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303 - 베르잔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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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스러운 장식품들로 꾸며진 응접실.
도형이 겹겹이 겹친 형태의 컬트식 테이블을 둘러싸고 여러 지성체들이 앉아 있었다.
대부분은 인간이었으나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야크뿔을 지닌 남성 컬트, 스타유니언의 워커와 유사하게 생긴 검은색 강화복으로 전신을 가린 존재 등.
다양한 외모를 지닌 구성원들은 패드를 든 인간 남자의 보고를 듣는 중이었다.
“네른 함장의 인맥 덕분에 새 인력 공급 루트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작스-01에서 발생한 손실 중 67%를 회복했으며….”
테이블의 상석에 앉은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 시현 유진은 자신의 패드를 이용해 부하가 보고한 내용을 확인했다.
원래 그녀는 베르잔02에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갤러곤의 행성에서 유물을 획득한 이후, 그녀는 범호가 남긴 또 다른 기록물을 해석하는데 집중했다.
이미 확보한 유물, ‘심연 파괴자’의 경우는 어떤 효과를 지닌 무기인지 대략 유추가 가능했다. 실제로 이 무기가 작동하는 것을 목격한 자들도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획득할 수 있었다.
문제는 심연 파괴자 말고 다른 유물에 관한 기록물이었다. 그것이 항해도의 일종이라는 것까지는 밝혀냈으나 그 이상은 확인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녀가 겪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 또한 유물 조사를 어렵게 만들었다. 스타유니언의 수도성 작스-01에 심어뒀던 그녀의 수하들로부터 연락이 끊겼기 때문이다.
다른 경로로 입수한 첩보에 따르면, 대수령이 스파이, 위험분자들에 대한 색출을 명령했다고 한다. 작스-01만이 아니라 스타유니언이 관할하는 모든 행성을 대상으로 말이다.
그 탓에 그녀는 휘하 세력의 절반을 상실하고 말았다.
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어도 이를 지원할 세력이 없다면 활동이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유물 조사를 뒤로 미루고, 휘하 세력을 복구하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원래는 케샤 아르마에서 용병들을 모집할 계획이었지만….’
해적들이 점거한 우주 요새, ‘케샤 아르마’.
주기적으로 대규모 경매가 일어나는 그곳은 실력 있는 용병, 귀한 정보, 희귀한 생물의 유전자를 구하기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실제로 그녀가 죽기 전, 그러니까 원본 시현 유진도 그곳에 여러 번 방문했을 정도라고 하니까.
게다가 이번 경매에 희귀 문서나 항해도들도 다수 나온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녀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인 선택지였다.
하지만 우주요새 근처로 날아간 그들을 반기는 것은 ‘무(無)’. 경매가 열릴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케샤 아르마가 통째로 사라졌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조차도 우주요새가 한순간에 사라질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아키라 유진이 그녀의 행선지를 미리 알고 함정을 준비한 거라 생각했을까.
그렇게 용병과 항해도를 구하려는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그녀를 도와 준 이는 전(前) 제국모함 함장 네른이었다.
그는 베르잔02에 가서 노예시장에서 필요한 인력을 구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덤으로 마침 거기에 그의 후임이 있으니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렇게 해서 이곳 베르잔02에 온 게 벌써 한 달 전이다.
“인력 수급은 크게 문제가 안 될 듯하나, 역시 장비가 문제인가.”
“그건 어쩔 수 없소. 의회에서 재무장 얘기가 간간이 나오는 중이니. 이곳에서 무기를 구하긴 쉽지 않을 거요.”
괴물에게 복수한다는 명분으로 시현에게 협력하는 네른은 베르잔02에 와서도 계속 도움을 주고 있었다.
시현의 집사 민석 유진도 여기 오기 전까지 그를 컬트라고 무시했으나 지금은 완전히 태도를 바꿨다. 속마음은 어떨지 모르나 겉으로는 네른에게 딱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회의를 진행 중인데, 그녀의 패드로 짧은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제가 혁신파와 접선해서 필요한 물품들을 구해 보죠. 그쪽은 재무장에 반대하는 측이니 무기를 팔지도 몰라요.」
검은색 생명 관리 슈트를 입은 여인, 라일라 쳄벌린이 보낸 메시지였다.
‘…혁신파라.’
노블캐피탈 중 라일라가 속한 티앤씨, 가르멜다, 이 두 가문은 컬트와 자주 교류하는 가문들이다. 티앤씨의 이름을 활용하면 컬트들의 무기를 구하기 어렵지 않을 거다.
‘그럴 수 없다는 게 문제지.’
현재 라일라는 티앤씨 특수무역중심지가 몰락할 때 실종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 그녀가 노블캐피탈의 이름을 빌려 혁신파와 접촉한다면 메가콥에도 그 소식이 알려질 터.
‘그 사실을 알면 아키라가 분명 수를 쓸 거다.’
세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메가콥CEO의 추적을 받는다면 벗어나기 어렵다.
‘혁신파와 접촉하는 것은 좋으나 라일라를 이용할 수는 없어.’
계속 고민하던 그녀는 마침내 입을 내렸다.
“적절한 인력이 충원되기 전까지는 장비 확보는 보류하겠다. 그리고 네른 함장. 자네의 후임을 만나고 싶다. 가능하겠는가?”
“만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소. 다만 무기를 구하는 것은 힘들 거요.”
“그를 통해 다른 루트를 뚫는 건? 가령 혁신파라든가.”
“그건…흠. 직접 만나서 물어봐야 알 것 같소.”
“그러면 만남을 통해 이후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회의는 이걸로 마치겠다.”
그녀가 선택한 길은 보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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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보다 훨씬 번화한 거리네?”
「그러게. 게임에서는 이 정도 규모가 아니었어.」
위로는 투명한 차폐막이, 양옆으로는 도형을 모델로 한 깔끔한 디자인의 건물들이 보인다. 아래 바닥에는 특수한 재질로 만든 블록이 깔려서 누가 걸어 다녀도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아케이드형 거리에 수많은 지성체들이 자기 할 일을 찾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사실 아케이드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규모 면에서는 지구에 존재했던 아케이드와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왜냐하면 거리 전체가 하나의 건물이었으니까.
‘광명의 거리’라는 이름을 지닌 이 장소는 아케이드를 본뜬 일종의 바이오 돔이다. 붉은 사막에서 오는 모래폭풍과 열기를 막고, 방문자들에게 최상의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이렇게 만든 거다.
지금 나는 하늘의 어머니와 함께 첨단 기술로 구현된 고풍스러운 거리를 걷는 중이다.
‘미지생물의 털가죽’과 ‘의태 기관’ 덕분에 내 본모습을 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페로몬을 감지할 수 있는 존재는 나를 감시청 정예함선의 함포 사수 컬트로 여길 거고, 카메라들은 나를 아예 인식하지 못하니까.
‘두 가지 특성이 없었으면 애초에 올 생각을 안 했겠지.’
아무튼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22위 랭커의 통신기가 이 일대로 있는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정확히 어느 건물 안에 있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므로 여기서부터는 직접 찾아봐야 한다.
“근데 여기도 원래 바이오 돔이었나?”
「아니. 새로 지은 거야. 광명의 거리가 장비 거래소로 유명하긴 했지만, 이런 시설은 없었어.」
“그랬나?”
「네가 여기에 제국모함을 추락시켜서 장비 제조 클랜 2개가 망했거든?」
그녀의 핀잔을 들으니 기억난다.
컬트와 전면전과 벌이기 직전, 베르잔02를 침공한 적이 있다.
당시 베르잔02는 난공불락으로 명성이 높은 행성이어서 성체인 나도 공략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적들의 공격 수단을 역이용한 것. 제국모함들을 행성으로 유인해서 충돌시키는 식으로 방어선을 뚫었다.
행성을 지키던 플레이어들도 제국모함들을 추락시킬 줄은 몰랐는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상당수가 충돌의 여파로 죽었고, 나머지는 내게 각개격파 당했다.
“여기는 제국에 중요한 장소니까. 미리 정리 안 하면 골치 아파.”
「뭐 그렇긴 하지.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번화한 행성이니까. 가끔씩 대제사장도 오고.」
“내가 알기로 너의 거점은 여기가 아니었는데, 생각보다 잘 아네?”
「내 장비를 만들어 주던 클랜의 거점이 여기였거든. 너 때문에 없어지기 전까지 말이야.」
“쩝. 할 말이 없군.”
베르잔02이가 무너진 탓에 큰 손해를 입은 랭커가 한둘이 아니라고 듣긴 했다. 보아하니 하늘의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던 것 같다.
나와 그녀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노예가 주로 거래되는 구역으로 진입했다.
노예시장이라고 해서 주변 풍경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거래용 상품들은 전부 가게 안에 있기 때문이다. 대신 건물마다 어떤 상품을 판매하는지 소개하는 광고판들이 세워져 있다.
어떤 광고판에는 보유한 노예의 스펙과 신체조건 등이, 어떤 광고판에는 판매 중인 희귀 생물의 내역이 기입되어 있었다.
광고판들 외에도 이 구역에는 유독 은색 목걸이를 착용한 자들이 많았다.
저 은색 목걸이는 착용자가 노예라는 증거다. 목걸이 안쪽에는 노예의 주인을 표시하는 코드가 있다.
수시로 고용인을 죽여 버리거나 실험체 취급하는 메가콥보다는 낫지만, 그것도 경우에 따라 다르다. 주인의 성품에 따라 노예의 운명이 극단적으로 갈린다. 내 몸의 인면충으로 살아가는 제이슨도 생전에는 여성 노예를 성적인 장난감으로 취급했다.
거리에 있는 노예들은 자기 주인이 시킨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규모가 어마어마해.’
광고판을 보니 노예도 노예지만, 생물 거래도 활발한 듯했다. 양 자체는 케샤 아르마의 지하보관소가 더 많았으나, 다양성으로 보면 여기가 압승이다.
‘잘하면 여기서 애들한테 줄 특성을 구할 수 있겠는걸.’
잠깐만 살펴봤는데도 유용한 특성을 지닌 생물들이 몇몇 보였다.
‘시장 사정에 밝은 자가 필요해.’
일일이 돌아다니며 먹을 만한 것들을 찾는 것은 번거롭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몰래 움직이는 상황에 가게들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럴 바에는 티앤씨 특수무역중심지에서 밀수꾼들을 지배했던 것처럼 현지인을 조종해서 먹이를 바치게 만드는 게 효과적이겠지.
「저 가게가 커 보이는데 저기에서 먼저 물어볼까?」
“좋은 생각이야.”
나는 하늘의 어머니와 함께 유독 튈 정도로 규모를 자랑하는 건물에 들어갔다.
호화로운 정문을 통과하자 프론트 데스크에 있던 인섹트맨 점원이 우리를 맞이했다.
“저희 가게…큼, 죄송합니다.”
은색 목걸이를 찬 그는 내게 인사하려다가 짧게 재채기했다. 의태 기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에 자극받았기 때문이리라.
물론 인섹트맨 또한 페로몬에 영향을 받는 생물인 이상, 의태 기관의 효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의 신체기관들은 나를 컬트 전함에서 근무하는 함포 사수로 인식할 거다.
점원은 민망한 듯 더듬이를 어루만지고 다시 인사했다.
“저희 가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원하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콜드블러드에 대해 알아보고 싶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인섹트맨 점원이 노예 목록을 살피는 것을 기다리는데 누군가가 데스크 쪽으로 다가왔다.
“거기.”
“응?”
점원에게 볼일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양복 비슷한 정장을 입은 표범머리 볼프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 노예, 얼마나 하지?”
“노예? 무슨 말입니까?”
“옆에 있는 암컷 말이다. 알몸인 것을 보니 노예인 것 같은데. 팔러 온 게 아닌가?”
그제야 나는 저 볼프가 뭘 말하는지 이해했다.
“…그녀는 노예가 아니라 부족에 속한 자입니다.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웃기는군. 원시인들이 베르잔02까지 온다고? 그것도 알몸으로? 그쪽도 짐꾼으로 쓰는 주제에 거짓말하지 마라.”
볼프가 손가락을 뻗어 하늘의 어머니가 매고 있는 배낭을 가리켰다.
그사이, 뒤늦게 표범머리 볼프가 자기를 노예 취급했다는 걸 알아차린 하늘의 어머니. 그녀가 말없이 배낭에 들어 있는 단창을 꺼내려 들었다.
“기다려.”
「…….」
내 말을 들은 그녀가 멈칫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모욕을 들어서 그런 걸까. 그녀 전신에 난 털이 바짝 곤두섰다. 저렇게 화내는 것은 뮤리엘을 단죄할 때 이후 처음 본다.
“두 번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제 친구지, 노예가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팔지 않습니다.”
“나의 주인께서는 그쪽이 상상하지 못할 대가를 지불하실 의향이 있다.”
“물러가시기 바랍니다.”
“…쯧. 멍청한 놈. 후회하게 될 거다.”
하늘의 어머니를 제지한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표범머리 볼프는 혀를 찬 뒤 물러났다. 그는 저 멀리 고급스러운 전통복을 걸친 컬트 남성에게 다가가 뭐라 말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인데.’
게임에서든, 이 세계에서든 내 앞에서 저런 식으로 군 자는 거의 없었다. 랭커가 된 이후에는 아예 없었고. 그래서인지 화가 난다기보다는 신선한 느낌이었다.
「…저 새끼가.」
물론 대놓고 노예 취급을 당한 하늘의 어머니는 엄청 화가 났지만.
차갑게 식은 호박색 눈동자가 가게를 나서는 컬트와 표범머리 볼프에 꽂혔다. 아마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표범머리 볼프는 머리에 구멍이 났으리라.
그때, 인섹트맨이 내게 소형 패드를 내밀었다.
“콜드블러드의 거래 현황은 이걸 통해 확인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점원이 준 콜드블러드 노예 목록을 훑어봤다.
‘생각보다 적네.’
이곳은 콜드블러드 노예를 많이 취급하지 않는지, 노예가 별로 없었다. 목록 뒤에 어느 노예가 팔렸는지 거래 현황도 정리되어 있어서 봤더니, 거래 수 자체가 적었다.
전부 확인한 나는 하늘의 어머니에게 패드를 넘겼다. 애써 분노를 가라앉힌 그녀는 패드의 목록을 빠르게 체크했다.
「여기에는 없어.」
“확실해?”
「응. 그 애, 일반 콜드블러드보다 몸이 많이 작아. 지금쯤이면 다 컸겠지만 키는 여전히 작을 거야.」
그녀도 거래 현황에 적힌 이름과 신상정보들을 확인했으나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여긴 꽝인 것 같았다.
나는 점원에게 패드를 돌려주며 물었다.
“콜드블러드 노예를 가장 많이 취급하는 가게는 어디입니까?”
“이 거리에서 콜드블러드를 취급하는 곳은 여기를 포함해 총 세 곳입니다. 전문점을 찾으신다면 다른 도시로 가셔야 합니다.”
“그 가게들의 이름이 뭡니까?”
“하나는 가깝습니다. 여기와 반대편에 있는 건물로 들어가시면 되니까요. 문제는 다른 가게인데….”
내 눈치를 보며 말을 흐리는 인섹트맨 점원.
“왜 그러십니까?”
“그게, 좀 전에 얘기를 나눴던 노예의 주인께서 콜드블러드를 취급하십니다.”
“아하.”
“저분께서는 이 거리에서 가장 많은 품목을 다루십니다. 하지만 보셨다시피 워낙 까다로우신 분이라….”
그도 방금 일어난 광경을 전부 봤다. 표범머리 볼프의 주인과 좋지 않은 관계가 됐다는 것도.
‘뭐 괜한 걱정이지만.’
“일단 가게 이름하고 위치만 알려주시죠.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 거리에서 가장 많은 품목을 다루는 자라.
꼭 만나 보고 싶어졌다. 설령 그가 원치 않아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