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307 - 흔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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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했네.”
“착륙 준비해. 나는 물건 상태를 확인하지.”
“어.”
노예 두 명이 탄 수송선이 모래 위에 착륙했다. 한 명이 계기판을 점검하는 동안, 다른 한 명은 수송선 뒤편에 실린 컨테이너를 살폈다.
“매일 오고 있지만 왜 여기에 갖다 두라는 건지 모르겠군.”
“아서라. 주인님께서 하시는 일이야. 신경 꺼.”
“넌 궁금하지 않아? 저 망한 건물에 뭐가 있다고 컨테이너를 두냐고.”
조종석에 앉은 남성 노예가 전방의 강화유리를 가리켰다. 유리 너머에는 모래에 반쯤 잠긴 호버 버스 센터가 있었다.
지난 3주 간 그들은 3일에 한 번씩 이 버려진 거리에 왔다. 생물이 담긴 냉동 컨테이너를 호버 버스 센터 앞에 내려놓기 위해서다.
“이봐. 호기심은 독이야. 컨테이너 옮길 거니 빨리 돕기나 해.”
“쩝.”
컨테이너 점검을 마친 인섹트맨 노예가 뾰족한 턱을 딱딱거렸다. 적당히 하라는 동료의 신호에 인간 노예는 얌전히 수송선의 뒷문을 열었다.
그 후 둘은 단말기를 조작하며 컨테이너를 밖으로 옮길 준비를 했다.
낮의 태양이 뜬 시간이라 그런지 수송선 밖은 온도가 매우 높았다. 보호복을 입고 있어도 땀이 계속 흐를 정도였다.
컨테이너를 옮기는 것은 수송선의 기계들이 다 하지만 그렇다고 열풍을 안 맞을 수는 없었다. 폭염 속에서 컨테이너를 호버 버스 센터 앞에 내렸을 때, 인간 노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가져온 생물 말이야.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
“내가 확인해 보니 가게에서 파는 상품 중 가장 비싼 것들이야. 심지어 주인님이 팔지 않고 기르던 동물도 있어.”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데?”
여전히 툴툴대는 인섹트맨의 태도에 남자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봐봐. 내일모레에는 생물 없이 컨테이너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걸? 저 비싼 동물을 버리고 있는데 수상하지 않아?”
“본론만 말해. 본론만.”
“내 생각에는 주인님이 사교단하고 결탁한 것 같아.”
“사교단?”
남성의 말에 인섹트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개소리야?”
“아니, 진짜로. 여기 말고 다른 행성에서는 난리도 아니라던데.”
“생각을 해봐. 주인님처럼 부유하신 분이 뭐하러 사교단에 가입하냐?”
“혹시 모르지. 놈들의 지원을 받아서 부유해진 걸지도. 그 대가로 귀한 생물들을 상납하는 거지.”
“미친놈. 주인님의 동생이 제국모함 함장이야. 그딴 짓을 했다간 바로 정화광선을 맞을 거다.”
“모르지. 동생도 함께 결탁한 것일지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동료의 망상에 인섹트맨은 짜증이 솟구쳤다. 날씨도 더워죽겠는데 이런 되도 않는 얘기를 들으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궁금하면 들어가서 확인해 봐.”
“어? 진짜?”“그래. 네가 들어가서 물건을 직접 건네주던가.”
여태껏 그들은 컨테이너를 센터 앞에 두기만 했지, 누가 수령하는지 직접 확인한 적은 없었다. 위에서 물건만 두고 바로 귀환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인섹트맨의 말에 남자는 망설였다. 막상 들어가자니 걱정됐다.
만에 하나 정말 사교도가 안에 있다면 큰일이다. 놈들에게 붙잡혀서 기괴한 의식의 제물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럴 거 아니면 제발 좀 닥쳐.”
“…들어갔다 올게.”
“뭐?”
“여기서 기다려.”
“미친! 야!”
다만 사교도에 대한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더 컸던 남자는 돌발행동을 했다. 그는 인섹트맨을 밖에 두고 센터 입구로 들어갔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센터 내부는 어두웠다. 벽과 천장에는 철골과 파이프 등이 훤히 노출되었고, 바닥에는 밖에서 들어온 모래들이 가득했다.
관리를 전혀 받지 못한 폐허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누가 여기서 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저기, 물건 도착했습니다!”
누군가 있을까 싶어 남자가 크게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센터 내부의 벽에 부딪치며 쩌렁쩌렁 울렸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중간 접선지인가?’
여기다 물건을 두면 물건을 받는 자들이 적당한 때에 수령하는 구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도 범죄자들에게 고용된 용병들이 숨어서 그를 지켜보고 있을 터.
‘으으, 진짜 범죄자들과 엮인 건가?’
사실 그는 모험심이 강한 타입의 인간이 아니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호기심이 그를 이끌었을 뿐. 지금까지 이런 돌발행동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남자는 입구 쪽으로 천천히 뒷걸음쳤다.
나가는 즉시 수송선으로 뛸 준비를 하는 그때.
어둠 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물건 왔어?”
“힉?!”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남자는 온몸을 굳혔다. 그의 등에 줄줄 흐르는 식은땀은 단순히 더위 때문에 생긴 게 아니었다.
그 자리에 굳어 있으니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건 왔어?”
‘…어디서 들은 목소리인데?’
두 번 연달아 동일한 톤으로 들려온 저 목소리,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주인 알카디의 경쟁자들에 대한 테러 등,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노예들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의 목소리와 매우 흡사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 출신 노예라서 확실히 기억이 났다.
“뭐야. 깜짝 놀랐잖아. 안에 있으면 대답하지.”
“미안!”
아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남자는 맥이 탁 풀렸다.
그의 주인이 새로운 음모를 꾸미는 것이 분명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하고자 일부러 이런 외진 곳을 골라 물건을 모아두는 것이리라.
“물건 왔어?”
“어! 센터 앞에 놨어.”
“알았어!”
알았다는 대답 이후 다시 센터는 정적에 잠겼다. 대답과 달리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안쪽 깊숙한 곳에서 일하는 중인지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보아하니 저쪽도 바쁜가 보군.’
그래도 얼굴은 볼 수 있지 않은가 싶어 남자는 다시 외쳤다.
“어이, 많이 바쁜가 봐?”
“미안!”
“미안할 것까지야. 얼굴 한 번 좀 보려고 했는데.”
“미안!”
계속 들려오는 사과에 남자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사람인 이상 말을 할 때마다 목소리의 톤과 말투가 미묘하게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안에서 들리는 저 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기계로 녹음한 뒤 튼 것처럼 완전히 똑같았다.
“…물건 놨다니까? 확인 안 해도 돼?”
“알았어!”
“…….”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대화가 이어지는 것 같으면서 뭔가 안 맞았다. 분명 아는 사람인데, 대화를 하면 할수록 사람과 대화하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목소리가 들리는 위치도 이상했다. 그가 기억하는 저 목소리의 주인은 키가 그리 크지 않았다. 기껏 해야 그와 비슷할 정도일까.
그런데 지금 목소리가 들리는 위치는 그보다 한참 높았다. 지금도 그렇다. 저자는 못해도 5m 이상의 높이에 서서 그에게 말하고 있다.
“…꿀꺽, 그럼 나 갈게.”
“알았어! 잘 가!”
이 낡은 센터는 복층 구조가 아니다. 모래가 덮인 지상 위에는 철골이 훤히 노출된 천장 밖에 없다.
그렇다면 목소리의 주인은 어디서 말하는 것인가.
아니, 정말 ‘인간’은 맞기라도 한 걸까?
‘생각해 보니 저 노예….’
주인님이 시킨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었다고 들었다.
불과 3주 전에 들었던 그 기억을 떠올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리가 아닌 본능이 그에게 고함을 지른다. 이곳은 이상한 곳이다. 더 이상 여기에 계속 있으면 안된다.
그는 차갑게 식은 다리를 억지로 이끌고 입구로 움직였다.
그가 막 입구 밖으로 나간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건 왔어?”
똑같은 말투와 목소리 톤으로 날아온 네 번째 질문에 남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간신히 수송선에 올라탔다. 조종석에 앉은 그는 흩날리는 모래 속에 있는 센터를 보며 결심했다.
오늘 일은 잊어버리자고.
센터에서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하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하니 묘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머리 안을 옥죄고 있는 무언가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응?”
수송선이 이륙하는 순간, 남자는 귀 안쪽이 축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땀이겠지.’
어차피 확인하고 싶어도 전신을 감싸는 보호복 때문에 이 자리에서는 불가능하다.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수송선이 떠난 이후, 센터의 입구에서 거대한 분홍색 촉수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것들은 컨테이너를 휘감은 뒤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 광경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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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애기야! 봤어? 봤어?」
[즈 즈즈즈즈(응. 고생했어)]
“잘 했어? 잘했어? 물건 왔어?”
[즈즈 즈즈즈(아주 잘했어)]
“잘했어! 알았어!”
내 칭찬에 26호가 기뻐하며 몸을 빛냈다. 녀석의 몸에서 나오는 알록달록한 빛이 센터 내부의 어둠을 걷어냈다. 그러면서 녀석 몸에 새로 생긴 ‘특수한 촉수’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녀석의 몸에 있는 지느러미나 일반 촉수와는 완전히 다르게 생긴 촉수. 생김새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구조도 일반 촉수에 비해 훨씬 복잡하다.
외형을 보면 촉수의 안쪽과 바깥쪽 모두 길고 가는 털처럼 생긴 돌기들이 잔뜩 나 있다. 돌기들은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쉴 새 없이 움직였는데, 이는 저 촉수가 녀석의 의식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반투명한 녀석의 몸을 보면 저 촉수가 몸 안쪽 깊숙한 곳과 연결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잘했! 그기, 그그, 그르르르? 알았어! 물, 하하하하.”
돌기들이 흔들리며 서로 맞댈 때마다 거기서 기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용을 제외하고 소리 자체만 들으면 사람이 말하는 것 같았다.
손처럼 다용도로 사용되는 일반 촉수와 다르게 저 촉수는 오로지 한 가지 기능만을 위해 존재한다.
바로 인간의 목소리를 따라 하는 것.
저 촉수는 녀석에게 ‘흉내 내기’ 특성을 이식하면서 생긴 부위다.
‘아예 새로운 촉수가 생길 줄은 몰랐는데.’
지금으로부터 3주 전, 나는 흉내 내기 특성을 26호에게 이식했다.
원래는 녀석이 아니라 하늘의 어머니에게 줄 생각이었다. 26호에게 이식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그쪽이 더 안정적일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그녀는 거절했다.
현재 내가 동료에게 특성을 이식할 수 있는 횟수는 총 2개까지다. ‘이중나선의 모노리스’ 자체가 우주괴물 타입과 연관이 있다고 하니 이후 늘어날 수도 있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흉내 내기 말고 다른 특성을 원한다고 말했다.
‘자기 스타일하고 맞는 특성을 달라고 했지.’
그녀가 포기한 덕분에 흉내 내기의 새 주인은 26호가 되었다.
특성을 이식한 뒤 녀석의 몸에는 소리를 만들 수 있는 촉수가 새로 생겼다. 외형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변이 촉수’가 흉내 내기의 기능을 계승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변화였다.
‘기존의 일반 촉수를 대체하는 형태로 적용됐어.’
변이 촉수와 흉내 내기용 촉수, 그러니까 ‘흉내 촉수’까지 얻었으니 제법 괜찮은 결과였다.
물론 그렇다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메커니즘이 너무 달라.’
나의 경우, 흉내 내기 특성을 습득하면 몸에 다른 생물의 유전자를 분석하는 기관이 추가로 생긴다. 이 기관이 목에 있는 발성기관에 정보를 보내면 그 생물의 목소리를 그대로 따라할 수 있게 되는 구조다.
하지만 26호에게는 그런 분석기관이 부재했다. 녀석이 누군가를 잡아먹는다고 해서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 낼 수 없다. 녀석이 내는 소리는 내가 잡아 먹은 노예의 목소리에 담긴 파장을 촉수의 돌기가 인식,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현재 시점에서는 나나 PS-111이 옆에서 목소리를 들려줘야만 녀석이 소리를 낼 수 있다. 기계로 음성을 녹음시킨 다음 합성하는 것과 비슷하다 보면 된다.
‘게다가 소리로 대화하는 방식에 익숙하지 않지.’
씨 데몬은 인간처럼 발성으로 소통하지 않는다. 녀석들은 몸에서 내는 빛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심해 생물이라서 그런 식으로 진화했다.
그렇다 보니 녀석은 소리로 대화하는 개념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녀석이 흉내 촉수를 제대로 써먹으려면 필요한 단어의 소리를 새로 배워야 한다.
「어려워. 잘 안 돼.」
[즈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연습하면 괜찮아질 거야)]
“여, 그르르, 연습! 알았어! 잘했어!”
[즈(그래)]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녀석이 배우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는 점이다.
‘원래도 특출한 녀석이었으니까.’
배우기 시작한 지 3주 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 정도다. 부지런히 가르치면 나만큼이나 목소리를 잘 따라 할 수 있을 거다.
‘내가 바쁘겠네.’
「나」「공부」「필요해」
“저도 새로 이식된 유전자에 대한 확인이 필요합니다.”
새 특성을 이식한 것은 26호만이 아니다. 아드하이와 PS-111에게도 유용한 특성을 이식했다. 26호에게 말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녀석들에게도 특성 활용법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물론 그 전에….’
[즈즈즈즈 즈즈 즈즈(먹이부터 먹고 하자)]
「좋아」
“알았어!”
“오늘은 어떤 생물입니까?”
‘유기적 진화’의 쿨타임이 끝나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11일.
남은 시간도 알차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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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하하, 알샤스 함장께서 면담을 요청하시는데 제가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화사한 분위기의 응접실.
컬트 두 명과 인간 한 명이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행성 의회 일은 잘 마무리되셨습니까?”
“다행히 이번 총독은 말이 통하시는 분이더군요. 문제없이 잘 끝났습니다.”
“그것참 다행입니다.”
“그보다 이분이 그….”
“안녕하십니까. 키소스님. 메가콥 노블캐피탈의 일원, 유진가의 시현입니다.”
컬트 귀족들이 주로 입는 정복을 차려입은 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했다. 키소스라 불린 컬트도 그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반갑네. 유진가의 시현. 몬잔 부족의 키소스요. 컬트식 예법에 익숙하군?”
“과찬이십니다. 컬트와 마주할 일이 많아 곁눈으로 보고 배운 것뿐입니다.”
“허허, 몬잔의 예법은 까다롭거늘 대단하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시현의 겸손한 대답을 들은 키소스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
사실 그녀가 컬트식 예법에 익숙한 것은 과거의 경험 때문이었다.
그녀는 유진 가문의 그림자. 손에 수많은 피를 묻혔고, 그중에는 컬트 귀족들의 피도 적잖게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사실을 이 자리에서 말할 리 없지만.
자리에 다시 앉은 키소스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유진가의 시현. 오늘은 무슨 일로 나를 만나자고 했지?”
“키소스님과 거래하고 싶습니다.”
“거래라. 내가 잘하는 분야로군. 자세히 말해 보게.”
“예. 컬트의 무기와 장비를 구매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키소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진가라면 메가콥에서 무기를 구할 수 있지 않은가? 왜 내게 구매하려 하는가?”
“저는 유진의 도움 없이 개인 세력을 구축 중입니다. 가문의 후광에만 의존하는 것보다 홀로 자립하고 싶어 그런 것이지요.”
“허어, 쉽지 않은 일일 터인데 대단하군.”
“키소스님께서 제게 투자하신다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투자라.”
그녀의 말을 들은 키소스가 손가락으로 의자 손잡이를 튕겼다.
“나는 메가콥의 가르멜다와 주로 거래하지. 그쪽의 수장이 말하길, 투자는 투명해야 한다고 하더군.”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베르잔02에서 노예를 마구 사들이는 이유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 말에 시현의 시선이 아주 잠깐, 키소스 옆에 앉아 있는 알샤스에게 향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걸 보면 알샤스가 말한 것이 아니라 키소스가 독자적으로 시현에 대해 조사한 것이 틀림없었다.
“부끄러운 일이나 최근 제국의 안보는 그리 좋지 않네. 아무리 내가 군축을 주장하는 입장이라 해도 이는 명백한 사실.”
“…….”
“나는 자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네. 자네가 사교도인지, 해적 나부랭이인지, 전혀 모르지. 나는 제국의 안보를 손상시키면서까지 부를 챙기고 싶지 않네.”
시현은 잠시 고민했다.
‘더 이상의 거짓말은 의미가 없어.’
키소스는 제국의회에서 닳고 닳은 의원이자 혁신파의 수장. 온갖 암투가 판을 치는 의회에서 지금까지 자리를 유지하는 노괴다.
그런 그를 속이는 일은 쉽지 않을 뿐더러, 만약 실패한다면 그녀는 베르잔02를 아예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이 행성에서 저자는 총독보다 더 위에 있는 최고 권력자이니.
‘…역시 정공법밖에 없나.’
그녀는 원래 계획했던 대로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시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가 안보에 해를 끼치는 자인지 의심이 든다고 말씀하신 거라면 사실입니다.”
“사실이라고?”
“예. 그 대상이 제국이 아니지만요.”
“호오?”
“제 목적은 유진의 가주직을 되찾는 것. 그걸 위해서는 현(現) 가주 아키라를 사살해야만 합니다.”
알샤스는 이런 얘기가 나올지 몰랐던 것 같았다. 두 눈이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으니.
그녀와 달리 키소스는 시현의 말이 꽤 재밌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알기로 유진의 가주는 메가콥의 황제, 그러니까 CEO자리를 겸하는 걸로 아는데.”
“맞습니다.”
“내가 주로 거래하는 가르멜다 가문은 CEO와 우호적인 관계인 걸로 아는데. 맞는가?”
“예.”
“그런데 내가 여기서 CEO에게 위해를 끼칠 자에게 투자할 것 같나?”
“키소스님께서는 아키라의 통치에 부정적이지 않습니까?”
“내가?”
그 말을 들은 키소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키라 유진은 제국과 적대하지는 않으나 그 이상의 관계는 거부하고 있습니다. 제국을 중심으로 열강들이 연대하는 질서를 원하시는 키소스님의 생각과 대비되죠.”
“…….”
“아키라 대신 제국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맞는 자가 CEO에 오른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입니다. 실제로 그것과 관련해서 이미 많은 ‘투자’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시현의 말대로 키소스는 메가콥 CEO 선출에 많은 투자를 하는 중이었다. 아키라의 유력한 경쟁자인 티앤씨에게 가르멜다로부터 얻은 신장비를 제공한다거나 등등.
다만 이는 전부 극비리에서 이루어진 일. 혁신파 내에서도 아는 자가 거의 없는데, 생판 모르는 자의 입에서 그 얘기가 나온 것이다.
“자네라면 ‘제국의 이해관계’에 부응할 수 있다는 건가?”
“정확히 말하면 ‘제국의 이해관계를 염두에 둔 자’가 CEO가 되도록 만들 생각입니다. 가령 티앤씨라든가 말입니다.”
“…….”
시현의 말이 끝나고 응접실은 침묵에 빠졌다.
키소스는 그녀를 한참 노려보다가 곧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재밌는 인간이로군.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야. 앞으로도 계속 같이 할 수 있으면 좋겠어.”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알샤스, 자네는 도대체 이런 인간을 어디서 찾은 건가?”
“어, 그게…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자네 덕분에 시현 유진을 만났으니 오히려 내가 고맙지.”
그 말과 함께 키소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기와 함선은 원하는 만큼 제공될 걸세.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
“자네를 내가 아는 이들에게 소개해주고 싶군. 지속해서 투자를 받을 수 있게 말이야.”
예상 밖의 친절에 시현은 깜짝 놀랐다. 무기를 거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인데, 아예 정기 루트를 뚫게 될 줄은 몰랐다.
“4일 뒤에 이 저택에서 파티가 열릴 예정이네. 그 자리에 오게나. 자세한 얘기는 그때 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키소스님. 또 뵙겠습니다.”
키소스에게 인사한 시현은 먼저 응접실을 나섰다.
키소스가 남은 알샤스를 배웅하려는데, 그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어르신.”
“왜 그러나?”
“그, 4일 뒤의 파티 말입니다. 데려가고 싶은 이가 둘이 있는데 혹시 괜찮겠습니까?”
“둘? 이번에는 또 누구인가?”
“한 분은 제가 지금 말씀드리기 곤란한 분이고, 다른 자는 제 오라버니입니다.”
“그 악동 알카디 말인가. 흠.”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낸 알샤스 앞에서 키소스가 턱을 쓰다듬었다.
“알카디가 사업 수완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어르신.”
“최근 총독이 폐허가 된 거리의 재개발을 고려하고 있어. 그 영광의 거리 같은 곳 말이야.”
“예. 그곳을 밀고 새 요새를 짓는다는 말이 나오는 걸로 압니다.”
“알카디가 그쪽 지역에 영향력이 있으니 그를 기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내가 한 번 힘을 써 보지. 파티에 데려오게.”
“감사합니다! 어르신!”
키소스가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자 알샤스는 고개를 크게 숙였다.
시현 유진, 키소스, 알샤스.
거래는 모두가 원하는 것을 얻는 걸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