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움직이려는데 하늘의 어머니가 나와 이사벨 사이로 끼어들었다.
「미안하지만, 기회를 줘!」
[즈즈즈즈 즈즈즈즈즈 즈즈 즈즈즈즈즈 즈즈즈즈즈(저쪽에서 공격한다면 나도 대응하겠다고 말했을 텐데?)]
「그 전에 대화할 시간을 준다고 말했잖아!」
문신으로 숨겨뒀던 마노(瑪瑙)색 날개까지 빼든 그녀가 나를 간절히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서 필사적인 감정이 느껴진다.
‘대화라.’
나는 그녀와 이사벨에 시선을 두면서 보조기관으로 주변을 살폈다. 이사벨를 쫓을 때 이미 확인했지만, 이곳은 감시탑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다. 크게 싸우지 않는 이상 전사단에게 걸릴 가능성은 낮지만, 그렇다고 리스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싸우는 것이 좋지 않은 건 맞아.’
컬트에게 걸릴 수 있다는 부분을 떠나서도 이곳은 녀석이 우리를 유인한 장소다. 저쪽의 홈그라운드나 다름없는 곳이기에 싸움 도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당장은 이사벨을 제압하는 것보다 긍정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게 더 나아.’
현재 나는 시현 유진의 유물 무기 때문에 ‘기생군체’가 봉인된 상태다. 원하는 정보를 빼먹으려면 인면충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
이사벨을 먹으면 특전을 강탈할 수 있으니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다. 엔딩을 보지 않았을 뿐, 녀석 또한 22위라는 타이틀을 가진 랭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대화하는 동안에는 탐색할 기회가 생기지.’
하늘의 어머니가 시간을 끄는 동안, 이사벨과 이 주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대화 내용 속에서 녀석의 약점에 대한 단서를 얻을 지도 모르고. 그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것도 제법 괜찮은 선택지다.
[즈즈(좋아)]
「고마워.」
그녀가 감사의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둘의 대화를 지켜보기 위해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조우하자마자 바로 싸움에 들어간 터라 외모에 신경 쓰지 못했는데, 이제야 이사벨의 모습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도마뱀과 인간의 얼굴이 적절히 섞인 형태의 두상, 머리에 난 더듬이, 전신을 덮은 비늘 등 전형적인 콜드블러드의 모습이었다. 몸의 비늘은 밝은 파란색이었고, 주둥이만 옅은 하늘빛을 띠고 있었다. 키는 이미 들은 대로 상당히 작았고, 팔과 다리도 얇아서 전반적으로 가녀린 느낌이 물씬 풍겼다.
복장은 호텔에서 쓰는 접대용 시녀복 대신 낡은 천 옷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훤히 노출된 팔과 허벅지, 복부를 보면 추가로 다른 무기를 숨기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콜드블러드가 무기에 의존하는 종족이 아니긴 한데.’
연약해 보이는 몸, 작은 키, 후줄근한 옷까지.
다시 봐도 불쌍한 노예로 보이지만, 전부 속임수다. 탐색전에서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되는 상대다.
나는 경계의 끈을 놓치 않고, 보조기관으로 감시에 집중했다.
“역시 모프박이 아니랄까 봐 게임에서 하던 짓을 여기서도 하는구나.”
「아니야. 이사벨.」
이사벨 또한 나와 똑같이 모든 신경을 내게 쏟는 중이었다. 하늘의 어머니와 대화하고 있지만, 눈은 오로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죽을 뻔한 나를 구해줬어.」
“구해줬다고? 모프박이가?”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야. 기생충도 심지 않았고. 나는 녀석에게 지배당하는 관계가 아니라 동료로 곁에 있는 거야.」
“…….”
하늘의 어머니가 한 얘기에 이사벨이 당황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반은 거짓이지만.’
원래 그녀를 구한 것은 보험용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기생충까지 심었던 거지만.
물론 이사벨은 그 내막을 모르고, 알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언니는 왜 여기 온 거야?”
예상 밖의 얘기를 들은 탓인지 침묵하던 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어.」
“물어볼 것?”
「응. 나와 에이모프는 성장하면서 현실에 관한 환상을 봤어. 그 환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조사 중이야.」
“환상….”
환상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이사벨의 시선이 처음으로 내가 아닌 하늘의 어머니를 향했다.
“언니도 ‘기억’을 봤어?”
「기억? 너도 인간 시절의 환상을 본 거야?」
이사벨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역으로 질문했다.
“언니는 기억 앞에서 어떤 선택을 했어?”
「나?」
“기억에게 먹혔어? 아니면 기억을 삼켰어?”
「둘 다 아니야. 나는 기억을 엿보기만 했어.」
그녀의 대답을 들은 이사벨의 눈이 다시 나를 향했다. 나보고 어떤 선택을 했냐고 묻고 싶은 것 같지만, 나는 침묵을 유지했다.
「저 녀석도 나와 비슷해. 기억을 엿보기만 했어.」
정확히 말하면 나는 환상으로 구현된 ‘현실의 나’와 싸워 승리했을 뿐, 죽이지 않았다. 이사벨의 표현대로라면 환상에 먹히지도, 먹지도 않았다고 봐야겠지.
하늘의 어머니도 그걸 알지만, 이사벨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기에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넘긴 것 같다.
「우리는 네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에 관해 듣고 싶어.」
“…….”
이사벨은 말없이 우리를 주시하다가 곧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녀석이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서아 언니. 우리가 서로 얼마 동안 연락하지 않았는지 기억해?”
「8년에서 조금 더 지났지.」
“8년하고 2개월이야. 언니가 떠난 뒤 많은 일이 있었어.”
「이사벨?」
다시 본 파충류의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늘의 어머니를 봤을 때 보여줬던 그리움도, 나와 싸울 때 보여줬던 분노도 없었다.
공허함이 가득한 눈과 마주한 그녀가 작게 숨을 삼켰다.
“놈들이 나의 친구들도, 우리가 만든 터전도 전부 짓밟아버렸지.”
「!」
이사벨이 지나가듯 흘린 말이었지만, 하늘의 어머니는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것 같았다. 점점 거세지는 그녀의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신경 쓰지 마. 이제 와서 누군가를 원망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까.”
「…….」
“언니가 원하는 답을 줄게. 대신 내 부탁을 먼저 들어 줘.”
불에 타고 남은 잿더미를 닮은 눈동자가 우리에게 말했다.
‘부탁?’
「…원하는 게 뭐야? 내가, 아니 우리가 들어 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 줄게.」
하늘의 어머니가 물었지만 이사벨은 머리를 흔들었다.
“먼저 들어 줄 거라 약속부터 해 줘. 부탁 내용은 그 다음에 말할게.”
그 말을 끝으로 이사벨은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따르겠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말하는 걸 보면 꽤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불리한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블러핑을 친 것 같지는 않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아예 거짓말을 늘어놓거나 다른 태도를 취했겠지.
‘신체 반응을 봐도 거짓말일 가능성은 희박해.’
각 머리의 보조기관들이 이사벨의 모든 움직임을 감시 중이다. 눈의 움직임, 심장 박동, 호흡의 박자, 근육의 떨림 등이 공기를 타고 턱 아래의 보조기관 끝으로 흘러들어온다.
긴장하거나 당황했을 때의 반응은 감지되지 않는다. 발가락이 잘린 것 때문에 다리 측 근육이 떨리는 것을 제외하고 말이다.
녀석이 지독한 거짓말쟁이가 아닌 이상, 적어도 환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좀 더 얘기를 나눠볼까.’
나는 4개의 다리를 움직여 하늘의 어머니 옆에 섰다. 이사벨이 말한 것 때문에 충격을 받았는지 멍하니 있던 그녀가 흠칫 놀란다.
“그쪽에서 역으로 제안을 할 줄이야. 의외네.”
“모프박이가 ‘대화’를 선택한 것이 더 놀라운걸.”
“쓸데없는 소리는 됐고.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날선 반응이 돌아왔지만 무시하고 바로 용건을 꺼냈다.
“부탁을 들어 준다면 알고 있는 지식을 전해주겠다고 했지?”
“그래.”
“일이 끝나고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나?”
다 떠나서 가장 큰 문제는 과연 이사벨이 우리에게 진실을 말할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다. 녀석이 거짓말을 하거나, 의도적으로 중요한 정보를 누락시킨다면? 전부 내게 손해가 된다.
내 말을 들은 이사벨은 불쾌하다는 듯 더듬이를 까딱였다.
“나를 너와 똑같이 보지 마.”
“진실만을 말할 거라는 확신이 없는 채 부탁을 들어 줄 수 없어.”
“믿지 못하겠으면 관둬.”
「이사벨!」
하늘의 어머니가 그만하라는 의미를 담아 사념파를 쐈지만, 이사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화로 안 풀리면 다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지.”
“내가 빠져나갈 수 있는 수단도 없이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아?”
당연히 아니다.
녀석이 능력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콜드블러드의 진정한 능력이라 할 수 있는 볼텍스원의 힘, 이 세계에 온 플레이어들이 받은 특전이 남아 있으니까.
어떤 능력과 특전을 지녔는지는 불명이나 최소한 지금 처한 위기를 타파할 수준은 될 거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지 못했을 터.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 또한 힘을 숨기고 있는 상태. 녀석을 곱게 보내줄 생각은 전혀 없다.
상대는 내게 필요한 정보를 손에 쥐고 있다. 현시점에서 그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사벨을 잡아먹고 인면충으로 만드는 거다. 녀석을 붙잡는다면 지금처럼 말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이빨로 설득하게 될 터.
‘문제는 위험 요소가 크다는 건데….’
이사벨과 싸우다가 컬트들까지 끼면 골치 아프다. 현재 이 행성에 있을 컬트 랭커는 내가 죽은 줄 알고 있을 터. 놈이 나의 생존을 인지하면 어떻게든 죽이려 들 거다. 그렇게 되면 컬트 랭커와 이사벨과 동시에 싸워야 한다.
‘그래도 우선순위를 따져 보면 녀석을 손에 넣는 것이 더 중요해.’
애초에 내가 베르잔02에 온 건 이사벨로부터 정보를 얻기 위해서다. 녀석을 발견한 이상 내 목표 중 절반은 이뤘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기서 싸우면 컬트들에게 내 존재가 노출되겠지만, 이대로 어영부영 녀석을 놓치는 것보다는 낫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막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 하늘의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문제는 이사벨이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는 거잖아. 맞지?」
[즈(그래)]
“맞아.”
「그렇다면 이걸 해결할 방법이 있어.」
그녀는 내 앞에 몇 발자국 걸어 나가 나와 이사벨 사이에 섰다.
「이사벨, 볼텍스원의 계약을 해 줘. 위배 시의 대가는 내가 치르는 걸로.」
“뭐?”
[즈(뭐?)]
갑자기 나선 오랜 친구의 말에 이사벨은 눈가를 움찔거렸다. 적지 않게 동요했는지 녀석의 심장 박동이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나 또한 하늘의 어머니가 꺼낸 말에 놀랐다.
우주의 악마라는 별명을 지닌 볼텍스원.
별명대로 놈들의 모든 활동은 계약을 통해 이루어진다. 콜드블러드가 볼텍스원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전부 계약 덕분이다.
자신을 강화하거나 엄청난 힘으로 무언가를 파괴하는 등 어떤 볼텍스원의 힘을 빌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효과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빌린 능력이 강할수록 요구되는 대가도 커진다. 그 대가를 지불하지 못했을 때의 리스크 역시 높아지고.
계약의 대가는 빌린 힘의 경중과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위반 시의 리스크는 완전히 다르다. 사망하는 것으로 모자라 추가로 플레이어한테 영구적인 손상까지 입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콜드블러드는 종족 특성으로 계약을 완수하지 못했을 때의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제물을 사용하는 거다. 계약 위반시 본인이 받아야 할 리스크를 제물에게 전이한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물론 지불하지 않은 대가가 계속해서 쌓인다면 제물도 소용없어지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 부분이 아니다.
아무리 가벼운 계약이라 해도 리스크만큼은 매우 가혹하다. 그걸 하늘의 어머니가 모를 리 없다.
그걸 알면서도 이사벨이 거짓말을 했을 시 자신이 그 책임을 대신 지겠다고 선언한 거다.
“내가 거짓말을 하면 언니는 죽어.”
「그러면 거짓말을 안 하면 되잖아.」
“왜 이제 와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지?”
「여기서 둘이 싸우는 게 더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데.」
“…….”
그 말에 이사벨은 입을 다물었다. 녀석으로부터 시선을 뗀 하늘의 어머니가 나를 돌아본다.
아름다운 호박색 눈동자에서는 그 어떠한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마음을 완전히 정했다.
「이거라면 에이모프, 너도 믿을 수 있지?」
[즈(그래)]
나는 짧게 동의를 표했다.
그녀가 죽어도 좋다고 생각해서 동의한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하늘의 어머니는 내게 중요한 동료가 됐다. 가족처럼 여겨지는 26호나 아드하이보다는 덜하더라도, 그녀 역시 소중한 존재다.
그런데도 내가 동의한 이유는 이사벨의 반응이 제법 격렬했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에 초탈한 것처럼 보이던 녀석은 하늘의 어머니가 목숨을 걸겠다고 하자 크게 동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