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302 - 베르잔02(1)
설정상 컬트들의 고향은 지구와 많이 다르다. 온도가 높고 물이 적어서 지구의 사막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들에게 사이킥 파워 능력이 없었다면 척박한 행성에서 결코 문명을 발전시키지 못했을 거다.
베르잔02의 환경은 컬트의 고향과 제법 유사한 편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붉은 모래와 암석. 드문드문 보이는 푸른빛 오아시스. 컬트의 고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들이다.
선조가 모래 위에서 제국을 일궈냈듯이, 그 후손들은 적색 대지 위에 거대한 도시를 세웠다.
광활한 사막 위에 펼쳐진 빌딩의 숲. 옅은 아이보리색의 건물들이 모래의 빛에 반사되어 붉게 물들었다.
새 하수인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도착한 지 하루가 지났다.
지식관리자 차라스를 감염시킨 날, 그녀와 함선으로부터 습득한 정보를 PS-111에게 보냈다.
어떤 배에 잠입해야 베르잔02에 제약 없이 무사히 들어올 수 있는지, 현재 그 배가 어디까지 왔는지 말이다.
우리가 이틀 동안 전함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녀석들은 아우르 성계를 향해 이동 중인 대형 화물선에 몰래 올라탔다.
일행 중 가장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아드하이가 PS-111과 26호를 들고 날랐기에 탑승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물론 마냥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PS-111의 덩치 때문에 탑승 도중 레이더에 걸릴 뻔했으니까. 녀석 말로는 26호가 기지를 발휘한 덕분에 걸리지 않고 잘 넘어갔다고.
아무튼 녀석들이 탄 무역선은 오늘 도착한다. 지금 나는 차라스와 함께 항만 구역에서 녀석들을 기다리는 중이다.
“도착했습니다.”
개인용 우주선의 조종석에 앉은 차라스가 말했다.
우주선 전면부에 달린 강화 유리 너머로 커다란 배가 착륙하는 것이 보인다. 잿빛 색상에 긴 직사각형 모양을 한 투박한 디자인의 화물선. 예전에 아드하이의 고향으로 가는 길에 털어먹었던 스타유니언의 인력공급선이다.
베르잔02는 컬트 제국에서 수위를 다툴 정도로 큰 노예 거래소다. 인력공급선 입장에서는 여기만큼 사이보그 재료를 구하기 쉬운 곳이 없다.
저 거대한 배 안 어딘가에 녀석들이 숨어 있다.
배의 문이 열리자 사이보그들이 내렸다. 적재된 화물을 내리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돌아갈 때는 지금과 반대로 인간이나 각종 종족들을 가득 태운 냉동 컨테이너가 저 배에 잔뜩 실리겠지.
“어떻게 할까요?”
“기다린다.”
사이보그들이 다 내렸지만, 아직 주변에 보는 눈이 많다. 나는 근처에 보는 눈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이쯤이면 되겠지.’
세 시간쯤 지나니 주변에 지나다니는 컬트나 외부인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준비해라.”
내 명령에 그녀는 이미 얘기했던 대로 우주선을 인력공급선의 측면에 가까이 댔다. 우리가 가까워지자 기다렸다는 듯 측면의 문이 개방되었다.
그에 맞춰 이쪽의 뒷문도 빠르게 열렸다. 열린 문들이 서로 마주한 순간, 낯익은 그림자 셋이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들은 재빨리 차라스의 우주선에 올라탔다. 목표를 달성한 차라스는 급히 우주선의 속력을 올려 항만을 빠져나갔다.
[즈즈 즈즈즈즈(셋 다 고생했어)]
“2초 가량의 오차가 있었으나 허용 범위입니다. 큰 문제는 없습니다.”
「작은 큰애기 안녕!」
「큰어른」「왜」「작아졌어?」
며칠 만에 다시 만난 녀석들은 여전했다.
몸을 작게 줄인 26호는 내 머리 위에 올라탔고, 아드하이는 덥수룩한 나의 털을 앞발로 툭툭 건드렸다.
“그럼 어디로 갑니까?”
우주선을 조종하던 차라스가 내게 묻는다.
그녀는 자기 우주선에 괴물 넷이나 타고 있어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현실이 워낙 비현실적이다 보니 모두 지독한 악몽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그녀의 질문에 나는 PS-111을 돌아봤다. 녀석이 붉은색 렌즈로 된 눈을 파르르 떨었다. 자기와 동기화된 MPS-05로부터 정보를 전달받는 거다.
“‘중간애기’가 은신처를 확보하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쪽으로 가면 됩니다.”
내가 항만에서 기다리는 동안, 하늘의 어머니와 MPS-05는 내가 숨을 만한 장소를 물색하러 갔다.
‘영리한 약자’의 지속시간은 7일. 그 효과가 종료되면 내 몸은 다시 거대해진다.
‘이미 변신한지 3일이 지났어.’
남은 4일 동안 22위를 찾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통신기의 위치는 알아도 22위가 그 근처에 없다면 이 행성 전체를 뒤져야 한다.
만에 하나 수색이 길어질 것을 대비해 그녀에게 미리 근거지를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즈즈즈즈즈 즈즈즈(차라스에게 안내해)]
내 말을 들은 PS-111이 조종석으로 기어갔다. 꼬리를 제외하고 7m에 달하는 인면(人面) 거미가 다가오자 차라스가 움찔 떨었다.
“영광의 거리에 있는 구(舊) 호버 버스 센터로 가시면 됩니다.”
“…예.”
우주선이 수많은 빌딩 사이를 지나치며 목적지를 향해 날아갔다.
계속 이동하다 보니 붉은빛으로 치장한 빌딩들이 점점 줄어들고, 어딘가 음산해 보이는 건물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왜 영광의 거리를 택했나 했더니….’
영광의 거리라면 나도 아는 곳이다. 우리가 있는 도시의 변두리에 위치한 거리로, 근처에 대규모 노예시장이 있어서 컬트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장소 중 하나다.
하지만 강화유리 건너편에 보이는 광경은 영광스러운 이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몰락했구나.’
어쩐지 지금쯤이면 보여야 할 노예시장도 보이지 않았다. 모래에 반쯤 파묻힌 건물들이 즐비한 그곳은 몰락한 도시 그 자체였다.
차라스는 정삼각형을 눕혀둔 것처럼 생긴 대형 건물 앞에 우주선을 착륙시켰다.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 안쪽에서 수인 모습을 취한 하늘의 어머니가 걸어 나왔다.
[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이런 건물을 용케도 구했네)]
「‘이런 건물’이니까 싸게 구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즈즈(하긴)]
「원래는 노예시장을 노리고 건축된 호버 버스 센터야. 도중에 다른 거리에 대규모 시장이 생기는 바람에 거리가 망하면서 센터도 그대로 폐쇄됐다더라.」
그녀 말 대로였다. 여기 오는 길에 차라스의 우주선 말고 다른 배나 컬트는 전혀 보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중개인이 재밌는 얘기를 해주더라고.」
[즈즈즈 즈즈(재밌는 얘기?)]
「그건 들어와서 직접 보는 게 좋을 것 같네.」
붉은빛에 반사되어 평소보다 진한 색을 띠는 호박색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휜다. 눈웃음으로 내 질문에 대답을 대신한 그녀는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호버 버스 센터의 내부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흉가의 모습이었다. 벽의 일부는 갈라져서 안에 있는 철골이 노출되었고, 바닥에는 모래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래도 넓긴 하네.’
낡았긴 해도 성체로 돌아가도 충분히 여유로울 정도의 크기다. 하지만 하늘의 어머니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듯, 계속 안쪽으로 들어갔다.
‘계단?’
호버 버스가 모이는 센터인데 왜 지하로 연결되는 장소라니. 그녀를 따라 내려가자 커다란 지하 공간과 여러 갈래로 뻗어 있는 미완성 선로가 우리를 반겼다.
‘왜 직접 보라고 했는지 알겠네.’
아무래도 이 호버 버스 센터는 지하철을 위한 시설도 겸하려 했던 것 같았다.
「이건 짓다가 만 거라서 다른 곳과 연결되지 않았어.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라나.」
컬트의 모성(母星)은 모래로 가득한 사막형 행성이다. 그래서 땅속에 뭔가를 짓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우주요새에서 봤던 것처럼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지하철 같은 것도 짓긴 하나, 베르잔02에서 그럴 것까지는 없을 터.
‘게다가 망한 거리에 이런 걸 지어 봤자 아무도 안 타겠지.’
나는 짓다 만 지하철역을 둘러봤다.
‘오히려 잘 됐어.’
이곳은 은신처로 활용할 장소. 다른 도시나 거리까지 선로가 안 뚫려 있는 것이 이득이다. 필요하면 내가 더 뚫어도 되고 말이다.
「그리고 아직 더 남았어.」
[즈(응?)]
“여기서부터는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제가. 설명.”
들어오면서 MPS-05와 다시 조우한 PS-111이 앞에 나섰다.
녀석이 구석에 있는 단말기를 조작하자 지하 공동 천장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공동의 벽 너머에서 삐걱거리는 기계음이 들리고 곧이어 벽에 달린 낡은 카메라로부터 수m짜리 구체의 이미지가 출력되었다.
‘이건…베르잔02이잖아?’
베르잔02의 이미지 위에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마크가 띄엄띄엄 떠 있었다.
“베르잔02에 설치할 예정이었던 호버 버스 센터와 그 주변의 노예시장 지도입니다.”
「22위의 종족을 생각하면 아마 노예시장에서 노예로 위장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즈즈(그 말은 이 마크가 있는 곳에 녀석이 있다는 거군)]
「응. 여기부터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
22위의 종족은 제국에서 박해받는 콜드블러드다. 예언자회 최대 지부가 있는 이 행성에서 활동하려면 역으로 노예로 위장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효과적일 터.
‘나쁘지 않은 스타트야.’
나는 베르잔02의 지도에 얼굴을 가까이 했다.
‘노예시장에서는 생물도 팔지.’
노예 거래가 주력이긴 하나 베르잔02 정도로 규모가 큰 곳이라면 희귀 생물도 종종 거래된다.
‘케샤 아르마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괜찮지.’
숨어 있는 녀석을 찾으면서 겸사겸사 유전자 정수를 모으는 것도 괜찮으리라.
-
백색의 방.
그곳에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한 여인이 의자에 앉아 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는 그녀의 뒤에는 두 존재가 서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마치 모자이크를 한 것처럼 검은색 안개가 끼어 있었다.
얼굴 없는 자들은 고개를 숙인 여인의 귀에 머리를 가까이 한 채 연신 무언가를 속삭이는 중이었다. 어찌나 집요하게 지껄이는지 얼굴이 보이지 않음에도 그들의 표정이 느껴질 정도였다.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속삭임 소리. 그건 더 이상 속삭임이라 할 수 없었다. 여인은 방 안에 메아리치는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똑같이 닮은 검은색 눈동자가 정면을 응시했다.
여인이 말했다.
「너 ■■을 ■■■.」
“헉!”
시현 유진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바이오캡슐의 투명한 유리벽에 그녀의 얼굴이 비춰졌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늘어진 그 얼굴은 방금 꿈에서 봤던 여인의 얼굴과 몹시도 닮아 있었다.
‘또 그 꿈이다.’
클론의 육신에서 부활한 이후, 그녀의 꿈은 한결 같았다. 그건 ‘시현 유진’을 죽인 정체불명의 괴물이 또다시 그녀를 죽이는 꿈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사라지지 않던 악몽이 지금이 완전히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갤러곤의 행성에서 유물을 획득한 그날 이후, 그녀는 정체불명의 괴물에게 당하는 꿈을 꾸지 않게 됐다.
그 대신 그녀가 꾸는 꿈은 지금 이것.
두 존재가 그녀에게 끝없이 속삭이는 꿈이다.
처음에는 그들의 목소리가 매우 감미로웠다. 방황하는 그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어느 기점에 이르러 그녀는 그 목소리가 불쾌하다고 느꼈다. 그들이 그녀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조종하고 있다고.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달콤한 꿈은 악몽으로 돌변했다. 이제 그녀는 지금처럼 바이오캡슐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잠을 잘 수 없는 몸이 됐다.
“산 너머 산이라더니.”
짧게 자조한 시현은 캡슐에서 몸을 일으켰다.
유리벽이 열리자 서늘한 공기가 그녀의 알몸을 감쌌다. 냉방 시설이 만들어 낸 찬 공기가 그녀의 몸에 맺힌 땀방울을 날려 보냈다.
그녀가 캡슐에서 나오자 전등이 서서히 작동하며 자연광 느낌의 빛을 방 안에 뿌렸다.
은은한 빛이 비추는 그곳은 우아하면서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방이었다. 벽과 천장에 그려진 기하학적 문양들은 메가콥의 시설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이질적인 공간에서도 시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캡슐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악몽에 대한 불쾌감은 한결 가셨으나, 그렇다고 다시 잠들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캡슐 옆에 놓아둔 가운과 패드를 들었다. 늘 그렇듯 다른 이들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기로 한 거다.
‘인력을 이 이상 수급하는 것은 어렵겠지. 양만큼 질도 계산해야 할 테니….’
그녀는 얇은 가운을 입은 채 일처리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그녀의 정신을 깨운 것은 노크 소리였다.
“들어와라.”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문이 열리고, 파충류 인간 베이스에 곤충의 특징이 섞인 것처럼 생긴 생물이 들어왔다.
메가콥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종족, 콜드블러드다. 일반 콜드블러드에 비해 작은 몸집을 지닌 그 존재는 목에 은색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기침하셨습니까? 시현 유진님.”
“벌써 회의 시간이 됐나 보군.”
“예. 민석 유진님께서 1층의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곧 갈 테니 대기하도록. 옷은 내가 직접 챙겨 입지.”
“알겠습니다.”
말과는 달리 콜드블러드는 시현의 의복을 들고 와서 그녀에게 바쳤다. 시현은 살짝 눈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콜드블러드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다. 왕을 대하는 것처럼 극도로 정중하게 대하는 이유는 저 존재가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있는 이곳, 베르잔02에서는 이런 광경을 아주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옷을 다 입은 시현은 방을 나서기 직전, 입을 열었다.
“항상 고맙다.”
시현의 칭찬에도 콜드블러드는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 또한 대답을 기대하고 칭찬한 것이 아니었다.
방의 주인이 나간 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콜드블러드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파충류 특유의 세로동공에 그녀의 뒷모습이 담겼다. 눈의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본인만 알 수 있으리라.
잠시 시현을 바라본 콜드블러드는 평소처럼 방의 청소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