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312 - 괴수 사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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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컴컴한 지하 미로 속에서 다수의 컬트들이 걸었다.
대부분은 슈트 형태의 강화복을 걸쳤으나, 일부는 아주 거대한 갑주를 입었다.
주변 컬트보다 머리 둘 이상 커 보이는 그들의 정체는 완전 무장한 계시의 눈 사제단. 그들이 입고 있는 강화복은 볼텍스원 사교단과 싸우기 위해 제작된 특수강화복이다.
아무리 사이킥 파워에 능한 컬트라도 볼텍스원의 힘에 노출되면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렵다. 수십 년 훈련을 거친 전사라 해도 사교도와 싸우다가 찰나의 순간에 광인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제단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전사들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최정예 사제들에게 지급되는 이 강화복의 이름은 ‘이단심문복’. 대량의 노바메탈을 암흑물질로 가공한 장비로 각종 에너지 계열 공격에 대한 면역 효과를 제공한다.
그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방어력도 뛰어나서 전함의 포격에도 버틸 수 있다. 방어력만 보면 경쟁자인 신전수호단의 ‘용린복(龍鱗服)’보다 뛰어나다.
단점이라면 특유의 내성 효과 때문에 전투에 도움이 되는 사이킥 기술의 보조를 전혀 받을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무게가 굉장히 많이 나가 움직임이 느려진다는 점이다.
게다가 지금 지하에 있는 자들 중 일부는 특별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무리 중간에 선 전사단원들은 둘이서 하나의 무기를 지탱한 채 걷는 중이다.
거인이나 신화적인 존재가 드는 창처럼 생긴 그 무기의 이름은 ‘슬레이어’. 신전수호단이 주로 사용하는 ‘데몰리셔’를 보급형 중화기로 개조한 물건이다.
보급형이긴 하나 크기가 크기다 보니 데몰리셔보다 월등한 화력을 보여 준다. 덕분에 단단한 갑각을 지닌 아웃스페이서와 싸울 때 주로 사용된다. 지금 그들이 상대해야 할 존재의 스펙을 생각하면 슬레이어가 반드시 필요해서 들고 온 것이다.
무거운 무기를 든 전사단, 마찬가지로 무거운 장비를 걸친 사제단으로 인해 토벌대의 속도는 굉장히 느렸다.
하지만 이를 탓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상대는 강력한 힘, 높은 지능, 그리고 변신 능력까지 갖춘 괴물. 이 정도 장비를 갖추지 않는다면 놈과 마주쳐봐야 개죽음당하기 십상이다. 실제 그들보다 앞서 들어왔던 토벌대가 큰 피해를 입었지 않는가?
그래서 토벌대는 느리지만 놈을 몰아넣을 수 있는 포위망을 구축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 탓에 꼬박 하루를 소모했으나 성과는 확실했다.
지금 지하에는 그들 말고 수천 명에 달하는 컬트 전사들이 각 지점에서 대기하고 있다. 토벌대나 각 지점에 대기 중인 전사들이 ‘세 머리의 악마’와 조우하면, 다른 지점의 전사들이 놈의 이동 경로를 대상으로 포위망을 재구축했다.
포위망이 구축되는 동안, 놈이 각 지점의 방어자들과 토벌대를 향해 공격을 시도했으나 그 피해는 경미했다. 역으로 토벌대가 놈에게 부상을 입히는데 성공했다.
약 3시간 전, 갈림길을 앞두고 이동 중이던 그들 앞에 갑자기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흉측하게 생긴 놈의 아가리로부터 강산성의 액체와 부식성 곰팡이 덩어리가 쏟아졌다.
두 종류의 공격이 닥쳐왔으나, 이번에는 토벌대도 제대로 준비한 상황. 중무장한 사제들을 앞세운 토벌대는 수월하게 공격을 방어해냈다. 사제들이 이단심문관의 방어 효과로 공격을 막는 사이, 슬레이어를 든 전사단원들이 사격을 개시했다.
놈의 단단한 갑각도 슬레이어의 물질 분해탄은 막지 못했다. 눈이 없는 머리의 뿔 중 2개가 탄에 맞고 파괴되었다. 놈도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지 뿔이 손상되자마자 바로 도망쳤다.
지하에 들어오고 난 뒤 첫 성과를 거둔 토벌대는 크게 고무됐다. 상처를 입힐 수 있다면 죽이는 것도 가능할 것이기에.
놈도 이후부터는 똑바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특유의 목소리 흉내 능력을 활용해 토벌대를 기만할 뿐이었다.
그러나 토벌대 입장에서는 아쉬울 게 없었다.
술래잡기가 길어질수록 유리해지는 쪽은 놈이 아니라 토벌대다. 이 행성의 주인은 컬트. 토벌대는 무한정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놈은 아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면 신전수호단의 지원 병력도 도착할 예정이다. 괴물 사냥의 전문가들이 합류하면 전세는 확실히 토벌대 쪽으로 기울게 되리라.
“전방 500m 내에서 움직임 발생.”
“순조롭군. 다른 지점의 사제들에게도 공유하라.”
“예.”
토벌대의 임시지휘관을 맡은 계시의 눈 사제단의 부단장은 부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슬레이어를 든 전사들은 언제든 발포할 수 있도록 준비했고, 이단심문복을 입은 사제들은 무기를 든 손에 힘을 꽉 줬다.
컬트들이 움직이며 만드는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흙 위에 맺혔다.
움직임이 발생한 지점과 토벌대 간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는 가운데, 어떤 소리가 들렸다.
“모두 정지.”
부단장의 말에 전원이 움직임을 멈췄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은 고요함 속에서 다시금 소리가 들렸다.
“도와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단장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이 근처에도 대기 지점이 있는가?”
“하나 있습니다.”
“연락은?”
재빨리 연락을 취한 부하는 고개를 저었다. 부단장은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모두 주의하라. 놈이 가까운 곳에 있다.”
“옙.”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이면 바로 사격을 개시하라. 명령이다.”
여태껏 놈은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그들을 기만해 왔다. 저 상대가 아군일 가능성은 낮다.
게다가 위에서도 이미 한참 전에 이와 관련해서 명령을 내렸다. 놈은 다른 지성체의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으니 의심이 가면 바로 공격하라고 말이다.
부단장의 명령을 받은 토벌대가 천천히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었다.
“도와줘어어어어! 도와줘어어!”
“신경 쓸 것 없다. 자기 임무에 충실하라.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
“도와줘어어어어어!”
그들이 가까워질수록 비명은 점점 더 처절해졌다.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부단장은 토벌대원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다독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목소리가 끊겼다. 정적으로 가득 차야 할 통로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어둠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본 부단장이 큰소리로 외쳤다.
“사격 개시!”
슬레이어와 각종 무기들이 불을 뿜으며 검은 굴을 환하게 밝혔다. 빛 이상으로 강렬한 폭음이 통로의 벽을 사정없이 때렸다. 번쩍거리는 빛 사이로 거대한 생물이 몸을 뒤트는 것이 보였다.
토벌대의 무차별 포화는 놈의 움직임이 멈추고 난 뒤에 끝났다. 흙이 뒤덮인 바닥은 어느새 놈이 흘린 피로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이만큼 피를 흘리고도 살아 있을 생물은 없지만 부단장은 방심하지 않았다.
“확인하도록.”
사제 한 명이 조심스럽게 놈을 향해 접근했다.
“부, 부단장님!”
“뭐지? 아직 살아 있나?”
“그게 아닙니다! 이리 와보십쇼!”
시체를 확인한 부하의 목소리에는 당혹스러워하는 감정이 역력했다.
부단장 또한 시체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가 왜 당황했는지 깨달았다.
그의 앞에 있는 시체.
흙 속에 몸의 절반을 숨기고 있던 놈의 정체는 세 머리의 악마가 아니다.
그건 이 행성 생태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존재, 레드웜이었다.
“어, 어떻게 합니까?”
차라리 놈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지금 상황보다 나았을 것이다.
‘…빌어먹을.’
죽은 레드웜은 아직 다 성장하지 않은 개체였다. 그 크기만 봐서는 이들이 뒤쫓는 세 머리의 악마와 비슷했다.
그 말은 놈이 레드웜인 척 행동하면서 토벌대의 이목을 피할 수도 있다는 것. 아니, 어쩌면 진작 이 주변에서 벗어났을 수도 있다.
생물의 크기와 진동만으로 추적하다 보니 생긴 맹점이었다.
“당장 위에 연락해라. 놈이 레드웜 사이에 섞여 있다고.”
“예. 알겠….”
그때 조용하던 통로가 진동했다. 그 진동이 뭘 의미하는지 부단장은 안다.
“다른 레드웜이 온다! 모두 전투 준비!”
세 머리의 악마는 단순히 도망치기만 한 게 아니었다.
놈이 준비한 거대한 함정이 그들을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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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렸네.’
보조기관을 땅에 대지 않아도 느껴지는 진동.
레드웜들이 움직인다는 신호였다.
놈들은 나를 성공적으로 포위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전혀 아니다. 반대로 내가 그들을 특정 장소로 인도했다.
바로 레드웜의 영역으로 말이다.
토벌대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으나 지금 그들이 서 있는 통로들은 내가 만든 게 아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레드웜이 지나다니는 땅굴에 살짝 곁길을 낸 것이 전부다.
또한 레드웜의 영역까지 유도하는 도중 적들에게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적들은 붉은 사막 아래에 타인의 목소리를 따라 하는 존재가 나 하나뿐이라고 판단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랭커도 뭘 잘못했는지 알겠지만….’
이제 와서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여기서 랭커가 나를 잡을 방법은 두 가지다.
직접 내려와서 나를 쫓거나, 아니면 움직이는 레드웜을 전부 다 죽이는 것.
‘아마 후자를 택하겠지.’
상대가 머리가 똑똑한 편이라면 이 상황이 내가 유도한 것이라는 사실을 얼추 알아차렸을 거다. 나에 대한 경계심이 바짝 높아졌는데 지하에 직접 들어올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제국모함을 꺼내는 것도 쉽지 않다. 베르잔02를 박살내는 건 성지를 폭격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다.
어찌어찌 파괴한다고 쳐도 내가 만약 죽지 않는다면? 텅 빈 우주에서 그 누구의 지원도 없이 나와 싸워야 한다는 리스크를 상대가 과연 감내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적 랭커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레드웜을 죽여서 나에 대한 추적을 원활하게 하는 법밖에 없다.
‘문제는 그게 내 진짜 의도라는 거지만.’
놈이 포위망을 구축하기 전, 내가 조우한 레드웜만 해도 80마리가 넘는다. 이렇게나 많은 레드웜을 일일이 추적하며 죽이는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빨라도 일주일은 걸릴 터.
놈들이 엉뚱한 목표를 뒤쫓는 동안, 나는 변신이 가능해 질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물론 중간에 양념도 좀 쳐야겠지만.’
적들이 내 계획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하려면 적절한 타이밍에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적도 헛된 희망을 품고 레드웜을 계속 뒤쫓을 테니까.
내가 ‘약한 상태’에 있다고 계속 착각하도록 만드는 것은 덤이고.
‘그럼 다시 움직여…아차.’
아직 레드웜과 조우하지 않은 자들을 찾으려 갈려던 찰나, 잊고 있던 일을 떠올렸다.
나는 전투용 팔을 들어 왼쪽 머리에 달린 뿔 2개를 붙잡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힘을 줘서 뿔을 부러트렸다.
26호는 내가 멀쩡한 뿔을 부러트리는 모습을 보고 촉수로 나를 툭툭 건드렸다.
「큰애기야, 뿔 왜 부셔?」
[즈즈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즈 즈즈(내가 낫지 않았다고 연기하는 거야)]
「연기? 나 연기 알아! 내가 나쁜 애들 흉내 내는 것도 연기야!」
[즈즈즈(정확해)]
「나도 연기 잘해! 봐봐!」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변이 촉수’를 꺼냈다. 평범한 촉수가 꾸물거리며 변하더니 뿔이 부러진 왼쪽 머리와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색깔만 분홍색이다 뿐이지 지금 내 머리의 생김새와 똑같았다.
[즈즈즈(잘하네)]
「나 잘해!」
[즈즈 즈즈 즈즈 즈즈 즈즈 즈즈즈즈 즈즈(나쁜 애들 만날 때는 원래 했던 대로 해 줘)]
「응. 연기야.」
촉수를 원래대로 바꾼 녀석이 내 머리 위에 올라탔다.
그 후 나는 녀석과 함께 다니며 적들을 농락했다. 도중에 아드하이도 합류한 이후에도 계획은 바뀌지 않았다.
예상했던대로 적들은 레드웜을 줄이는 방법을 택했다. 단,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인원들이 지하에 투입되었다.
‘심지어 신전수호단까지 동원할 줄이야.’
신전수호단은 제사장의 경호원이자 괴물 사냥의 전문가들이다. 본래 이들은 베르잔02에는 주둔하지 않는다. 계시의 눈 사제단이 있기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곳에 용린복을 입은 전사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다른 행성에서 급히 불러들인 것이 틀림없었다.
‘진짜 나를 잡고 싶은가 본데….’
하나 그 방법이 잘못됐다.
수많은 인원들이 레드웜을 나로 착각하고 죽이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덕분에 지하에서 이틀 동안 큰 피해 없이 버틸 수 있었다.
‘앞으로 한 시간.’
대략 1시간만 더 지나면 ‘유기적 진화’의 쿨타임이 끝난다. 그 뒤에는 변신한 상태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
이미 한참 전에 하늘의 어머니와 PS-111이 나를 탈출시키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저 밖의 약속 장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적을 멀리 떨어뜨려 놓을까.’
[즈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즈(볼일이 있으니 먼저 가 있어)]
「응.」
「빨리」「와」「기다릴게」
지금까지 수고한 26호와 아드하이를 한 번씩 쓰다듬어 주고 먼저 보냈다.
나는 녀석들을 뒤로한 채 컬트 무리가 모여 있는 방향을 향했다.
‘응?’
그들과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내 보조기관이 묘한 기운을 감지했다.
이 지하에 온 컬트들은 절대로 소수로 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느껴지는 이 인기척, 결코 다수의 느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익숙함, 어디서 분명 느꼈던 것 같은데.’
내가 있는 쪽으로 오는 존재는 극히 희미한 발자국 소리와 기계처럼 정제된 움직임을 보였다. 분명 내가 직접 마주했던 자의 몸놀림인데 언제 봤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혹시 모르니.’
나는 상대가 오는 방향을 향해 산성 브레스를 준비했다. 굴 너머에서 수상한 인기척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나는 브레스를 발사했다.
녹색의 껄쭉한 액체로 이루어진 대포가 통로를 가로질러 목표물에게 명중했다.
“…산성 점액이라니. 변한 게 없군.”
‘어라?’
산성 연기가 자욱이 깔린 통로에서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무형의 칼바람이 안개를 가르며 날아와 중앙의 머리에 있는 뿔 하나를 벴다.
‘이건 설마?’
“나를 기억하나?”
나는 뿔 끝이 잘렸다는 사실보다도 상대의 정체에 더 놀랐다.
검은색의 긴 장발과 호리호리한 몸매, 그리고 서늘하면서도 잔잔한 광기가 느껴지는 눈.
내가 만난 자들 중 이런 특징을 지닌 자는 한 명뿐이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맞닥뜨렸던 강적.
목숨을 건 싸움 끝에 내게 패배한 유전자 조작 인간.
‘시현 유진?’
한 번 죽었던 그녀가 이 어두운 지하 세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