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269화 (270/400)

Episode 269 - 수확(3)

통로는 벽과 천장 가릴 것 없이 피범벅이었다.

내가 쏜 ‘파괴 음파’로 인해 해적들이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적, 위, 위험도, 측정, 측정 불….”

머리와 상체 일부만 남은 안드로이드가 망가진 성대로 기계음을 내뱉었다. 나는 날개 팔로 세게 내리쳤다.

‘선발대는 이걸로 끝났고.’

이제 저쪽에서도 요새 내부에 적지 않은 위험이 닥쳤음을 인지할 거다. 당장 경매가 코앞인데 지하 보관소가 털렸다? 도시 내에 광인이 늘어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요새의 모든 인원과 도시의 방문자들이 힘을 합쳐 나를 죽이려 하겠지.’

이 요새에 있는 모든 생명체, 기계가 나의 적이다. 내가 데려온 애들만 빼고.

‘이제 어떻게 할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요새에서 도망치는 거지만, 지금 요새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우주요새는 방어 시설은 함대와의 전투를 상정하고 만들어진 만큼 매우 강력하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방어용 포탑들은 내부보다는 외부에 더 많다. 어찌어찌 배를 타고 군항을 빠져나가는 순간, 요새 포대들로부터 집중포화가 쏟아지겠지.

‘괜히 피해를 키울 필요는 없어.’

이 외강내유의 궤도거주지를 무력화시키려면 내부부터 파먹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공략하느냐는 것.

이대로 나가서 사람들을 학살하며 사령부로 이동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요새를 감싸는 외벽을 뚫어서 내부 환경을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다.

게임에서 케샤 아르마를 세 번 파괴했을 때도 나는 매번 다른 방식으로 공략했다. 이번에도 요새를 무너트릴 여러 방법이 떠올랐지만, 나는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게임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특성들, 그러니까 초월 시스템을 이용해 만든 유일 특성들을 활용하는 방법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한 번 시도했던 방법이지만.’

반투명 텍스트박스를 띄운 나는 ‘대혼란의 전령’과 ‘유기적 진화’의 특수상태 중 ‘변이 바이러스 숙주’ 부분에 시선을 뒀다.

해적의 노예시장을 무너트릴 당시. 나는 두 가지 특성의 조합을 처음 시도해봤다. 둘 다 막강한 군중제어기인 만큼, 서로 궁합이 괜찮았다. 특히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아주 효과가 좋았다.

적당한 준비와 환경만 갖춰진다면, 내가 서 있는 강철의 요새를 뒤흔들 정도의 폭발력을 보여 줄 터.

‘방법은 정했고.’

다음은 장소인데, 이건 딱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는 몸을 돌려 보관소 안쪽으로 기어갔다.

「우리 안 나가?」

“이곳의 지형은 대규모 전투에 유리하지 않습니다.”

[즈 즈즈즈 즈즈 즈즈즈(다 방법이 있지. 따라와)]

A구역 보관소에 있던 26호가 PS-111이 내가 돌아오자 의문을 표했다. 나는 녀석들을 데리고 보관소 안쪽으로 향했다.

D구역 보관소의 중간쯤에 도착한 나는 애들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벽 어느 한 편에 머리를 바짝 갖다 댔다.

「큰애기가 뭐 하는 걸까?」

“뭔가를 찾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 굳이 설명해주지 않았다. 나는 턱 아래의 보조기관으로 벽을 계속 더듬었다.

‘분명히 이 근처였는데…아, 찾았다.’

넓은 공동의 구석진 부근에서 나는 원하는 것을 찾았다. 바로 미세한 진동.

벽 너머에서 아주 약한 진동이 간헐적으로 느껴졌다. 도시를 여러 번 공략한 나는 이 진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지하철 노선.’

이 우주요새에는 티앤씨 특수무역중심지만큼이나 거대한 우주 건축물. 한 번에 다수의 거주민을 효과적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운송 수단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호버 버스라든가, 지하철이라든가 말이다.

그리고 지하 보관소 중 D구역으로부터 약 50m쯤 떨어진 곳에 지하철 노선이 있다.

마르시오 카르텔의 조직원들, 여러 성계에서 찾아온 카르텔, 그밖에 메가콥이나 스타유니언 등에서 찾아온 손님들이 부리는 용병들까지. 다수의 적들이 열차에 타고 움직이고 있을 터.

‘아직 지하철이 움직이는 것을 보니 다 모이지 못했어.’

나라는 위협에 맞서기 위해 요새 각 구역에 배치된 병력들이 사령부에 집결 중일 거다.

물론 그들은 제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거다.

[즈즈 즈즈즈(모두 물러나)]

내 경고를 들은 26호와 PS-111이 나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나는 진동이 느껴지는 지점 앞에서 주둥이를 활짝 벌렸다. 위턱과 아래턱이 찢어질 것처럼 벌어지고 양쪽 면에 붙은 어금니가 바깥 방향으로 젖혀졌다.

길쭉한 목이 울렁거리고, 곧이어 내 입 안쪽에서 녹색의 액체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뜨겁게 달아오른 프라이팬에 찬물을 부은 것 같은 소리가 들리고, 유독 가스가 자욱하게 올라왔다. 산성 물대포에 의해 내 앞에 있던 두꺼운 합금 벽에 직경 10m 가량 되는 구멍이 뚫렸다.

‘게임이었다면 이런 방법은 상상도 못 했을 텐데.’

아무리 다양한 방법으로 몸을 강화시킬 수 있는 에이모프라 해도 수십m 두께의 합금 벽을 단숨에 뚫어 버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준성체 상태라면 더더욱 그렇고. ‘위대한 감염체’로 강화된 ‘산성 진균샘’이 없었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했겠지.

기세 좋게 벽을 녹이던 산성 브레스는 몇 초가 지나자 그 세기가 급격히 약해졌다. 진균샘 내부에 있는 진균액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쯤이면 됐고.’

산성 브레스를 멈춘 나는 계속 녹아내리고 있는 벽의 구멍 앞에 몸을 낮췄다. 구멍 앞에서 머리를 숙이니 내 등에 있던 2개의 포신이 구멍 안쪽으로 향했다.

그 상태로 등 근육에 힘을 주자 포자 대포의 끝에서 주황빛 덩어리 2개가 발사되었다.

대포에서 발사된 포탄처럼 빠르게 안으로 날아간 포자들. 이윽고 안쪽에서 강렬한 폭음이 들리고, 뜨거운 열기가 밖으로 확 솟구쳤다. 폭발성 체액이 담긴 포자가 터진 것이다.

‘아직 안 끝났어.’

이제 곧 저 폭발성 체액과 산성 진균이 어우러져 강렬한 화학 반응이 발생할 거다.

잠시 후, 우리가 있는 지하 보관소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벽이 진동할 때마다 구멍 안쪽에서 사람 하나는 가볍게 익혀버릴 만큼 강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보관소를 둘러싼 벽 안쪽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화학 물질이 치명적인 연쇄 폭발을 일으킨 거다.

「쾅쾅! 신난다!」

“흥미로운 화학 반응입니다.”

26호는 보관소가 쿵쿵 울리는 것이 재밌는지 몸에서 빛을 냈다. PS-111은 내가 행한 일에 흥미를 느꼈는지, 구멍 안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폭음과 진동이 한동안 계속되다가 점점 잦아들더니 마침내 멈췄다.

나는 날개 팔로 구멍 양끝을 잡은 뒤 잡아당겼다. 망가진 합금 판이 덜덜 떨리며 버티다가 우그러졌다.

[즈즈 즈즈(이제 가자)]

나는 애들과 함께 깊숙이 뚫린 합금 벽 안쪽으로 기어들어갔다. 불균등하게 뚫린 통로를 지나자 넓은 공간이 우리를 반겼다.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거대한 공간. 그 가운데에 자기장이 흐르는 선로가 보인다.

‘좋아.’

몇 분 후에 또다시 지하철이 이곳을 지나칠 거다. 이곳으로 올 예정인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나는 오랜만에 유기적 진화를 활성화했다.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요새의 지하 한복판에서 내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긴 전투용 팔과 날개 팔로부터 골격이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거미의 다리처럼 길쭉하던 것들이 우그러지다 못해 짜리몽땅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그에 반해, 내 몸은 풍선에 공기를 주입하듯 크게 부풀어 올랐다. 팔을 감싸던 갑각들이 모두 몸으로 간 것인지 비대화된 몸통 위에 두꺼운 갑각이 덮였다.

몸이 확대되는 것에 맞춰 내 머리도 함께 커졌다. 머리는 무거워졌고, 목은 몸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두꺼워졌다. 변화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모습은 풍뎅이 애벌레에 가까운 형태가 됐다.

물론 아직 변이는 다 끝나지 않았다. 몸을 감싼 갑각 위에 구멍들이 송송 뚫리고, 그 안에서 수백 개에 달하는 촉수들이 튀어나왔다.

새로 생긴 촉수는 내가 지니고 있던 침식 촉수와 다른 외형이었다. 전체적으로는 문어 같은 두족류의 다리와 닮았으나 끝부분이 세 갈래로 갈라져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길이는 얼추 5m에서 10m 사이. 침식 촉수에 비하면 훨씬 짧았다.

변화는 길지 않았다. 나는 급변하던 육신이 안정화되는 것을 느끼며 텍스트박스를 띄웠다.

「변이 바이러스 숙주: 돌연변이를 촉발시키는 바이러스를 품은 생물로 변화시킵니다. 육체 관련, 내부기관 관련 특성이 비활성화됩니다. 변신 상태는 사용자가 임의로 해제할 수 있습니다. 최대 지속 시간은 3일, 쿨타임은 30일입니다.

-변이 바이러스: 촉수에 접촉한 대상에게 급격한 유전적 변이를 촉발시킵니다. 변이 효과는 무작위이나 공통적으로 극도의 공격성을 띄게 됩니다.」

변이 바이러스 숙주는 예전에 용의 둥지를 떠나기 전, 피라 일레븐의 지원선을 털 때 해금한 특수상태다.

전투력을 급상승시키는 ‘괴수의 왕’, 잠입과 암살에 특화시키는 ‘영리한 약자’와 다르게 이 특수상태는 적을 감염, 변이시키는데 특화되어 있다.

체형에서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육탄전에서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속도도 매우 느려져서 기동전에도 불리하다. 툴팁에 쓰여 있던 육체 관련 특성이 봉인되기에 강적과 1대1로 싸우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깝다.

그런데도 내가 이걸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저 ‘변이 바이러스’라는 것 때문이다.

내 촉수에 맞아 바이러스에 감염된 적은 유전자가 급격히 변질된다. 보통이면 유전자가 망가지는 순간, 죽겠지만 이 바이러스는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바이러스의 숙주가 죽지 않도록 변이에 맞춰 육신을 새로운 형태로 조작한다.

‘마치 네X로X프처럼 되지.’

변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생물체는 고전SF게임에 등장하는 우주 언데드 같은 존재로 변모한다. 이지를 완전히 상실한 채, 자기 몸에 비축된 에너지가 떨어질 때까지 다른 생물을 죽이는 것에 몰두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생물’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기에, 변이된 적들은 나한테도 달려든다. 여기서 내가 다음으로 꺼내는 카드가 바로 대혼란의 전령이다.

대혼란의 전령은 주변 대상의 감각을 왜곡시키는 특성. 변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적들의 감각을 왜곡, 특정 목표만 노리도록 조작할 수 있다.

‘거기다가 광기 폭탄은 덤이지.’

변이된 생물들은 싸움과 죽음이 끊이지 않는다. 당연히 광기 폭탄의 전염 효과도 크게 상승한다.

변이 바이러스 숙주, 대혼란의 전령 콤보의 치명적인 단점은 속도가 굼벵이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것. 본래 대혼란의 전령도 발동시 몸의 움직임이 느려진다는 패널티가 있는데, 이 패널티가 2배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 이것도 문제는 없다. 곁에 있는 친구들이 나를 지켜 줄 테니까.

「와! 큰애기가 나랑 또 비슷해졌어!」

“축하드립니다.”

26호는 내가 변한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내 주변을 폴짝폴짝 맴돌며 빛을 내뿜었다. 녀석은 내가 노예시장에서 처음 이 모습으로 변신했을 때도 매우 좋아했었다.

‘다른 애들은 아니었지만.’

참고로 아드하이는 내가 못생겨져도 괜찮다고 말했고, 하늘의 어머니는 토할 것 같다는 시늉을 했다. PS-111은 내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화학 작용의 원리를 궁금해 하는 것 외에 별다른 코멘트를 남기지 않았고.

‘모두가 만족스러워 할 수는 없겠지.’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의 형태도 퍽 마음에 든다.

‘일단 그건 됐고.’

선로로부터 강한 진동을 느낀 나는 텍스트박스를 닫았다.

제물을 태운 열차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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