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99 - 잠입(2)
‘아슬아슬했어.’
하마터면 걸릴 뻔했다.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진 덕분에 전함에 올라타는데 성공했다.
게임에서도 베르잔02를 치기 위해 몰래 잠입한 적이 있는데, 이 정도로 꼼꼼하게 수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탐지 시스템도 업그레이드됐어.’
놈들은 온갖 종류의 탐지 장비와 사이킥 파워 기술을 써서 ‘암흑 장막’을 뚫으려 했다. 만약 내가 성체 상태로 계속 있었으면 걸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암흑 장막이 적의 탐지망을 교란하는 동안, 나는 몸을 전혀 다른 형태로 바꾸는 특성, ‘유기적 진화’를 사용했다. 몸을 5m 이하로 줄여주고, 은신 효과를 제공하는 ‘영리한 약자’로 말이다.
‘성체가 되고 영리한 약자로 변한 건 처음인가?’
큼지막한 군함의 외벽에 매달린 채 몸 상태를 점검했다.
이전에 영리한 약자로 변신했을 때는 체형이 켄타우로스와 비슷했다. 성체가 된 이후 변신한 지금도 대략적인 형태는 유사했다. 전투용 팔 2개와 가슴쪽 작은 팔을 제외한 나머지 팔들은 다리가 됐고, 전신이 덥수룩한 털로 덮였다.
차이점이라면 일단 머리와 목. 변신하기 전까지만 해도 길게 뻗은 목들이 크게 줄어들었다. 특히 양옆에 달린 2개의 머리는 어깨 부분에 바짝 붙어서 목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머리들의 형태는 공통적으로 뒷머리 갑각 부분이 크게 줄어들었다. 머리갑각만 없어지고 턱 아래의 보조기관과 엄니, 뿔 등은 그대로 남았다. 목과 뒷머리에 달린 괴물의 촉수는 털가죽 사이에 섞여서 묶은 머리마냥 치렁치렁 흘러내렸다.
머리 외에 달라진 부분이라면 꼬리다.
머리와 마찬가지로 2개인 것은 그대로였으나 굵기도 얇아지고 길이도 짧아졌다. 왼쪽 꼬리에 달린 생체 대포도 모습을 감췄고, 뱀의 꼬리 형태로 바뀌었다. 오른쪽의 집게 꼬리는 크기가 줄어든 형태로 남아 있었다.
‘일단 실드 안쪽으로 들어왔으니….’
나는 실드를 뚫을 때 썼던 뿔의 형태를 원래대로 돌렸다. 갤러곤이 지닌 뿔을 닮아 뾰족하게 솟아 있던 머리의 뿔이 구불구불하고 투박한 형태로 변화했다. 신체 부위를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가변형 생체병기’의 효과였다.
‘갤러곤의 뿔은 사이킥 실드를 무효화시키니까.’
덕분에 작아진 몸으로도 실드를 쉽게 뚫었다.
‘변신했는데 뿔이 없어졌으면 진짜 곤란했을 거야.’
영리한 약자 상태에서 사용할 수 없는 유일 특성은 ‘악몽의 지평선’, ‘복잡화 분광체’, ‘검은 탐식자 대포’, ‘메두사 기관’이다. 이것 외에도 신체 중 날개 같은 부위가 사라진 탓에 초광속 항해 관련 특성들도 금제가 걸렸다.
가변형 생체병기도 마찬가지다. 머리갑각이 크게 줄어들고, 날개도 없어졌기에 아이스 호러의 머리 갑각, 갤러곤의 날개 등으로 바꿀 수 없다.
‘바꿀 수 없는 부위가 생겼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원래대로 돌아온 뿔을 확인하고 있는데, 내 다리 아래에서 하늘의 어머니가 조용히 고개를 뺐다.
「실드가 복구될 때 그 사이에 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즈즈즈 즈즈즈(그대로 잘리지)]
「넌 몸이 잘리고도 살지 모르지만, 나는 그걸로 끝장이거든?」
그리폰 수인 형태를 취한 그녀는 함대의 탐지 시스템을 피하기 위해 내 4개의 다리들 사이에 숨어서 들어왔다.
[즈즈 즈즈 즈즈(운이 좋긴 했지)]
「운? 아까는 계산했다며?」
[즈즈 즈즈즈즈 즈즈 즈즈 즈즈즈즈(말이 그렇다는 거지. 슬슬 움직이자고)]
「어휴.」
매혹적인 호박색 눈으로 나를 흘겨보던 그녀는 다시 내 몸 아래쪽으로 기어들아갔다.
그렇게 우리는 호흡을 맞춘 채 외벽에 바짝 붙어서 이동했다.
영리한 약자의 특전인 ‘미지생물의 털가죽’의 효과는 전신에 난 긴 털을 통해 은신 효과를 제공하는 것.
그녀에게는 은신 기술이 없기에 내가 그녀를 덮어 보호하며 이동해야 했다. 그녀가 길게 늘어진 털 밖으로 나가면 함선의 외부 카메라에 걸리므로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즈즈즈즈 즈즈(답답하지 않아?)]
「괜찮아. 너야말로 안 불편해?」
[즈즈(딱히)]
한동안 그녀는 수인형으로 움직일 예정이다. 부족해진 전투력을 보충하기 위해 필요한 장비들을 들고 왔다. 그녀가 등에 멘 배낭 속에는 제사장의 황금창과 MPS-05가 들어 있다.
덕분에 짧게 접힌 단창이 앞다리 안쪽을 쿡쿡 찔렀으나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검은 하늘과 아이보리색 대지 사이에서 나와 그녀가 함께 걷는다.
컬트 함선들만의 고유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화려한 장식과 아름다운 색깔이다. 우리가 올라탄 배에도 일반적인 컬트 함선의 특징이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문실버 합금으로 제작된 선체는 아이보리색으로 선명히 빛났고, 표면에는 기하학적 문양이 가득했다.
저 문양은 단순히 치장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다. 겉만 그럴 뿐 장식 내부를 까보면 기계 부품들이 가득할 거다. 컬트 함선의 장식들은 실드 같은 함선의 사이킥 파워 능력을 증폭시키기 위해 설치한 일종의 기능성 장치다.
‘외부 카메라도 포함해서 말이야.’
복잡한 문양으로 위장된 렌즈들을 피해 나는 배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를 계속 찾았다.
‘이쯤에 있을 텐데.’
몸을 낮춰서 걷던 도중 보조기관이 미세하게 돌출된 부분을 발견했다.
‘찾았다.’
겉으로만 봐서는 다른 외벽과 다르지 않았으나 그 안쪽에서 빈 공간이 감지됐다. 소형 함선을 상대할 때 필요한 대공용 함포가 배치된 공간이다.
‘일단 여기로 들어가자.’
나는 오른팔을 헬사이드 호넷의 팔로 변형시켰다. 팔의 관절이 뒤틀리고, 4개의 손가락이 구겨지듯 갑각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어서 손바닥이 있던 자리에서 거대한 낫을 닮은 뼈가 튀어나왔다.
무시무시한 예리도를 자랑하는 헬사이드 호넷의 낫이 지금 내 손에 있다. 그리고 낫 끝을 돌출된 부분 안쪽에 박아 넣었다.
대공용 함포를 덮은 합판이 작은 스파크를 튀며 틈을 보인다. 나는 앞다리와 왼팔을 그 틈에 집어넣어 크게 벌렸다.
나는 힘들어도 하늘의 어머니가 들어가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그녀는 내 뜻을 읽고 재빨리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를 들여보낸 뒤, 나도 합판을 강제로 벌려서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손을 놓자마자 합판은 자동으로 닫혔다.
배 안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본 것은 내 몸만한 크기의 함포였다. 그다음 보인 것이 포신 너머에 보이는 얼빠진 컬트 사수의 얼굴이었다.
그는 멍하니 나와 하늘의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컵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휴식차 함포실 밖으로 나갔다 막 들어온 것 같았다.
“저…!”
잔뜩 확대된 그의 눈에 날카로운 감정이 돌아오고 그의 몸이 움직임을 재개한다.
컬트의 손에서 음료수가 담긴 컵이 떨어진다. 그의 손이 컵 대신 다른 것을 붙잡기 위해 위로 올라간다. 산양 뿔에 걸고 있던 헤드폰형 통신기를 귀에 끼려는 거다.
그때 하늘의 어머니가 벽력과 같은 속도로 제사장의 황금창을 내질렀다. 황금색 단창이 그의 목을 꿰뚫었고,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허!”
그의 고통은 길지 않았다. 나는 낫이 달린 오른팔로 그를 참수하고, 머리를 들었다. 뿔에 걸린 통신기를 분리하고 남은 머리는 그대로 삼켰다.
「15번 함포. 무슨 일이지?」
나는 소리가 작게 흘러나오는 통신기에 대고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보호벽이 오작동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오작동?」
“실드가 손상되면서 들어온 운석에 부딪쳤습니다.”
「그렇군. 일단 지식관리자에게 보고하게.」
“알겠습니다.”
대충 대화를 마무리한 나는 통신기를 종료했다.
옆에 있던 하늘의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들어올 때 사수와 마주칠 줄이야.」
“그러니까.”
나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목 없는 시체를 먹기 시작했다.
머리가 셋이라 그런지 손에 들린 먹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컬트 사수가 있었던 자리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 뭐지, 의태기관이라 했나? 그건 언제 봐도 섬뜩하단 말이야.」
“이게 얼마나 유용한데.”
「…내가 말을 말지. 아무튼 도착했으니까, 받아.」
“고마워.”
그녀는 배낭에서 인간 얼굴의 2배 정도 되는 크기의 미니 스크리머를 꺼냈다. MPS-05라 명명한 녀석은 몸에는 스크리머 지원선에서 분리한 성간 통신 장치들이 들어 있다.
‘그래서 다른 애들에 비해 덩치가 약간 크지.’
다만, 이 작은 몸에 통신기를 완벽하게 이식하는 것은 아무리 녀석이라 해도 불가능했다. 수십, 수백 개의 성계 건너편에 있는 기가크래커까지 신호를 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 애들은 기가크래커가 아니라 아우르 성계와 인접한 성계의 어느 소행성에 숨어 있다. 그 정도 거리라면 미니 스크리머와 통신이 가능하다고 녀석이 계산했기 때문이다.
나는 팔을 원래대로 돌린 뒤, 미니 스크리머를 건네받았다.
동화 속에 등장하는 공주처럼 눈을 감고 있는 녀석. 반응이 전혀 없는 이유는 휴면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성간 통신 기능을 이식한 덕분에 MPS-05는 먼 곳에 위치한 본체의 명령을 받아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함선 내부에서 그런 짓을 하면 녀석의 몸에서 발생하는 전파로 인해 적들에게 걸릴 가능성이 높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나는 MPS-05에게 두 가지 특성을 이식했다.
‘신경 접합과 파장 모방.’
환경적응 특성인 ‘파장 모방’은 내가 원래 지니고 있었고, ‘신경 접합’은 갤러곤의 지하 왕국을 들쑤시면서 다시 획득한 내부기관 특성이다. 이 두 특성이 없었다면 녀석을 데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으리라.
나는 PS-111이 미리 말해 준 방법대로 행동했다.
‘먼저 회로를 연결하고 전력을 공급.’
대공용 함포 앞에 있는 의자를 뜯어내자 합판 아래에 깔끔히 정리된 케이블들이 보였다. 가슴의 작은 팔로 그걸 일부 분리해서 MPS-05 뒤통수에 있는 포트와 연결했다.
‘그 다음은….’
내가 작업하는 동안, 하늘의 어머니는 다른 누가 근처에 오는지 감시했다.
녀석의 몸에 케이블, 기계 장치들을 잔뜩 연결한 나는 녀석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인간과 달리 건조한 입 안쪽에 있는 수동 스위치를 누르자 MPS-05가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된 거야?」
“좀 기다려야 한다고 했어.”
녀석과 나는 MPS-05에 에너지가 공급되면 자동으로 신경 접합이 발동되도록 설정해 놨다. 녀석이 몸을 떠는 이유는 몸 안에서 함선 설비에 맞춰 체내가 조율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파장 모방도 준비하겠지.’
함선에서 발생하는 여러 종류의 신호와 전파들을 분석 및 모방해서 외부와 연락해도 걸리지 않게 만드는 거다. 기계위원회에서 직접 모든 신호를 다 분석하는 것이 아닌 이상, 파장을 모방한 녀석의 신호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 특성이 있는 한 녀석이 걸릴 일은 없어.’
10분쯤 기다리자 녀석이 눈을 떴다. 붉은색 카메라 렌즈를 단 눈이 몇 번 깜빡이고 나와 하늘의 어머니 모습을 담았다.
“연동. 확인.”
“성공이네.”
「거참, 이게 되네?」
“특별한 녀석이니까.”
“특별! 특별!”
이걸로 베르잔02 잠입 작전의 사전 준비가 끝났다.
이제 남은 일은 배에 저장된 정보들을 뒤져서 베르잔02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는 배를 확인하는 거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요소는 둘.
‘컴퓨터 해킹, 그리고….'
지식관리자. 그가 필요하다.
컬트에만 존재하는 직책인 지식관리자는 살아 있는 컴퓨터이자 지식의 보고다. 특히 성계를 감시하는 함선에 탑승한 지식관리자라면 베르잔02의 방위 체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을 터.
‘거기다가 행성 내부 사정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겠지.'
무엇이 약점인지, 내가 우려해야 할 적이나 요소는 무엇인지, 게임과 달라진 점이 있는지.
모두 행성 공략에 반드시 필요한 정보들이다. 당장은 22위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지만, 공략에 관한 부분을 미리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컴퓨터 부분은 네게 맡길게. 잘 부탁해.”
“맡겨. 가능.”
나와 하늘의 어머니가 노려야 할 다음 목표는 함선에 탑승한 지식관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