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300 - 잠입(3)
-
컬트 사회에서 지식관리자는 상당히 높은 위상을 지닌 직책이다.
지식관리자의 역할은 함장을 보좌해서 배가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도록 돕는 것.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들은 광범위한 영역에 걸친 지식들을 습득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식관리자들과 그 지식을 교류할 수 있는 사이킥 기술도 익혔다.
강한 사이킥 파워 능력을 갖춘 컬트지만, 지식관리자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신성한 업무를 수행할 영광을 얻을 수 있다.
그것 때문에 지식관리자는 그 중요성과 별개로 매우 명예로운 지위다. 직급 자체는 함장이나 전사단장보다 낮지만 위상 부분에서는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아우르 성계 감시청 소속 지식관리자 차라스 또한 함선의 승무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녀 덕분에 함선이 위험에서 벗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승무원들의 인식과 달리 차라스는 자신의 직업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녀에게 지식관리자는 긴 인생 중 거쳐 가는 관문 중 하나였다.
그녀의 최종 목표는 제국의회의 의원이 되는 것.
파벌이라는 뒷배도 없고, 평범한 염소뿔만 가진 그녀가 의원이 될 수 있는 방법은 그 길뿐이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감시청 정예함대에 소속된 배에 탑승한 이후, 그녀는 여러 번 공을 세웠다. 그 덕분인지 몇 달 전 베르잔02의 저명한 파벌 중 하나, 섭리파에서 제의가 들어왔다.
혹시 제국의 미래에 관심이 있다면 자기들과 뜻을 같이 하지 않겠냐고.
‘섭리파면 나쁘지 않은 시작이야.’
섭리파의 수장 제이슨이 ‘사이길08의 참사’의 책임을 지고 실각된 이후, 섭리파는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 의회에서 아웃스페이서의 대침공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시작해 섭리파가 다시 힘을 얻었다.
섭리를 섬기고 제국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는 강한 무력을 적극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 섭리파의 핵심 이념이다. 군축을 주장하는 혁신파와 대립되는 그들은 제국이 불안정할수록 힘을 얻는다.
차라스가 봤을 때 섭리파의 미래는 꽤 유망해 보였다. 실제로 지식관리자 업무를 수행하며 모은 정보들을 보면 제국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가 폭풍전야 상태였다.
메가콥 우주도시의 파멸, 스타유니언의 무력 도발, 또 얼마 전에 발생한 ‘케샤 아르마’의 추락 사건까지. 짧은 시간 동안 전례 없는 일이 마구 터지고 있다.
요점은 우주가 혼란스러워지면 무력을 이용한 섭리의 실현을 주장하는 섭리파가 힘을 얻게 된다는 것. 한동안은 섭리파의 강세가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유의미한 정치 경력이 필요한 신인인 내게는 이득이지.’
그녀는 잠시간 장미빛 미래에 취했다가, 다시 업무를 개시했다.
현재 그녀가 탑승한 함선은 정체불명의 자기장이 발생한 지점에서 대기 중이었다. 만약 또다시 이상 현상이 발생하면 이를 바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배가 받은 임무와 별개로 감시청에서는 그녀에게 다른 임무를 내렸다. 그녀가 보낸 ‘세 머리의 악마’와의 연관성에 대한 내용을 검토 중이니 계속 정보들을 정리해서 전송하라고 말이다.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하고 나서야 그녀의 업무는 끝났다. 정리된 정보도 지식관리자만 배울 수 있는 전송술로 감시청에 보고했고.
‘나가서 뭐라도 마실까.’
과다한 사이킥 파워 사용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지끈 울렸다. 이럴 때는 베르잔02식 칵테일이 제격이다.
차라스는 칵테일의 달콤한 맛을 상상하며 방을 나섰다. 이 배에는 미련이 없으나 딱 하나, 함선 내 바에서 제공되는 저 맛 좋은 칵테일만은 아쉬웠다.
기하학 형태의 장식으로 꾸며진 복도를 지나 무인 바에 도착한 그녀는 즐겨 찾는 베르잔02식 칵테일을 시켰다.
많은 업무량 때문에 지친 것이었을까. 아니면 두통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평소보다 많은 양의 칵테일을 마셨다. 덕분에 두통 대신 알딸딸한 기분을 느끼며 바를 나올 수 있었다.
두통도 가셨으니 이제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할 일만 남았다.
‘아.’
딱 한 가지 일을 빼고.
‘아까 운석에 맞았다고 했지?’
오후 중 상황실로부터 얘기를 들었다. 15번 함포의 외벽에 운석이 맞아 보호벽이 오작동을 일으켰다고. 정작 해당 사수한테서는 보고가 없어서 잊고 있었다.
‘귀찮지만….’
지금 시간이면 이미 선내 기술자들이 알아서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확인하는 것이 좋다. 섭리파에 들어가기 전까지 어떠한 잡음도 있어서는 안 되니까.
그녀는 발걸음을 돌려 함선 내 보호벽과 실드를 관리하는 ‘방패관리소’로 향했다. 승선한 적과 백병전을 벌이는 기구가 전사단이라면 방패관리소는 배 자체를 지키는 기구다.
그녀는 살짝 흐트러진 걸음으로 방패관리소로 이어진 복도 위를 걸었다.
바에서도 그랬지만 복도에는 승무원이 보이지 않았다. 승무원들 중 다수가 취침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
복도는 아까 바에 갈 때와 전혀 달라진 점이 없다. 기하학 문양만 다를 뿐, 평소 그녀가 다니는 복도와 동일했다.
그러나 그녀는 등골을 스멀스멀 타고 올라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식관리자답게 이 배의 구석구석까지 모르는 것이 없는 그녀다. 복도 벽에 깔린 독특한 문양들 안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상황실에서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송곳이 되어 그녀의 머리를 찌르고 있었다.
환하게 밝은 복도 너머에 끔찍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전신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술이 확 깼다.
‘뭔가 잘못됐어.’
차라스는 다양한 사이킥 기술을 익힌 컬트다. 이 감정이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날 리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녀는 곧장 벽에 있는 문양 장식을 더듬었다. 달칵 소리가 나며 문양의 모양이 변하며 작은 통신기가 튀어나왔다. 복도의 카메라를 관리하는 ‘선내감시단’과 직통으로 연결된 통신기다.
“여기는 방패관리소로 가는 복도 중간입니다. 이 복도에 누군가 있나요?”
“여기는 선내감시단. 현재 복도에는 지식관리자님 혼자입니다. 두 시간 전부터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두 시간 전부터요?”
“예. 문제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혹시 모르니 저희가 예의 주시하겠습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시기 바랍니다.
이 복도에 그녀 빼고 아무도 없다는 선내감시단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복도 전체의 카메라가 고장 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말이 사실이리라.
등골을 옥죄는 불안감은 가셨으나 이번에는 새로운 문제가 그녀를 괴롭혔다.
‘이게 무슨 냄새지?’
평생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가 공기 중에 퍼져 있었다.
그건 말로 형용하기 힘든 기이한 것이었다. 실체없는 벌레들이 몸 안에 파고 들어가려는 것처럼, 악취가 코와 입에 스며들었다.
방패관리소와 가까워질수록 그 역한 냄새는 점점 진해졌다.
‘…빨리 확인하고 돌아가야 해.’
술기운도 거의 날아간 상황. 그녀는 반쯤 뛰다시피 방패관리소로 향했다.
다행히 냄새를 제외하고 다른 이상요소는 없었다. 그녀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했다.
문을 열자 새 방문자를 인지한 내부 전등이 환하게 빛났다. 선내감시단 말대로 기술자들은 전부 2시간 전에 퇴근했는지,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컴퓨터를 확인했다. 실드와 보호벽 부분을 빠르게 체크했으나 특별히 문제될 요소는 없었다. 15번 사수가 보고하지 않은 것을 기술자들이 알아서 처리한 듯 보였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일 문책을….’
15번 사수 때문에 생고생을 한 그녀는 컴퓨터를 막 종료하려 했다.
그 순간, 귀에 무슨 소리가 들렸다.
“!”
화들짝 놀란 그녀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환한 불빛 아래에는 비활성화된 컬트식 컴퓨터들 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흡?!”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또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그건 작은 금속 꼬챙이 같은 것들이 여러 개가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와 비슷했다.
차라스는 그것이 단단한 다리 여러 개를 지닌 무언가가 합금판 위를 기어갈 때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봤다. 컴퓨터들 사이로 컬트 머리보다 큰 물체가 긴 다리들을 놀리며 빠져나간 것을.
‘자, 잘못 본 거겠지?’
침을 꿀꺽 삼킨 그녀는 사이킥 파워를 손에 집중했다. 다시 놈이 나타난다면 바로 쏴버릴 생각이었다.
“……!”
그때 소리가 들렸다. 여러 개의 다리를 지닌 검은 그림자가 컴퓨터들 사이로 휙 지나갔다.
‘지, 지금 빠져나가야 해!’
지식관리자라 해서 모두가 뛰어난 전투 기술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는 급히 문 쪽으로 달렸다.
그런데 갑자기 문과 가까이 있던 컴퓨터가 이유도 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그녀는 바로 준비 중이던 사이킥 기술, ‘사이킥 임펙트’를 컴퓨터에게 날렸다.
팡 하고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사이킥 임펙트가 허공에서 소실되었다. 그와 동시에 컴퓨터 뒤편에서 누군가가 두 손을 든 채 튀어나왔다.
“쏘, 쏘지 마세요!”
생각지도 않은 곳에 나타난 컬트 남성을 본 차라스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당신은?”
“저, 저는 함포를 담당하는 사수입니다.”
“혹시 15번?”
“예, 옙! 지, 지식관리자님께서 오시기 전에 처리하려고 아까 들어왔습니다. 다, 다 처리하고 나가려는데 과, 관리자님께서….”
자신을 15번 사수라 소개하는 컬트. 말대로 그는 함포를 담당하는 사수복을 입고 있었다.
“정식 보고도 안 하고 이런 식으로 처리하려고 하다니. 제정신인가요?”
“사수가 된 지 얼마 안 돼서 제가 미숙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게 사과해도 소용없습니다. 내일 오전에 바로 징계 절차에 들어갈….”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기괴한 생물의 소리가 들렸다. 그녀와 15번 사수의 머리가 동시에 소리가 난 방향으로 향했다.
“바, 방금 무슨 소리죠? 혹시 들으셨습니까?”
주변에 동료가 늘어서 그런 걸까. 차라스는 생각이 살짝 바뀌었다.
‘여기서 문제를 잘 처리한다면….’
그녀는 선내감시단에 연락하는 대신, 이 얼빵한 컬트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어차피 몰래 이곳에 들어온 그는 자기 공을 주장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 말은 그가 세운 공도 모두 그녀의 차지가 된다는 것. 섭리파에 들어가기 전, 공을 한 번 더 세우는 거다.
“여기 어딘가에 알 수 없는 생물이 있습니다.”
“예?”
“일단 지금은 절 도우세요. 이걸 잘 처리하면 징계 수위를 낮추는 것도 고려해 보겠습니다.”
“어, 아, 알겠습니다!”
쩔쩔매는 그의 모습은 전혀 미덥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수라면 기본적인 군사 훈련을 받는다. 적어도 무력 면에서는 차라스보다 그가 더 뛰어날 거다.
“소리는 도구실에서 났어요.”
그녀 말대로 도구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전등이 괴생명체에게는 반응하지 않는지 안쪽에는 새까만 어둠만이 보였다.
“불빛을 만들 수 있나요?”
“어, 제가 그건 잘….”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스스로 사이킥 파워로 불빛을 만들어 도구실 안쪽을 비추었다.
안쪽 바닥에는 쌓아둔 상자가 무너지면서 쏟아진 도구들로 가득했다. 도구실을 엉망으로 만든 괴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에서 놈을 발견하면 바로 죽이세요.”
“알겠습니다.”
“멍청하게 아까처럼 비명이나 지르지 말….”
“왜 그러십니까?”
말을 하던 도중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15번 사수와의 대화를 통해 상황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불을 일으킬 수 없다고 했죠?”
“어? 예.”
“제가 여기 들어왔을 때 불이 막 켜졌었는데, 그 전에는 어떻게….”
15번 사수는 방금 불을 일으킬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은 그는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곳에서 컴퓨터를 조작했다는 뜻이 된다.
설령 몰래 컴퓨터를 조작하기 위해 불을 끈 것이라 해도 이상한 점은 남아 있었다.
선내감시단에서 말했다.
이곳까지 이어진 복도에는 두 시간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두 시간 동안 15번 사수는 어둠 속에서, 그것도 괴생명체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하. 전등.”
마치 그건 생각 안 했다는 듯 15번 사수가 말했다.
아니.
15번 사수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그것’이 말했다.
방패관리소에 있는 괴물은 하나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