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291화 (292/400)

Episode 291 - 이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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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별 사이를 자유롭게 뛰노는 시대가 되고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유전자를 원하는 대로 조작하고, 행성의 환경을 뒤바꾸고, 거대한 금속 구조물을 성계 단위로 이동시키는 시대.

이제 인간은 신의 기적을 손 위에서 재현할 수 있다.

그런데도 변하지도, 바꿀 수도 없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인간이란 생물이 지닌 한계’다.

죽음, 종말. 신의 기적을 다루지만 정작 신이 아니기에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그에 대한 두려움은 여러 형태로 구현된다.

우주의 심부에 도사리는 무한한 악의 존재에 관한 신화.

무인 행성에 착륙하고 다시 출발했는데 배의 인원이 늘었다는 이야기.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도착하고 난 뒤에 보니 배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소문.

아이러니하게도 우주시대가 되고도 괴담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상기시키고 원초적 두려움을 자극하는 형태로 변화했을 뿐.

OS-255 성계에 위치한 메가콥 우주요새의 구조함대팀장, 야마다도 과거에는 괴담을 자주 들었다.

한때는 그 역시 일개 승무원이었기에 못 들은 괴담이 없었다. 광활한 별의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이 술자리에서 할 수 있는 얘기라고는 대개 그런 것들뿐이니까.

그러나 오늘 이 순간만큼 무서운 이야기를 들었던 적은 없었다.

“기가크래커로부터 연락이 안 된다고?”

이제 막 잠이 들려는 찰나, 부하의 연락을 받은 야마다는 등골이 오싹하다는 표현을 실감했다.

「예. 정기연락 시간이 됐는데도 연락이 없습니다.」

“설마 완전 소실인건 아니겠지?”

「그건 아닙니다. 기가크래커의 에너지 반응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구조함대에는 기가크래커 고유의 에너지 흔적을 추적할 수 있는 장비가 마련되어 있다. 함선 자체가 아예 파괴되거나, 흔적이 생긴 지 오래 지난 경우가 아니라면 추적할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이군. 모두 깨우고, 당장 항해 준비해.”

「알겠습니다!」

부하와의 통신을 종료한 그는 전(全) 함대에 긴급 통신을 날렸다.

“모든 구조함대에 알린다. 기가크래커 14호로부터 신호 두절! 기가크래커 14호로부터 신호 두절!”

통신이 간 지 5분 후.

요새 밖 우주공간에 구조함대가 집결했다.

일반 함선에 문제가 생겼다면 이 정도로 빠르게 모이지 않았을 거다. 기가크래커와의 연락 두절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가크래커 에너지 반응은? 여전히 그대로인가?”

“예.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스타유니언 공작원들의 짓일지도 모르겠군.”

당연한 얘기지만 기가크래커가 파괴되는 것보다 다른 세력에게 강탈당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메가콥의 행성들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고, 제일 큰 위협은 바로 리버스 엔지니어링이다.

기가크래커의 제작 방법과 핵심 기술은 오직 세인트케이만이 알고 있다. 그게 유출됐다간 세인트케이는 엄청난 타격을 받을 터.

막대한 손해를 본 노블캐피탈이 그 분노를 어디에 풀 지는 뻔했다. 구조함대에 소속된 자들은 고용인이 되는 것도 사치라고 느낄 정도로 큰 벌을 받게 되리라.

“전 함대 초광속 항해 준비 완료했습니다.”

야마다의 명령에 집결한 함대 전체가 푸른색으로 빛났다. 항성이 빛나듯 검은 우주를 비추던 빛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몇 분 후, 한참 떨어진 전혀 다른 성계에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광속 엔진 덕분에 광속으로 이동해도 몇 개월 이상 걸리는 거리가 몇 분으로 단축된 것이었다.

“목표 지점 도착 완료.”

“낙오된 함선 없음.”

“피해 없음.”

“좋아. 홀로그램으로 기가크래커 상태 띄워.”

함대 전체의 보고가 오가는 동안, 상황실 중앙에는 성계 내부 상황을 전달하는 홀로그램이 출력되었다.

곧이어 함선의 외부 카메라로 기록한 기가크래커의 모습이 홀로그램에 반영되었다. 직경 2km구체 형태의 기가크래커의 모습과 현재 상태를 분석한 수치들이 옆에 떠올랐다.

“위치는 변화없…응?”

선원이 보고하다가 말고 말을 멈췄다.

그러나 야마다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홀로그램에 떠오르는 수치가 몹시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발산하는 에너지 수치가 급증하고 있잖아?’

마치 이온캐논을 작동시킬 때처럼. 그 사실을 깨달은 야마다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회, 회피! 당장 회피 기동!”

“예, 옙!”

다른 함선들도 이상을 눈치챘는지 급격히 진영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홀로그램에 표시된 수치들은 한계까지 올라가다 못해 붉은빛으로 빛났다.

그리고 그 수치들의 상승이 멈추자, 함선AI의 무미건조한 소리가 상황실에 울려 퍼졌다.

「전방으로부터 고에너지 반응 확인.」

“모두 아무거나 잡아!”

두 목소리가 교차한 순간, 엄청난 충격이 함선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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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서바이벌에서 슈퍼무기를 싫어하는 플레이어는 거의 없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대규모 함대를 일격에 쓸어 버리거나 행성을 불태워 정화시키는 등, 우리가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매체들에서 자주 봐 왔던 무기를 직접 사용해 볼 기회니까.

SF에 대한 로망 말고도 게임 내적으로 봐도 슈퍼무기의 성능은 나쁘지 않다. 일단 위력 하나는 절륜하기 때문에 상대의 방어 수단을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다.

슈퍼무기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그에 준하는 힘뿐. 랭커, 클랜, 세력 간의 전투에서 슈퍼무기의 유무는 큰 영향을 미친다.

실제 나도 슈퍼무기를 지닌 적들과 싸울 때 곤란을 겪은 적이 많다. 행성에 숨으려 해도 저쪽에서 슈퍼무기로 쏴버리면 끝이기 때문이다.

하나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슈퍼무기를 오랫동안 보유하는 플레이어는 드물다.

그 이유는 저 장점들과 맞닿아 있다.

전투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가져다주기에 누구 하나가 슈퍼무기를 손에 넣으려고 하면 주변에서 방해가 들어온다. 적이면 말할 것도 없고, 아군이라 해도 저 무기가 언제 자기들한테 향할지 모르므로 비밀리에 방해 공작을 펼친다.

그리고 슈퍼무기는 눈에 많이 띤다. 엄청난 위력을 지녔다고 해도 방어력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조금만 잘못 굴리면 적들의 포화를 맞아 잃어 버리기 십상이다.

그 외에 비싼 제작비와 유지비는 덤이고.

이처럼 현실적인 이유로 슈퍼무기를 장기간 보유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선망을 받는 것. 그것이 슈퍼무기다.

그 파멸적인 매력을 지닌 무기가 지금 내 손에서 움직이고 있다.

기가크래커의 핵심 무장인 초거대 이온캐논. 소행성, 왜행성과 같은 작은 별을 단번에 쪼개버릴 수 있는 위력의 무기가 작동한다.

구경(口徑)만 수백m에 달하는 함포에서 청록색의 빔이 발사된다. 그건 크리스털윙이 쏘는 입자광선과 흡사했으나 그 범위, 그 파괴력은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애초에 별을 부수는 힘을 생물과 비교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죽음이 우주를 채우는 암흑을 가르고 목표를 향해 날아간다.

그 끝에 있는 목표는 별이 아닌 배. 구조를 위해 나타난 구조함대들이다.

방금 이 성계에 도착한 적들은 우왕좌왕한다. 설마 기가크래커가 자기들을 노릴 줄은 몰랐다는 반응. 뒤늦게 산개 진형으로 변경하려 하지만 이미 이온캐논이 발사한 광선은 코앞이다.

빔과 함대들이 충돌한 순간, 강렬한 빛이 번뜩였다.

함대전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화려한 불꽃놀이는 없었다. 그건 파도가 모래성을 쓸고 지나가는 모습과 흡사했다. 전함, 구축함, 초계함 가릴 것 없이 수백에 달하는 함선들이 빔에 맞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게임에서는 내가 저 역할이었지.’

성체가 된다고 해도 슈퍼무기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은 극히 제한적이다. 유일 특성이라 해도 말이다. 에이펙스 중에서도 매우 강력한 놈들의 특성을 잔뜩 모아야 맞대응이 가능할 정도일까?

‘생각해 보면 제국모함과 싸울 때도 그랬지.’

제국모함의 코스믹 볼트를 막을 때도 성체, 괴수의 왕, 신의 회초리, 거기에 머리 3개로 쏜 사이킥 브레스까지 전부 동원한 뒤에야 겨우 이길 수 있었다.

사실 게임에서 그렇게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슈퍼무기가 작동하기 전, 끝장을 내곤 했기 때문이다. 만약 실패하면? 저 배들처럼 되는 거고.

‘끝났나.’

만개한 연꽃처럼 펼쳐진 기가크래커의 선체가 다시 접히고 있었다. 평소에는 구체 형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온캐논을 발사할 때는 무기 주변부의 외벽과 선체가 꽃봉오리 모양으로 펼쳐진다.

‘그 탓에 별명이 귤이었지.’

휴면 상태에 들어간 이온캐논과 원상태로 돌아오는 기가크래커.

나는 우주 공간에서 ‘암흑 장막’을 펼친 채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내 차례인가.’

살아남은 것은 움직임이 빠른 초계함들과 빠른 판단으로 회피 기동을 펼친 소수의 전함들 뿐.

저들이 무사히 돌아가면 곤란하다.

나는 장막을 활성화한 채 그들에게 날아갔다. 생존한 함선들은 내가 가까워지자 즉시 산개했다.

암흑 장막을 쓴 덕에 내 몸은 적의 감지 시스템을 엉망으로 만드는 물질로 감싸져 있다. 적들의 시선에서 지금의 나는 대규모 에너지 덩어리로 보일 터.

이온캐논에 연달아 새로운 공격 때문인지 적들은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놈들 사이에 파고든 나는 가까운 위치에 있는 초계함을 향해 오른쪽 꼬리를 휘둘렀다. 이제는 나보다 작은 크기가 된 초계함이 집게가 달린 꼬리에 맞고 두 쪽이 났다.

꼬리를 휘두르는 동안, 다른 신체 부위들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몸에 달린 파이프에서는 암흑 장막 대신 ‘위대한 감염체’ 특성으로 강화된 ‘그렘린 이끼’가 스모그 형태로 방출됐다.

기계를 무력화시키는 그렘린 이끼 구름이 구조함대 잔당들에게 들러붙었다. 연기에 닿은 배들은 불이 몇 번 깜빡거리다가 그대로 정지해 버렸다.

무력화된 먹잇감은 양옆에 달린 두 개의 머리들이 알아서 정리했다. 오른쪽 머리는 강화된 산성 브레스로 배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고, 왼쪽 머리는 심플하게 함선을 문 뒤 다른 배를 향해 집어던졌다.

전투용 팔들은 예리한 낫 형태, 아니면 손에 큼지막한 갈고리 손톱을 단 형태로 바꿔서 가까이 다가온 함선들을 후려쳤다. ‘가변형 생체병기’ 특성의 효과 덕분에 팔들이 수시로 모양을 바꾸며 적들을 농락했다.

초계함들의 수가 빠르게 줄어들자 적들도 자기들을 공격하는 존재가 뭔지 인식한 듯 보였다. 살아남은 전함들이 뒤로 빠지더니 주포를 작동시켜 내게 포화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전함들의 주포가 발사한 플라즈마 에너지가 내 몸을 강타했지만 큰 충격은 없었다. 아예 통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과 비교하면 사실상 피해가 없다고 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함포전을 하자고?’

놈들이 그걸 원하는 것 같으니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알아서 잘 싸우고 있던 양쪽 머리들이 움직임을 멈추더니 내 의지를 따라 전방으로 향했다.

내 전신에서는 용의 심장이 펌핑하는 막대한 에너지가 분수처럼 위로 용솟음쳤다. 전과 같았으면 머리 하나에 집중됐을 사이킥 파워가 지금은 세 방향으로 나눠서 흘러들어갔다. 그 강렬한 에너지를 전부 흡수한 괴물의 촉수들이 일제히 요동쳤다.

그리고 모인 에너지가 적정 수준에 도달했을 때, 내 촉수들이 불을 뿜었다.

원본을 압도한 지 한참 된 용의 숨결이 함선들을 덮친다. 아직 내 힘이 슈퍼무기에 미치지 못한다 해도 그들이 사이킥 브레스를 견디는 것은 별개의 문제. 두터운 외벽을 지닌 전함은 장갑채로 녹아버렸고, 크기가 작은 초계함은 아예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불의 심판이 끝난 뒤, 더 이상 움직이는 존재들은 없었다.

우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함선의 무덤들만 남았을 뿐.

‘이것까지 정리하고 돌아갈까.’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라색 화염을 토해냈다. 사이킥 브레스가 고철이 된 함선들까지 모두 불태웠다.

구조함대가 이곳에 왔다는 흔적까지 남김없이 지운 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애들이 새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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