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304 - 베르잔02(3)
나한테 신선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준 컬트 주인과 표범머리 볼프.
인섹트맨 점원도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컬트 주인은 이 거리에서 꽤 유명한 자다. 북적거리는 장소에서 당장 습격하기에는 보는 눈이 많다.
그러니 그들과는 이따가 밤에 심도 깊은 면담을 나눌 예정이다.
그사이 나는 인섹트맨 점원이 추가로 소개해 준 가게에 들렀다. 안타깝게도 22위 콜드블러드 랭커의 흔적은 없었다.
‘이 도시에 없을 수도 있겠어.’
22위가 베르잔02를 떠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감시가 삼엄한 이 행성에서 몰래 탈출하는 것은 쉽지 않을 테니까. 또 자칫 잘못하면 제이슨을 비롯한 지배파 세력한테 꼬리를 잡힐 수도 있고.
따라서 이 행성 어딘가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물론 이 거리, 이 도시에 본인도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장기전이 될 거라고는 이미 예상했어.’
은신처를 마련한 것도 이 때문이다. 벌써 조바심을 낼 것 없다.
“슬슬 돌아가자.”
「잠깐.」
은신처에 들렸다가 밤에 다시 움직이려는데, 하늘의 어머니가 나를 불러 세웠다.
“왜?”
「나 옷 좀 사자.」
“놈 때문에?”
「그것도 있지만 이대로 다니면 귀찮아질 것 같아서.」
그녀가 부리를 긁으며 짜증을 냈다.
사실 이번 경우는 저 컬트 주인이 이상하게 행동한 것에 가깝다. 노예를 증명하는 것은 목에 찬 은색 목걸이지, 알몸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녀의 몸에는 검은색 물결무늬의 문신이 있다. 누가 봐도 볼프 부족에 속하는 자유민에 가까운 모습이다.
‘하지만….’
컬트는 선민의식이 강하고, 자기 생각을 잘 바꾸지 않는다. 그들 기준으로 하늘의 어머니는 지극히 야만적이고 미개하게 보일 터. 이번처럼 대놓고 저런 행동을 하는 자는 드물겠으나, 불편한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여기 있는 동안은 옷을 입어야겠어. 저딴 개새…귀찮게 구는 놈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
“나도 알몸인데?”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너는 의태 기관 때문에 멀쩡한 컬트로 보인다고.」
“농담이야. 그럼 더 둘러보다가 갈까.”
노예시장에서 나온 나는 그녀와 함께 옷가게를 둘러봤다. 그곳에서 컬트 고위층들이 주로 입는 스톨라(Stola) 비슷하게 생긴 옷을 구매했다. 여성 귀족들이 밖에 외출할 때 입는 옷이니 앞으로 하늘의 어머니를 무시하는 자는 없을 거다.
「…오랜만에 옷을 입으니까 어색하네.」
그녀는 몸을 감싸는 천의 느낌이 익숙하지 않은지 안절부절못했다.
수인 전사의 느낌이 물씬 나던 그녀가 저런 부드러운 천옷을 입으니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몸을 살짝 조이는 디자인의 옷 때문인지 털에 가려졌던 몸매가 확 드러났다. 탄탄한 근육과 여성 특유의 곡선이 조화롭게 얽혀서 묘한 매력을 뽐냈다.
“괜찮아. 잘 어울려.”
「쩝, 변신하면 바로 찢어질 텐데.」
“아까우니까 벗고 변신해야겠네.”
「전투 중에? 너라면 그러겠냐?」
툴툴대는 말투와 반대로 호박색 눈동자는 살짝 휘어 있었다. 옷을 오랜만에 입어서 어색해하는 거지, 옷 자체에는 딱히 불만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나는 하늘의 어머니와 함께 차라스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갔다.
-
“주인님. 그자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습니다.”
호화로운 저택의 어느 방.
통신을 마친 표범머리 볼프가 젊은 컬트 남자에게 보고했다.
은발에 야크뿔을 가진 그의 이름은 알카디.
광명의 거리에서 가장 많은 노예를 보유한 자이자 ‘베르잔02의 방어자’의 함장 알샤스를 동생으로 둔 자다.
동생이 제국모함의 함장이고 본인은 매우 큰 부를 손에 쥐고 있기에, 이 거리에서는 그를 모르는 자가 없다. 베르잔02의 정치계에서도 그의 영향력은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다.
다만 컬트 귀족들 사이에서 그의 평판은 좋지 않은데, 그 이유는 그의 취미 때문이었다.
알카디는 노예 수집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그는 아름다운 노예, 전투력이 강한 노예, 똑똑한 노예 등 여러 종류의 노예를 자기 컬렉션으로 수집했다. 심지어 주인이 있는 노예도 어떻게든 자기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아무리 컬트 사회에서 노예를 부리는 것이 개인의 자유라 하더라도 알카디의 행동은 문제가 됐다. 특히 보수적인 경향이 강한 귀족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고.
오죽하면 동생이 그에게 제발 그러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할 정도였을까.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혁신파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될 정도로 뛰어난 동생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알카디도 한동안은 자재하고 있었다.
오늘 한 가게에서 수상한 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말씀하신대로 놈은 함포 사수가 아니었습니다. 폐허가 된 호버 버스 센터에서 묵는다고 합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표범머리 볼프의 말에 알카디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얼굴도 모르는 병사가 있을 리 없지.’
이 행성을 수호하는 제국모함 함장의 형인 자신을 모르는 전사는 있을 수 없다. 함포 사수라면 더더욱 그렇고.
게다가 알카디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특별한 도구를 지니고 있었다. 동생이 정적(政敵)의 테러를 경계해서 그에게 선물한 팔찌로, 근처에 몸을 숨긴 자가 있으면 착용자에게 알려준다.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은신했는지, 은신한 자의 정체가 뭔지는 알려주지 않지만, 큰 상관은 없다. 어차피 주변에 위협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아무튼 팔찌는 알카디의 얼굴도 모르는 수상한 사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말은 상대가 정상이 아니라는 뜻. 어떠면 제국의 암과 같은 존재인 볼텍스원 사교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가 데리고 있는 아름다운 노예를 강탈해도 괜찮지 않을까?
“밤에 놈이 있는 곳으로 전사들을 보내겠습니다.”
“좋아. 주인은 혹시 모르니 죽이지 말고, 내게 데려와라. 만약 이 행성에 몰래 잠입한 사교도라면 예언자회에 넘겨야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 볼프. 절대로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
수많은 볼프 노예들을 봐 왔지만 수상한 사수가 데리고 있던 암컷 볼프만큼이나 매력적인 존재는 처음이었다.
노바메탈만큼이나 찬란하고 윤기가 넘치는 황금빛 털에 강철을 제련해서 엮은 것처럼 섬세하고도 탄탄한 근육들. 그리고 하늘에 빛나는 항성을 축소시켜서 박은 것처럼 아름다운 눈까지.
그 어느 하나 평범한 부분이 없었다. 그 노예와 몸을 섞으면 얼마나 황홀할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알카디가 암컷 볼프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을 때, 표범머리 볼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제가 보기에 그녀는 상당한 실력자로 보였습니다. 저도 함께 가야 피해가 적을 겁니다.”
“네가 같이 갈 정도라고?”
표범머리 볼프는 알카디가 데리고 있는 노예 중 가장 뛰어난 전사다. 그런 그가 경계할 정도라면 상대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다.
“강하고 아름다운 투희라. 더더욱 구미가 당기는군. 네가 직접 가서 정리하라.”
“옙.”
표범머리 볼프가 사라진 뒤, 알카디는 다른 노예들을 불렀다. 온갖 종류의 여성 노예들이 그에게 봉사할 동안에도 그는 암컷 볼프의 육체를 떠올렸다.
-
시간이 흘러 베르잔02에 밤이 찾아왔다.
다만 말만 밤이지, 밖은 여전히 태양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베르잔02가 속한 아우르 성계는 2개의 항성이 존재하는 일종의 쌍성계다. 그래서 베르잔02에서는 총 2개의 태양을 볼 수 있다.
물론 두 항성이 도는 궤도가 달라 태양 2개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컬트들은 이 중 상대적으로 밝은 태양이 뜰 때는 낮, 어두운 태양이 뜰 때는 밤으로 본다.
지금은 어두운 태양, 즉 동반성(同伴星)이 뜨는 시간이다.
‘슬슬 나갈까.’
컬트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잠을 자야 생존할 수 있는 생물이다. 밤이 되면 각자 집에 들어가 수면을 취한다. 지금쯤이면 내가 노리는 컬트 주인도 가게에서 퇴근할 준비를 하거나 귀가했을 거다.
「큰애기야, 어디 가?」
[즈즈즈 즈즈(볼일이 있어)]
「볼일?」「무슨 볼일?」
모래 속에 파묻혀 열 찜질을 즐기던 아드하이가 고개를 들었다.
[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낮에 봐둔 먹이가 있거든)]
「올 때」「우리」「선물」「챙겨 와」
「맞아! 나도 중간애기처럼 선물 받고 싶어!」
[즈즈즈즈(가능하면)]
낮에 하늘의 어머니가 옷을 입고 온 것을 본 녀석들은 참 많은 관심을 표했다.
못생긴 친구가 난쟁이 옷을 입었다고 하는 아드하이부터 왜 자기들 것은 없냐고 하는 26호, 모든 상황을 배낭 속에 든 MPS-05를 통해 지켜본 주제에 개량용 유전자를 구해 달라고 하는 PS-111까지.
‘그 녀석은 왜 낀 건지 모르겠지만.’
씨 데몬과 갤러곤의 애교어린 성토에 나는 그들에게 선물을 약속했다.
‘어차피 새 특성이 생기면 이식할 생각이었으니까.
지금 내가 밖으로 나가려는 이유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좋은 특성을 주면 녀석들도 마음에 들어 하겠지.
[즈즈 즈즈(그럼 가자)]
“잘 부탁. 부탁.”
나는 MPS-05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그곳에는 루비 속에 박제된 모래의 왕국이 있었다.
어두운 빛이 붉은 모래 위를 비추는 중이라 세상의 모든 색이 짙은 체리빛을 띠고 있었다. 게임에서도 몇 번 본 적 있는 광경인데도 현실에서 보니 너무나도 달랐다.
‘게임에서는 섬뜩한 느낌이었지.’
밤만 되면 세상에 붉은색으로 가득 차니 싫어하는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세계는 그 섬뜩함에도 불구하고 몹시 아름답고, 또 장엄했다. 파멸적인 아름다움. 그것이 베르잔02의 밤이었다.
나는 붉은 모래만이 가득한 거리를 질주했다. 은신처가 순식간에 멀어지고 내 주변에는 모래로 파묻힌 건물들만 즐비했다.
4개의 다리가 열심히 달리는 동안, 턱 아래의 보조기관은 건물에 인기척이 느껴지는지 부지런히 살폈다.
태양이 바뀌면서 거리의 온도는 낮에 비하기 어려울 정도로 떨어진 상태였다. 아드하이처럼 모래 속에 들어가 있을 게 아니라면, 버려진 거리에서 돌아다니는 짓은 현명하지 못하다. 내 생각대로 건물에서는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아무도 없네…응?’
안심한 그때, 보조기관에 뭔가가 걸렸다. 일련의 무리가 내 쪽으로 오고 있다.
나는 MPS-05와 함께 모래 속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얼굴을 가린 수상한 자들이 나타났다. 강화복과 각종 무기들을 든 그들은 내가 숨은 모래 곁을 지나쳤다.
그들이 멀어져서 보이지 않을 때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얼굴을 가렸다고 해서 내가 그들을 몰라볼 리가 없다. 그들 중 선두에 선 자는 낮에 나와 만났던 표범머리 볼프였다.
그들은 내가 숨은 은신처로 향하고 있었다.
‘하.’
잔뜩 무장한 노예들이 노리는 것은 명확했다. 그들의 주인은 하늘의 어머니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신선하다는 느낌도 한두 번이다. 지금 놈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니 기분이 좋지 않다.
아니, 매우 불쾌하다.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먹이가 간다고 애들한테 말해)]
“확인. 적. 확인!”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한 놈은 살려둬. 놈들의 주인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
“한 놈. 살려둬.”
MPS-05를 통해 PS-111에게 명령한 나는 다시 광명의 거리를 향해 뛰었다.
여기서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다. 지금 은신처로 간 놈들은 애들한테 전멸당할 테니까. 나는 놈들의 주인이 어디 있는지 듣고 바로 움직이면 된다.
‘얼마나 대단한 놈이기에 이러는지 궁금하네.’
내게 이렇게 불쾌감을 준 적은 또 오랜만이다.
과연 내 모습을 직접 보고도 이렇게 나올 수 있는지.
머리에 기생충이 박히고도 감히 내게 이런 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지.
오늘이 가기 전, 놈은 자기 행동의 대가를 지불하게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