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317 - 유물(4)
「통과입니다.」
경비원의 통신이 끝나자 커다란 금속 문이 열렸다. 비행선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터미널을 통과했다.
바이오 돔 형태의 초대형 구조물로 구성된 ‘물의 요새’에 진입하려면 여러 개의 게이트를 통과해야 한다. 우주요새나 궤도거주지처럼 돔의 외벽이 여러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규모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 게이트 간의 거리만 수km에 달했으니까.
그리고 방금 우리는 외벽에 있는 마지막 게이트를 통과했다.
「휴.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끝났네.」
“고생했어.”
조종석에 앉아 있던 하늘의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나서야 할 때를 빼놓고 대부분은 그녀가 담당했기에 적잖게 힘들었을 거다.
「네가 죽은 덕분에 경계가 풀렸어.」
“묘한 느낌의 말인데.”
「그래? 적절한 타이밍에 잘 죽은 것 같은데.」
그녀의 농담대로 적들은 내가 죽은 걸로 알고 있을 거다. 내가 이를 의도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두 가지 요인 덕분에 ‘뇌신의 공격을 받아 죽은 에이모프’라는 상황을 연출할 수 있었다. 만약 그 요인들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적들과 한창 전투 중이었겠지.
‘특히 그 특성. 그런 것을 지금 시점에 얻게 될 줄은 몰랐는데….’
「끝?」「나」「나가도 돼?」
그때 뒤편에서 흘러나온 사념파가 내 괴물의 촉수를 간질였다. 철창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아드하이였다.
녀석은 철창 안에 갖혀 있다는 것보다 긴 시간 동안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든 것 같았다. 처음에는 입가의 촉수로 날개와 꼬리의 비늘을 부지런히 다듬더니 지금은 그저 푹 퍼져서 엎드려 있었다.
26호는 그나마 얌전히 있었지만, 몸 색깔이 좋지 않았다. 어두운 분홍색이라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 녀석 또한 아드하이와 마찬가지로 심히 지루함을 느끼고 있다.
[즈즈즈 즈 즈즈즈즈(조금만 더 기다려 줘)]
「이미」「많이」「기다렸어」
「심심해. 친구도 잠만 자고. 공부할 것도 없어.」
26호는 휴면 상태에 들어간 PS-111의 몸을 촉수로 툭툭 쳤다. 사실 PS-111은 케이블을 비행선과 연결해서 아까부터 운행을 돕는 중이었지만, 녀석이 그걸 알 턱이 없다.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잘 참으면 나중에 선물 줄게)]
「선물?」「어떤 선물?」
「무슨 선물?」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너희들이 좋아할 만한 거야)]
물의 요새의 규모는 광명의 거리와 영광의 거리를 합친 것보다 수십 배 이상 크다. 당연히 도시 내에서 취급하는 생물도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22위 랭커를 찾아다니는 동안, 녀석들에게 희귀 생물을 맛보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런데 녀석들은 먹이 말고 다른 선물을 원하는 것 같았다. 긴 목을 살며시 쳐든 아드하이가 앞발로 나를 가리켰다.
「선물」「큰어른」「비슷한 거?」
「나도 반짝반짝 갖고 싶어!」
[즈(응?)]
「큰어른」「몸」「변했어」「느낌」「특이해」
「맞아. 반짝반짝 지지징 하고 움직이는 거 신기해.」
「저게 무슨 말이지?」
유일하게 하늘의 어머니만 녀석들의 얘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 빼고 다른 애들은 의태 기관에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내 몸에 생긴 변화를 금방 알아챘다.
지금 나는 ‘영리한 약자’로 변신한 상태다.
켄타우로스를 닮은 체형, 몸 전체를 덮은 털, 중앙의 머리를 제외한 양측의 머리가 갑옷처럼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 등 기존에 변신했던 모습과 동일하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두 가지.
먼저 팔을 보면 역할을 하는 부위가 가슴쪽 작은 팔 밖에 남지 않았다. ‘기생 군체’ 특성이 비활성 상태가 된 것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 가슴 근처를 보호하는 갑각에서 일어난 변화다.
현재 흉부 갑각을 보면 은색으로 빛나는 물결무늬가 있다. 검은색 일변도의 갑각 위에 생긴 은빛 무늬는 마치 은하수를 연상시켰다. 흉부 전반에 새겨진 이 무늬는 가슴쪽 작은팔에도 이어졌다.
지금은 털 때문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지만, 이 무늬는 흉부 갑각의 안쪽에서부터 시작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심장, 그러니까 ‘용의 심장’이 아닌 에이모프의 심장과 연결되어 있다.
갑자기 왜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이냐면, ‘약탈자의 부정형 다면체’ 덕분이다.
시현 유진과 싸우던 중 나는 그녀가 가진 장비 중 크리스털을 닮은 부품을 포식했다. 그 결과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포식 거머리의 손’는 새로운 장비 관련 특성으로 대체됐다.
바로 ‘공허의 주사위’라는 특성으로.
공허의 주사위는 여태까지 약탈자의 부정형 다면체로 얻은 특성들과 성격이 사뭇 달랐다.
뇌신의 힘을 구현하는 ‘신의 회초리’, 손에 쥔 적의 생명력을 강탈하는 포식 거머리의 손. 모두 전투에 도움이 되는 특성들이다.
반면, 공허의 주사위는 전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오히려 이 특성 하나만 단독으로 있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처음에는 의외였지.’
시현이 사용하던 무기는 유전자 정수를 파괴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부품도 비슷한 효과를 가졌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훨씬 더 좋다고 해야 할까.
이 특성은 지금까지 내가 보유했던 특성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막강한 특성이다.
‘사용 시, 보유한 특성들의 쿨타임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로 돌리는 것.’
공허의 주사위가 발동하면 흉부에 있는 은빛 무늬가 전신에 퍼진다. 무늬가 완전히 몸을 잠식하면 걸려 있는 모든 특성의 쿨타임이 사라진다.
그 덕분에 아직 사용할 수 없었던 ‘레버넌트 기관’, 쿨타임이 몇 분 남았던 유기적 진화의 제약도 전부 초기화되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가장 대단한 것은 이 특성의 부가 효과다.
은빛 무늬가 몸에 퍼진 상태에서는 보유한 특성들의 쿨타임과 제약이 사라진다. 그 말은 즉, 공허의 주사위가 활성화된 상태에서는 모든 특성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이건 당시 텍스트박스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에 확실하다. 특성 지속 시간은 3분을 채 넘지 않을 정도로 짧았지만, 그동안은 모든 특성의 제약 부분이 아예 공란이 됐었다.
그 덕분에 나는 ‘사냥의 표상’과 ‘가변형 생체병기’를 동시에 사용해서 방어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걸로 뇌신의 공격을 버티고, 바로 초광속 항해를 써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쿨타임을 초기화시키는 특성은 정말 드문데….’
볼텍스원 중 하나가 이와 비슷한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획득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예전에 게임을 할 때도 그 특성을 얻느라 고생한 기억이 있다.
그것 말고는 온갖 제약이 덕지덕지 붙은 레버넌트 기관이 쿨타임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특성이다.
물론 공허의 주사위도 완벽한 것은 아니라 단점이 하나 있다.
「약탈자의 부정형 다면체(공허의 주사위)(66)]
반투명 텍스트박스에 떠 있는 저 숫자. 공허의 주사위에 걸린 쿨타임이다. 다시 사용하려면 66일을 기다려야 한다.
‘주사위라는 이름을 보면 저게 무작위인 것 같은데.’
한 번 더 써봐야 확실해지겠으나 현재는 사용이 불가능한 상황. 저 숫자를 보고 추측컨대 쿨타임이 제멋대로 바뀌는 것이 이 특성의 단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쿨타임 부분이 변수지만.’
특성 효과가 너무 좋다 보니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특성을 얻은 이상, 전보다 훨씬 다양한 전략을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도대체 시현은 어디서 이런 무기를 얻었지?’
그녀가 사용한 무기도, 공허의 주사위의 원 재료가 된 부품도 게임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것들이다.
이곳은 현실이니 내가 모르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게임에 존재하지 않던 것들과 여러 차례 조우했었으니,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나 그걸 감안해도 그녀의 무기는 지나치게 강력하다. 마치 플레이어가 만든 것처럼 말이다.
‘그녀가 랭커와 연관되어 있나?’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시현과 적대 관계인 3위 랭커였지만 그는 아닐 거다.
내 기억에 그는 게임에서도 독선적인 성격이었다. 나도 놈과 싸울 때 몇 번씩 놈의 성격을 이용해서 이득을 본 적이 있었으니.
그런 성격파탄자가 자기 적한테 저런 위협적인 물건을 넘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 행성의 랭커들도 아니야.’
단독으로 나를 쫓아온 것을 보면 우리가 찾는 22위나 이 행성에 있는 컬트 랭커와도 관계가 없을 거다. 그랬으면 진작에 협력해서 나를 쳤겠지.
‘시현에 관해서는 22위를 찾은 다음 확인해봐야겠어.’
지금쯤 시현은 컬트들에게 불려가 나의 죽음에 대해 알려주고 있을 거다.
뇌신의 타격지점 밖에서 본 거긴 하나 그녀는 유전자 개조 인간이다. 거리가 멀어도 내가 없어지는 것을 봤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녀의 시점에서 나를 보면 뇌신의 공격에 맞고 몸이 뒤틀리다가 완전히 소멸한 것처럼 보일 터.
컬트와 랭커들은 그녀가 제공한 잘못된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녀는 뇌신의 공격이 개시되기 전, 가장 마지막으로 나와 함께 있던 자니까.
설령 적들이 의심을 품고 해당 지점을 샅샅이 뒤진다고 해도 내 흔적은 나오지 않는다. 초광속 항해로 발생한 에너지 반응도 뇌신의 포격으로 인해 묻혔을 거고.
‘애초에 뇌신을 맞으며 초광속 항해를 썼다고 누가 생각할까?’
나와 함께 다닌 하늘의 어머니도 그럴 줄은 몰랐다고 할 정도다. 적 랭커가 이를 예상하고 초광속 항해의 흔적을 조사할 가능성은 낮다.
‘어쩌다가 찾는다고 해도 이미 늦었지.’
내가 탄 비행선은 이미 물의 요새에 진입 중이니. 이제 와서 밖을 다 헤집고 다닌다고 해도 나를 찾기에는 늦었다.
「큰애기야, 나도 반짝반짝 갖고 싶어.」
「나도」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데 녀석들의 파장이 느껴진다.
녀석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약탈자의 부정형 다면체는 넘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런 무기를 또 구하는 것은 어렵겠지.’
[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즈즈으 즈즈즈즈(이건 줄 수 없지만 대신 더 좋은 것으로 찾아볼게)]
「진짜로?」
「약속?」「약속해」
[즈(그래)]
내 확답을 듣자 녀석들이 기뻐한다. 아드하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고, 26호는 몸의 색깔을 밝은 분홍색으로 바꿨다.
‘쩝. 바빠지겠는데?’
원래는 희귀 생물을 구해다가 먹일까 생각했다. 그랬는데 녀석들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더 좋은 선물을 가져다 줘야 할 것 같다.
그때, 어두컴컴하던 전방 유리가 환하게 빛났다.
어둠이 걷히고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밝은 아이보리색 빌딩이었다. 여기서는 옥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거대한 빌딩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빌딩의 숲 저편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폭포가 보인다. 장대한 규모의 하늘색 물줄기가 거대한 구조물 위에서 쏟아진다.
저건 자연적으로 생성된 폭포가 아니다. 바이오 돔과 마찬가지로 컬트들의 건축 공학이 집대성된 거대한 구조물 위에 설치한 인공 폭포다.
「물이 둥둥 떠다녀. 신기해!」
「난쟁이」「많아」
폭포 주변에는 수많은 공중수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수로 위를 보면 수많은 호버 보트가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아이보리색 빌딩에서 나온 컬트을 실어날랐다.
수로와 빌딩 사이에는 흙으로 덮인 도로가 깔려 있었고, 커다란 나무들이 가지런히 심어져 있었다. 나무들 사이에 가벼운 복식을 한 컬트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실제로 마주한 물의 요새는 고대의 유적지와 미래의 도시가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게임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대단하네.」
[즈즈즈(그러게)]
붉은색 모래 사막 한가운데 세워진 푸른 폭포의 도시.
마침내 물의 요새 진입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