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280화 (281/400)

Episode 280 - 신수와 야수(1)

칠흑처럼 어두워야 할 공간에 새하얀 구름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은색 피부를 지닌 메탈릭 그렘린이 다수 모이면 보통 저렇게 보인다.

‘많네.’

구름의 크기를 보니 준성체가 되기 전에 만났던 메탈릭 그렘린 무리보다 배 이상 많다. 당시에는 중간 규모였는데 지금 날아오는 놈들을 보면 그 이상, 대규모 무리다.

‘이제 보니 2만은 넘을 것 같은걸.’

어쩌면 더 많을 수도 있다. 대규모 무리면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으니까.

그리고 ‘워프보이’ 한 마리가 이끄는 중간 규모 무리와 달리 대규모 무리부터는 여러 종류의 상위종이 포함되어 있다. 워프보이 다수, 전투에 특화된 상위종 ‘볼프람 고블린’ 등등.

구성원이 세분화된만큼 대규모 무리는 체계적으로 움직인다. 다수가 진영을 구축해 움직이는 군대개미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중간 규모 무리와 싸울 때를 생각하면 안 된다.

그 악명 높은 우주의 약탈자 군단이 케샤 아르마를 집어삼키기 위해 접근해 온다.

그에 맞서 우주요새도 적군을 향해 요격을 개시했다.

내 뒤에 배치된 초대형 요새포들이 하나둘씩 불을 뿜었다.

내가 쏘는 사이킥 브레스에 버금갈 정도로 굵은 사이킥 열선들이 별들의 바다를 가른다. 그에 메탈릭 그렘린 무리가 빠르게 흩어진다. 몇몇 행동이 굼뜬 녀석들은 열선에 맞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첫 사격은 아쉽게도 실패였다. 초대형 요새포들이 대기 상태에 들어가고, 그 대신 수백 개에 달하는 함재기 요격용 대공포들이 전투를 준비했다.

그사이, 넓게 펼쳐진 메탈릭 그렘린들이 순식간에 뭉쳐서 요새를 향해 돌진했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다.

신시아와 싸우면서 맞은 컬러 밤으로 인해 시각뿐만 아니라 목 안쪽 진균샘과 전투용 팔 한쪽이 약해졌지만, 큰 문제는 없다.

우주에서 다수와 싸울 때 필요한 것은 민첩한 기동 능력, 그리고….

‘장거리 사격 능력.’

‘심연의 색채’ 한 스푼을 끼얹은 사이킥 브레스라면 그 조건에 충분히 부합할 터.

나는 한계까지 펼쳐진 날개를 수평으로 유지한 채 다가오는 적군을 향해 전진했다. 그와 함께 나의 신체를 보호하는 검은색 갑각의 색깔이 변했다.

보라색과 녹색, 그리고 온갖 종류의 색들이 뒤섞인다. 갑각이라는 무대 위에서 혼란스러운 색깔들이 춤추며 이동한다.

그 끝에는 괴물의 촉수가 있다. 목과 뒷머리갑각에 갈기처럼 늘어진 촉수가 기이한 색으로 빛나며 흐느적거린다. 내 주둥이 앞에 촉수로부터 빠져나온 불길하고 형언할 수 없는 힘이 응축된다.

나와 거리가 점점 좁혀지는 메탈릭 그렘린들은 아직 위기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구름을 구성하는 작은 먼지와 같던 놈들의 모습이 슬슬 새끼손가락의 손톱만큼 크게 보인다.

수만에 달하는 괴물들이 흉측한 아가리를 활짝 벌리고 나를 향해 달려든다.

나는 그들에게 혼돈과 악의로 채워진 거품 덩어리를 던졌다. 이 우주, 아니 나와 비교해도 터무니없이 작은 크기의 거품들. 메탈릭 그렘린들은 경계하지 않았다.

그리고 구체가 불운한 어느 약탈자와 충돌했다. 유리 구체가 깨지는 것처럼 거품이 터지고 약탈자의 몸 위에 덮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

심연의 색채로 강화된 사이킥 브레스는 나 이상으로 탐욕스러운 포식자다. 미지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저 거품들은 근처에 있는 유기물들을 남김없이 먹어 치우기 전까지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

「■■■!」

처음 맞은 메탈릭 그렘린은 이미 사이킥 브레스에게 손가락 하나 남기지 않고 먹혔다. 생명을 삼키는 거품들은 놈의 동료들한테도 달라붙었다.

놈들은 당황해하며 거품을 털어내려고 했으나 그건 어리석은 짓이다. 손가락으로 털면 거품이 손가락을 잡아 뜯고, 이빨로 거품을 제거하려 하면 몸속 안에 들어가 내장부터 파먹는다.

한 마리로 시작한 피해자는 이내 수십, 수백 마리로 불어났다. 그러자 거품에 고통스러워하던 놈들의 몸이 푸른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워프보이로구나.’

워프보이가 고유 기술인 ‘워프가이드’로 거품이 묻은 동족들을 다른 공간으로 보내려는 거다. 내 보조기관이 저 멀리 워프보이 두 마리의 몸에서 강한 에너지가 흐르고 있음을 잡아냈다.

나는 즉시 그쪽 방향을 향해 일반 사이킥 브레스를 발사했다. 거대한 보라색 화염이 텅 빈 무중력의 세계를 가득 채웠다.

초광속 항해를 준비 중이던 워프보이 하나가 워프가이드를 취소하고 급히 옆으로 피했다. 빠른 상황 판단 덕분에 놈은 살아날 수 있었다. 다른 놈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다른 동족들과 함께 용의 숨결 속에서 산화했다.

다만 놈의 희생 덕분에 거품에 맞은 메탈릭 그렘린들은 내가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곳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

「■■■」

놈들의 진영이 요새포를 피할 때처럼 빠르게 변경됐다. 이번에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깔린 그물과 비슷한 형태였다. 개체들 간의 간격을 넓히면서 동시에 나와 요새를 포위할 수 있는 망을 구축한 거다.

‘대규모 무리는 이래서 성가시지.’

중간 무리의 리더가 워프보이인 것처럼 대규모 무리에도 지휘를 도맡는 개체가 있다.

‘타이타보스.’

타이타보스는 아군을 강화시키는 특수 물질을 지속해서 분비하기에 무리를 지원하는데 특화되어 있다. 또한 수만 마리를 통솔하는 개체인 만큼 지능도 상당히 높다.

‘놈을 최대한 빨리 찾아야 해.’

요새 내부에 있는 신시아가 언제 도망칠지 모른다. 수송선이 발사되지 못하도록 사일로를 망가트려놨으니 지금쯤이면 다른 방법을 찾고 있을 터.

수만 마리에 이르는 메탈릭 그렘린을 일일이 다 잡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시간도 오래 걸린다. 적의 머리를 쳐서 와해시키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나는 흩어진 놈들을 향해 강화된 사이킥 브레스를 발사했다. 거품 형태로 날아가는 브레스를 본 녀석들이 잽싸게 흩어졌다.

‘진영이 급격히 변할 때면 놈도 모습을 드러낼 터.’

게임에서도 타이타보스는 전투 중에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동족 틈에 숨어 있다. 놈을 끄집어내려면 지금처럼 무리 자체를 헤집어놔야 한다.

보조기관이 미세물질을 방출하는 타이타보스를 찾고 있는 사이, 놈들도 반격을 준비했다. 일반 메탈릭 그렘린에 비해 덩치가 3배 이상 크고, 양팔이 검은색으로 물든 개체들이 앞에 나섰다.

저 덩치 큰 괴물의 이름은 볼프람 고블린. 놈들이 검은 팔을 들자 그 끝에서 바위 같은 물체가 발사되었다. 내가 쏜 브레스는 도중에 날아온 바위 덩어리에 맞아 폭발했다.

‘…쯧.’

볼프람 고블린은 메탈릭 그렘린의 상위종으로 전쟁 중에 원거리 견제를 담당한다. 방금 발사한 저 바위 덩어리는 놈들이 함선을 먹어 치운 뒤, 소화시킨 배설물이다.

배설물이라고 우습게 보면 안 되는 것이 놈들이 쏘는 바위는 금속이 특수한 화학 작용을 거쳐서 굳은 것이 굉장히 단단하고, 또 안에 금속을 부식시키는 미생물이 잔뜩 들어 있다.

‘나한테는 상관없지만, 그래도 성가시네.’

타이타보스가 똑똑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강화된 사이킥 브레스가 무력화됐다. 놈들은 근접전으로 승부를 볼 생각인지 날아오는 속도를 한껏 올렸다.

메탈릭 그렘린은 함선을 먹어 치우는 괴물답게 이빨 또한 단단하고 날카롭다. 한두 마리 정도야 물려도 흠집 정도밖에 안 나지만, 수만 마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놈들이 내게 붙어서 한 번씩만 씹어대도 나는 적지 않은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뒤에 있는 요새도 신경 써야 하고.’

현재 놈들은 나와 요새를 대상으로 포위 진영을 구축한 상태. 후방으로 돌아간 놈들도 요새의 방어시설과 교전을 개시했다.

‘그걸 써야겠다.’

내 몸을 거대한 대형 괴수로 변신시키는 특성, ‘뼈 야수’.

요새 공략 도중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터질지도 몰라서 아껴두고 있던 카드였다.

‘지금이야말로 쓸 시간이야.’

메탈릭 그렘린 무리가 나를 덮친다.

눈도, 코도 없이 칠성장어를 연상케 하는 흉측한 입들이 갑각 위에 빨판처럼 들러붙었다. 놈들은 굶주린 모기처럼 내 몸에 이빨을 박은 채 대롱대롱 매달렸다.

나는 전투용 팔로 등 위에 매달린 놈들 중 몇 마리를 붙잡았다. ‘포식 거머리의 손’ 효과가 발동되자 놈의 몸이 미라처럼 쪼그라들었다. 똑같은 행동을 몇 번씩 반복하는 동안, 내 갑각의 상처는 늘어만 갔다.

놈들은 옆에서 동족이 미라가 되는 꼴을 보고도 악착같이 나를 씹어댔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 내가 숨이 끊어질 것이라 믿는 거겠지.

하지만 그건 틀렸다.

‘좋아.’

다량의 에너지를 흡수하니 나도 모르게 배가 빵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을 느끼며 뼈 야수를 활성화했다.

「■?!」

「■■!」

「■!」

모기가 피를 빨고 있는 부위에 힘을 주면, 피가 한 번에 확 쏠려서 모기가 터져 버린다고 한다. 실제로 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떤 광경인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느낌만은 알 것 같았다.

지금 내 몸에 달라붙어 있던 메탈릭 그렘린들이 그 꼴이었기에.

약 25m에 달하던 내 신체가 급속도로 성장한다. 갑각의 두께, 꼬리의 길이, 날개와 팔들, 머리갑각, 촉수들. 에이모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몇 배씩 확대된다.

「■■■■!」

변하는 나를 보며 놈들이 후퇴하려 한다. 순식간에 변화를 완료한 나는 도망치려는 놈들을 붙잡았다.

아니, 붙잡았다는 표현인 적절하지 않다. 내 등에서 튀어나온 침식 촉수는 날벌레를 향해 손바닥을 흔드는 것처럼 허공을 후려쳤을 뿐이다.

하지만 두께만 3m에 달하는 침식 촉수가 만드는 파괴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촉수가 지나간 자리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육편만 남았으니까.

동족의 처참한 죽음에 메탈릭 그렘린 무리가 다급히 물러났다. 수만에 달하는 우주의 약탈자들이 나 하나를 보고 긴장하는 중이었다.

물론 25m짜리가 한순간에 80m에 이르는 거대 괴수로 변한다면 누구라도 저런 반응을 보이리라.

‘오랜만에 써 보네.’

전에 제이슨과 싸웠을 때는 300m를 넘겼으나, 지금은 그 정도로 크지 않다. 그때는 ‘괴수의 왕’과 뼈 야수를 함께 써서 그런 거고, 지금 이 상태가 일반적인 뼈 야수의 변신 상태다.

급격히 거대해진 나를 보고 타이타보스는 신중히 움직여야 한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요새를 공격하고 있는 놈들을 제외한 나머지 놈들이 포지션을 바꿨다. 메탈릭 그렘린들은 나와 거리를 유지, 그 대신 볼프람 고블린들이 나를 사격하기 위해 앞에 나왔다.

‘거리를 벌려서 싸우면 이길 것이라 생각했나보지?’

거대화된 이상 내 브레스의 화력도 좀 전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판단하면 큰 잘못이다.

나 또한 사이킥 브레스를 준비하려는데, 전방에 나선 볼프람 고블린들의 머리가 으깨졌다. 놈만 그런 게 아니었다. 주변에 있는 놈들도 머리와 몸이 투명한 압착기에 들어간 것처럼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

「■■■■■!」

‘이건?’

혼란에 빠진 볼프람 고블린들이 아우성치며 물러나는 사이, 작은 무언가가 내 옆으로 날아왔다.

「힘들어 보이는데 도와줄까?」

장난기와 전의(戰意)라는 상반된 감정을 품은 호박색 눈동자의 주인이 내게 사념파를 보냈다.

겨우 몇 시간 안 봤음에도 왠지 모르게 반갑게 들리는 것은 왜일까. 나는 그녀에게 짧게 대꾸했다.

[즈즈 즈즈즈 즈즈즈(이게 힘들어 보이나?)]

「힘드니까 뼈 야수를 쓴 거 아니야?」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나는 화제를 돌렸다.

[즈즈즈즈 즈즈즈즈 즈즈 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즈(너야말로 괜찮겠어? 이제 막 단계 상승이 끝났잖아)]

「걱정하지 마. 날아갈 정도로 힘이 넘치니까.」

그리폰, 하늘의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마노(瑪瑙)색이 흐르는 찬란한 날개를 활짝 펼쳤다. 보석의 빛이 깃털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리는 그 모습은 사막의 모래가 바람에 흐트러지는 광경을 연상시켰다.

이전까지 없던 저 신비로운 분위기의 날개가 바로 신격화 상급 단계에 오른 증거였다.

‘다행이네.’

그녀가 곁에 있다면 절대 질 일은 없을 거다. 새로 얻은 힘을 능숙하게 쓸 수 있을지는 살짝 걱정되지만 그녀라면 금방 적응할 터.

거대한 머리갑각을 살짝 까딱인 나는 메탈릭 그렘린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새로 나타난 적을 보고 당혹스러워 했으나 그렇다고 물러나지는 않았다.

‘좋은 자세지만….’

다수의 목숨을 책임진 리더라면 필요할 때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 놈들을 향해 괴물의 촉수가 또다시 화염을 분출했다.

이제 제2라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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