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88 - 이사(1)
스페이스 서바이벌에서 메가콥과 스타유니언의 함선들은 플라즈마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 둘 다 태양계의 인류에서 출발한 세력이기 때문이다.
다만 세부적인 부분으로 들어가면 두 세력 간에 선호하는 장비가 약간씩 다르다.
스타유니언은 고도의 AI 기술이 적용된 드론을 무기화해서 사용하는 편이다. 반면, 메가콥은 레이저, 플라즈마 같은 에너지 계열의 무기가 주력이다.
지금 내 발 아래에 있는 구체 형태의 초대형 채굴선, ‘기가크래커’도 에너지 계열 무기를 사용하는 메가콥 슈퍼무기 중 하나다.
기가크래커의 주력 무장은 초거대 이온캐논. 그 위력은 운석이나 소행성을 쪼개버릴 수 있을 만큼 막강하다.
‘대신 유지비가 엄청나지.’
이온캐논을 작동시킬 때마다 에너지원으로 소모되는 물질이 있다. 내가 전에 잡았던 크리스털윙. 놈이 분비하는 특별한 금속물질이 초거대 이온캐논의 에너지원이다. 메가콥 플레이어들이 크리스털윙 둥지를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가크래커를 여기서 볼 줄이야.’
아무 것도 없는 이곳에 온 것을 봐서는 내가 진화하려고 자리 잡은 왜행성을 대상으로 채굴을 시도하려 한 듯싶다.
거리가 떨어져도 보일 만큼 크기가 큰 우주선이라 바로 선제공격하려고 했으나 문득 생각이 들었다.
슈퍼무기의 침식.
성체가 된 터라 내 몸 크기는 전보다 더 커졌고, 용의 심장이 이식된 덕분에 에너지 출력도 크게 상승했다. ‘악몽의 지평선’으로 저 배를 장악할 수만 있다면 강적과 싸울 때 큰 도움이 될 터.
설령 침식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상관없다.
일개 해적선보다 기가크래커가 훨씬 유용하고 강력하니까. 채굴선이라 부무장은 그저 그런 수준이지만, 대신 이온캐논이 있지 않은가. 무조건 손에 넣는 것이 이득이다.
‘검은 탐식자 대포를 시험해 보려 했지만….’
나는 두 갈래로 갈라진 꼬리 중에서 생체대포를 단 ‘왼쪽 꼬리’를 흘낏 쳐다봤다. 툴팁만 보면 이 배를 통째로 파괴하거나 최소한 반파시킬 수 있는 위력을 지닌 특성이다.
운 좋게 슈퍼무기를 손에 넣을 기회가 생겼는데 특성 효과를 실험해 본다고 낭비하기에는 아깝지 않은가. 이건 나중에 써야겠다.
배를 박살 내는 대신, 장악하는 것으로 목표를 바꾼 내가 새로 꺼내 든 무기는 두 가지였다.
초능력 관련 융합 특성인 ‘암흑 장막’과 처음 보는 유일 특성인 ‘가변형 생체병기’다.
‘암흑 장막, 이건 게임에서도 많이 썼지.’
에이모프는 매번 다음 단계로 성장할 때마다 공짜로 특성 몇 개를 얻는다. 암흑 장막은 공짜로 얻은 특성과 ‘정신 그물망’을 융합해서 만든 특성이다.
암흑 장막이 활성화 되면 몸 곳곳에 달린 파이프로부터 특수 물질이 흘러나와 전신을 감싼다.
그 효과는 적의 감지 시스템에 걸리지 않는 것.
금속 분비물 때문에 감지되지 않는 크리스털윙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작동 방식은 정반대지만.’
전자기기 자체에 걸리지 않는 크리스털윙과 달리 암흑 장막은 내 모습을 가려주지 않는다. 대신 매우 강력한 자기장을 형성하므로 기계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아마 이 배에서는 나를 괴물이 아닌 일종의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 혹은 갑자기 발생한 자기장 폭풍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을 거다.
암흑 장막을 펼쳐서 적의 탐지 기능을 무효화시킨 뒤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전함보다 훨씬 두터운 장갑으로 무장한 기가크래커지만 성체가 된 나의 돌격을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는 없었다.
‘물론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고.’
나는 평소보다 서너 배 이상 거대해진 머리갑각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머리 안쪽에서 갑각과 뼈가 부딪치고 뒤틀리는 소리가 나고, 목에 가해지는 무게감이 실시간으로 줄어들었다.
「가변형 생체병기: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입니다. 이미 포식한 에이펙스 생물의 신체적 특징을 모방해 육체를 변형시킵니다.
변형 가능한 신체 부위: 머리, 팔, 오른쪽 꼬리, 침식 촉수
모방 대상(결과) 목록: 아이스 호러(머리갑각), 갤러곤(뿔, 날개), 글래셔 핀드(손톱), 크리스털윙(보조기관), 스카이웨일(눈), 헬사이드 호넷(팔), 고르곤 스웜(꼬리)
*추신: 원본이 가장 우월하다는 인식은 허상입니다.」
우주요새에서 탈출한 뒤에 만든 ‘가변형 생체병기’.
각 신체 부위에 특정 생물의 강점을 반영해서 변형시키는 유일 특성이었다. ‘완전한 유기체’와 유사하게 육체 관련 특성을 재료로 요구하더니 결과물도 닮았다.
‘몸을 변형시키는 특성이라.’
완전한 유기체를 보유한 덕분에 나는 24시간에 한 번씩 전투에 특화된 ‘사냥의 표상’으로 변신할 수 있다. 가변형 생체병기는 전신을 바꾸지는 않지만 대신 신체 부위 중 일부를 다른 형태로 바꿀 수 있다.
방금 기가크래커를 들이받았을 때도 가변형 생체병기를 활용, 머리갑각을 아이스 호러의 두개골 형태로 변형시켜서 때린 거였다.
아이스 호러의 두개골은 이것저것 못 먹는 것이 없는 나도 이빨이 제대로 박히지 않아 다 먹지 못한 부위이다. 가변형 생체병기로 머리갑각을 바꿨을 때도 이러한 특징은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괜찮긴 한데 아쉬운 점도 있네.’
처음 써봤는데 바로 느낀 단점은 총 두 가지.
일단 신체를 변형시키고 되돌릴 때마다 통증이 상당했다. ‘고통 경감’이 발동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거슬리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제한된 부위 하나만 변형시키는 것이라 다른 신체 부위와는 호응이 안 된다. 머리갑각을 키우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대신 목에 상당히 부담이 가해졌다.
‘이 부분은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좀 더 연구해 봐야겠어.’
변형될 때 느꼈던 통증은 시간이 지나자 가라앉았다. 나는 공성망치에 얻어맞은 성벽처럼 움푹 파인 외벽을 내려다 봤다. 상태를 보니 아이스 호러 갑각으로 바꿔서 한 번 더 박으면 구멍이 날 듯했다.
‘아니야. 다른 부위를 바꿔보자.’
암흑 장막은 여전히 유효한 상황. 안쪽에서는 외부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는 팔을 바꿔보기로 했다.
‘글래셔 핀드의 손톱.’
가변형 생체병기가 발동되자 날개 팔 말고 전투용 팔이 빠르게 변했다.
끝에 달린 4개의 손가락이 근질거리더니 외피가 뜯어지고 안에서 피가 솟구쳤다. 찢어진 손가락 근육 사이로 갈고리 모양의 손톱들이 삐져나왔다. 무중력의 우주공간 위에 나의 피와 살점들이 둥둥 떠다녔다.
이윽고 내 손의 모양은 풍뎅이의 발과 비슷한 형태로 변했다. 나는 큼지막한 갈고리 손톱이 달린 전투용 팔 2개를 강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묵직하면서도 예리한 손톱이 함선 외벽에 꽂혔다. 그 상태로 힘을 주고 팔을 당기자 외벽이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역시 비슷하네.’
아드하이의 고향에서 글래셔 핀드를 잡을 때는 운이 좋았다. 당시 ‘심연의 색채’로 놈이 장악한 붉은 숲을 일망타진한 덕분에 직접 싸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약한 적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놈도 에이펙스로 분류되는 포식자 중 하나. 마약성 물질로 부하를 부리는데 능숙한 것과 별개로 본체의 스펙도 상당한 수준이다.
사슴벌레의 상체, 나무뿌리를 닮은 하체를 가진 글래셔 핀드는 여러 개의 무기를 지니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수십 개에 달하는 발톱들.
놈은 특정 지역을 장악한 뒤에는 가지 형태로 뻗어난 수십 개의 다리를 땅속에 숨겨둔다. 그래서 평소에는 다리 끝에 달린 무식할 정도로 두꺼운 갈고리 발톱이 보이지 않는다. 이 발톱들은 놈의 본체에 가까이 접근한 대상을 공격할 때만 외부로 드러난다.
만약 이걸 모르고 본체를 향해 달려들면? 지하에서 솟아난 수십 개의 발톱에 의해 난도질당하게 된다.
‘설정상 땅을 파는데 쓰는 용도라 하지만.’
지금 나는 땅 대신 슈퍼웨폰의 외벽을 파고 있는 중이다.
유용한 신체 부위 덕분에 양파 껍질 벗기듯 쉽게 외벽을 긁어낸 나는 날개 팔로 외벽 구멍의 양끝을 붙잡았다. 팔에 힘을 줘서 구멍 크기를 넓힌 나는 안쪽에 머리를 드밀었다.
‘주변에 인간은 없고.’
배 안에서 처음 마주한 것은 어마어마하게 많이 쌓인 광물 덩어리들이었다. 붉은색 비상등이 깔린 저장칸 위에 다수의 광물 피라미드들이 있었다.
‘확실히 넓긴 하네.’
기가크래커가 슈퍼무기라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채굴선. 직경 2km에 달하는 배의 내부는 대부분이 광물을 저장하는 공간들로 채워져 있다. 실제 선원들이 거주하는 공간은 그리 넓지 않다.
확인을 마친 나는 고개를 뺐다. 고개를 돌리니 멀리서 익숙한 물체 두 개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분홍색 공을 안고 있는 그리폰 수인, 8개의 다리가 달린 거미 로봇을 든 백색의 용. 그들은 내가 만들어 놓은 구멍 안쪽으로 쏙 들어갔다.
녀석들이 들어간 이후에도 나는 구멍을 계속 넓혔다. 몸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뚫어놓은 뒤에야 겨우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
‘너무 커도 문제네.’
들어오니 PS-111은 하늘의 어머니와 함께 함선 장악 작업을 개시 중이었다. 26호와 아드하이는 이렇게 많이 쌓인 광물 덩어리가 신기했는지 구경하고 있었고.
「와! 동글동글 많다!」
「거짓말쟁이 오드 그라드」「둥지」「비슷해」
「이 동글동글 예쁘다.」
「인정」
나는 저장칸의 단말기를 조작하는 PS-111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턱 아래의 케이블을 단말기에 연결한 상태로 고개를 까딱이고 있었다.
[즈즈즈 즈즈즈(조종할 수 있어?)]
“제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 듯하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그래? 그러면 초광속 항해만 못하게 시간을 끌어 줄래?)]
「설마 기가크래커를 침식하려고? 그게 가능해?」
[즈즈즈즈 즈즈즈(확인부터 해 보고)]
나는 등에서 침식 촉수를 뽑아 저장칸의 벽에 갖다 댔다. 그러자 익숙한 텍스트박스가 내 앞에 떠올랐다.
「침식하기 적합한 크기로 확인. 침식 완료까지 16시간 소요 예정. 침식 이후 조종 가능한 시간은 현재 80일.」
‘흠. 16시간이라.’
긴 시간이라 생각이 들 수 있지만, 무려 직경 2km짜리 슈퍼무기를 완전히 장악하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이 정도는 거저나 다름없다.
‘이건 나중에 쓰도록 할까.’
배가 장악 가능한 것은 확인한 나는 촉수를 회수했다.
침식을 개시하면 시간제한이 생기므로 강적과 싸울 때 히든 카드로 쓰기가 힘들어 진다. 침식이 필요한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PS-111의 통제에 맡길 생각이다.
[즈즈즈(가능해)]
「진짜? 밸런스 너무 안 맞는 것 같은데.」
[즈즈즈즈 즈즈즈 즈 즈즈즈 즈즈즈즈즈(지금까지 고생해 온 대가라 생각하자고)]
그녀에게 가볍게 답한 뒤, 애들을 불렀다. 노트북만한 다이아몬드 원석을 가지고 놀던 26호와 아드하이가 내게 다가왔다.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모두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뭔데? 뭔데?」
「?」
나는 애들에게 이 배를 장악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설명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집을 점거한 불청객들을 정리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응. 나 어떻게 해야 할 지 알아.」
「나도」
“저는 해킹으로 초광속 항해를 못하도록 막겠습니다.”
모두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간단히 말해도 금방 이해했다. 그때 하늘의 어머니가 손을 들었다,
「잠깐만.」
[즈즈(뭐지?)]
「해적선에 있던 컨테이너. 떠나기 전에 그것도 챙겨야 해.」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아무래도 들고 가야겠지?’
우주요새에서 챙겨 온 식재료들은 모두에게 반응이 좋았다. 이 배에도 사람이 탄 이상 식량이 적재되어 있을 테지만 대부분 전투식량에 불과할 터.
[즈즈즈즈 즈즈즈즈(정리되면 챙기자고)]
「좋았…! 흠흠, 알았어.」
감정을 내비친 것이 부끄러운지 어색해 하는 하늘의 어머니. 그걸 끝으로 더이상 새로운 의견을 내놓는 녀석은 없었다.
‘기가크래커라.’
게임에서든, 이곳에서든 한 번도 얻지 못한 슈퍼무기다 보니 왠지 모르게 흥미가 생긴다.
물론 이 배의 주인 입장에서는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겠지만, 모두가 만족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튼 이걸로 이사할 새 둥지가 정해졌다.
성체가 되고 나서 얻은 첫 집은 기가크래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