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95 - 휴식(2)
‘흠.’
이번에는 아드하이의 사냥을 돕는데 주력했다. 그래서 사냥의 표상도 쓰지 않았고. 특성을 얻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예상외의 결과가 나왔다.
‘게다가….’
「‘타이런트로이드’ 유전자 정수 획득 성공.」
「‘기간테리움’의 생물 특성 중 ‘타이런트로이드’를 탈취.」
「‘타이런트로이드’를 적용하시겠습니까?」
그 수많은 특성 중에서도 이걸 얻게 될 줄이야.
에이펙스 생물을 포식해서 얻은 특성의 이름은 ‘타이런트로이드’.
얼핏 보면 육체 관련 특성이거나 내부기관 관련 특성처럼 보이지만, 이 특성은 환경적응 특성에 속한다.
설정상 기간테리움의 몸에는 제한된 상황에서도 효과적으로 에너지를 습득 및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기관이 존재한다. 타이런트로이드는 이 기관에서 분비되는 특수한 화학 물질이다. 이 물질 덕분에 놈은 어떠한 환경에서든 큰 제한이 없이 생존이 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물질이 놈의 전투 능력과 관련이 있다는 것. 놈이 분노할 때마다 덩치가 커지는 것은 모두 타이런트로이드 덕분이다.
‘이제 내가 사용할 특성도 그렇고.’
타이런트로이드는 ‘뼈 야수’나 ‘사냥의 표상’과 비슷하게 신체를 크게 바꾸는 부류의 특성이다. 다만 조건부에서만 발동한다는 점에서는 ‘레버넌트 기관’과 유사하다.
‘레버넌트 기관보다는 발동이 쉽지.’
타이런트로이드의 활성화 조건은 딱 하나다. 육체에 큰 부상을 입게 되면 자동으로 발동된다. 이 특성이 있으면 부상이 심각해질수록 근력과 에너지 출력이 크게 상승하고, 몸이 거대해진다.
단, 그 대가로 움직임이 굼벵이처럼 느려진다. 몸이 커져서 피격 면적이 넓어졌는데, 속도도 느려지니 꽤 치명적인 단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특성 하나만으로 한정했을 때의 얘기지만 말이야.’
거대화되면서 갑각이 단단해지는 뼈 야수, 아주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때만 조건부로 발동되는 레버넌트 기관 등과 연계하면 매우 강력하다. 에이모프식 죽창이라고 할까.
아쉬운 점이라면 이 콤보가 부상을 전제로 한다는 거다. 특성들이 발동된 시간 동안 적을 제압하지 못한다면 크게 불리해진다. 최소한 몸을 부상에서 빠르게 회복시키거나 저하된 속도 페널티를 제거할 수 있는 수단이 있어야 한다.
‘지금 내가 지닌 회복 수단은 둘.’
‘재생력’, ‘포식 거머리의 손’이다. 포식 거머리의 손은 적을 내가 직접 붙잡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고, 재생력은 회복 속도가 제한적이다. 재생력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여기는 게임이 아니라 현실. 죽으면 끝이다. 단점을 충분히 보완할 수 있기 전까지 이 콤보는 봉인이다.
‘뭐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전혀 기대도 안 한 선물을 받아서 그런지 기분이 좋다.
「왜」「안 움직임?」
「큰어른」「머리」「먹었을 때」「가끔」「저래」
「맛」「감동?」
「아마도」
‘아.’
여기저기서 들리는 사념파를 느낀 나는 반투명 텍스트박스를 해제했다.
어둠 속에서 자수정을 닮은 보라색 눈동자들이 빛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머리를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린 것 같았다.
[즈즈 즈즈즈(난 다 먹었어)]
내 말을 들은 아드하이는 레드아머를 사용한 날개 끝으로 기간테리움의 두 팔을 잘라냈다.
기간테리움의 몸은 고릴라와 곰을 섞은 것처럼 생겼기에 두 팔이 상당히 발달한 편이다. 그렇다 보니 잘린 팔만 해도 크기가 상당했다. 팔의 길이만 10m에 달했으니까.
큼지막한 먹이를 바닥 위에 놓은 아드하이는 동족들에게 사념파를 뿌렸다.
「큰어른」「보상」「끝」「우리도」「먹자」
사념파가 퍼지자마자 갤러곤들이 팔들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먼저 화이트 갤러곤들이 예리한 발톱으로 털과 가죽을 도려내고, 입가의 촉수를 안쪽에 박아 넣었다. 아드하이는 다른 갤러곤들이 먹기 쉽도록 가죽을 벗긴 뒤, 만찬에 참여했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그린 갤러곤들은 아드하이와 갤러곤들이 만든 상처에 촉수를 꽂아 피를 빨았다.
녹색, 백색, 각각 다른 비늘을 가진 갤러곤들이었으나 촉수 색깔만큼은 동일했다. 팔에 박힌 보라색의 생체 빨대들이 꿈틀거릴 때마다 팔의 크기가 실시간으로 줄어들었다.
이 자리에 아드하이가 데려온 갤러곤은 총 10마리. 화이트 갤러곤이 셋, 그린 갤러곤이 일곱이다. 아드하이까지 합쳐서 11마리의 갤러곤들이 맹렬히 피를 빨자 기간테리움의 팔 두 쪽은 금세 미라가 됐다.
「맛」「훌륭함」
「맛있음」
「부족함」「먹이」「더」「필요함」
짧은 식사를 마친 갤러곤들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어린 그린 갤러곤들은 기간테리움의 몸이 탐나는지 시선을 그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에 아드하이가 뒷발로 땅바닥을 세게 찼다. 날카로운 타격음이 울려 퍼지자 갤러곤들이 움찔했다.
「먹이」「둥지」「가져갈 거야」「먹는 거」「이제」「끝」
「위대한 아드하이」「말」「따름」
여왕의 서늘한 엄포에 그린 갤러곤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욕심내는 동족들에게 경고한 아드하이는 기간테리움의 멀쩡한 왼쪽 다리를 잘랐다.
「샤 벨마그」「이거」「반려」「넬 게르마」「줘」
「위대한 아드하이」「배려」「감사함」
깡마른 체구의 화이트 갤러곤, 샤 벨마그는 앞다리를 굽히며 아드하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드하이가 고개를 들고 도도하게 서 있는 동안 샤 벨마그는 여왕이 하사한 선물을 챙겼다.
‘그러고 보니 넬 게르마가 알을 품는 중이라고 했나?’
과거 용의 둥지에서 우리를 가장 많이 도와 줬던 화이트 갤러곤, 넬 게르마.
녀석은 우리가 오기 직전에 알을 낳았고, 지금은 둥지에서 알을 품고 있다.
원래 아드하이는 샤 벨마그 대신 함께 싸우며 호흡을 맞춘 넬 게르마를 사냥에 데려올 생각이었다. 하나 상황이 이러했기에 샤 벨마그가 아내를 대신해 사냥에 참여한 거였다.
‘갤러곤의 번식이라.’
갤러곤 매니아는 아니지만 꽤 흥미로운 주제다. 게임에서도 갤러곤이 어떻게 번식하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었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구현이 안 됐던 것일 수도 있겠어.’
대부분의 VR게임들이 그렇지만, 스페이스 서바이벌에도 성적인 부분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 플레이어들 간의 육체적 교류라든가, NPC가 제공하는 성적인 서비스 등등.
스페이스 서바이벌에는 NPC의 생태계 구현과 설정에 신경을 많이 쓰던 게임답게 야생 동물의 생식 활동이 구현되어 있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설정상 암수의 사이가 좋다거나, 모성애가 강해 양육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생물들의 경우, 생식 활동이 묘사되었다. 예를 들어 내가 용의 둥지에서 사냥했던 크리스털윙도 생식 활동이 구현된 생물종 중 하나였다.
다만 이런 디테일한 부분이 세간에서는 안 좋은 방향에서 화제가 되었고, 결국 심의에 영향을 미쳤다.
‘그놈의 선정성 때문에 심의를 못 뚫었지.’
국내에 정식 발매가 되지 않아서 나도 어쩔 수 없이 외국판을 구해서 즐겼으니까. VR기기 자체에서 제공되는 번역 기능에 의존하면서 말이다.
아무튼 갤러곤은 번식이 묘사될 법한 생물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았다. 직접 확인하기 위해 갤러곤 둥지에 잠입한 랭커도 있었지만, 결국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
「큰어른?」
[즈(응?)]
「둥지」「돌아가자」
잠깐 옛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아드하이의 사념파가 나를 깨웠다. 다른 갤러곤들은 날개를 펼친 채 돌아갈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일단 돌아갈까.’
나는 머리부터 팔다리까지 전부 잃은 기간테리움 시체를 들었다. 침식촉수로 시체를 몸에 단단히 고정한 나는 날개 팔을 펼쳤다. 내 몸집만큼이나 큰 날개를 펄럭이며 갤러곤들과 함께 위로 비상했다.
기간테리움이 은신처로 삼은 지하 동굴과 통로는 이 지하세계에서 상대적으로 협소한 장소였다. 나와 11마리의 갤러곤들이 동시에 날갯짓하면 좁게 느껴질 정도로 폭이 넓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동굴과 좁은 통로를 벗어나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앞서가던 11마리의 갤러곤을 따라 지하 통로에서 빠져나오자 시야가 한순간에 확 트였다. 거기에 있는 것은 공동이라는 표현보다는 지하 세계란 단어가 적절할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 있었다.
두터운 얼음층으로 이루어진 천장은 가히 두 번째 하늘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고, 그 아래에는 광활한 대지가 펼쳐졌다.
단순히 묘사가 아니라 실제로 얼음 천장을 보면 하늘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그 이유는 얼음층 바깥 부분에 깔린 미생물들 때문이다. 이끼를 닮은 이 생물들은 먹이를 섭취 후 소화할 때마다 몸에서 빛과 열을 낸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보면 밤하늘의 별처럼 보인다.
얼어붙은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빛 아래에서 갤러곤들이 비행하는 모습이라. 내가 살던 곳에서는 본 적도, 볼 수도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아래로 시선을 돌리면 지하 대지 위에 수m에서 수십m 사이의 식물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은 것이 보인다. 버섯과 무지개풀이 섞인 독특한 외형을 지닌 식물들 사이에 야생 동물들이 돌아다닌다.
우주의 용들과 함께하는 여정은 길지 않았다. 식물들의 숲을 지나니 이번에는 짙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협곡이 우리를 반겼다.
지열로 인해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저곳이 갤러곤들의 새 궁전이다.
협곡 안쪽에 들어가자 수많은 동굴들이 있었다. 그중 제일 큰 동굴에 들어가자 검은색 용 함 오르트가 우리를 반겼다.
「함 오르트」「위대한 아드하이」「사냥」「성공」「축하한다」
「응」
정중한 태도로 몸을 숙이는 함 오르트에게 아드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본 함 오르트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꽤 달라졌다. 비늘 위에 있던 흉터들이 모두 사라졌고, 몸도 약간 커졌다.
‘좋은 환경에서 잘 지내서 그런지 살이 약간 찐 것 같네.’
그렇다고 뚱뚱하다는 뜻은 아니다. 누가 아드하이의 어미 아니랄까 봐 특유의 고혹적인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흑요석 색깔의 비늘은 매끄럽게 빛났고, 4개의 다리와 길쭉한 몸통은 탄탄한 근육 덕택에 생기가 넘쳤다.
뿔만큼은 완전히 재생되지 않아 여전히 불균형한 상태였으나 유려한 몸매와 대조적으로 야성적인 느낌을 줘서 오히려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아드하이에게 인사한 함 오르트는 내게도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감사한다」
[즈즈 즈즈즈 즈즈(내가 한 일은 없어)]
「아드하이의 반려」「덕분에」「동족」「다치지 않았다」
「반려」「아냐」「아직」
「큰애기야, 잘 갔다 왔어?」
그때 동굴 안쪽에서 커다란 분홍색 생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블루 갤러곤들을 잔뜩 껴안은 그 존재는 26호였다.
「이번에는 안 다쳤네?」
[즈즈즈즈(당연하지)]
「잘했어!」
녀석은 내가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온 것이 기쁜지 몸을 밝게 빛냈다. 25m짜리 발광체 덕분에 어두운 동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뭐임?」
「신기함」
「또」「또」
26호에게 안겨서 사이킥 파워를 흡수하던 새끼들이 신기한지 앞발로 녀석의 몸을 툭툭 건드렸다.
나는 등에 맨 기간테리움의 시체를 함 오르트 앞에 내려놓았다.
[즈즈 즈으으으 즈즈즈(이거. 아드하이가 챙긴 것)]
「야수의 왕」「시체」「왜?」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하자 옆에 있던 아드하이가 대신 대답했다.
「어린 동족」「먹여」「성장」「양분」「필요해」
「위대한 아드하이」「자비」「감사한다」
아드하이가 동족들에게 먹이기 위해 가져 왔다고 하자 함 오르트는 꼬리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누가 봐도 자기 딸의 성장에 대견해하는 부모의 모습이었다.
[즈 즈즈 즈즈 즈즈(또 잡을 것이 있어?)]
「있다」「다만」「동족」「휴식」「필요하다」
[즈즈 즈즈즈즈(하긴 그렇겠네)]
어차피 이 행성에는 최소 일주일 이상 머물러야 하는 상황. 굳이 급하게 굴 필요는 없겠지.
사냥이 끝났으니 잠시 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