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94 - 휴식(1)
하늘의 어머니가 이 세계에 온 것은 무려 15년 전.
그리고 사별한 남편 ‘대지의 아버지’를 처음 만난 시점은 10년 전이었다. 그녀가 대지의 아버지와 연을 맺은 이후에도 얼마간은 플레이어들과 교류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플레이어들 간의 끝없는 투쟁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상황. 그 관계는 얼마 가지 못했다. 어쩌면 그녀가 이 세계의 거주민들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이는 예정됐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플레이어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운둔하기 전, 그녀와 함께 다녔던 플레이어 한 명이 있었다.
그 존재가 바로 22위의 콜드블러드 플레이어다. 20위 안에 들지 않았기에 엔딩은 보지 못한 자다.
하늘의 어머니가 22위를 만난 시점은 10년 전, 그러니까 그녀가 대지의 아버지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만났다.
당시 그녀는 아직 미숙한 22위를 도울 것인지, 아니면 대지의 아버지와 함께 지낼 것인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 후에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연락을 끊었지만, 22위하고는 약 1년 정도 더 연락을 했었다. 어느 순간부터 22위가 연락하지 않은 바람에 거기서 관계가 끊어졌다고.
22위와 연락할 때 쓰던 장치는 그녀만이 아는 장소에 방치해놨다고 했다. 그 장치를 다시 활성화하기 위해 하늘의 어머니는 PH-101 행성에 있는 세인토피아02 대륙으로 돌아갔다.
신격화 상급에 이르면서 날개를 얻은 그녀는 나와 비슷하게 초광속 항해 능력을 얻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크기 또한 작으니 컬트들의 감시망을 피해 행성 내부에 진입하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떠나기 전, 그녀는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동안 나와 애들은 갤러곤 무리가 머무는 행성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아드하이가 ‘하얀 돌’이라 부르는 이곳은 한때 고르곤 스웜의 활동 영역에 포함되는 행성이었다.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고르곤 스웜은 함선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기에 이 성계 자체에 일부러 찾아오는 자는 없었다. 성계에 찾아오는 자들이 없으니 이런 행성이 존재하는지 아는 자들도 없다.
‘안다고 해서 쉽게 진입할 수 없겠지만.’
하얀 돌이라는 별명에서도 보이듯 행성의 지표 전체가 얼음으로 덮여 있다. 평균 온도가 아드하이의 고향보다 훨씬 낮아서 도저히 생물이 살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단, 두꺼운 얼음층을 뚫고 아래로 내려가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행성이 발산하는 지열로 인해 얼음층 아래에 생물이 살 수 있는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다. 바다라 불러도 좋을 규모의 호수도 있고, 얼음 행성에서 볼 수 있는 생물 중 일부도 서식했다.
지열이 발산되는 영역 주변에서 사이킥 파워도 같이 흘러나온 덕택에 아드하이 무리는 무사히 정착했다.
이 지하 세계가 갤러곤들의 새 왕국이다.
그리고 지금 그 왕국의 주인이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움직이는 중이다.
“그오오오오오오오!”
맘모스의 머리, 곰과 고릴라가 뒤섞인 몸을 가진 거대한 생물이 포효한다.
6m짜리 초대형 엄니 두 쌍이 번개와 같은 속도로 내 복부를 향해 날아들었다. 내 날개 팔과 전투용 팔이 재빨리 반응해서 놈의 엄니들을 붙잡았다.
나와 싸우고 있는 이 무식한 포식자는 매우 강한 힘, 육중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 놈은 자기 장점을 적극 활용, 엄니에 무게를 실어 나를 밀쳐내려고 했다. 그로 인해 내 다리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놈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내 힘이 놈보다 더 강하다는 것.
나는 엄니를 붙잡은 4개의 팔에 힘을 줬다. 팔들이 근육이 꿈틀거리며 크게 부풀었다.
이윽고 놈의 몸이 천천히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오오?”
엄니를 잡힌 채 몸이 들리자 놈이 당황해 한다. 이 지하 세계에 살면서 자기보다 강한 힘을 가진 적과 만난 적이 없었을 테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오오오!”
내 팔들이 엄니를 단단히 틀어쥐고 있기에 뒤로 빠져나갈 수 없다. 놈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대신 발달된 앞발을 크게 휘둘렀다.
곰의 앞다리를 닮은 저 앞발은 살아 움직이는 공성추와 같다. 그 무지막지한 무기가 막 내 날개 팔을 내려치려는 순간, 내 머리 양쪽에 있는 목 2개가 놈의 양팔을 휘감았다.
긴 목의 끝에 있는 두 개의 머리는 입을 크게 벌려 각각 놈의 어깨와 목덜미를 물었다.
“그오오오오오!”
「그르르르르」
짐승이 살점이 뜯겨지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울부짖는다. 2개의 입을 통해 덥수룩한 털 안쪽에 위치한 놈의 살점과 핏물이 스며들어온다.
그 달콤함에 취할 뻔했으나 나는 침착하게 다음 명령을 내렸다. 중앙의 머리에 있는 촉수들이 흔들리며 독특한 파장을 뿜어냈다.
[즈즈즈즈(지금이야)]
넓게 퍼져나간 파장이 우리 머리 위를 덮고 있는 얼음의 천장에 닿았다. 천장에 매달려 몸을 숨기고 있던 갤러곤들이 일제히 날개를 펼쳤다.
마르고 긴 체격을 지닌 화이트 갤러곤, 샤 벨마그의 브레스가 내가 붙들고 있는 짐승의 등을 가격했다. 보라색 열선이 놈의 등을 바짝 태웠지만, 상처는 크지 않았다.
이어서 녹색 비늘을 지닌 갤러곤들의 브레스가 여기저기서 쏟아지면서 놈을 공격했다. 몇 발은 내 팔에도 맞았지만 큰 고통은 없었다.
“그오오오! 그오오오오오오!”
하지만 큰 피해가 없었던 것은 놈도 마찬가지였다. 애매한 통증이 역으로 분노를 자극한 것 같았다.
나와 맞대고 있는 놈의 몸이 계속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놈의 어깨와 목덜미에 박아 넣은 이빨들이 서서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놈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가죽이 두꺼워진 탓에 이 이상 깨물고 있을 수 없었다.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놈의 덩치가 2배가 됐다. 이제 나와 눈을 마주할 정도로 거구가 된 놈이 나를 다시 밀치려고 힘을 줬다. 내 발이 또다시 한 발자국 뒤로 밀려났다.
‘덩치가 크길래 셀 거로 생각했는데 이건….’
놈은 내가 알던 에이펙스 생물보다 훨씬 강력했다. 덩치도, 힘도, 투지도 게임 속의 생물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전에 용의 둥지에서 잡았던 ‘아이스 호러’처럼 말이다.
‘사냥의 표상을 써야 하나?’
아직 사용하지 않은 카드를 꺼낼까 생각 중인데, 놈의 뒤편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섬광처럼 날아든 아드하이가 놈의 오른쪽 다리를 들이받았다.
‘레드아머’로 보호받는 뿔에 가속력이 더해지니 그 파괴력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내 꼬리만큼이나 두꺼운 놈의 다리가 그대로 걸레짝이 됐으니 말이다.
“그옥!”
털북숭이 포식자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나 놈의 눈에는 여전히 독기가 빠지지 않았다. 코끼리를 닮은 코가 길게 늘어나며 아드하이의 뒤를 노렸다.
코끝에 달린 예리한 이빨들이 레드 갤러곤의 매력적인 꼬리를 난도질하기 위해 날아든다. 이를 막기 위해 내 두 머리들이 놈의 긴 코를 붙잡았다.
“그오오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아드하이를 놓치자 놈은 크게 분노했다. 놈은 앞발 2개를 위로 번쩍 쳐들더니 땅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고 내 몸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 탓에 엄니를 잡고 있던 팔들에 힘이 빠졌고, 놈의 엄니는 아무런 방해 없이 내 흉부를 꿰뚫었다.
아니, 꿰뚫을 뻔했다.
“그우?”
만약 놈의 엄니가 분노할 때마다 커지는 몸에 맞춰 성장했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기에 놈의 엄니는 내 흉부 갑각의 일부를 부수는데 그쳤다.
한쪽으로 쏠린 자세를 고친 나는 팔들에 힘을 가득 실어 놈을 크게 밀쳤다. 서 있는 높이만 40m에 달하는 거대 괴수는 뒤로 크게 밀려났다.
놈과의 거리를 벌린 나는 ‘가변형 생체병기’를 사용했다.
바꿀 신체 부위는 머리. 내 머리의 갑각들이 아이스 호러의 머리와 유사한 형태로 변이되었다.
장점이라고는 무겁고, 단단하다는 것 말고는 없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3개의 생체 망치가 놈을 강하게 후려쳤다.
“그왁?!”
남은 다리와 복부, 머리를 얻어맞은 놈이 피를 세차게 토했다. 방향감각이 망가진 것인지 놈이 비틀거리다가 뒤로 자빠졌다.
「아드하이의 무리여!」「공격!」
뒤에서 아드하이의 사념파를 듣는 순간, 나는 급히 엎드렸다. 내 등 위로 수십 발의 사이킥 브레스가 날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 끝에 있는 것은 움직이지 못하는 먹이가 있다.
“그오오오오!”
「힘」「더」「더!」「더!」
아드하이의 독려가 효과가 있는지 보라색 브레스들의 굵기가 조금씩 굵어졌다. 사냥에 참여한 그린 갤러곤, 화이트 갤러곤, 그리고 아드하이까지 전력을 다해 용의 숨결을 쏟아 냈다.
그리고.
“그, 그오오….”
나와 갤러곤들을 애먹인 짐승은 처참한 몰골로 신음을 흘렸다.
놈의 이름은 기간테리움. 육상 전투에 강세를 보이는 에이펙스 생물이다.
놈은 각종 독이나 정신 지배, 신체 속박과 관련된 기술에 면역이고, 신체 능력도 굉장히 뛰어나다. 그뿐만 아니라 분노할 때마다 몸이 커지고, 힘, 방어력, 속도 모두 증가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상대하기가 적잖게 까다롭다.
‘특히 컬트들한테는 악명이 높지.’
놈의 움직임을 봉쇄할 수단이 없어서 근접전이 강제되는데 놈은 보다시피 근접전에 특화된 에이펙스다.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놈을 이길 수 없다.
원거리에서 사이킥 공격으로 잡으려 해도 놈의 가죽이 워낙 단단해서 이를 뚫기가 쉽지 않다. 원거리 공격은 놈을 죽이지 못하고 분노만 자극하니 역효과다.
이런 특징에서 보이듯 갤러곤 입장에서도 굉장히 까다로운 적이다.
실제로 나와 아드하이가 돌아오기 전, 갤러곤들은 저놈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고 했다. 함 오르트가 나서서 쫓아내려 했지만, 매번 죽이는데 실패했다.
‘그럴 수밖에.’
가뜩이나 까다로운 적인데, 내 앞에 있는 저 기간테리움은 규격 외의 존재였다.
내가 알기로 기간테리움의 크기는 8m에서 10m 사이. 분노한다고 쳐도 20m 이상 넘어가는 놈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저 괴물은 분노 전의 몸만 20m에 달한다. 엄니 길이도 3배 이상이고. 거기서 분노하면 나와 눈높이가 비슷해 질 정도로 거대해진다.
그걸 보면 확실히 함 오르트라고 해도 쉽게 이기기 어려운 상대다.
‘장소도 별로 안 좋고.’
여기는 얼음층 아래의 지하 공간이다 보니 갤러곤에게 불리한 환경이다. 비행하기도 어렵고, 블랙 갤러곤의 고유 능력인 ‘마엘스트롬’도 봉인되니까.
‘그런 괴물인데 어떻게든 이겼네.’
나는 기간테리움 주변에 몰려든 아드하이와 갤러곤들을 바라봤다.
이번 공략 작전은 내가 짜지 않고 아드하이가 짰다. 나는 그저 미끼 역할만 했을 뿐. 강적을 쓰러트린 존재는 내가 아니라 지하 왕국의 용들이다.
‘기특한 녀석.’
갤러곤들 사이에서 고개를 높게 들고 날개를 핀 녀석이 보인다. 어느새 홀로 작전을 짜서 동족들과 함께 강적을 사냥하는 녀석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든다.
그때 아드하이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 내 앞으로 날아왔다.
「큰어른」「나」「잘했어?」
[즈즈 즈즈즈즈(아주 훌륭했어)]
「응」「나」「별의 딸」「훌륭해」
녀석은 내 칭찬이 마음에 드는지 꼬리를 부지런히 살랑거렸다.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한 꼬리를 보니 손가락으로 콕 찔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큰어른」
[즈(응?)]
그때 녀석이 나를 불렀다.
「큰어른」「사냥」「공」「세웠어」「미끼」「매우」「중요해」
[즈즈 즈즈 즈즈 즈즈즈즈즈 즈즈즈즈즈(놈을 잡은 것은 어디까지나 너희들이야)]
「큰어른」「없으면」「동족」「다쳤어」「그러니까」「상」
녀석이 머리를 살짝 까딱거리자 기간테리움 주변에 있던 갤러곤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큰어른」「머리」「필요해」「양보할게」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머리를 나한테 준다고?)]
「응」
이번에는 녀석들을 위한 사냥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사냥의 표상도 안 쓰고 미끼 역할에만 전념했는데 녀석이 이렇게 나올 줄이야.
‘뭐, 준다고 하니까.’
수십 개의 보라색 눈들이 초롱초롱 빛을 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거부하기도 뭐했다. 나는 아드하이를 쓰다듬은 뒤 기간테리움에게 다가갔다.
“그….”
끈질긴 생명력이 지금은 오히려 독이 된 상황. 만신창이가 된 기간테리움은 숨을 헐떡이며 빨리 죽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중앙의 머리로 놈의 머리를 깨물었다. 턱에 힘이 들어가고 이빨이 가죽과 피부를 뚫고 두개골에 박혔다. 놈은 한차례 경련하다가 축 늘어졌다.
기간테리움을 죽인 나는 목에 힘을 줘서 물고 있던 머리를 뒤로 당겼다. 놈의 목이 덜덜 떨리다가 척추의 일부와 함께 뽑혔다.
다른 갤러곤들은 내 식사에 관심이 많은지 내 머리들과 입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럼.’
나는 갤러곤들의 시선을 받으며 뜨뜻한 김을 내는 머리를 꿀꺽 삼켰다. 척추와 살점 조각들은 양옆의 머리들이 받아먹었다.
‘어차피 특성은 뜨지 않….’
「포식 효과 발동!」
「그르?」
먹이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자마자 떠오르는 반투명 텍스트박스.
떨어지는 핏물을 핥아먹던 옆의 머리가 내가 느낀 감정을 여실히 표현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