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324화 (325/400)

     

   그 말은 옛 친구에 대한 정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 녀석이 단번에 승낙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마음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좋아.”

     

   몇 분 동안 고민하던 이사벨은 짧게 한숨을 쉬며 하늘의 어머니가 내건 조건에 동의했다.

     

   녀석은 낡은 옷에서 실드 생성 장치와 비슷하게 생긴 물건을 꺼냈다. 실드 생성 장치가 육각형 판의 형태라면 이번 물건은 오각형 모양의 판이었다.

     

   ‘에너지 차단 장치네.’

     

   볼텍스원과 계약을 할 때는 무조건 에너지가 발생한다. 거짓말을 못하도록 하는 아주 작은 계약이라도 말이다. 에너지 차단 장치로 막을 수 있는 에너지는 극히 제한적이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충분히 도움이 된다. 저 작은 도구로도 에너지 유출을 막을 수 있을 거다.

     

   ‘지금 걸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네.’

     

   녀석은 베르잔02에 있는 컬트 랭커와 사이가 좋지 않다. 내가 모르는 모종의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대놓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만한 사이는 아니다. 그래서 에너지 차단 장치를 들고 다니는 것일 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녀석은 에너지 차단 장치를 키고 하늘의 어머니와 계약을 맺었다. 차단막 안쪽에서 검은빛이 살짝 번뜩였으나 외부로 유출되는 에너지는 없었다.

     

   “끝났어.”

     

   1분도 안 돼서 계약을 끝낸 이사벨이 차단막을 해제했다. 하늘의 어머니는 털이 가라앉아 기운이 없어 보이는 점 말고는 멀쩡했다.

     

   “이제 원하는 걸 말해.”

   “알았어. 나를 따라와.”

   

   이사벨은 구석에 놓아 둔 식료품 바구니를 들면서 말했다.

   

   “너를 따라오라고?”

   “안전한 장소야. 계약까지 한 이상, 너희에게 위해를 끼칠 생각 없어.”

     

   거래가 끝나기 전까지 녀석은 거짓을 말할 수 없다. 하늘의 어머니에게 괜찮겠냐는 의미를 담아 쳐다 보자,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이사벨을 따라 골목에서 나왔다.

   

   녀석은 감시탑의 사각지대에 걸친 곳만 골라 움직였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는 걸 보면 이런 식으로 여러 번 돌아다닌 것 같다. 

     

   그러다가 녀석이 멈춘 곳은 오래된 창고였다. 이사벨은 낡은 단말기를 조작해서 입구를 막는 차단막을 해제했다.

     

   안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본 것은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널려 있는 잡동사니들이었다. 난잡하게 깔린 잡동사니 아래에는 먼지가 잔뜩 쌓인 바닥이 있었다.

     

   ‘응?’

     

   겉보기에는 오랫동안 외부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것 같았지만 에이모프의 보조기관은 속일 수 없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미세한 모래를 뿌려 발자국을 숨긴 흔적이 느껴진다.

     

   그리고 바닥 중 일부는 겉면만 똑같을 뿐, 재질이 완전히 달랐다. 재질이 다른 바닥 아래에서 공기가 오가는 바람 소리가 들린다.

     

   ‘창고 아래에 빈 공간이 있어.’

     

   예상대로 이사벨은 재질이 다른 바닥을 발로 특정 문양을 따라 그었다. 바닥이 덜컥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사벨, 도대체 뭘 한 거야?」

   “언니는 하지 않은 일을 했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툭 던진 녀석은 계단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즈즈즈즈(따라가자)]

     

   우리도 이사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에는 흔하디흔한 전등 하나 없었다. 계단 자체도 컬트가 만들었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투박했다.

     

   그렇게 긴 계단을 내려가 지하층에 도착하고 나서야 나는 계단이 왜 그런 형태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사벨이 하늘의 어머니에게 말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지하의 어둠 속에서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진다. 수십 명에 달하는 콜드블러드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자를 향해 기도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사벨이 말했다.

     

   「이사벨, 너….」

   “저들을 안전한 행성으로 옮길 수 있게 도와줘. 그게 내 부탁이야.”

     

   잃어 버린 낙원과 구원을 찾아 헤매는 콜드블러드.

     

   이사벨은 그들을 인도하는 지하의 메시아였다.

   창고 지하에 존재하는 그곳은 길게 뻗은 계단만큼이나 조악했다. 행성 환경을 뒤바꾸고, 성계를 마음대로 오가는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천장은 높낮이가 다 달랐고,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만한 높이의 통로들은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수십 명의 인원을 수용하고 있으면서도 에너지를 소비하는 첨단 기기가 하나도 없었다. 작은 전등조차도 없어서 촛불만이 지하를 비추는 유일한 빛이었다.

     

   구조물이 아니라 토굴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의 형편없는 장소.

     

   그곳에서 기도를 올리는 콜드블러드들의 상태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콜드블러드는 인간보다 키가 살짝 더 크다. 평균적으로 수컷은 2m, 암컷은 180cm 정도 되니까. 몸무게도 근육량과 비늘 때문에 인간보다 훨씬 무겁다. 키 150cm에도 못 미치고 가녀린 체형을 가진 이사벨이 특이한 경우다.

     

   그런데 여기 있는 콜드블러드들은 이사벨 이상으로 살점이 없었다. 비늘의 상태는 엉망이었고, 팔, 다리, 허리 등은 기형적으로 뒤틀렸다. 전부 옷을 입고 있지 않았기에 처참한 몸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들이 왜 이런 상태인 건지는 이사벨의 행동 덕분에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녀석은 가게에서 구한 과일과 식료품들을 그들 앞에 내려놓았다.

     

   “오늘의 양식입니다.”

     

   녀석의 말을 들은 콜드블러드들이 즉각 기도를 멈췄다. 바닥을 기다시피 해서 움직인 그들은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낯선 우리가 있음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음식에 정신이 팔린 상태라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노예나 고용인보다 상태가 안 좋은데.’

     

   스페이스독이 아닌 이상, 노예를 저런 식으로 관리하는 자는 없다. 복장이나 몸 상태를 보면 도망친 노예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상주하는 걸 보면 탈출한 노예가 맞아.’

     

   공기 중에는 불쾌한 냄새가 섞여 있었고, 음식을 흡입하는 콜드블러드들의 몸에서도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이 지하에서 모든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들을 안전한 행성으로 옮겨 달라고 했지?’

     

   보조기관을 통해 체크한 바로는 이 지하에 있는 콜드블러드의 수는 이사벨을 제외하고 40명. 비행선에 몰래 싣기에는 부담되는 숫자다. 게다가 빈말로라도 건강 상태가 좋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쉽지 않겠는데.’

     

   그때 식량을 먹던 콜드블러드 중 하나가 일어나 이사벨에게 머리를 숙였다.

     

   “구세주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구, 구세주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구세주, 은혜, 감사드립니다.”

     

   그를 시작으로 다른 콜드블러드들도 먹던 것을 멈추고 이사벨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나는 구세주가….”

   ‘?’

     

   녀석이 아주 작게 뭐라 중얼거렸지만, 토굴 벽에 울리는 목소리들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녀석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자세한 것은 위에서 얘기하지.”

     

   여기가 상황을 설명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이사벨도 알고 있었다. 녀석은 우리를 다시 지상으로 인도했다.

     

   콜드블러드들은 이사벨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머리를 계속 숙이고 있었다.

     

   우리는 긴 계단을 지나 낡은 창고로 돌아왔다.

     

   「…….」

     

   이사벨이 바닥에 있는 흔적을 지우기 시작하는 동안, 하늘의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콜드블러드들의 모습을 본 이후 그녀는 상당히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이 그랬지.’

     

   언니는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자기를 두고 떠난 걸 비난하는 걸까?’

     

   계단을 내려가던 중에 그런 말을 했다. 어쩌면 자신을 두고 떠난 그녀의 행동을 가리킨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에 빠진 사이, 정리를 다 끝낸 이사벨이 우리를 돌아봤다.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물어봐.”

     

   지금 하늘의 어머니는 도저히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니 내가 물어봐야겠다.

     

   “어느 행성으로 보낼 거지?”

   “밀림형 행성으로 분류되는 곳이야. 아직 발견되지 않아서 명칭은 따로 없어.”

     

   그럴 것 같았다.

     

   탈출한 노예들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려면 항로에 등록되지 않은 행성이야 할 테니까. 아마 아드하이의 동족들이 머무는 얼음 행성 같은 곳이겠지.

     

   “지하에 있는 자들의 수는 40명인데 전부 다른 행성으로 보낼 건가?”

   “그래.”

   “숫자가 너무 많아.”

   “그건 걱정할 것 없어.”

     

   녀석은 품에서 패드형 단말기를 꺼냈다.

     

   “여기에 수송선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어. 목적지는 내가 미리 설정해놨으니까 너는 수송선으로 이동시키기만 하면 돼.”

     

   패드를 건네받은 나는 가슴쪽 작은 팔로 저장된 정보를 확인했다.

     

   녀석이 말한 수송선은 컬트식 구형 초계함을 민간용으로 개조한 물건이었다. 운송 수단에 관한 정보 말고도 식량과 연료, 배와 관련된 관계자 등에 관한 부분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배의 주인이 따로 있는데? 이 자는 누구지?”

   “다른 노예상이야. 너라면 쉽게 조종할 수 있겠지.”

     

   이사벨은 내가 당연히 기생충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게임에서도 ‘의태 기관’과 ‘기생 군체’는 나의 상징과 같은 특성이었기에 녀석의 반응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지금 내가 기생 군체를 못 쓴다는 것.

     

   시현 유진이 사용한 유물 때문에 내 육체에서는 아웃스페이서의 유전자가 소실된 상태다. 새로운 유전자 정수를 습득하기 전까지는 기생 군체를 사용할 수 없다.

     

   그러니 내가 직접 우주선을 조종해야 한다.

     

   “이 배는 3일 후 떠날 예정이야. 못해도 이틀 전까지 노예상을 처리해 줘. 그렇게 해야 배에 저들을 태울 수 있을 테니까.”

   “너도 함께 가는가?”

     

   감시가 삼언한 베르잔02를 떠나면 다시 들어오기 쉽지 않다. 만약 이사벨도 함께 가는 것이라면 굳이 여기 돌아올 필요가 없다.

     

   그러나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떠날 수 없어.”

   “해야 할 일?”

     

   그때 내가 들고 있던 녀석의 단말기에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수신자명은 ‘지배인’. 녀석을 고용한 호텔에서 온 연락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야. 일할 시간이라서 슬슬 돌아가야 해.”

   “연락은 어떻게 하지?”

   “내일 이 시간에 아까 봤던 골목길로 와.”

     

   패드형 단말기를 돌려받은 녀석은 우리를 창고 밖으로 내보내고 차폐벽을 원 상태로 복구시켰다. 그리고 인사도 없이 그대로 떠나 버렸다.

     

   “일이 귀찮게 됐어.”

   「…….」

   “어떻게 할지 계획을 다시 짜야 할 것 같은데.”

   「…….」

     

   내 말에도 하늘의 어머니는 반응이 없었다. 그저 이사벨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을 뿐.

     

   나는 왼쪽 머리로 그녀의 어깨를 툭 밀었다.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내게 급히 사과했다.

     

   「…미안.」

   “자세한 건 비행선에 가서 얘기하자고.”

     

   나는 그녀와 함께 비행선이 있는 비행장으로 되돌아갔다. 하늘의 어머니는 일이 이렇게 된 것에 미안함을 느낀 것인지, 비행장으로 가는 동안 아무 말도 안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 온 것은 그녀가 이사벨의 오래된 친구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도 이 상황에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사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원하는 대로 안 풀릴 것이라고는 오기 전에 이미 예상했다. 이사벨이 컬트 랭커와 내통하는 사이가 됐다거나, 아니면 우리가 오기 전 랭커들에게 사냥 당했다거나. 그랬다면 지금보다 훨씬 안 좋은 상황에 처했겠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유일한 부분은 이사벨의 행동이다.

     

   ‘동족을 구한다라.’

     

   내가 알기로 녀석은 지배파 랭커들에게 쫓기는 중이다. 랭커들의 추적을 받는 중에도 저렇게 도망친 노예들을 지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본인은 노예로 살면서 말이야.’

     

   아주 강한 목적의식이 있지 않고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엔딩을 노리는 건가?’

     

   저 파충류 인간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동족들을 낙원으로 이끄는 것. 단순히 안전한 장소로 대피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콜드블러드가 엔딩을 보려면 낙원에 가장 위협이 되는 요소, 즉 볼텍스원을 사살해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볼텍스원을 제물로 바쳐 종족 전체에 걸린 저주를 파괴하는 거지만.’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의식을 치르기 위한 특별한 장소, 굉장히 희귀한 재료로 지어진 제단, 의식용 도구다. 모든 것이 준비되면, 그 다음 볼텍스원을 죽여서 제물로 바쳐야 한다.

     

   ‘탈주 노예들까지 신경 쓰면서 이걸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해.’

   

   당연한 얘기지만 이 조건들을 달성하려면 강력한 힘, 막대한 부가 필요하다. 지하 토굴에 있는 동족 수십 마리로는 택도 없다. 엔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저런 행동을 한다고 봐야 할 터.

     

   이사벨의 행동 동기가 뭔지 생각하는 사이, 우리는 비행장에 도착했다.

     

   “환영. 일. 끝남.”

     

   비행선의 문을 열자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MPS-05가 우리를 반겼다.

     

   “별일 없지?”

   “‘작은애기’. 두통. 두통.”

   “숙취 때문에 그래. 물 많이 먹여.”

   “메인컨트롤러, 물. 공급 중!”

     

   통신 연결과 기계 장악에 특화된 MPS-05는 현재 본체, PS-111과 동기화된 상태다. 지금처럼 통신 거리만 된다면 언제든지 서로 연락을 교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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