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저 자리에 앉으면 어떤 기분일까?
지금껏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던 생각이었으나 그녀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의식이 서서히 의자와 좁혀진다. 얼굴 없는 자들이 속삭임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본다. 분명 표정이 보이지 않아야 할 터인데, 왠지 모르게 웃는 것처럼 느껴진다.
모든 것이 기이함 천지였으나 그녀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당장에라도 저 의자에 앉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너 ■■■ ■■■.」
‘그녀’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에 앉기 직전, 그녀의 시선이 문득 얼굴 없는 자들 중 하나에게 향했다.
가까이 와서 보니 알 수 있었다.
그의 몸, 깨진 거울처럼 금이 가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그녀는 깨어났다.
“…….”
익숙한 꿈과 별개로 식은땀에 젖은 채 깨어나는 감각은 상당히 불쾌했다. 유리 벽을 거칠게 밀어서 바이오캡술을 빠져나온 그녀는 습관적으로 패드를 들었다.
그녀는 패드 화면에 떠오른 장문의 메시지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두 눈은 메시지 중 딱 한 단어, ‘분석 실패’라는 부분에 고정되어 있었다.
“…실패인가.”
숙원 중 하나였던 괴물을 해치우는데 성공했으나,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는 힘들었다. 그녀가 입은 피해가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놈과 싸우던 중 크리스털 배터리를 잃었다. 이제 ‘심연 파괴자’를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2회 분량 밖에 남지 않았다.
‘이걸로는 아키라를 죽일 수 없어.’
메가콥 CEO 아키라 유진은 시현과 마찬가지로 유전자가 개조된 존재. 어쩌면 그녀가 죽였던 괴물만큼 많은 유전자가 이식됐을지도 모른다.
그 말은 즉, 심연 파괴자로도 단번에 죽이지 못할 수 있다는 뜻.
아키라는 괴물 이상으로 교활한 적이다. 놈과 싸울 때 이번과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녀는 패배하고 말리라.
“그래서 여기에 기대를 걸었는데…후우.”
그녀는 패드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유물을 함부로 쓸 수 없게 된 이상,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다.
그녀가 새로 기대를 건 것은 바로 강화복 ‘화이트메이든’에 묻은 피였다. 괴물은 뇌신의 공격에 완전히 소각되었으나 강화복에 말라 붙은 피는 아직 남아 있었다.
시현은 기함에 있는 연구실에게 그 피를 분석할 것을 명령했다. 괴물의 유전자를 육신에 이식할 수만 있다면 막강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 달리 혈액 분석은 계속 실패했다.
피에 들어 있는 유전자 종류가 워낙 다양한데다가, 이물질도 많이 섞였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더 많은 샘플이 필요했지만, 놈은 시체도 남기지 않고 증발한 상황. 당연히 불가능한 요구였다.
결국 연구팀은 현시점에서는 분석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기함의 설비로는 괴물의 유전자를 분석할 수 없었다.
‘메가콥 데이터베이스였다면 가능하겠지만….’
달에 있는 메가콥 데이터베이스는 최고의 연구 설비를 갖추고 있다. 그곳이라면 괴물의 유전자를 분석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문제는 메가콥 데이터베이스도 잠입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
메가콥 정보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그곳은 유진의 그림자조차도 목숨을 여러 번 걸어야 할 정도로 보안이 철저하다.
잠입 도중 목숨을 잃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본말전도.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닌 이상, 메가콥 데이터베이스 침투는 보류해야 한다.
‘남은 방법은 결국 그것뿐인가?’
시현은 범호가 남긴 미완성 지도를 떠올렸다.
현재 그녀가 처한 상황은 베르잔02에 오기 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세력은 어느 정도 복구했지만, 유물이라는 히든카드를 잃어버렸으니까.
아키라라는 강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무기가 필요하다. 지금 상황에서는 저 지도가 유의미한 결과물을 내놓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저 지도를 완성시키는데 필요한 단서가 전무하다는 것.
시간이 많다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다. 메가콥의 내전도 종식 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다. 전쟁이 끝나면 아키라는 시현 유진의 세력을 정리하러 들 터.
아키라의 추적 함대가 움직이기 전까지 어떻게든 지도를 완성시켜야 한다.
“…머리가 아프군.”
매일 꾸는 악몽에 현실적인 문제까지 겹쳐서 그런 것일까?
아무래도 머리를 식혀야 할 것 같다. 덤으로 식은땀에 절은 몸도 닦아내고.
그녀는 비틀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이건 어때? 내가 보기에는 비슷한 느낌인데.”
「…….」
내 질문에 강화복을 입은 그리폰 볼프, 하늘의 어머니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호박색 눈동자가 단말기형 패드의 화면을 주시했다.
옆에 있던 PS-111도 몸을 숙여서 패드를 함께 바라봤다. 안구를 대체하는 붉은색 카메라 렌즈가 수축과 확장을 반복했다.
지금 이 저택에는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다. 로베츠로부터 콜드블러드 노예에 대한 정보를 얻은 뒤, 애들을 불렀다.
“수색 목표의 성장 예측 시뮬레이션과 대조한 결과, ‘중간애기’가 말한 특징과 78% 일치합니다.”
「…기다려 봐. 그렇게 말하니까 더 헷갈리잖아.」
보다시피 하늘의 어머니와 PS-111은 내가 추려 낸 노예들을 확인 중이다. 26호와 아드하이는 저택 내부를 구경하러 갔고.
「인상이 약간 변하긴 했지만 맞는 것 같아.」
“그래?”
「안 본 지 꽤 됐으니까. 오히려 예상했던 것보다 덜 변했다고 해야 할까.」
잠시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던 하늘의 어머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광명의 거리부터 시작된 22위 랭커 수색도 어느새 끝이 가까워졌다.
알카디는 두 달 전쯤에 22위로 추정되는 콜드블러드를 물의 요새의 노예상 로베츠에게 팔았다.
그리고 로베츠는 구매한 노예를 고급 호텔에 대여했다.
설정상 컬트들은 콜드블러드를 그리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사교도, 아니면 범죄자 취급이라 고급 호텔에서 종업원으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인면충에게 물어보니 호텔 측에서 타종족 접대용으로 쓰기 위해 일부러 요청한 거라고 한다. 콜드블러드치고는 외모도 나쁘지 않고, 손님에게 순종적이어서 제법 평가가 좋다고.
‘얘기만 들었을 때는 플레이어 같기도 하고.’
콜드블러드면서 컬트의 고급 호텔에서 일하는 것이 특이하긴 하다. 다만 플레이어라는 결정적인 증거로 보기는 힘들다.
또한 22위는 지배파 랭커들에게 쫓기는 몸. 몰래 숨어도 모자랄 판에 무슨 생각으로 각 세력 상류층이 들락날락하는 장소에 간 걸까.
‘아니면 다른 플레이어와 결탁했나?’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것도 막상 와서 보니 애매하다.
녀석이 지배파가 아닌 다른 파벌과 결탁했다면 뭐 하러 노예로 있겠는가.
컬트가 메가콥이나 스타유니언보다는 인도적이라 해서 노예에게까지 친절한 것은 결코 아니다. 애초에 그랬다면 노예라는 표현도 쓰지 않겠지. 어지간히 좋은 대가를 약속하지 않는 이상, 플레이어를 노예로 부리는 것은 쉽지 않을 거다.
반강제적인 노예가 된 거라 보기도 어려운 게, 로베츠는 녀석이 좋은 노예라고 평가받는다고 했다. 정신 지배, 기생충 같은 수단은 물리적으로 상대를 억압할 수 있어도, 일을 잘하게 만들 수는 없다.
‘역시 얼굴을 직접 봐야 해.’
상대가 진짜 22위라고 확정된 것도 아닌 이상, 이 이상 고민해 봐야 큰 의미는 없다.
「그래도 직접 만나 봐야 확실해질 것 같아.」
하늘의 어머니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말을 덧붙였다. 나도 동의의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큰어른」
그때 아드하이가 나를 불렀다.
새집에 와서 신이 난 대형견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녀석이 내 곁에 다가왔다. 녀석의 길고 통통한 꼬리가 나무통을 휘감고 있는 게 보인다.
「이거」「먹어」
[즈(응?)]
녀석은 내 옆에 나무통을 내려놓고, 꼬리로 내 다리를 톡톡 쳤다. 나무통과 녀석의 몸에서 달콤한 향기가 났다.
‘술?’
로베츠의 노예들을 처리하던 중, 오크통 비슷하게 생긴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는 곳을 봤었다. 노예 중 하나가 와인 병을 들고 나오길래 술 창고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진짜였나 보다.
「그거 혹시 술 아니야?」
“그런 것 같은데.”
「맛있어」「함께」「먹어」
술이라.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술을 마신 적은 한 번도 없다.
사실 현실 세계에서도 술을 즐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좋아하지 않은 게 아니라 좋아할 수 없었던 거지만.
술을 마시기만 하면 얼굴과 몸에 난 화상 자국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되냐면, 좀비처럼 몸에 피부 가죽을 덧대어 붙인 것처럼 흉한 모습이 된다. 그 탓에 나 혼자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과 술을 마신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맛있다고 하니 궁금한데.」
미묘한 기분의 나와 달리 하늘의 어머니는 꽤 반기는 눈치였다.
“술 좋아해?”
「좋아하는 것까지는 아니고. 여기서나 저기서나 먹을 기회가 많이 없었거든.」
“알코올이 섞인 음료라니 흥미가 갑니다.”
22위로 추정되는 노예가 어디 있는지는 이미 확인했다. 남은 건 적당한 기회를 노려 녀석을 만나는 것뿐. 오늘 해야 할 일은 다 끝났으니, 여기서 휴식을 취해도 무방하리라.
‘한 번 먹어볼까?’
하늘의 어머니, PS-111 둘 다 술을 맛보고 싶어하니 나도 살짝 끌린다.
나는 몸을 숙여서 가슴쪽 작은 팔로 나무통을 붙잡았다. 입 양쪽에 달린 엄니로 술통에 구멍을 내자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캐러멜 색의 액체가 솟구쳤다.
색깔만큼이나 달착지근한 향기가 나는 술이 입으로 흘러들어 왔다. 짜릿함은 잠시였고, 설탕을 졸인 것 같은 숙성된 풍미가 입과 목구멍에 퍼졌다.
「이거」「맛있지?」
“그러게?”
「나」「난쟁이 둥지」「수색」「발견」「성공」
“잘했어.”
아드하이는 날개를 살짝 핀 채로 긴 목을 높이 들며 으쓱거렸다. 녀석이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취해도 될 만큼 술의 맛은 훌륭했다. 이 정도로 맛좋은 음료는 헬사이드 호넷의 고치 이후 처음 맛본다.
‘둘 다 숙성한 음료라 그런가?’
풍미만 따지면 고치 쪽이 더 깊지만, 이쪽은 그보다 하나의 잘 만들어진 상품에 가까운 느낌이다. 단맛을 기반으로 다양한 맛이 나지만 혼란스럽지 않고 잘 분배된 느낌이라고 할까.
「나도 맛보고 싶은데 잔이 없네. 이거 어디서 가져온 거야?」
「저쪽」「다른 둥지」
“그냥 마시지.”
「에이, 그래도 잔이 있어야지.」
「여기 잔 있어!」
「고마…응?」
분홍색 촉수가 건넨 유리잔을 받던 하늘의 어머니는 멈칫했다.
‘26호?’
「큰애기랑 친구도 받아!」
어느새 다가온 26호가 내게 접시를 건네줬다. 녀석이 워낙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바람에 나도 뒤늦게 눈치 챘다.
[즈즈즈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즈즈(여기에 따라 마시라고 가져온 거야?)]
「응. 사람의 먹이는 ‘잔’에 넣어서 먹어야 한대! 신기하지?」
녀석은 와인병, 항아리, 장식용 꽃병 등 각종 물건들을 촉수로 쥐고 있었다. 물건 중에는 내가 저택에 온 녀석에게 준 사이킥 교육용 키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새 저걸 보고 배운 건가?’
아드하이가 술을 맛보는 사이, 선물 키트를 확인했나보다. 똑똑한 녀석답게 금방 지식을 습득하고, 행동에 옮긴 것 같다.
‘접시에 술이라.’
「여우와 두루미 같네.」
“애 기죽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농담이야.」
나는 나무통을 내려놓고 26호를 쓰다듬어줬다. 내게 칭찬을 받자 녀석이 기쁜지 몸을 밝게 빛냈다.
[즈즈 즈즈 즈즈즈즈(같이 잔에 넣어 먹을까?]
「응! 재밌겠다.」
나는 녀석이 가져온 꽃병에 술을 채웠다. 녀석은 꽃병에 촉수를 빨대처럼 꽂더니 쭉쭉 빨아들였다.
「맛있다!」
「나도」「먹을래」
촉수를 가진 둘이서 술을 즐기는 사이, 하늘의 어머니도 가득 채운 술잔을 부리에 가져다 댔다.
「괜찮은데? 위스키랑 비슷한 느낌인데 단맛과 향이 더 강해.」
“그렇지. 도수도 더 약한 것 같고.”
「나는 이 정도가 좋은 것 같네.」
「못생긴 친구」「맛」「어때?」「좋아?」
「네가 그 말만 안 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네.」
「맛있어!」
셋이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나는 PS-111에게도 술을 따라줬다.
“PS-111, 너도 받아.”
“감사합니다.”
갈고리 발톱으로 술이 담긴 병을 쥔 PS-111은 생체조직과 기계가 섞인 혀를 내밀어 안의 액체를 핥았다. 술맛이 제법 인상적이었는지 녀석이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