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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309화 (310/400)

Episode 309 - 흔적(4)

지금까지 기생충을 여러 번 잃었으나 대부분은 내가 의도한 것이었다.

기생충은 적을 기만하거나 통제할 때 쓰는 소모품. 목표를 달성한 이후에는 죽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딱 한 번, 기생충으로 인해 위기를 겪은 적이 있었다.

티앤씨의 우주도시에서 지배했던 형사, 윌리엄. 그는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자해를 했다. 그 탓에 내 계획이 많이 어그러졌고.

그리고 지금 여기서 비슷한 일이 재현되었다.

‘아니, 오히려 더 안 좋아.’

오늘 알카디는 중요한 자리에 나갔다. 듣기로는 제국모함 함장이나 감시청장 같은 고위직들과 만나는 자리라고 했다. 오늘만큼은 이 행성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갔다고 해도 좋을 터.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죽다니.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왜 죽었는지를 알 수가 없어.’

기생충은 숙주에게 큰 위해가 닥치거나, 숙주가 내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할 시 내게 신호를 보낸다. 과거 윌리엄의 경우도 기생충이 내게 파장을 보냈기에 놈이 자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전조가 전혀 없었다.

그 말은 알카디 몸에 있는 기생충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다.

가장 안전한 장소, 예상치 못한 상황, 파장을 보내기도 전에 죽은 기생충.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랭커.’

‘기생 군체’로 만들어 낸 기생충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신체 내부를 검사하는 탐지기나 기술이 있으면 바로 걸린다.

즉, 기생충은 ‘누구도 그것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때’ 진정 그 효과를 발휘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알수록 기생충을 첩보나 기만전술에 사용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기생충의 존재를 다른 이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윌리엄이 자해한 사실을 알고 병원에 찾아간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한 일이다.

다시 알카디의 사례를 보면, 그는 모임에서 기생충이 걸릴 만한 검사는 받지 않았다. 또한 다른 이들에게 의심을 살 만한 행동도 삼갔다.

그런데도 걸렸다는 것은 그를 죽인 누군가가 기생충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 혹은 수단을 갖추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즉시 숙주를 죽인 것을 보면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도 잘 알고 있다는 거고.

기생충의 존재를 알고 있는 자, 기생충에게 많이 당해 본 자가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한 행동이다. 역시 상대는 랭커일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이야.’

잠입하기 전부터 컬트 랭커들이 있을 것이라고는 충분히 예상했다.

베르잔02는 게임에서도 컬트에게 요지 중 요지. 여기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에이모프인 내가 어떤 특성이 유용하고, 어떤 생물을 잡아야 하는지 훤히 꿰고 있듯이 컬트들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컬트 랭커를 피하기 위해 몰래 행성에 숨어 들어온 거였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걸리고 말았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어.’

지금은 당황해 하는 것보다 이후에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것이 먼저다.

‘아지트가 걸리는 건 시간문제야.’

기생충에 감염된 자의 행적을 조사하다 보면 내가 어디 숨어 있는지 나올 테니까. 빠르면 며칠, 못해도 일주일 안에 날 찾을 거다.

「괜찮아? 무슨 일이야?」

내가 갑자기 움직이지 않자 걱정됐는지 하늘의 어머니가 등에서 뛰어내렸다.

[즈즈즈즈 즈즈즈(알카디가 죽었어)]

「뭐? 언제?」

[즈즈 즈즈 즈즈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방금. 워낙 순식간이라서 기생충이 정보도 제대로 보내지 못했어)]

「오늘 물의 요새에서 열리는 모임에 나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죽었다고?」

[즈(응)]

그녀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몸을 굳혔다.

「설마 랭커가 있는 건가.」

[즈즈 즈즈즈 즈즈(그럴 확률이 높지)]

「…골치 아파졌는데. 어떻게 할 거야?」

[즈즈 즈즈 즈즈즈(지금 생각 중이야)]

기생충이 걸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추격이 시작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콜드블러드 랭커가 숨은 ‘물의 요새’로 진입하는 것.

다만 성체의 몸 상태로 적들의 시선을 피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내가 괜히 ‘영리한 약자’로 다시 변신하기 위해 30일 동안 기다린 게 아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놈과 싸울까?’

내가 22위의 콜드블러드 랭커를 찾으러 온 이유는 환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다. 상대는 하늘의 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오래 이 세계에 있었고, 그나마 우호적으로 우릴 대할 가능성이 높은 상대이기 때문이다.

하나 나는 지금 새로운 랭커의 존재를 인지했다. 22위를 만나기 전, 컬트 랭커를 노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목표 수정이라.’

기생충을 죽인 랭커. 추측컨대 이 세계에서 상당히 오래 활동한 자다. 베르잔02의 권력자들이 참여하는 모임에 정식으로 초대받을 정도니까. 심문 대상으로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아니야.’

잠시 고민해봤지만 전면전은 역시 좋지 않다.

놈도 나를 모르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다. 컬트 랭커가 권력자일 거라는 것만 추측 가능할 뿐, 그것 말고 다른 것은 하나도 모른다. 여기서 나를 노리는 랭커가 7위라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7위 컬트 랭커, 범호는 나와 비슷하게 예측이 불가능한 전략을 주로 사용한다. 내 존재를 인지한 순간부터 함정을 준비했겠지.

설령 적 랭커가 범호가 아니라고 쳐도 문제다. 적이 한 명이라는 보장은 없으니. 다른 동료 랭커들이 있을 확률이 매우 높으므로 무작정 싸우는 것은 위험하다.

‘그리고 잘못해서 22위가 적 편에 붙으면 곤란해져.’

내가 랭커와 싸우는 걸 본 다른 플레이어들은 하나 같이 내가 아닌 다른 랭커들을 도왔다. 그 이유는 내가 대부분의 랭커들과 크고 작은 원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걸 감안하면 22위도 게임에서처럼 행동할지도 모른다. 뒤늦게 하늘의 어머니가 나서서 말린다고 해도 상대의 판단을 바꾸기는 쉽지 않을 거다. 오히려 그녀가 기생충에 지배당하는 중이라고 여길 테지.

‘실제로도 그런 적이 있으니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콜드블러드 랭커의 ‘오해’를 막으려면 적어도 첫 조우만큼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 어떤 식으로 싸울 지가 중요한 건가.’

일단 전면전은 안 되고, 그렇다고 유인전도 용이치 않다.

여기는 적의 홈그라운드. 지하로 적을 유인해 잡는 것은 이익보다는 손해가 더 크다. 내가 적들을 몰살시켜도 지원부대가 끝없이 들어올 테니까. 제이슨을 잡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변신이 가능해지는 시간은 얼마나 남았어?」

말없이 고민하고 있던 하늘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질문에 나는 ‘유기적 진화’의 쿨타임이 끝나기 전까지 얼마 남았는지 체크했다. 남은 시간은 7일 미만. 컬트들이 나를 발견하는 것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즈즈 즈즈(7일 미만)]

「그 전에 놈들이 먼저 우리 은신처를 찾아내겠지?」

[즈(그래)]

「그 전에 내가 물의 요새에 잠입하는 건 어때?」

[즈즈즈(혼자서?)]

「응. 놈들이 은신처를 발견하는 데까지 며칠은 걸릴 테니 최대한 빨리 그 애를 찾아볼게. 만약 일찍 찾으면 걔를 데리고 이곳을 뜨면 되잖아.」

그녀가 단독으로 22위를 만나는 방법이라.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하나 역시 문제가 있다. 만약 22위가 그녀를 따르지 않는다면? 가뜩이나 시간이 없는데 그녀가 저항하면 골치 아파진다.

‘저항만 하면 그나마 다행이지.’

혹여나 변심해서 그녀를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꽤 골치 아파진다.

하늘의 어머니가 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저쪽도 랭커다. 어느 한쪽이 완전히 압도하지 않는 이상, 전투가 조용히 끝날 리 없다.

‘싸우다가 컬트 랭커에게 걸리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야.’

콜드블러드 쪽은 물론이고 그녀 또한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빛나며 나를 비추었다. 그녀도 스스로가 위험해 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상황이 좋지 않으니 위험을 감내할 생각으로 말을 꺼낸 것일 터.

‘여기서 그녀를 버릴 수 없어.’

하늘의 어머니는 나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존재. 이 자리에서 써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카드다.

[즈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추격대가 오기 전까지 22위를 찾는다는 보장이 없어서 안 돼)]

「놈들하고 싸우는 것도 위험해. 네가 컬트랑 싸우면 그 애는 저쪽에 붙을 걸? 솔직히 네 이미지가 좋지는 않잖아.」

[즈즈 즈즈(나도 알아)]

알고 있었지만, 그녀 입에서까지 이미지를 지적하는 말이 나오니 기분이 묘하게 별로였다. 농담식이 아니라 진지한 눈으로 저렇게 말하니까 더 그랬다.

‘내 평판이 그렇게 쓰레…잠깐. 이미지?’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었다.

내가 적에 대해 모르는 것처럼 놈들 또한 나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다. 내가 적의 능력을 미리 추측하는 것처럼 저쪽에서도 비슷하게 행동하겠지만, 완벽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령 내가 하늘의 어머니를 물의 요새 안에 보낸다거나 하는 것들은 게임이었으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일이다.

게임 속 나와 지금의 나.

이 틈이 어쩌면 돌파의 실마리가 될 지 모른다.

[즈즈 즈즈즈즈즈 즈즈즈즈(방금 생각한 건데 이건 어때?)]

「응?」

나는 머리에서 떠오른 아이디어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듣던 그녀였지만, 설명이 끝날 무렵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즈즈(어때?)]

「…솔직히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의외로 통할지도.」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즈(게임 속 나라면 할 수 없는 짓이니까)]

「하긴. 너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지.」

그녀는 내 말에 정확히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직 걸리는 부분이 많아. 운에 너무 의존하는 부분들은 조율해야 할 것 같아.」

[즈즈즈즈(물론이지)]

놈들이 오기 전까지 준비하려면 시간이 빡빡하다. 나는 다시 그녀를 등에 태우고 서둘러 센터로 출발했다.

게임에서 나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난관도 여러 번 돌파했다. 랭커가 아니었을 시절에는 랭커를 사냥했고, 성체는커녕 준성체에 불과하던 때에도 다수의 클랜을 집어삼켰다.

이 세계에 와서도 죽음의 위기에 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나는 살아남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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