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96 - 휴식(3)
기간테리움을 사냥한 다음날, 나는 홀로 둥지를 나섰다.
함 오르트가 말하길, 다른 사냥에서는 딱히 내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아드하이의 실력이라면 동족들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만한 수준이라고.
아드하이는 무리를 이끌고 사냥을 나섰고, 26호는 어린 새끼들과 노느라 바쁘다.
게임에서는 딱히 묘사되지 않아서 몰랐는데 블루 갤러곤들은 꽤 호기심이 많았다. 에너지를 섭취할 때와 잘 때를 빼고는 새로운 관심사를 찾아 계속 돌아다녔다. 협곡 안쪽의 동굴에서만 돌아다니면 괜찮겠지만, 몇몇이 밖으로 나오려고 해서 문제였다.
협곡 사이에 지열로 인해 끓어오르는 산성의 강이 흐르고 있다. 화이트나 그린 갤러곤이라면 모를까, 블루 갤러곤들은 비늘이 약하므로 물에 빠지면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다.
그 탓에 육아를 담당하는 갤러곤들이 장난기 많은 새끼들을 돌보느라 고생하던 중, 26호가 온 덕분에 한시름 놨다고 한다.
녀석은 새로 얻은 변이촉수를 활용해서 블루 갤러곤들의 호기심을 채워줬다. 수십 개의 촉수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의 장난감으로 변하니 어린 갤러곤들도 만족할 수밖에.
‘덤으로 사이킥 파워 공급도 되고.’
아드하이, 26호 둘 다 바쁘기에 오늘은 나 혼자 PS-111에게 가 보려고 한다.
협곡에서 빠져나온 나는 어제 왔던 곳과 반대 방향을 향해 날아갔다. 아래에 수십m 크기의 느타리버섯을 닮은 식물들이 보였다.
날개 팔의 위치를 조정해 고도를 낮춘 나는 전투용 팔로 기묘한 외형의 식물 끝을 뜯어냈다. 그리고 뭉개진 덩어리를 중앙의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흠.’
생긴 것은 버섯을 닮았지만 맛은 전혀 다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아몬드우유와 두유가 섞인 과일을 먹는 느낌이다. 맛 자체는 나쁘지 않으나 지나치게 물기가 많아서 식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도 영양은 풍부해.’
갤러곤들이 새끼들에게 사이킥 파워 말고도 이 식물을 추가로 먹이는 것을 봤는데, 왜 그런지 알겠다.
이곳은 녀석들이 머물던 곳과 환경이 많이 달라서 새끼들을 제대로 기르는 것이 쉽지 않다. 다행히 영양이 풍부한 먹이가 주변에 많으니 성장에 어려움을 겪는 새끼는 없을 것 같다.
‘녀석들이 이 맛을 좋아하면 좋겠네.’
아몬드우유 맛이 나는 느타리버섯을 맛본 나는 주변에 또 다른 외형의 식물들도 전투용 팔과 다리를 이용해 한 움큼씩 뜯어냈다. 양쪽에 달린 두 머리에게도 맛을 보여주며 느긋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천천히 이동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날개 피막과 갑각에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아래쪽을 보면 살아 있는 식물이 점점 줄어들었고, 얼음 천장에는 나 이상으로 거대한 고드름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이 주변에는 다른 지역과 달리 얼음층이 얇다. 그 이유는 저 멀리 보이는 인공구조물과 관련이 있다.
생명 하나 없는 얼어붙은 대지에 부서진 탑 하나가 솟아 있다.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진 저 구조물의 정체는 전에 피라 일레븐을 해치우고 손에 넣은 스크리머 지원함이다. 고르곤 스웜과 싸운 뒤 이 행성에 불시착하면서 저렇게 된 거다. 후미 부분은 완전히 부서졌고, 외벽 곳곳에 수리 불가능할 정도로 큰 구멍들이 보인다.
함선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지원함은 오랜만에 찾아온 주인을 맞이해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뻥 뚫린 후미 부분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니 그나마 손상되지 않은 전등들이 깜빡였다. 그 모습이 마치 내가 들어온 것을 환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녀석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
고르곤 스웜과의 싸움 직후, PS-111은 이 부서진 지원함을 일종의 통신 중계기로 개조했다. 추후에 우리가 새 함선이나 기계 구조물을 손에 얻었을 때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말이다.
결과적으로 녀석의 판단은 옳았다. 행성에 착륙이 불가능한 기가크래커는 원격 조종에 의해 행성 궤도에 머물고 있으니까. 안 그랬다면 녀석은 기가크래커를 관리하기 위해 우주에 남아 있어야 했을 거다.
나는 날개 팔을 접고 몸을 낮춘 뒤, 기울어진 구조물 내부를 기어갔다. 상황실에 있을 것이라 생각해 쭉 내려가는데, 전등 빛이 도중에 끊겼다.
‘상황실이 아니야?’
아래쪽 통로는 깜깜하기만 했다. 나는 불이 꺼지기 직전에 위치한 장소의 안내판을 확인했다.
‘생산칸이라.’
그러고 보니 내가 있는 이곳은 유전자 샘플들과 냉동 컨테이너들이 있던 보관소 근처다. 추측컨대 저곳은 보관소에 저장된 재료들을 활용해 스크리머를 만드는 칸이리라.
‘또 몸을 개조하려 그러나?’
이 배에는 더 이상 남은 유전자 샘플이 없다.
‘일단 가 볼까.’
조금 더 기어 내려간 나는 반쯤 열려 있는 철문을 날개 팔로 잡아서 열었다. 우수수 떨어지는 얼음 조각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불안전하게 깜빡이는 전등이 나를 반겼다.
생산칸 내부의 분위기는 매우 음산했다.
천장과 벽은 합판이 모조리 벗겨져서 철골이나 파이프가 그대로 노출되었고, 바닥에는 얼어붙은 전선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그 기괴한 공간 위에서는 어딘가 어설픈 형태로 복구된 생산 설비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강철들이 맞대며 만들어 내는 소음, 파이프에 연결된 접합부에서 튀는 스파크 등이 이 장소를 한층 더 으스스하게 만들었다.
마치 미친 과학자의 실험실 같은 공간 한가운데, 녀석이 있었다.
거미, 전갈을 닮은 체형, 꼬리를 제외하고 7m에 달하는 크기에 단단한 금속 갑각으로 덮인 육신은 적지 않은 위압감을 내뿜었다.
게다가 몸으로부터 뻗어 나온 8개의 다리. 그 끝에는 각양각색의 무기들이 달려 있었다.
어떤 손은 인간의 손에 손가락만 갈고리로 대체한 것처럼 생겼고, 어떤 팔에는 손대신 마체테를 닮은 길쭉한 칼날이 달려 있었다. 모든 팔에는 수십cm에 달하는 가시들이 마구 튀어나와 있었다.
오로지 생물을 자르고, 찢고, 부수는 것에 특화된 것처럼 보이는 몸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얼굴만큼은 전혀 달랐다.
커다란 몸 위에 달린 머리는 크롬색으로 창백히 빛나는 여성의 얼굴이었다. 머리카락처럼 축 늘어져 있는 케이블들과 새빨간 눈, 턱 아래 4개의 케이블가닥이 약간 이질적이긴 하나 충분히 매력적인 외모다.
그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180도 돌아가며 나를 향했다.
“오셨습니까?”
목과 등에 케이블을 주렁주렁 연결한 PS-111이 나를 보고 눈인사를 했다.
[즈즈 즈즈즈 즈즈즈즈(개조 중인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실험을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즈즈(실험?)]
나는 바닥에 깔린 전선과 케이블을 밟지 않도록 주의하며 녀석 근처로 다가갔다. 그 앞에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존재가 놓여 있었다.
‘이건?’
“원격 조종용 모델입니다. 기가크래커에서 구한 재료들과 이 주변에 서식하는 토착 생물들을 베이스로 만들었습니다.”
내 의문을 간파한 녀석이 알아서 대답했다. 몸을 개조하기 위해 이곳에 온 줄 알았는데, 내가 틀렸다. 녀석은 선내 컴퓨터에 실린 스크리머 제작 도면을 토대로 스크리머의 육체를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이거….’
내가 마주했던 스크리머들과는 많이 다르게 생겼다. 오히려 초창기의 PS-111과 비슷한 느낌이다. 얼굴과 신체 일부만 만들어져서 그렇지, 전부 완성되면 녀석과 매우 비슷할 것 같다.
[즈즈즈즈즈즈즈(원격 조종용 모델?)]
“예. 제가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육신이 있다면 지금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질 겁니다.”
말을 마친 녀석은 스크리머 육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기와 똑같이 생긴 얼굴에 입맞춤을 할 것처럼 머리를 가까이 한 PS-111. 턱 아래의 케이블이 스크리머 육체의 케이블을 향해 스스로 움직였다.
녀석의 케이블이 스크리머 육체의 케이블에 연결되자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스크리머 육체가 전기충격기를 맞은 것처럼 파르르 떨었다.
PS-111이 머리를 때자, 스크리머 육체가 눈을 떴다. 눈 역할을 하는 붉은색 카메라 렌즈가 몇 번 깜빡이더니 나를 향했다.
“조, 조율, 완, 료, 어, 어떻, 습니까?”
“조율 완료. 어떻습니까?”
[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즈즈즈(이걸 이렇게 빨리 만들었다고?)]
“제 몸 구조를 역설계 및 제 세포 조직을 복제한 덕분입니다. 적절한 설비와 시간만 있으면 여기서 완성도를 더 높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겸손하게 말하는 녀석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스크리머 개발 자체는 게임에서도 몇 주 이상 걸리는 장기간 걸리는 프로젝트다. 여기는 현실이니까 몇 개월, 아니 몇 년은 족히 걸릴 거다.
그런 스크리머를 미완성 복제품이라고 해도 안 좋은 환경에서 만들어 낸 녀석이 대단할 따름이었다.
[즈즈즈 즈즈 즈 즈즈즈 즈즈(자아가 있는 것 같지는 않네)]
“예. 독립적인 작전 수행 능력은 불필요하기에 독자적 사고 능력은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제가 보낸 전기 신호로만 작동합니다.”
“도, 독립, 작전, 수, 행, 불필요, 불필요.”
[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즈즈(원격 조종용 모델이라 그렇구나)]
보아하니 녀석의 통제를 받을 때만 움직이는 단말기에 가까운 스크리머 같다. 본체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녀석의 정신과 동기화됐을 때만 기능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아직은 스크리머라 부르기 애매한 상태이긴 하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프로토타입. 시간이 지나면 PS-111에 준하는 성능을 지닌 스크리머들이 많이 생길지도 모른다.
[즈즈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즈(대단하네. 그럼 이걸로 완성이야?)]
“완성까지는 시간이 더 걸립니다.”
“와, 완성까, 지는? 시, 시간, 더, 걸립, 걸립, 걸립니다.”
[즈즈 즈즈즈(역시 훌륭해)]
“아닙니다.”
“아, 아닙, 맞, 맞습니다! 치, 칭찬, 감사! 너, 너무 좋….”
“음성 동기화 모듈에 오류 확인. 더 조율해야 합니다.”
녀석은 갑자기 폭주하는 복제품을 향해 다시 조율에 들어갔다. 생산칸 곳곳에 있는 기계 팔이 주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며 ‘원격용 조종 모델’의 몸을 손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우주괴물 타입 2단계 보상인 ‘이중나선의 모노리스’.
우호적인 생물에게 유일 특성을 제외한 일반 특성을 최대 2개까지 이식할 수 있는 특전이다.
특전을 받고 지금까지 나는 이 특전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 실험하지 못했다.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몰라서 그렇다.
하지만 녀석이 만든 스크리머라면?
적절한 실험 대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쁘지 않아.’
PS-111이 디자인하고 관리하는 스크리머이니까 내가 부여한 특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거다. 설령 부작용이 생겨도 폐기하면 그만이니 리스크도 적다.
‘특성 하나를 날리는 것은 아깝지만.’
그렇다고 다른 애들이 피해를 보는 것보다는 낫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PS-111에게 말했다.
한 가지 실험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