했다.

이제는 원래부터 갖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특성.

게임에서는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게 나를 성장시킨 그 특성.

‘사냥의 표상’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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