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때?”
“분석 결과, 베르잔02산(産) 선인장 75%, 고르모스03산 헤븐푸르츠 11%, 아모리아09산 용설란 시럽 10%, 기타 4%. 흥미로운 맛입니다.”
“마음에 드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녀석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문득 갸웃거렸다.
“이런 표현이 적합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듭니다.”
“익숙하다고?”
“액체를 흡입한 순간, 제 기억에 있던 유사한 성분 조합 데이터가 출력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데이터를 입력한 적이 없습니다.”
여태껏 여러 먹이를 섭취한 녀석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녀석도 자신이 모르는 기억을 떠올렸다는 상황 자체가 꽤 낯선 것 같았다.
‘입력한 기억이 없는 데이터라.’
PS-111은 지배파의 여러 랭커들이 힘을 합쳐 만든 뮤턴트 스크리머다. 그리고 그 재료 중 하나가 바로 지성체의 머리, 그러니까 뇌다.
전에 스타유니언의 기계위원회 중 하나인 피라 일레븐의 배에서 PS-111이 만들어지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복제된 콜드블러드의 뇌를 스크리머 기계에 이식하는 과정을 말이다.
‘과거의 기억인가?’
현재의 PS-111은 신체가 크게 손상된 이후, 26호의 힘에 새로 만들어진 존재다. 망가진 뇌도 원본과 다른 형태로 복구된 터라 녀석이 갖고 있던 기억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하지만 전부 없어진 것은 아니야.’
녀석이 익숙하다고 표현한 건, 술을 마시면서 과거 스크리머가 되기 전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크리머가 되기 전에 이 술을 마셨던 것 아닐까?”
“제가 말입니까?”
“그래. ‘지금의 네’가 인지하지 못하는 기억이라면 과거의 기억뿐이겠지.”
내 말을 들은 녀석은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병을 내려다 봤다. 병 바닥에 남은 캐러멜 색 액체에 녀석의 붉은색 렌즈가 비쳐 보였다.
잠시 침묵하던 녀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타당한 지적입니다. 이 술과 제 과거가 서로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51%입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이 술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자.”
“감사합니다.”
녀석의 얼굴은 금속 재질의 피부 때문에 표정을 확인하기 힘들다. 평소와 똑같이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녀석의 사정을 알아서 그런 걸까. 많이 심란해 보였다.
“더 마실래? 마시다 보면 기억이 더 떠오를 지도 몰라.”
“부탁드립니다.”
내가 술을 따라주려고 나무통을 쥐자 녀석이 통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리고 나와 똑같이 혀를 내밀어 통에서 흐르는 액체를 핥아마셨다.
“주재료 성분과 전혀 다른 맛이 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녀석은 차가운 입술에 묻은 술을 혀로 핥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때, 우리의 모습을 본 26호가 통통 튀며 다가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친구야, 그렇게 먹으면 안 돼. 사람 먹이는 담아 먹어야 해.」
“저는 사람이 아니라서 이렇게 해도 됩니다.”
「아니야. 사람 먹이는 그렇게 먹으면 안 돼.」
26호가 끼어드는 바람에 녀석과의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그 후, 컬트 저택에서의 술 파티는 저장고가 텅텅 비고 나서야 끝났다.
-
“이곳을 떠나겠다고?”
컬트식 저택의 응접실.
나이 든 컬트 키소스의 질문에 시현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의원님 덕분에 장비와 노예는 충분히 확보했습니다. 제게 투자해주셨으니 저도 그에 따른 성과를 보여드려야겠지요.”
“메가콥의 황제는 쉽지 않은 상대일 텐데. 부족하지 않겠는가?”
“현재 메가콥은 종전을 앞둔 상황입니다. 장기간 유지됐던 전시 체제가 해제되면서 사회 전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지금이야말로 CEO를 죽이는데 기회라 할 수 있습니다.”
“흐음.”
시현의 말은 사실이었다.
타종족과의 교류를 강조하는 혁신파의 수장답게 키소스는 메가콥에 많은 인맥을 보유했다. 덕분에 메가콥의 세가 많이 약해진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메가콥을 지탱하던 일곱 귀족 중 하나가 몰락하면서 불황이 닥쳤다고 들었네. 황제와 귀족들이 그것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 하더군.”
“그렇습니다.”
“호기라.”
그 말을 끝으로 키소스는 입을 다문 채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그녀가 떠나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진가의 시현이여. 섭리가 그대의 뜻을 이루어 주시길 비네.”
“감사합니다.”
예의를 갖춰 인사를 마친 시현은 응접실을 나섰다.
복도를 걷던 그녀는 얼마 안 가 벽에 쓰러지듯 기댔다. 최근 악몽에 두통까지 겹치는 바람에 잠을 거의 못자고 있었다.
유전자 개조의 부작용인가 싶어 검사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검사를 담당한 연구팀장은 정신적인 문제로 보인다고 했다.
그 말대로 약을 먹어도 악몽과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나마 바이오 캡슐에 들어가 있으면 수면을 취할 수 있었으나, 그 시간도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후.”
서늘한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으니 두통이 약간 가라앉았다. 작게 한숨을 쉰 그녀는 다시 걸었다. 복도를 나와 회랑을 걷던 중 건너편에서 낯익은 자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시현 유진?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안녕하십니까. 알샤스님.”
상대는 빛나는 은발을 가진 컬트 여성, 알샤스였다. 그녀는 시현의 존재가 예상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베르잔02를 떠나기 전 키소스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렇군요. 결국 떠나는 겁니까.”
“키소스님을 연결해 주신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추후 인사드리러 따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키소스의 저택에서 알샤스가 나타난 것은 그녀 또한 약속이 있다는 뜻일 터. 상대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시현은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잠깐만요.”
“예?”
떠나려는 시현을 붙잡은 알샤스는 품에서 작은 데이터칩을 꺼냈다.
“받으세요.”
“이건?”
“당신이 신비한 유물들을 찾아다닌다고 선배님께 들었습니다. 이건 제가 예전에 구한 지도입니다.”
그녀의 입에서 지도라는 말이 나오자 시현은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녀의 검은색 눈동자가 손바닥 위에 있는 데이터칩에 고정되었다.
“지도라고 하셨습니까?”
“사실 지도라고 하기도 민망한 물건입니다만. 미완성 지도거든요.”
“미완성….”
“예언자회에 지인이 있어서 물어봤습니다. 수수께끼의 병기를 숨겨둔 제단에 관한 지도인 것 같은데 더 자세한 것은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사실 알샤스가 건넨 데이터칩과 범호가 남긴 지도가 호응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누가 의도하지 않은 이상, 그런 형편 좋은 일이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하나 그녀의 감은 다르게 반응했다. 이 데이터칩이 망가진 지도를 복구하는 핵심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시현은 이성으로 감정을 간신히 억누른 채 알샤스에게 물었다.
“병기가 숨겨진 장소로 안내하는 지도를 왜 제게 주시는 겁니까?”
“솔직히 흥미가 가긴 하지만 저는 제국모함의 함장. 불확실한 정보를 추종해서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시현님은 저와 달리 그런 제한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저 또한 어르신과 마찬가지로 시현님에게 투자한 입장입니다. 시현님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제게도 이득이 됩니다. 그러니 받으시길.”
알샤스와 시선을 마주한 시현은 상대의 진심을 느꼈다. 저 여성 컬트는 진실로 그녀가 이 지도를 갖기를 원했다. 그것 외에 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은 위대한 계획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무 걱정도 안 하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결국 시현은 데이터칩을 받기로 했다.
-
에이모프가 준성체에 도달하면 대부분의 독에 면역이 된다. 준성체 특전으로 얻은 특성 ‘완전면역체’ 덕분이다.
어마어마한 양의 술을 마셨음에도 내 육체는 전혀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술을 마실 때부터 취기가 전혀 안 느껴졌지.’
사실 에이모프의 육체라면 완전면역체 특성이 없어도 술에 취하거나 하지 않을 거다. 신진대사가 전반적으로 뛰어난 터라 알코올 따위는 금방 분해시킬 테니까.
이러한 점은 나 말고 다른 애들도 비슷했다. 26호와 PS-111은 나무통 수십 개를 비워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물론 모두가 전혀 술에 취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아드하이의 경우, 술을 마실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헬사이드 호넷의 고치를 먹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지.’
당시 고치의 액체를 마시던 다른 갤러곤들도 녀석처럼 평소보다 즐거워 보였다. 야생동물들이 발효된 열매를 먹고 취기를 즐기는 그런 느낌에 가깝다고 할까.
다만 아드하이는 자기가 취할 수 있는 신체를 지녔다는 것을 몰랐던 것 같다. 잔뜩 취한 녀석은 실내를 마구 뛰어다니다가 내게 안겨서 잠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저택 주인이 쓰던 방에서 잠들어 있지.’
「아드하이는 아직 자나 보네.」
“그러게.”
수건 한 장을 어깨에 걸친 하늘의 어머니가 방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일어나자마자 목욕을 했는지 그녀의 털에 물방울이 잔뜩 맺혀 있었다. 젖은 털이 몸에 바짝 달라붙은 탓에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신격화 단계가 올라가도 크게 변한 건 없네.’
알몸이 된 그녀의 등에는 마노(瑪瑙)색 날개 문신이 있었다. 전투가 없을 때 날개가 있으면 움직이기가 거추장스럽기에 문신으로 바꿔 수납하곤 한다. 날개가 젖으면 말리기 귀찮아지니 일부러 문신으로 바꾼 것 같다.
아무튼 날개 문신을 제외하고는 이전 모습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그래서 그 애로 추정되는 노예는 언제 만날 생각이야?」
아름다운 육체를 가진 그리폰 볼프는 수건으로 털을 닦아내며 물었다. 나는 그녀의 몸에서 시선을 떼고 생각했단 바를 말했다.
“가능하면 오늘, 멀리서 한 번쯤 확인해 보고 싶네.”
「오늘? 그렇게 빨리?」
“만에 하나 상대가 22위가 아닐 가능성도 있으니까. 직접 마주해서 얘기를 나누기 전에 확인만이라도 하게.”
「하긴. 일리가 있네.」
“로베츠에 대한 것만 다 정리하면 바로 움직일 거야. 가는 길에 대형 창고 쪽도 체크하고.”
「창고를 쓸 일이 없으면 좋겠네.」
로베츠를 찾으러 가기 전, 대형 창고를 빌린 이유는 두 가지였다.
명목상 우리는 희귀 생물을 판매하기 위해 요새에 들어온 것. 차라스의 이름으로 창고를 대여해 놔야 서류상 문제가 없다.
그리고 두 번째는 22위 수색이 길어질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다. 영리한 약자의 지속시간이 끝나면 나는 길이만 60m에 달하는 거대한 괴수로 돌아간다. 원래의 몸으로 안전하게 숨을 곳이 필요하니 미리 대형 창고를 빌려 둔 거다.
‘간단히 말해 보험용이지.’
창고를 쓰기 전에 끝나면 좋겠지만, 세상일이 그렇지 않은가. 원하는 대로 이뤄진다는 보장이 없으니 미리 대비해야 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지금 얘기한대로 움직일 생각이야.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말해 줘.”
「지적하고 싶은 것?」
그녀는 눈을 살짝 찡그리더니 손가락으로 내 가슴팍을 가리켰다.
「그 몸.」
“응?”
「지금 너 목욕 가운을 입은 컬트로 보이거든?」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났다.
마지막으로 잡아먹은 로베츠는 거의 알몸에 가까운 상태였다. ‘의태기관’은 페로몬을 통해 타인이 나를 ‘내가 잡아먹은 지성체’의 모습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위장과 잠입에 뛰어난 효과를 발휘하는 특성이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페로몬을 감지할 수 없는 기계나 생물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을 자의적으로 바꿀 수 없다는 점이다.
‘다른 건 몰라도 보이는 모습을 못 바꾸는 것은 귀찮단 말이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인면충 숙주’ 특성으로 이 단점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면충 숙주가 있으면 몸에 최대 다섯 명의 유전자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 의태기관은 잡아먹은 지성체의 유전자 정보를 분석해서 페로몬으로 구현하는 특성. 필요하면 인면충 숙주가 저장한 정보를 끄집어내서 사용해도 된다.
중요한 정보원인 제이슨만 고정이고, 나머지 넷은 여태까지 수시로 바뀌었다. 나는 이 요새에 잠입할 때 썼던 ‘차라스’의 거죽을 뒤집어썼다.
“이러면 됐지?”
「…그거 볼 때마다 진짜 소름 끼친다. 목소리까지 완전히 바뀌니까 더 무서워.」
그녀는 영락없이 지식관리자 차라스로 느껴지는 나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복장은 됐고.’
모습을 바꾼 나는 단말기 패드를 이용해서 로베츠의 비서에게 연락했다.
「주인님?」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래서 당분간 가게에 못 나가.”
「예? 어, 그게, 어제 말씀하신 건….」
“어제?”
「그 가게에 수상한 자가 침입할 수도 있다고 하셔서 방비를 강화하라고 하셨는데요. 볼프 노예가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고 합니다.」
“그건 내가 해결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 경비는 전부 해제해. 아, 그리고. 장부에서 수당을 빼서 어제 경비를 선 자들에게 줘라. 특히 그 볼프 노예한테는 추가로 더 얹어 주고.”
「아! 알겠습니다!」
“고생했다.”
그렇게 로베츠의 목소리로 통화를 마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늘의 어머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무 자연스러운 거 아냐?」
“한두 번 한 것도 아닌데 뭐.”
「여러 번 해서 되는 연기 실력이 아닌데. 역시 핏줄 덕분인가….」
혼자 중얼거리는 그녀를 뒤로 한 나는 로베츠의 죽음이 걸리지 않도록 정리를 시작했다. 감시실과 대피실에 남은 카메라의 영상들을 전부 제거하고, 요새의 전사단에게 신고한 것을 무효화하기 위해 취소 신청도 넣었다.
물의 요새의 그 누구도 노예 상인 한 명이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리라.
모든 정리가 끝난 뒤, 나는 MPS-05, 하늘의 어머니와 함께 저택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