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84 - 우화(1)
“■■야, 왜 그래?”
어?
익숙한 목소리가 내 정신을 일깨웠다. 눈앞에 먹음직스러운 음식들과 흰색 접시가 놓여 있는 식탁이 보인다.
그와 함께 손바닥으로부터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 손에 쥐고 있는 포크를 보자 왠지 낯선 기분이 든다.
“…혹시 마음에 안 들어? 오랜만에 만든 거라 솔직히 자신 없긴 한데.”
“기껏 비싼 한우를 썼는데 마음에 안 들면 곤란해.”
“아이 진짜 이런 날까지 그런 말을 해야겠어? 전에도 그러….”
“아니예요! 아빠!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 그랬어요!”
또 전처럼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투려 한다.
나는 재빨리 들고 있던 포크로 식탁 위의 빵을 푹 찔렀다. 바삭한 소리와 함께 빵에 구멍이 나고, 그 틈 사이로 진한 육즙이 흘러나왔다.
그 강렬한 냄새에 이끌린 나는 맨손으로 빵을 잡아 뜯어서 입에 집어넣었다.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웠지만 그 열기를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굉장한 맛이었다.
“추잡하게 맨손으로 먹니? 포크는 뒀다가 어디에 쓰려고?”
“어때? 맛있어? 끝내주지?”
맹렬히 씹어 삼킨 나는 말없이 엄지를 치켜올렸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가 활짝 웃으셨다.
“내 선물은 이미 받았고. 이제 엄마 차례.”
“알고 있어.”
“선물요?”
육즙 하나 남기지 않기 위해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먹던 나는 깜짝 놀랐다.
어머니가 내게 선물을 주신 적은 매우 드물었다. 애초에 내가 병원에 입원한 후에는 얼굴 자체를 뵙기도 힘들었다. 유명한 배우라서 항상 바쁘셨으니까.
“엄마가 나한테 선물을?”
“그렇다니까. 나도 놀…아, 이런. 잠깐만 나갔다 올게.”
아버지는 핸드폰을 들고 나가셨고, 부엌에는 어머니와 나만 남았다. 어머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식탁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내셨다.
헤드기어를 닮은 기계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큼지막한 상자는 나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사방에서 광고를 하는 VR기기였다. 나는 어머니가 건넨 선물을 멍하니 받았다.
“매니저한테 요즘 뭐가 인기냐고 물어봐서 샀어.”
평소와 달리 약간 어색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어머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좋지도 않은 물건이 비싸기…너, 지금 우니?”
“네?”
어머니 말씀대로 눈가에서 따뜻한 액체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선물을 받아서 기쁜 것은 맞지만, 눈물을 흘릴 정도는 아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얘!”
나는 선물을 내려놓고 급히 화장실로 뛰어갔다. 어머니가 당황해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볼 수 없었다.
화장실 문을 잠근 나는 수도꼭지부터 틀었다.
쏟아지는 물소리 덕분인지 널뛰는 감정이 점점 진정됐다.
방금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 것 같다.
어린 시절을 병원에서 보낸 나는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꿈꿔왔다. 모두가 식탁에 앉아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하는 것. 그 꿈이 이루어지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것이리라.
나는 물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바라봤다.
“응?”
거울 구석에 작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포스트잇에 적힌 세 글자의 단어가 보인다.
무의식적으로 뻗은 손가락이 포스트잇에 닿는 순간, 화장실이 암흑에 잠겼다.
얼굴에 묻은 물이 끈적끈적한 점액질이 됐고, 입고 있던 옷은 답답한 고치가 되어 몸을 조여 왔다.
‘방금 그건 뭐였지?’
지금껏 고치를 통해 본 환상들은 전부 과거에 있었던 기억의 편린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내 기억에 가족 모두가 화목하게 웃으며 식사를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모두 항상 바쁘셨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쯤에는 아예 별거 중이셨다.
‘그리고 마지막.’
그 포스트잇.
분명 중요한 단어인 것 같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른 것은 다 빼고 그 부분만 싹 지워진 것 같았다.
‘…성체로 진화할 때 또 확인할 수 있으려나?’
고치 속에 들어갈 때마다 환상을 보니 이후에 또 볼 수 있을 터.
나는 고치를 찢고 밖으로 나왔다.
서늘한 공기를 느끼는 것과 동시에 내가 본 광경은 문이 활짝 열린 컨테이너와 그 앞에 서 있는 그리폰 수인이었다.
하늘의 어머니는 손에 쥔 사과를 막 베어 물려다가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뭐? 왜?」
그녀는 새벽에 몰래 라면을 끓여 먹으려다 걸린 사람 같은 반응을 보이며 사과를 으적 씹었다.
[즈즈 즈즈즈(진작 말하지)]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아는데 어떻게 그래. 최대한 빨리 진화하고 싶어 했잖아.」
그녀 말이 맞다.
용의 둥지를 떠난 이후 나는 온갖 장소를 돌아다니며 유전자 정수들을 긁어모았다. 메가콥, 스타유니언 랭커들이 나의 존재를 인지한 이상, 그들이 언제 나를 뒤쫓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를 적대하는 자들은 하나 같이 자기 세력에서 최고의 권력을 지닌 자들이다. 그들과 맞서려면 나 또한 성체가 되어야 한다.
확실히 서두른 감이 있던 것은 사실이었기에 나는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즈즈즈(애들은?)]
「PS-111과 함께 밖에 나갔어. 녀석이 금속을 먹는 것을 구경하고 싶다나.」
[즈즈 즈즈 즈즈즈즈즈(역시 이미 도착했구나)]
어쩐지 함선의 내벽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했다.
배가 착륙한 곳은 이름 모를 왜행성이다. 케샤 아르마를 습격하러 가기 전, 나는 다른 이들의 견제를 받지 않고 성체로 진화할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았다.
여기는 항성으로부터 거리가 멀어 빛이 거의 도달하지 않는 행성이다. 행성의 지각은 얼음과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고, 대기도 매우 얕아서 일반적인 생물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케샤 아르마에 가기 전, 이곳이 진화하기 적합한 곳인지 확인하기 위해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합격.
이 작고 어두운 행성에서 나는 성체가 될 거다.
[즈즈즈 즈즈 즈즈즈(애들이 오면 말해 줘)]
「기다리지 않고?」
[즈즈 즈즈즈 즈즈즈즈즈 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금방 고치에 들어갈 텐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나는 달라붙은 점액질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 크기가 전보다 커졌고, 긴 꼬리 ‘2개’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새 유일 특성을 얻으면서 신체가 변화한 거다.
‘어차피 곧 성체가 될 텐데 그때 확인해도 되겠지.’
[즈즈 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내가 잠든 동안 애들을 부탁해)]
「걱정 마세요.」
어느새 사과를 다 먹어 치운 그녀는 냉동된 포도를 꺼내고 있었다.
그녀를 두고 나가려던 나는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파장을 보냈다.
[즈즈즈즈 즈즈(물어볼게 있어)]
「응? 뭔데?」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즈즈(신격화 단계를 올릴 때 뭔가 본 것 없어? 환상이라든가)]
「환상?」
막상 그녀에게 질문하고 나니 후회가 들었다. 내가 겪는 일을 남이 똑같이 겪으리라는 보장이 없는데 왜 물어 봤을까. 하물며 종족도 다른 데 말이다.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이려는데 그녀가 먼저 대답했다.
「봤어.」
[즈즈즈(봤다고?)]
「응. 인간 시절의 기억들. 너도 봤나 보네.」
[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그래. 고치에 들어갈 때마다 보고 있어)]
정확히 말하면 유체로 진화할 때만 빼고 말이다. 그때만큼은 환상을 본 기억이 없다. 내가 기억을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때만 예외적인 경우인지는 불명이다.
아무튼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성장할 때마다 환상을 보는 것 같다. 그렇다면 다른 플레이어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별로 즐거운 경험은 아니겠네. 아, 너는 또 다를 수도 있나?」
[즈즈 즈즈즈(무슨 뜻이지?)]
내 질문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황금색 털로 뒤덮인 손으로 포도를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내가 여태까지 본 환상은 딱 두 번이야. 내용도 다 똑같았어.」
[즈즈즈즈즈(똑같았다고?)]
「응. 중학생 때 따돌림 당하던 기억. 잊으려고 노력했는데 자꾸 튀어나오더라.」
그녀의 답변은 의외였다.
하늘의 어머니는 내가 아는 플레이어들 중 이 세계에 와서 잘 적응하고 결혼까지 한 유일한 케이스였다. 성격이나 사회성도 나나 다른 플레이어들과 비교해 보면 모난 구석 없이 꽤 좋은 편이었다. 당연히 현실에서도 순조로운 삶을 살았을 것이라 짐작했는데 이런 아픔이 있을 줄 몰랐다.
「그런 눈으로 볼 거 없어. 이미 한참 전의 일이니까.」
[즈즈즈(그렇군)]
「너는? 이런 걸 물어보는 것을 보니 네 기억도 썩 좋지는 않은가 보네.」
나는 그녀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인간 시절, 얼굴이 왜 그러느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많이 받았다. 그때마다 나는 왜 이런지에 대해 한참 설명해야 했다.
기껏 설명하고 난 뒤에 돌아오는 반응은 항상 똑같았다. 어색함. 불신. 값싼 동정.
하늘의 어머니 역시 그들과 비슷하게 반응할지도 몰랐다.
‘아니야. 그녀가 먼저 자기의 아픔을 얘기했어.’
그러니 나도 그녀에게 솔직히 말하는 것이 정당한 일일 터.
나는 그녀에게 내가 본 환상들과 과거에 겪었던 큰 사고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는 말없이 내 얘기를 끝까지 들었다.
내 얘기가 끝나자 하늘의 어머니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아픔이 있었을 줄은 몰랐네.」
[즈(그래)]
「이거라도 받아.」
그녀는 들고 있던 포도 가지를 자른 뒤 반을 내게 건넸다. 그리고 자기는 남은 반을 단번에 삼켰다.
‘술잔 대신인가.’
어떤 의도로 준 것인지 알기에 나도 그녀와 똑같이 포도를 입에 집어넣었다. 분위기와 별개로 상큼하면서도 신맛이 입 안 전체를 간질였다.
포도를 먹느라 생긴 잠깐의 정적은 그녀가 입을 열면서 깨졌다.
「그보다 네 어머니께서 그 대배우이실 줄은 몰랐네. 내가 여기 오기 전에는 외국 영화제에서 상까지 타셨다고 들었는데.」
[즈 즈즈즈(뭐 그렇지)]
「연기 잘하는 건 집안 내력인가 봐?」
[즈즈즈즈(그럴지도)]
짤막한 농담을 건넨 그녀는 곧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건 내 추측인데. 어쩌면 우리가 정한 목표에 따라 환상이 달라지는 것 아닐까?」
[즈즈 즈즈즈(무슨 의미지?)]
「너는 처음부터 승천을 노렸잖아. 나는 약간 달랐거든. ‘현실’보다는 이 세계가 더 마음에 들었으니까.」
[즈즈즈(그렇지)]
「나와 달리 너는 부정적인 기억 대신 이상적인 미래를 본 거잖아.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전보다 훨씬 ‘동기 부여’가 되지 않겠어?」
그녀의 말은 즉, 자기가 정한 목표에 따라 보는 환상이 달라지는 게 아니냐는 것.
‘환상이 목표와 관련되어 있다라.’
단언하기에는 사례가 너무 적지만, 그녀의 의견은 꽤 흥미로웠다.
유일 특성을 만들기 위해 고치에 들어가면서 본 환상.
그것은 과거에 겪어보지 못한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이었다. 그 행복을 손에 쥐려면?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환상을 보여주는 거지?’
그녀는 동기 부여를 위한 것이라 말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터. 나나 그녀나 환상을 본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다.
‘…이것도 알아봐야겠어.’
기억으로 구성된 환상. 어쩌면 우리가 이 세계에 떨어진 이유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최종 목표인 승천과 별개로 말이다.
더 이상 알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그녀와의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그래도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기에 나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즈즈즈(고마워)]
「천만의 말씀을. 말 몇 마디 나누는 것이 대수라고.」
[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 즈즈즈즈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즈(항상 그렇게 생각했어. 네가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나가서 성체 될 준비나 해.」
그녀는 내 진심 어린 감사가 어색한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고개를 돌린 그녀를 향해 고개를 한 번 숙인 나는 함선 밖으로 기어 나왔다.
황량한 금속의 지표가 나를 반겼다. 빛이 거의 없어서 우주의 암흑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그곳이었지만 나에게는 보조기관이 있다.
나는 미리 알아둔 장소를 향해 기어갔다. 멀지 않은 곳에 크레이터가 있다. 오래전 운석과 충돌해서 생긴 거대한 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나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럼.’
「‘준성체’->‘성체’ 진화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진화하시겠습니까?」
오래 기다렸다.
언제나 똑같은 말투로 의견을 구하는 반투명 텍스트박스.
내 대답도 언제나 같았다.
고치에 들어갔다 나오며 묻은 점액질이 마르기도 전에 내 몸이 다음 단계를 위해 나아갈 준비를 한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광경은 검은색 심연 대신 빛과 색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내 앞에 있는 것은 익숙한 모양의 철문이었다.
‘여긴?’
녹슨 경첩과 맨들맨들한 손잡이의 낡은 문. 그건 내 자취방의 문이었다.
안쪽에서는 누군가가 열심히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씹! 감히 내 진화를 방해해? 곱게 안 죽일 줄 알아라!”
저 목소리, 많이 익숙하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왠지 기시감이 든다. 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문고리가 돌아가고 문이 열린다.
화장실이 딸린 원룸 한구석에 놓인 침대 위. 거기에 헤드기어를 쓴 남자가 누워 있다.
체격은 평범해 보이나 몸은 그렇지 않았다. 집이라서 그런지 편하게 반팔 티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기에 훤히 보였다. 오른쪽 다리부터 시작해서 팔뚝과 어깨, 목까지 이어진 긴 화상 자국들이 말이다.
“이번이 도대체 몇 번째야! 왜 매번 나만 졸졸 따라다니지?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나의 존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듯, 그는 열심히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남자의 모습, 그의 행동. 모든 것이 익숙하다.
‘뭔가 잘못됐어.’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 나의 생각과 다르게 몸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길쭉한 날개 팔이 그가 쓴 VR기기를 벗겨 냈다.
“아이, 이건 또 뭔…어?”
스페이스 서바이벌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그가 나를 본다. 그의 눈이 찢어질 듯 확대된다.
‘…미친.’
얼굴 오른편에 화상 자국이 난 그.
그건 내가 아침마다 화장실 거울에서 항상 보던 그 얼굴이다.
“으, 으아아아아악! 괴물이다아아아아!”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는 그의 정체는 바로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