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85 - 우화(2)
예전에 봤던 고전 영화 중 그런 게 있었다.
지구 내부에 지상의 인간과 똑같이 생긴 복제인간들이 존재한다는 설정을 가진 스릴러 장르의 영화였다.
지상의 인간과 지하의 복제인간이 만난 결과는 좋지 못했다. 마치 자기와 똑같이 생긴 인간을 만나면 죽는다는 도플갱어 전설처럼.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그렇다.
나를 보며 비명을 지르는 남성. 그는 인간 시절의 ‘나’였다.
‘…일단 대화부터 해 봐야겠어.’
나는 의태 기관 특성으로 인간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기대와 전혀 달랐다.
「그르르르?」
‘뭐야?’
예리한 엄니가 솟아난 내 주둥이에서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튀어나왔다. 그걸 위협이라 판단했는지 ‘나’가 숨을 삼켰다.
‘특성이 발동되지 않잖아?’
환상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육신이 고치 속에서 변형 중이라서 그런 걸까? 의태 기관은 전혀 활성화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내 몸은 인간 정도 크기 밖에 안 된다. 좁은 자취방에 수월하게 들어온 것도 내 몸이 작아졌기 때문이다.
내가 당황해하는 것을 기회라 여겼는지, 또 다른 ‘나’가 발로 내 머리를 걷어찼다.
「그륵?!」
‘윽?!’
본래 나의 몸이었다면 꿈쩍도 안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다수의 전함이 쏜 주포에 맞은 것처럼 강렬한 통증이 내 머리를 지배했다.
나는 예상 밖의 고통 속에 허우적거리다가 컴퓨터가 놓인 책상 위로 쓰러졌다. 내가 넘어진 사이, ‘나’는 자취방 밖으로 급히 뛰쳐나갔다.
‘이게 무슨?’
나는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날개 팔로 머리를 문질렀다.
‘환상이 아니야?’
발차기에 얻어맞은 머리는 이게 현실임을 증명하듯 계속해서 욱신거렸다. 여태껏 고치에서 환상을 볼 때 지금과 같은 고통을 느낀 적은 없었다.
머리를 어루만질수록 통증은 약해졌지만, 그와 반대로 점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앞에 있는 컴퓨터를 부숴버리고, 도망친 사냥감을 뒤쫓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그르르르르」
‘…아니, 진정하자.’
나는 빠르게 타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혔다.
생각해 보면 이전의 환상에서도 내 감각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었다. 병원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설에서 맡았던 독한 화학 약품 냄새 같은 것들 말이다.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통증도 느낄 수 있을 터. 그때는 나를 공격하는 자가 없어서 몰랐던 거겠지.
문제는 환상에서 내게 처음으로 피해를 입힌 자가 바로 ‘나’라는 거지만.
‘붙잡아야 해.’
인간 형태의 ‘나’가 아무 이유 없이 나타났을 리 없다. 왜 이런 환상이 나타났는지 알려면 그가 필요하다. 말이 안 통하긴 해도 붙잡아서 어떻게든 물어봐야 한다.
나는 도망친 ‘나’를 따라 자취방 밖으로 나갔다.
회색빛 복도와 굳게 닫힌 문들이 나를 반겼다.
혹시나 싶어 건너편 방의 문고리를 잡았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단순히 문이 잠겨서 열리지 않는다거나 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벽에 문고리를 달아 놓은 것 같은 감각이었다.
‘계단으로 갔어.’
다른 집에 들어간 것이 아닌 이상, 놈이 갈 곳은 한 군데 밖에 없다. 여섯 개의 길쭉한 팔이 딱딱한 바닥에 닿을 때마다 복도가 울렸다.
예상대로 계단으로 이어지는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안쪽에는 전등의 빛이 비추는 계단이 보였다.
‘저기로 갔나?’
감지 센서로 인해 켜진 것을 보면 ‘나’는 저기로 내려간 것일 터.
계단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저 존재가 정말 ‘나’라고 한다면, 피할 수 없는 괴물을 마주쳤을 때 어떻게 대응할까?
지금처럼 겁먹고 도망치기만 할까?
아니면….
‘뒤!’
“죽어!”
계단 반대편에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머리를 급히 숙였다. 부러진 밀대자루가 날아와 내 뒷머리갑각을 꿰뚫었다.
‘젠장!’
“젠장!”
나는 머리를 뒤로 빼서 감추는 한편, 적을 향해 꼬리를 휘둘렀다. 꼬리 끝 집게발이 바닥의 먼지를 쓸며 날아갔다. 하지만 ‘나’는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시점에 이미 몸을 날리고 있었다.
꼬리의 집게가 허공에 뜬 놈과 교차한다. 놈의 신발 바닥이 집게발에 쓸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몸을 띄워서 낮게 날아온 공격을 피한 놈은 그대로 건너편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 버렸다.
놈이 모습을 감춘 사이, 나는 뒷머리갑각을 관통한 밀대 자루를 잡아 뽑았다.
내 몸에서 가장 단단한 부위는 머리갑각, 흉부, 꼬리의 집게 이렇게 총 3개다. 전함의 주포에 맞아도 끄떡없는 부위가 겨우 이딴 조잡한 창에 구멍이 났다.
「그르르르르르」
맹렬한 분노가 참을 수 있는 한계까지 끓어오른다. 나도 모르게 부러진 밀대자루를 물고 씹다가 뱉어냈다.
아까부터 계속 정신을 어지럽히던 분노. 이제는 통제가 힘들 정도였다. 당장에라도 또 다른 ‘나’를 잡아다 머리를 뜯어 먹고 싶었다.
‘…침착, 침착해. 침착.’
나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애쓰며 방금 있었던 일을 복기했다.
‘그 행동, 나의 반응을 읽었어.’
이제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외형만 나와 똑같은 것이 아니다. 생각도 나와 동일하다.
‘나’는 내가 계단 쪽을 확인할 것을 예측하고, 뒤편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숨어서 기습했다. 내가 인간이었다면, 현실에서 에이모프를 만났다면 지금처럼 행동했을 거다.
괴물에 환장하는 ‘나’이기에 에이모프가 어떤 존재인지도 잘 안다. 에이모프는 설정상 대화도 타협도 불가능한 식인괴물. 그런 존재에게 노려질 시 도망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하나뿐. 바로 맞서 싸우는 거다.
‘머리를 노렸어.’
에이모프는 심장이나 뇌가 파괴되면 죽는다. 만약 내가 놈의 공격을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면 밀대 자루에 뇌를 관통 당했을 거다.
‘그르르, 다음에 보면 제압부터 해야겠어.’
놈이 내 생각을 읽었듯, 나도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저 계단 아래 어딘가에서 무기를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아마 소화용 도끼를, 그륵, 챙겼을 거야.’
아래층 복도에 가면 소화용 도끼와 소화기가 배치되어 있다. 내 머리갑각은 밀대 창에 맞아 뚫릴 정도로 약하다. 소화용 도끼는 도저히 버틸 수 없다.
덩치는 내 쪽이 훨씬 우월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딱히 장점이라 하기 힘들다. 피격 면적이 넓어진다는 뜻이니까.
무기를 든 놈은 계단이 아니라 복도로 이어지는 문 뒤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계단에는 감지 센서가 있으니 몸을 숨기기에는 좋지 않다. 장소도 좁아서 나처럼 덩치 큰 적과 싸우기에 비효율적이고.
나는 놈이 도망친 계단을 쳐다봤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서 놈이 튀어나왔던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날개 팔을 뻗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환한 빛이 깔린 엘리베이터 안에는 부러진 밀대의 걸레 부분이 놓여 있었다.
좋은 생각이 났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나는 꼬리를 문에 걸친 뒤, 스테인리스로 된 천장을 날개 팔로 밀어냈다. 덜컥 소리와 함께 스테인리스가 분리되었다.
나는 엘리베이터 천장을 통해 통로로 기어 올라갔다. 물론 꼬리 끝으로 아래층 버튼을 누르는 것은 잊지 않고 말이다.
‘놈이 기다리는 장소, 그르르르, 필시 계단과 복도가 이어지는, 그르르, 문 뒤편.’
쇳소리와 함께 발아래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하강했다. 나는 분리된 스테인리스를 원래 자리로 옮겼다.
‘계단에는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 그륵, 있으니까 그걸 보고 대응하겠지.’
그리고 계단의 반대편에는 엘리베이터가 바로 보인다. 혹여 내가 엘리베이터를 이용해도 바로 볼 수 있다. 놈은 내가 어느 쪽으로 내려가도 도끼로 즉각 내 머리를 찍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이건 모르겠지.’
「그르르르」
나는 어느새 줄줄 흐르는 침을 손으로 닦았다. 허기인지 아니면 전투를 앞둔 기대감인지 모를 기이한 고양감이 내 몸을 장악하고 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춘다. 문이 열리는 순간, 아래쪽에서 쿵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는 타이밍에 맞춰 소화용 도끼를 휘두른 것이 틀림없다.
“뭐야?”
놈의 행동은 헛발질이었다. 나는 있는 힘껏 꼬리로 스테인리스를 내리쳤다. 단단한 집게가 얇은 엘리베이터 천장 가운데를 꿰뚫었다.
“!”
당황한 놈이 뒤로 물러난다. 나는 꼬리로 그가 바닥에 놔둔 소화기를 낚아챘다.
놈이 든 새빨간 도끼날이 내 꼬리의 겉면을 베고 지나갔다.
“…칫!”
복도 쪽으로 도망치는 놈. 나는 천장에서 기어 내려와 가슴쪽 작은 팔로 소화기를 붙잡았다.
그리고 놈이 하려던 것을 대신했다. 복도에 소화제를 잔뜩 뿌리는 것.
“쿨럭?! 이런, 쿨럭!”
분말용 소화제가 안개가 낀 것처럼 복도에 가득 깔렸다. 놈은 생리적인 부분은 어쩔 수 없는지 마구 기침을 해댔다.
나는 놈이 무력화된 틈을 타 복도로 뛰쳐나갔다.
“꺼져!”
도끼가 사나운 소리를 내며 소화제 분말을 갈랐다. 놈이 노린 목표는 내 머리에서 살짝 윗부분. 내가 천장에 거꾸로 붙어서 갔다면, 도끼날은 정확히 내 머리에 꽂혔을 거다. 실제로 내가 에이모프로 플레이할 때 많이 그랬으니까.
그러나 나는 반대로 바닥에 아래턱이 닿을 정도로 바짝 낮춰서 움직이고 있었다. 놈이 휘두른 도끼는 내 뒷머리 갑각을 찍었다.
워낙 깊게 박혔기에 쉽게 빼는 것은 불가능. 놈이 잠깐 움찔한다. 힘을 줘서 뽑을지, 아니면 후퇴해야 할지 고민하는 거다.
중요한 것은 놈이 고민하는 것 자체가 실수라는 점이다. 나는 날개 팔을 휘둘러서 놈을 후려쳤다.
“악!”
놈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벽에 처박힌다.
놈의 피 냄새를 맡은 순간, 내 머리에는 오로지 하나의 생각만이 가득 찼다.
놈을 죽이고 싶다. 놈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마시고 싶다. 주둥이를 놈의 배에 처박고 내장을 씹고 싶다. 놈의 발끝까지 남김없이 다 삼키고 싶다.
‘나’를 먹어서 유전자 정수를 얻어야 한다.
“사, 살려 줘! 누가 좀 도와주세요! 제발!”
놈이 피를 흘리며 바닥을 긴다. 나는 손톱을 세워서 놈의 허벅지를 찔렀다.
“아아아아악!”
애처롭게 비명을 지르는 ‘나’. 그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식욕을 돋운다.
‘그르르르르르’
날개 팔로 단단히 그를 붙잡고 입을 벌렸다.
눈물과 콧물, 피로 젖은 그의 얼굴이 보인다. 곧 놈의 머리는 잘게 다져져서 내 몸의 양분이 되리라.
「■애■야! 안■!」
「■■■ ■■!」
막 이빨로 놈의 머리를 물어뜯으려는 순간.
알 수 없는 메시지와 해석 불가능한 파장이 내 몸을 붙들었다.
‘방금 그건?’
메시지와 파장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 충격은 메아리처럼 계속 내 머리 안을 맴돌았다.
‘뭐지?’
나는 적, 아니 또 다른 ‘나’를 내려놓았다.
‘내가 왜 그랬지?’
이제야 떠오른다. 나의 계획은 이 환상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대화하기 위해 그를 붙들어 놓는 것이었다. ‘나’를 잡아먹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히, 히익! 괴물! 죽어! 죽으라고!”
그가 내 머리갑각에 박힌 도끼를 뽑으려 한다. 나는 그의 손을 밀어낸 뒤 소화용 도끼를 대신 뽑아 멀리 던져버렸다.
‘이럴 것이 아니야. 대화해야 해.’
날개 팔로 날뛰는 ‘나’를 붙잡고, 가슴쪽 작은 팔로 그의 피를 닦았다. 그리고 바닥에 글씨를 썼다.
“뭐, 뭐야?”
‘대화’. 두 글자를 본 ‘나’의 눈이 흔들린다. 하지만 곧이어 꽥꽥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씨, 씹! 거짓말! 에이모프가 무슨 대화야! 여기 괴물이 있어요! 제발 누구든 나 좀 도와줘!”
속에서 다시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감정을 강하게 억눌렀다. 혹시 잘못해서 힘이 더 들어가 그에게 고통을 줄까 봐 날개 팔에도 신경을 썼다.
나는 끈기를 갖고 계속 글씨를 적었다. ‘나’를 해칠 생각이 없다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
그 후 몇 분이 지났을까. ‘나’는 어느새 얌전해졌다.
‘이제 진정한 건가?’
나는 고개를 숙인 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너는 누구냐고.
“내가 누구냐고?”
그걸 본 ‘나’가 고개를 들었다.
“병신 새끼. 그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뭐?’
피범벅된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이윽고 그는 마치 프로그래밍된 감정을 재생하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죽거렸다.
“네가 온 세상의 불행을 다 껴안고 있는 것 같지? 세상에 고통받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넌 그냥 쓰레기야. 그깟 화상 하나 때문에 뭐? 가족이 필요해? 너를 위해 헌신한 부모님을 버린 건 너야.”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날개 팔에서 힘이 빠졌다.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실에 매달린 목각인형처럼 제자리에 우뚝 섰다.
“괴물을 좋아한다고? 네가 괴물을 좋아하는 것은 단 하나 때문이야. 애들이 괴물이라고 놀려서. ‘너희들이 괴물이라 놀렸으니 진짜 괴물이 되어주겠다’ 뭐 이런 거 아냐?”
「그르르르르」
“너의 취향, 아니 취향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그 짓거리는 비참한 자위행위에 불과해.”
그는 내게 비난을 퍼부으며 복도에 떨어진 도끼를 집어 들었다.
“네가 게임에 빠진 이유. 그것도 똑같아. 너는 자기가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게임 세계로 도피한 것뿐이야. 지금도 그 세계에서 게임과 같은 감성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있지. 그러니까 ‘현실의 나’도 못 죽이는 거 아냐. 진짜 살인이 될까 봐 무서워서 그런 거지.”
그가 도끼를 쥔 양손을 번쩍 든다. 도끼의 날이 전등 빛을 머금고 서늘하게 빛난다.
“병신같은 너지만, 나 또한 ‘너’. 내가 도와줄게. 현실을 살 수 있도록 말이야.”
「…….」
“그럼 잘 가라. 겁쟁이.”
그의 말이 끝나고 복도에 피가 튀었다. 극심한 통증에 나의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날개 팔’에 박힌 도끼날은 제법 아팠다.
“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네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야. 두 가지만 빼고)]
내 괴물의 촉수가 파르르 떨면서 내 의사를 전달한다. 어차피 그는 인간이기에 내 파장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상관없다.
나는 다른 팔로 놈의 손목을 붙잡았다.
[즈즈 즈즈즈즈즈즈 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나는 ‘저쪽 세계’에서 겪은 모든 경험을 소중히 하고 있어. 도피 따위가 아니야)]
처음에는 그랬을지 모른다.
생명의 위기 때문에, 현실로 돌아가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스페이스 서바이벌의 세계’를 도피처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지금의 내게 여전히 ‘저쪽 세계’가 도피처냐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부정할 수 있다.
내가 승천에 도달하게 되면 애들과 헤어져야 할지 모른다. 아니면 거기까지 도달하기 전에 애들을 잃을 수도 있다. 혹은 다른 랭커랑 싸우다가 내가 패배할 수도 있고, 조건을 달성하기 전에 강적과 싸워 죽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과 함께 겪은 것들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여정이 어떤 결말로 끝나더라도 그들만큼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러니 그 전까지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살인이 두려워서 그런 게 아니다.
[즈즈 즈즈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즈(네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새끼! 놔!”
[즈즈 즈즈즈 즈즈즈(너는 죽이지 않는다)]
이 환상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되기 전까지 ‘나’는 죽지 않을 거다. 그저 에이모프에게 제압당한 상태로 있을 뿐.
내게 붙들린 그는 악귀 같은 얼굴을 한 채 날뛰었지만 에이모프의 팔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리였다.
“멍청한 새끼! 이러고 있을 시간 없다고! 나를 죽이던가! 아니면 나한테 뒈지던…?!”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그는 마비라도 당한 것마냥 몸을 딱 굳혔다. 그러더니 몸을 마구 경련하기 시작했다. 놈이 떨기 시작하자 주변 복도의 색이 흐릿해졌다.
‘공간이 사라지고 있어?’
밖, 그러니까 현실에서 나의 진화가 완료된 것 같다.
내 손에 붙들린 ‘나’의 몸도 복도와 마찬가지로 흐릿해졌다. 방금까지 흉흉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 ■생, ■수■체∬⫱⪿….”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그는 사라졌다.
‘나’가 사라지자마자 나의 감각도 어둠 속에 잠겼다.
잠시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나는 끈적거리는 점액 속에 잠겨 있었다.
팔을 뻗어 고치를 찢자 낯익은 분홍색 몸통이 보였다.
「큰애기, 안녕!」
나의 성장이 끝날 때까지 곁에서 기다린 26호.
새 가족이 나를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