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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322화 (323/400)

     

   저택은 26호와 PS-111이 지키기로 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는 26호, 컬트 사회에 대한 지식을 가진 PS-111이라면 문제가 생겨도 잘 대처할 거다.

     

   “먼저 대형창고부터 들리자.”

     

   우리는 하늘의 어머니가 끌고 온 차라스의 비행선을 이용해 창고가 위치한 곳으로 날아갔다.

     

   아직 낮의 태양이 깔린 시각, 요새는 인파들로 북적였다. 와인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던 폭포도 제 색깔을 찾아 푸른빛을 뿜어냈다. 폭포와 이어진 수로에는 알록달록한 호버 버스가 수면을 뒤흔들며 돌아다녔다.

     

   태양에 반사되어 찬란히 빛나는 빌딩들을 지나자 피라미드 형태의 거대한 건축물이 보였다. 가까이 가니 피라미드를 구성하는 블록 하나하나가 전부 창고였다.

     

   「많기도 하네.」

   “누가 수색해도 안 걸릴 수 있겠어.”

     

   미리 계약해 뒀던 창고는 그 크기 때문인지 피라미드 아래쪽에 있었다.

     

   차라스의 단말기 패드를 이용해 들어가 보니 로베츠의 저택이 통째로 들어가도 좋을 만큼 넓었다.

     

   ‘대신 높이는 별로 안 높네.’

     

   요새에 들어오기 전, 컬트들과 싸웠던 땅굴보다도 높이가 낮았다. 내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면 몸을 바짝 엎드리고 있어야 할 정도로 말이다.

     

   하긴 생각해 보면 씨데몬이나 기간테리움 같이 몸 자체가 아주 거대한 생물을 넣지 않는 이상, 높이까지 높을 필요는 없다.

     

   「그 애를 최대한 빨리 찾아야겠네.」

   “작음! 높이! 작음!”

   “그러게.”

     

   오늘 확인할 노예가 22위가 맞기를 바라며 창고를 나왔다.

     

   ‘창고는 됐고. 이 다음은….’

     

   나는 가슴쪽 작은 팔로 새 목적지를 입력했다.

     

   「콜드블러드 노예가 있는 호텔은 북쪽 거리인데?」

   “호텔에 직접 찾아가는 것은 리스크가 커. 대신 노예 숙소로 가서 기다리는게 더 나을 거야.”

     

   입력을 완료하자, 비행선이 중심지와 반대 방향으로 직진했다.

     

   창고 피라미드는 손님과 상인들이 상품을 보관하는 장소다. 고급 호텔들이 위치한 거리와 크게 떨어져 있지 않다.

     

   탁 트인 곳에 거대한 창고 피라미드를 벗어나자마자 중심가의 빌딩과는 많이 다른 형태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원지로 보이는 넓은 호수. 그 위에 각종 도형 형태를 띤 건물들이 떠 있다. 호버보다 큰 비행체, 즉 대형 함선에서나 쓸 법한 자기부상 기술이 접목된 고가의 건물들이다. 호수 상공에 떠 있는 호텔들의 모습은 물 위에 핀 연꽃을 연상시켰다.

     

   ‘저건 게임 속에서 본 거랑 비슷하네.’

     

   컬트 행성 중 수도성 같이 설정상 오래된 행성에 가면 공중 부양 시설물들을 볼 수 있다. 지하보다 지상, 공중에 거주하는 것을 선호하는 컬트 문화, 종족 전체가 사이킥 파워를 다룰 수 있다는 특징이 어우러져서 저런 식으로 지상에 떠 있는 건물들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플레이어들 평은 별로였지만.’

     

   부양 장치가 망가지면 건물도 끝장이다. 컨셉 플레이가 아닌 이상, 저런 건물에서 거주하는 플레이어들은 거의 없었다.

     

   아무튼 이번에 우리가 갈 곳은 저 멋진 호텔들이 아니다. 비행선은 호수를 조용히 가로질렀다.

     

   로베츠가 말하길, 콜드블러드 노예가 일하는 호텔은 노예 전용 숙소를 운용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숙소는 호텔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비행선이 향하는 곳은 아름답지만 어딘가 낡은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그 구역에는 호텔에서 일하는 노예들을 위한 시설들이 배치되어 있다.

     

   구역 근처의 비행장에 착륙한 뒤, 나는 하늘의 어머니와 함께 로베츠가 알려 준 숙소로 향했다.

     

   「보니까 다들 메가콥 미들캐피탈만큼 잘 사는 것 같은데.」

   “고급 호텔에서 일하는 노예니까 취급도 다르겠지.”

     

   베르잔02에서 부가 가장 집중된 도시라 그런지 컬트의 노예들 또한 생활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노예들의 표정은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지만, 행색 자체는 노예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깔끔했다. 건물도 낡았다는 점 빼고는 잘 관리받는 것 같았고.

     

   ‘게다가 감시탑도 있어.’

     

   구역 자체는 낮은 층의 건물들 위주로 채워져 있었지만, 중심지의 빌딩처럼 높은 감시탑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주 목표는 노예를 감시하기 위한 거겠지만, 치안을 안정시키는 기능도 함께 수행할 터. 만약 구역 내에서 싸움이라도 난다면 저들이 즉각 대응할 거다.

     

   ‘싸울 거면 감시탑을 피해야….’

   「!」

     

   감시탑을 보며 어떻게 싸워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의 어머니가 나를 툭 쳤다.

     

   “왜 그래?”

   「찾았어.」

   “뭐? 어디?”

     

   그녀가 과일을 파는 가게를 가리켰다. 가게 앞에는 낯익은 인물이 서 있었다.

     

   파충류와 인간, 풍뎅이류 곤충, 이렇게 세 가지 동물의 특징을 고루고루 섞은 것처럼 보이는 종족, 콜드블러드였다. 녀석은 로베츠의 파일에서 본 사진과 흡사하게 생겼다.

     

   「그 애가 맞아.」

   “확실해?”

     

   내가 묻자 그녀는 확신에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하늘의 어머니는 상대가 22위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는 작은 키의 콜드블러드에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어떻게 할까.’

     

   원래 오늘 계획은 로베츠가 판 노예가 정말 22위인지 얼굴을 확인하는 거였다. 하늘의 어머니가 보여주는 반응을 보면 목표 자체는 달성했다고 봐도 좋으리라.

     

   “급할 것 없으니 좀 더 지켜보자.”

     

   그래도 혹시 모르니 22위로 추정되는 콜드블러드를 계속 살펴보기로 했다. 나와 하늘의 어머니는 거리를 유지한 채 녀석의 뒤를 따라갔다.

     

   녀석은 과일을 몇 개 사더니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옆 가게에서 물건을 몇 개 더 산 이후부터는 가게에 진열된 상품들을 훑어보기만 했다.

     

   ‘키가 작다고 듣긴 했는데, 진짜 작네.’

     

   아드하이처럼 왜소화 특성을 타고 태어난 건지, 녀석은 유독 작은 키를 가졌다. 워낙 작아서 콜드블러드가 아닌 어린아이가 분장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응?’

     

   뒤쫓기 시작한 지 몇 분이 지났는데 뭔가 이상했다. 녀석은 더 이상 물건을 사지 않고 어디론가 계속 이동했다. 처음에는 구경하는 시늉이라도 했는데, 이제는 그러지도 않았다.

     

   ‘숙소에 가는 것도 아닌데.’

     

   일이 잘못 돌아간다고 생각한 순간, 녀석이 인적이 드문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설마?’

   「…저 애, 미행을 눈치챈 것 같은데.」

     

   수백m의 거리를 유지하며 움직였는데도 걸릴 줄은 몰랐다.

     

   녀석을 쫓는 중에도 보조기관으로 주변에 실행된 탐지 기술은 없는지 계속 확인했다. 사이킥 기술로 우리를 발견한 것은 절대 아니다.

     

   ‘혹시 탐지 장비를 가져온 건가?’

   “계획 수정이야. 오늘 얘기해야겠어.”

     

   무슨 수단을 썼는지 모르겠으나 저쪽에서 우리의 존재를 이미 인식한 이상,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여기서 담판을 지어야 한다.

     

   내 말뜻을 이해한 하늘의 어머니도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나와 그녀는 녀석이 사라진 골목에 따라 들어갔다.

     

   예상대로 작은 키의 콜드블러드는 낡은 건물들 사이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아 언니.”

     

   콜드블러드가 내 곁에 선 동료의 본명을 읊었다. 파충류의 눈이 하늘의 어머니에게 잠깐 머물다가 옆에 있던 내게 향했다.

     

   “…모프박이. 네 짓이구나.”

     

   이번에는 옛 동료의 이름을 불렀을 때와 완전히 달랐다. 나에 대한 멸칭을 씹어 먹듯 내뱉은 22위의 눈동자에 어두운 빛이 깃들었다.

     

   「어? 잠깐! 이사벨!」

   “…….”

     

   당황한 하늘의 어머니가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22위, 아니 이사벨이라 불린 콜드블러드 랭커는 무기로 보이는 물건을 이미 빼든 상태였으니까.

     

   ‘이런.’

     

   분위기를 보아하니 쉽게 풀기는 글렀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 이사벨이 내게 달려들었다.

   낡은 건물들 사이에 위치한 골목.

     

   이사벨이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내게 바짝 접근한다. 손에 들린 곡도가 사냥에 나선 맹수처럼 날렵하게 내 머리를 노리고 날아든다.

     

   나는 4개의 다리로 땅을 박차 상반신을 뒤로 빼는 것과 동시에 2개의 꼬리를 휘둘렀다. 오른쪽 꼬리 끝에 달린 집게로 곡도를 노리는 한편, ‘검은 탐식자 대포’가 없는 상태의 왼쪽 꼬리로는 적의 손목을 노렸다.

     

   ‘영리한 약자’ 상태라서 집게의 크기도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이사벨이 들고 있는 곡도에 비해 훨씬 크다.

     

   ‘곡도의 절삭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크기 차이는 무시 못 해.’

     

   곡도의 칼날 너비는 기껏 해야 손가락 두 마디 정도에 불과하다. 양자가 부딪치면 저쪽도 손상을 피하기 힘들 터.

     

   상대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곡도를 잡은 손이 급선회했다. 예리한 칼날이 거친 집게의 표면을 쓸고 지나가며 섬뜩한 파열음을 냈다.

     

   그사이, 나의 왼쪽 꼬리가 먹이를 포착한 구렁이처럼 상대의 두 팔을 휘감기 위해 움직였다. 꼬리 끝이 막 상대의 손목에 닿으려는 순간, 이사벨의 허리가 기괴한 형태로 굽혀졌다. 허공에서 발목이 거의 손목과 같은 위치로 올라가더니 내 꼬리 끝을 걷어찼다.

     

   두 꼬리의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그녀는 꼬리를 박찬 반동을 이용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나 역시 꼬리로 유의미한 타격을 주기 어려울 것이라 예측했다. 나는 4개의 다리로 바닥을 박찼다.

     

   “칫!”

     

   막 땅에 착지한 적으로부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녀석은 황소처럼 돌진해 오는 나를 피해 옆으로 굴렀다. 낙법을 취한 그녀를 향해 말이 하듯 뒷다리로 걷어찼지만, 그녀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피해냈다.

     

   그뿐만 아니라 녀석은 마치 곤충이나 도마뱀이 벽에 달라붙듯 내 등 위로 올라탔다.

     

   ‘어딜.’

     

   털로 덥수룩하게 덮인 나의 등에는 인면충들의 둥지가 숨어 있다. 내 명령을 전달받은 인면충들이 털가죽 안쪽에서 마비 음파를 준비했다.

     

   다섯 마리의 식인벌레들이 치명적인 음파를 토해내려는 순간, 이사벨이 다른 도구를 꺼내 들었다. 녀석은 육각형의 작은 판처럼 생긴 도구를 내 털 안쪽에 던진 뒤, 등에서 뛰어내렸다.

     

   인면충으로부터 비명과도 같은 강렬한 소음이 공중에 퍼진다. 하지만 그 소리가 녀석이 닿는 일은 없었다.

     

   녀석이 던진 육각형 판에서 실드가 형성되며 내 몸 전체를 감쌌기 때문이다. 인면충의 음파들은 무형의 장벽에 막혀 허무하게 사라졌다.

     

   놈이 던진 도구는 사이킥 실드를 생성하는 장치. 음파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 내 위로 던진 거다.

     

   나는 오른쪽 꼬리에 달린 집게로 실드를 후려쳐서 깨뜨렸다. 종잇장처럼 찢어진 보호막의 틈으로 곡도가 날아 들어왔다.

     

   ‘그럴 줄 알았지.’

     

   나는 녀석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곡도가 내 머리의 뿔에 박혔다. 얇은 날이 뿔에 꽂히는 바람에 녀석으로부터 찰나의 틈이 생겼다.

     

   녀석이 나와 바짝 붙어 있는 지금이야말로 양옆의 머리가 활약할 시간이다. 녀석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왼쪽의 머리가 아가리를 크게 벌렸다.

     

   “!”

     

   양옆의 머리가 움직일 줄은 몰랐는지 녀석이 눈을 부릅뜬다. 그녀는 결국 곡도를 버리는 걸 선택했다. 내 이빨이 비늘로 뒤덮인 녀석의 팔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왼쪽 머리가 움직이는 동안, 대기하고 있던 오른쪽 머리가 녀석을 향해 부패를 유발시키는 곰팡이더미를 쏟아 냈다. 맞으면 꽤 아프겠지만 녀석이 자초한 일이다.

     

   녀석은 다급히 몸을 굴려서 날아온 곰팡이 뭉치를 피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완전히 피할 수 없어서 발가락 끝에 약간 묻었다.

     

   “큭!”

     

   녀석은 가차 없이 손톱으로 자기 발가락을 잘라버렸다. 곰팡이로 새까맣게 물든 발가락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제법이네.’

     

   녀석이 발가락을 절단하고 뒤로 한참 물러난 탓에 전투는 잠깐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나는 중앙의 머리를 숙여서 가슴쪽 작은 팔로 뿔에 박힌 곡도를 뽑았다.

     

   ‘처음 보는 무기네?’

     

   소닉 블레이드 같은 부류의 초진동 무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어떤 버튼이나 기계 장치도 없는 그저 단순한 곡도에 불과했다.

     

   ‘예리함과 내구도가 무시무시하지만 말이야.’

     

   어떤 금속으로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내구도가 상당하다. 꼬리의 집게와 마찬가지로 내 머리의 뿔은 단단한 편이다. 아무리 절삭력이 좋은 무기라 해도 내 뿔과 집게에 맞부딪치고 손상 하나 없을 줄은 몰랐다.

     

   ‘모르는 것들을 갖고 있으니 조심해야겠어.’

     

   나는 곡도를 뒤편에 내던지고, 22위 랭커 이사벨을 응시했다.

     

   뿔이 손상된 것 자체는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어차피 금방 재생할 테니까.

     

   문제는 저쪽이 본 실력을 보여 주지 않고 있다는 것.

     

   ‘어떤 볼텍스원의 힘을 빌렸을까?’

     

   에이모프의 핵심이 특성을 어떻게 획득하고 사용하는 것이라면, 콜드블러드 플레이의 핵심은 바로 볼텍스원과의 관계다.

     

   볼텍스원에게 종족 전체의 삶이 저당 잡힌 콜드블러드는 어떤 존재의 힘을 빌리는지에 따라 싸움 방식이 크게 달라진다.

     

   어떤 놈은 육탄전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주고, 어떤 놈은 막강한 사이킥 파워 능력을 부여한다. 계약의 대가만 지불한다면 에이펙스 최상위권에 있는 존재의 힘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거다.

     

   다만 여기는 컬트의 영역. 나와 마찬가지로 녀석도 힘을 함부로 사용하기 어렵다.

     

   설정상 컬트들은 볼텍스원을 극도로 혐오한다. 콜드블러드가 멸시받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

     

   여기서 볼텍스원의 힘을 사용한다면 베르잔02의 모든 군사력이 녀석에게 집중될 거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의도가 있거나.’

     

   나의 악명을 아는 녀석이니 일부러 감춘 것일 가능성도 있다. 볼텍스원의 힘뿐만 아니라 고유 특전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쪽이 가진 패를 내보이지 않은 것처럼, 저쪽도 마찬가지다.

     

   ‘좀 더 겨뤄….’

   「잠깐! 둘 다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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